보신탕
安 泳
영재는 휴일만의 특혜인 조반 후의 짧은 단잠에서 깨어나 뜨락으로 나갔다.
푸른 오월.
한 뼘쯤 자란 갖가지 화초들이 그 어느때보다 아름다운 초록으로 온몸에 자르르 윤기가 돈다. 아침의 찬란한 햇살 탓이리라.
“야, 정말 좋구나 날씨!”
그는 화단을 둘러보고 눈에 띄는 대로 몇포기의 풀을 뽑았다. 언제 보았는지 다섯 살 난 딸 영미가 쏜살같이 달려온다.
“넘 질라. 천천히 천천히.”
그는 풀 뽑던 손을 놓고 아이 쪽으로 몸을 돌린다.
“아빠. 성진네는 창경원 간대. 우리도 가자. 응?”
대문 밖에서 뛰어온 영미는 숨을 헐떡이며 큰소리를 친다.
“창경원? 지금은 엄마가 아프니까 나중에 가자. 우리만 가면 재미가 없잖아?”
“엄마 언제까지 아플 건데?”
“너희들이 말 잘 듣고 밥 잘 먹으면 금방 낫지.”
“정말?”
“그럼. 자. 우리, 엄마한테 가볼까?
영재는 아이를 데리고 아내 곁으로 왔다. 세 살 난 아들 훈이가 장난감을 팽개치고 짜박짜박 걸어와 그의 무릎에 틱 앉는다.
“좀 어때? 허리 아픈 건?”
“많이 부드러워졌어요. 인제 일어날께.”
“바람이나 쐬러 나갈까?”
“오늘? 아직 출혈도 안 멎었는걸?”
영재는 핏기 없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느 주간지의 기사를 생각한다.
애처가여, 정관수술을 하라.
아내는 벌써 세번째 저일을 치르고 있다. 남매면 족하다고 훈이를 낳은 후 계속 피임을 하고 있다. 그려나 번번이 실수를 해서 수술을 받곤 하니 안타깝다. 그렇다고 막상 자신이 수술을 하기도 그렇고…….
가뜩이나 신경 쓸 게 많은데 피임 까지 머리를 괴롭히다니, 현대의 젊은이들은 얼마나 불행한가. 옛날 사람들은 그런 일 따위로 고민하지눈 않았을 것이다. 그는 책이나 볼까 하고 서재로 건너갔다. 쭉 훑어보다가 명심보감을 빼어들었다.
가끔씩 읽곤 하지만 청량제로는 일품이다. 책장을 마악 넘기려는데 따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마루로 뛰어나가 수화기를 들었다.
“네. 그렇습니다. 응? 어휴, 오랜만이야. 그래, 그래 응 알았어. 응 응. 그
럼 그때 만나. 세시쯤.”
영재는 수화기를 조용히 놓았다. 엷은 흥분으로 손끝이 조금 떨렸다. 영주…·그네를 만난다? 몇년 만인가. 아슴한 추억속에 휩싸이는데 엄마 곁에서 재잘대던 영미와 훈이가 마루로 쫓아나온다. 그리고는 다투어 그의 목에 매달린다. 아빠, 아빠. 말 태워줘, 말.
아름답게 떠오르던 영주와의 지난날이 흐늘흐늘 흩어진다. 그는 어느새 애들을 등에 태우고 마루를 맴도는 현실로 돌아온다.
“고만들 해. 아빠 힘들어요.”
그는 지금 자기의 마음을 아내에게 들킬까봐 조마조마하다. 애들을 데리고 다시 아내의 곁으로 갔다. 그러나 뜻밖에도 아내는,
“전화 누구여요?” 묻는다.
“응. 옛날 동창생. 점심 먹고 좀 나갔다 와야겠구먼.”
“반가운 친군가보죠?”
그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아내 곁을 빠져나왔다. 명심보감 같은 것은 필요없었다. 영주·…… 그네와의 해후로 벌써부터 그의 가슴은 뿌듯이 차올랐다. 부탁이 있다고? 무얼까?
그네와는 한집 안이고 국민학교 동창이다. 항렬자까지 똑같은 팔촌간이다. 단지 생일이 몇달 빨라 오빠 소리를 가끔씩 듣곤 했다. 퍽은 자랑스럽게.
사춘기에 들면서부터 두 사람의 교류엔 색다른 몸짓과 빛깔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한동네, 한집안이라 만나는데 전혀 구속이 없어 좋았다. 그네가 여고를 졸업하고 고향에 눌러앉아 집안살림을 돕고 있을 때, 자기는 서울서 대학을 다녔다. 그 무렵 열흘이 멀다 하고 오고간 편지들. 가슴 조이도록 기다려지던 방학중의 만남. 군대시절에 가장 큰 용기와 위안을 준 그네의 면회, 편지·….
그네가 시집가던 날, 아직 졸업반이던 자기는 공부고 뭐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거리를 배회하며 허퉁한 마음을 달래던 일. 그러다가 정말 뜻밖에도. 너무너무 뜻밖에도 그네가 서울로 이사를 오고, 자기는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재희가 가능했던 일.
그네 손수 차려내온 술상을 가운데 놓고 그네의 남편과 인사를 나누면서 어색한 마음을 감추려 애쓰던 일. 무의식중에 그네의 딸애를 무릎에 앉히고 사랑해 주던 일.
아직 총각이던 그는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그네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던가.
불륜의 운명을 저주하면서 그는 당돌하게도 일기에 이런 말까지 쓰고 말았다.
〈신이여! 그네를 나에게로 돌려주소서.〉
그네를 만나고 돌아오자 아내는 몸이 많이 부드러운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날씨가 더워져서 애들 잠옷을 얇은 것으로 바꿔야겠다고. 그는 살살 눈치를 살폈다. 아무 기미도 없다. 다행이구나.
하지만 그는 마음의 평정을 잃는다. 서너 시간 남짓 그네의 얘길 듣고 저녁을 같이하고 돌아왔지만 영 입맛이 쓰다. 정말 그럴 수가 있을까. 세 남매의 어머니가 된 그네는 뜻밖에도 이혼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남편이 사업상 출장이야 외박이야 자주 집을 비우더니 끝내는 딴살림을 차렸다고.
그런 정도의 이야기는 고향사람들에게 가끔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영재가 결혼을 하고는 둘 사이의 교류가 끊겨서 이혼에까지 번져간 줄은 전혀 몰랐다. 작년 가을엔가 영재 없는 새 전화가 한번 오긴 했다. 그러나 두 여자는 서먹한 가운데 상투적인 안부만 교환했을 뿐이다.
아내는 시집을 막 와서 하루가 너무 길고 심심하니까 자기의 책상을 뒤져서 일기를 훔쳐본 모양. 영주와의 관계를 캐물으며 질투한 적이 있었다. 그일만 없었으면 영주네를 초청도 하고 자기도 아내랑 함께 그네를 방문하며 계속 유대를 가졌으리라.
그래저래 소식이 끊겼다가, 그러니까 꼭 육년 만에 만난 그네에게 그런 비극
을 들어야만 하다니…….
결론은 혼자 살아갈 만한 일자리를 구해달라고.
“오빠네는 재밌게 산다며? 고향에 가니까 소문이 자자하데요.”
영주는 제 얘길 끝내고 흥건히 물기 서린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콧날이 찌잉 했다. 그래 그는 힘닿는 데까지 알아보겠노라며 연락처를 적어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아무래도 착잡한 마음은 가라앉질 않는다. 하필이면 영주가 그런 일을 당하다니. 착하고 마음씨 고운 그네가.
그는 서재에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아내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늦게야 안방으로 건너갔다. 눈치를 못 챈 것이 그저 다행스럽다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밤 세시.
버릇처럼 깨어 용변을 보고 왔다. 아내가 어느새 스탠드를 켜고 어린것 잠자리를 살펴주고 있었다. 웬지 서먹하고 소외된 느낌이어서 소리없이 잠을 청했다.
그런데 아내가 먼저 말을 건네온다.
“아빠, 자요?”
“왜 그래?”
“낮에 누구 만났어요?”
“친구, 얘기했 잖아?”
가슴이 뜨끔했다. 갑자기 자다가까지 물을 켠 뭔가. 아내는 또 묻는다.
“여자친구?”
“사람, 참!”
“아니…… 다른 땐 술만 밖에서 먹고 저녁은 꼭 집에서 들지 않았우? 근데 오늘은 정반대니 이상하죠? 술 냄새 전혀 안 나. 낮에 전화도 퍽 다정하게 받는 것 같고, 괜히 영주 아가씨 생각이 나잖아요?”
후유!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 저게 바로 여인의 육감이로구나. 어떡한다?
실토를 해버려?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필 이혼 이야기를. 들으면 언짢을 텐데·…· 에라. 그래도. 양심상 해버리자. 집 안간에 연애는 무슨!
그는 아내 쪽으로 확 돌아누우며, 그러나 뜻밖에도,
“요 맹추야. 낮에 한두 시간 친구 만나고 당신 유산 후에 좋다는 가물치 한 마리 구하러 동대문까지 갔다가 여태 쏘대고 온 사람보고 무슨 소리야? 오늘은 하필 없드군, 몸도 아픈데 늦게사 따로 저녁 차린다고 신경 쓸까봐 일부러 보신탕 한 그릇 사먹코 왔구만은!” 해버린다.
“어머나, 그랬어요? 그런 걸 난 공연히…….”
그의 팔아름 속에서 전정으로 미안해 하며 속삭이는 아내를, 영재는 힘주어 안았다.
―1972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