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설날을 맞으며/靑石 전성훈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철마다 제삿날 돌아오듯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온다. 단 한 번이라도 길을 잃어버리거나 옆으로 비켜 가지 않는다. 옛날 어른들 말씀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외상값 받으려고 재촉하는 빚쟁이처럼, 오라고 부르지 않아도 말 없는 세월 따라 삐거덕 소리를 내는 망가진 녹슨 대문을 넘어서 한 걸음 두 걸음 부지런히 다가온다. 한겨울 동장군을 닮은 듯이 속절없이 찾아오는 명절을 기쁜 마음으로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는 게 우리네 인생살이 아니던가. 온몸으로 고단하게 겪는 현실과 몸담아 사는 처지에 따라서 저마다 명절도 아주 다르게 느끼기 마련이다. 화목하고 평온한 가정에 사는 어린아이같이 들뜨고 신나는 명절을 즐기는 이도 있다. 그런가 하면 고단한 인생살이 고개를 넘으며 온갖 어려움과 서러움에 겨워 기나긴 한숨과 눈물을 뿌리는 이웃 소식을 종종 마주친다.
설날은 물론 추석 명절에 대한 느낌은 결혼 전후가 확연히 다르다. 어린 시절을 비롯하여 결혼할 때까지 명절을 기쁘거나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던 기억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부모님 사이가 워낙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끊임없는 오랜 바람기로 인하여 가정생활이 파탄지경이라서 명절 때가 되면 집안 분위기가 더욱 어둡고 을씨년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런 집안 분위기 탓에, 우리 형제들은 설에 친가 어른댁을 찾아가 세배를 한 적이 손가락 꼽을 정도이다. 더욱이 가난하기 그지없는 외갓집에 세배하러 간 적은 거의 없다. 어머니께서 눈물을 훔치시며 친정에 가실 때에는 동생들은 집에 놔두고 어쩌다 장남인 나만 데리고 가시곤 했던 것 같다. 가난하고 어두운 환경에서 자라나서인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세뱃돈 받은 기억이 안 난다. 무사히 성장하여 결혼하고서도 어머니와 장모님에게 세뱃돈을 드리고, 아이들에게 주기만 했지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때가 되어 세상을 떠나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스틱스강을 건널 때, 뱃사공에게 줄 여비인 노잣돈은 미리 챙겨놔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늙어가니까 참 별난 생각마저 다 든다.
중고등학생 시절이 지나 대학생이 되면서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져서 설을 앞두고 어머니께서 설빔을 준비하시고, 방앗간에 가래떡을 뽑으러 가시면 따라가서 짐꾼 노릇을 한 기억이 난다. 가래떡을 무척 좋아했기에 어느 해 설에는 앉은 자리에서 뽑아 온 가래떡을 일곱 개나 달콤한 꿀이 없어서 조선간장에 찍어 먹은 적이 있다. 지금도 고급스러운 선물용 떡 대신에 저렴한 콩 송편, 가래떡, 절편 그리고 인절미를 좋아한다. 결혼한 이후에는 우리 집도 설날이나 한가위가 다른 집처럼 한바탕 축제의 시간이다. 명절이 다가오면 음식 준비로 어머님은 마음이 무척 바쁘시다. 음식 장만하시는 손이 크신 어머니에게 형제들이 먹을 만큼 적당히 하시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해야 할 정도이다. 형제가 4명이라서 조카들까지 모두 모이면 정말 시끌벅적하고 동네 시장처럼 활기차고 정신없다. 조카들이 어렸을 때는 하루 또는 이틀 잠을 자고 갔기에 비좁은 집안에서 시중을 드시는 어머니와 아내는 무척 힘들고 버거운 날이었음이 틀림없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 지도 강산이 넘었고, 형제들도 각자 집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노릇을 하기에 설날과 한가위 형제 모임도 자연스럽게 아득히 먼 옛날로 사라지고 없다. 눈이 많이 내린 1990년대 초반 어느 해, 저녁을 먹고 극장에 가서 ‘패왕별희’라는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 밤참으로 김치말이 국수를 해 먹으며 체력 훈련인 화투놀이로 밤을 새운 40대 젊은 날의 추억이 지금도 새록새록 난다. 설 날을 앞두고 보니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 한 번만이라도 되돌아가고 싶은, 아아, 그리운 옛날이여! 어머니 10주기를 지내고 난 후부터는 설날에 차례도 지내지 않아 집에서 특별히 음식 준비할 일도 없다. 그냥 떡국을 끓여서 자식들 그리고 손주들과 함께 먹으며 술 한잔하고, 상을 물린 다음에 아이들 세배를 받고 덕담을 해 주고 손주들에게 세뱃돈을 준다. 아직 돈의 가치를 모르는 손주들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설날이 기다려진다. (2024년 2월)
첫댓글 어렸을때 가래떡을 설탕찍어 먹었던 기억이새삼스레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