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지교'(水魚之交). 물과 물고기의 사귐을 뜻하는 말이니 이보다 가까운 사이는 없을 것이다. '박혜강'과 '소설'도 마치 수어지교와 같다. 이 인연이야 틀림없이 사람이 먼저 손을 내밀어 이루어진 것이겠지만, 그 골은 한없이 깊어 한번 맺어진 이상 끊어지기 힘든 각별한(?) 관계이다.
집을 한 채 짓는 데에는 많은 종류의 자재와 일용잡역부터 목수 같은 전문가까지 각 분야의 노련한 일손들이 필요하고, 충분한 기일을 두고 기초부터 단단히 다져나가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하물며 소설로 한 가(家)를 이룬다는 것은 보통 '쟁이'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소설가는 그 집을 혼자서 지어 올려야하는 고단한 작업의 연장 속에서 보내야만 한다. 이 또한 나약한 의지의 소유자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다. 그야말로 무일푼으로 튼튼한 집을 지어야만 하니 섣불리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다.
사람살이는 아침이슬과 같아 잠깐 맺혔다가 볕이 들면 사라지는, 실로 덧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시간들을 소설창작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주 우둔하거나 아니면 빠져들지 않고서야 온전히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듯하다. 박혜강의 경우야 당연히 후자에 해당될 것인데 이번에 펴낸 대하역사 장편소설 <운주>(運舟, 2001, 이룸)를 통해 큰 '가'를 이루어 가는 입담 좋은 소설가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7년의 침묵 깨고 펴낸 장편소설 <운주>
소설가 박혜강은 7년 동안 침묵했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소설에서 손을 뗀 것으로 생각했을 터이다. 그 오해의 시간들이 작가에게는 견디기 힘들었겠지만 큰 덩치만큼이나 우직하게 말을 아껴왔다. 오직 <운주>를 위해서였다. 출간을 계기로 이러한 기우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으니 작가에게는 큰 부담을 떨친 셈이다.
이 지역의 문화가는 <운주>로 술렁인다. 촉망받던 한 젊은 작가가 다시 용트림을 해서요, 그것이 책으로 다섯 권, 원고지로 6천매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는 90년대 중반까지 리얼리즘 문학의 든든한 허리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7년 동안 침묵을 지켜왔었고, 이제 <운주>를 통해 작가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가의 눈은 저 광활한 역사 손으로 던져져 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과 망이·망소이의 난이 화순 운주사의 설화와 만난다. 작품의 배경이 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귀족사회 내부의 모순과 폐단이 표출되는 과정에서 귀족사회 내부의 족벌과 지역·외교정책·고구려 계승의식 대한 대립 등 개경파와 서경파와의 대립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천민의 저항운동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망이·망소이의 난은 신분 해방운동이었고, 이를 계기로 정부에서는 천민이나 농민들의 주장을 정치에 반영시키기 위한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운주사는 여전히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불가사의한 곳으로, 이 두 사건과 작가의 문학적인 상상력이 동원되어 새롭게 복원된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 천년의 역사 속으로 자맥질해"
작가는 이 작품 속의 민초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다를 게 없다고 이야기한다.
"묘청의 난에 의한 서경성 전투는 오월 광주의 10일간 항쟁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묘청의 난에서는 민족의 자주를 보았고, 망이·망소이 난에서는 민중의 해방을 보았습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운동은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개경과 서경의 정치적 알력이나 지역감정은 시간적, 공간적인 배경과 그 계기가 다를 뿐 천년이 지난 현재에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단순히 역사를 일러주기 위한 일이었다면 그는 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현대를 이야기하고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으로, 광주의 5·18과 같은 민주화운동의 배경과 그 가치 등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의미를 갖는다. 역사를 바로 본다는 것은 더 나은 미래의 활로를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위해 천년 전의 역사 속으로 자맥질했다"는 그에게 아무래도 현실이라는 조건은 넘기 힘든 큰 벽이었다.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시대적 배경이 고려조이기 때문에 역사, 불교, 풍수지리, 병법, 전통무예, 전통의술, 복습, 풍습, 지리 등등 한 수레쯤의 자료를 모았고, 필요한 지역은 계속 답사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건이기에 자료와 취재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일이고, 작가적 상상력도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악조건이었기에 <운주>는 더욱 값진 역작이다. 또한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닌 그가 전업작가라는 그 험난한 가시밭길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이 또한 순전히 박혜강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게 주변의 반응이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아쉬움은 남는다.
"글의 무대가 되는 북한 지역을 필히 답사하여 미진한 부분을 수정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의 글은 미완성인지도 모릅니다. 미완이란 부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정지상태가 아닌 계속적인 운동상태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의 말대로 <운주>는 계속 된다. 7년이 아닌 그 몇 배가 걸릴지도 모르는 고난한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 질긴 인연의 끈은 작가 스스로 선택한 운명의 다른 이름이다. 사실 <운주>는 "절친한 벗임과 동시에 애물단지였다"고 한다. "당당하게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가 의연하게 되돌아오고 싶었다"는데 그동안의 고락을 생각하면 말처럼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는 자신의 소설에 대한 말을 매우 아끼는 편이다. 10여 년 전 실천문학상 시상식에서 말했던 것처럼 "작가는 모든 것을 글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을 필자는 후에도 몇 번 더 들을 수 있었다. 다만 작가의 사명을 다하겠다는 의지의 다른 말로 풀이된다. 그와 그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을 정독하고, 그저 사람 좋게 만나면 족한 것이다.
안정된 직장 버리고 전업작가의 길을 나서
<운주>를 발간하기까지 그는 단 한편의 단편도 발표하지 않았으며 전업작가의 길을 걸었다. 생활고에 쫓기면서도 취직을 생각하지 않았다. 조선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ROTC로 군생활을 마치고 강원도 태백시에서 3년간 석탄공사를 다녔다. 당시의 석탄공사는 지금의 대기업보다 좋은 근무조건이었다. 직장을 박차고 나온 이유는 순전히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는데, 아내는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계속 일했다면 지금쯤 임원이 됐을 것이라며 웃음을 보인다.
그는 대학 때에는 자원공학을 전공했으며 문학동아리 활동 한번 해보지 않았다. 습작으로 혼자서 시를 200여 편 쓴 것이 문청시절 이력의 전부다. 그런 그가 1989년 무크지 <문학예술운동>에 <검은 화산>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광부들의 아픔과 목숨을 건 투쟁을 담은 이야기로 원고지 300매 분량의 중편소설인데, 친구인 화가 홍성담이 아무런 이야기 없이 잡지사에 보낸 것이 그를 작가 대열에 합류하게 만든 것이다. 이후 1991년에 장편소설 <검은 노을>로 제1회 실천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화려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장편소설 <다시 불러보는 그대 이름>, 장편동화 <자전거 여행>(제1회 대산문예창작지원금 수여작), 1995년 장편소설 <안개산 바람들>(전2권)을 펴내기까지 핵문제, 노동문제, 환경문제에 천착해 있었다. 이후 7년, 씨알 굵은 작품만을 발표하며 촉망받던 젊은 작가의 침묵은 스스로의 존재를 점차 잊혀가게 할 무렵 돌연 <운주>를 들고 나온 것이다. '역시 박혜강'이라는 말이 이구동성으로 들려왔다.
아빠는 왜 쓴 것만 먹으려해?
박혜강은 두주불사(斗酒不辭) 형이다. 그러나 술을 좋아하기 이전에 사람을 좋아한다. 가까운 지인들이 마련한 출판기념회에서 "광주에서 글 쓰는 사람 치고 혜강 형의 술을 먹지 않은 사람이 없다", "사람을 좋아할 뿐이다. 거기에 술이 곁들여질 뿐이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그는 한번 술을 입에 대면 꼭 '뿌리'를 뽑고야마는 성격이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이왕에 입을 버린 거 계속 먹자"는 것이다. 이런 그가 호구지책으로 3년 동안 하고 있는 한 라디오 방송국의 방송작가 일에서 한번도 원고를 펑크낸 적이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술이 아무리 취해도 진통제를 먹어가면서까지 자기 책임을 다했던 것이다. 생계를 위해 방송국 일을 시작했을 때에는 소설에 전념하지 못한다는 부담으로 눈물이 났다고 한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언제든 그만 둘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화순의 작업실에서 93년부터 6년 동안 머물며 <운주>를 3권 반, <자전거 여행>, <안개산 바람들>을 썼다. 술을 전혀 못하는 그 동네의 한 어른이 박 선생은 술을 전혀 안 해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를 했을 정도이다. 그만큼 자기 관리에 철저히 엄숙했던 것이다. 일단 소설창작에 임하면 절대 술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만한 소설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아버지의 끼를 이어받은 큰딸은 모 대학 문창과 2학년에 재학중이고, 고3인 둘째딸은 국문과 지망생이다. 컴퓨터 자판에 '쓰지 않으면 먹지 마라'고 써 붙여 놓은 글을 보고 오래 전 어린 아들은 아빠는 왜 단 것은 먹지 않고 '쓴 것'만 먹으려냐고 물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생각하는 그것은 분명 다른 것이지만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인생을 좀 편안하게 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쓴 것을 스스로 고집하며 사는 것, 그것이 작가로서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 하더라도 그는 그 운명을 사랑한다. 이제 중학생 된 아들은 쓰디쓴 아버지의 입맛을 이해할는지 모르겠다…….
끝으로 덧붙이건대, <운주>의 의미를 조명하고 평가하는 일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역의 정신문화를 살찌우는 일이다. <운주>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이 필요한 때이다.(사족 : 부족한 필력으로 인해 존경하는 선배작가에게 행여 누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와 그 작품의 진면목을 전하는 게 필자에게 주어진 과제인데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짐이 될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작품을 정독하는 것과 함께 술자리에 앉아 청담(淸談)을 나누는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