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량통신5. 선생님, 잡혀가면 고문 받나요?
- 고문에 대한 그 처절한 기억들...
오늘은 전부 3학년 수업이 있는 날입니다.
2교시에 8반 윤리수업을 하는데, 갑자기 한 학생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잡혀가면 고문 받나요?”
내가 압수수색 당했음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다 허둥지둥 화장실에 다녀와야 하겠다며 질문에 즉답을 피했습니다.
화장실 창가에서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있으니 지나간 영상들이 순식간에 떠올랐습니다.
고문에 대한 처절한 기억들을...
‘그래, 잡혀가면 항상 한인간이 철저히 해부되었었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있던 시시콜콜한 모든 것까지 다 꺼내게 하고, 또 그것을 하나하나 검증했었지.
검증하는 과정에서 고문 취조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나는 내가 아는 것을 다 말해야 했고, 저들은 그것도 항상 부족하다며 나를 밟고 우그려 넣고 그랬지.
반복되는 압수 수색과정에서 일기장을 비롯한 그동안의 삶의 과정들이 다 압수되므로 나는 과거에 대한 기억들이 특히 날짜 같은 것은 언제나 정확하지 못했지.
그래서 또 저들에게 두들겨 맞고...
일제 때부터 누적시켜온 각종 취조 기술을 동원하면서...
저들이 항상 나보다 나를 더 잘 알며 취조할 때마다 득의양양 회심의 미소를 짓곤 했었지.
80년 9월인가? 광주항쟁 때 수배되었다가 붙잡혀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헌병대 영창에서 재판 선고를 기다리고 있던 중, 갑자기 의정부로 강제 입영을 시켰었지.
그 때 전국의 학생 지도부 30여명이 함께 강제입영되어 데모하다 왔다고 ‘야호장병’으로 불리었었지.
지금 장관으로 있는 유시민이, 망월동 묘지에 묻혀 있는 박왈수, 그리고 김남규, 배현식...
이제는 젊었던 그 친구들의 이름조차 다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데... 어디서 무엇들 하는지...
그 친구들도 나와 똑같은 잔인한 폭력에 의해 고통을 받으며 심장을 찢는 아픔으로 군대생활을 했겠지.
보안대 지하실에서 취조를 받을 때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되곤 했지.
어떤 때는 꾀를 홀씬 벗겨 놓고 기라고도 하고...
그 때마다 이런 삶을 살아서 무엇 하는지, 삶을 끝 간 데 놓고 마음속에 번민하고 흥정하기를 몇 차례 이었던가?
어느 날 한번은, 저들이 어찌나 몰아붙이며 신체적 정신적 극한과 모욕을 주는지, 눈이 빨개진 채로 삶을 포기해버려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조사관이 그날따라 서류를 묶는 송곳을 내가 보이는 곳에 놓고 갔었지.
다른 때는 다 챙겨 나가곤 했는데...
<그래 너 나가면 오늘 내가 저것으로 목숨을 끊는 거야> 속다짐하고 있는데, 나가면서 보초병에게 조사관이 이렇게 말했지.
《저 새끼 오늘 죽을지 모르니까 문 열어 놓고 감시해라. 실탄 장전하고 혹시 죽으려고 하면 총을 다리에 쏴라!》며 초병의 경례를 받고 나갔지.
보초는 총을 겨누고 있었고 나는 쭈그려 앉아 있는 상태에서, 밤새 내내 <내가 빠를까?, 보초가 빠를까?> 셈하면서, 새벽녘이 될 때까지 삶을 붙잡았다 놓았다가..
<아~ 어머니, 아버지.. 자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것만 알려달라고 군부대 정문에서 지나가는 군인들에게 물어보며 애를 태우셨던 부모님들> 생각도...
<그래 살아 나가는 거야. 나가서 저들의 만행을 온 천하에 알리는 거야. 그것이 안 되면 죽을 때까지 간직하며 다시는 이런 세상 없게 민주화운동을 해야지> 생각도...
저들의 가해 때문에 나의 의지는 곧 무너져 버리곤 하길 반복했지만, 송곳이 눈 앞에 있던 그 날 새벽은 결국 다시 살아야 하겠다는 의지를 다졌지.
보안대에서 빨간 것을 파랗게 만든다는 전두환이 만든 녹화교육이 있었지.
그 녹화교육이 나를 대상으로 3개월 넘게 진행되면서, 고문당하고 맞았던 흔적들이 아물 즈음, 어느 날 담당 조사관이 이랬지.
《너는 이제 사상검증이 다 끝났다. 그리고 새사람이 되었다. 이제부터 우리 식구나 다름없다. 같이 멸공의 대열에 서야 한다.》그렇게 어르고는
《너는 이제 준보안대 요원이다. 네가 원하면 보안사요원으로 취직을 시켜주마. 그런데 마지막 검증과정이 하나 남았다. 그것은 네 친구 노병관의 최근 행적과 전북대 지하 써클 조직표를 그려오는 일이다. 만약 배반하면 너는 죽는다.》
이렇게 임무를 주고는 일주일간 나에게 휴가를 주었지.
《너 뒤에는 우리들이 항상 따라 다닌다.》는 말과 함께...
휴가를 가서는 종일 집에 틀어 박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마는지 또 고민 했었지...
휴가기간 내내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귀대 전날 퉁퉁 부은 얼굴로 친구를 만나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는 친구가 제시해주는 해법에 따라, 공개적인 남문교회 대학부 조직과 친구의 공개단체 활동사항을 적었고, 다음날 그것을 가지고 보안부대로 갔었지...
휴~
해서 나는 살아남았지만, 이런 비슷한 과정에서 자살을 한 사람, 의문사 당한 사람들...
그 혹독한 세월 속에서...’
짦은 기간 스쳐가는 잔상들이 무수하게 범벅으로 교차되다가, 울컥해진 마음을 추스르고는, 다시 교실에 가서, 초롱초롱 맑은 눈동자의 아이들에게 이렇게 대답을 해 주었었습니다.
“애들아, 이제 세상이 조금 좋아져서 과거처럼 그러지는 않는단다.”
분명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95년 구속되어서는 비교적 신사적으로 취조를 받았거든요.
하지만 아이들에게 '변화되는 현상 가운데 변하지 않는 동일성'이 계속 숨어 있다는 것은 차마 말해주지 못했습니다.
과거에 나를 고문했던 자들은 친일분단세력의 후예들로, 지금도 여전히 권력의 한켠에 귀틀고 앉아 음습한 빨갱이 색칠을 하며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있다고 하는 말도 차마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아이들에게 어둠보다는 밝음을 이야기해 주고 싶어서 일 겁니다.
우리 사회는 분명 민주주의로의 변화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중심문제 해결과 연결 속에서 이해되지않는 한, 현상의 미봉책으로 만족할 경우 변화의 방향도 삶의 질도 민주주의도 민중의 삶도 다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가령, 여전히 조국도 분단된 채 국가보안법으로 민족구성원들을 정신적 불구로 만들고 있고,
방응모 박근혜로 이어지는 친일파 후손들의 광영된 삶의 기득권도 그대로이고,
자주독립국의 징표인 군사주권도 여전히 미국에게 있는데,
이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더 이상 싸울 것이 없어졌다고 예지를 접어버린 사람들을 보십시요.
그들에게는 민중들의 절규도 죽음으로 이야기한 故허세욱님의 외침에도 겸허히 귀를 기울일 최소한의 양심조차 잃어 버렸지 않습니까?
평상시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 저의 과거인데... 너무 가슴이 아파서요.
오늘은 웬지, 해도 해도 못다 할 나의 이야기 한 부분만 주렁주렁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수업시간에 이 녀석들이 나의 압수 수색 소식을 듣고 하필이면 '고문'을 떠 올리며 질문을 하는 통에...
그것도 우리 사회가 만들어 놓은 상징 컴플렉스 중에 하나이겠지만...
퇴근하는 길에 교문 앞길에 현수막 하나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군산지회 이름으로 “통일교육 하자는데 국가보안법 왠 말이냐? 공안탄압 중지하라” 라는 글귀가 쓰여 있는 현수막이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할 때 바삐 오느라고 못 보았는데, 아이들은 이것을 보고 내 소식 알았나 봅니다.
여기 저기 많은 님들의 고민과 집중, 국가보안법 폐지로 집중하는 현상을 보고는 국보법 폐지 연대전선에 꽃피우는 신뢰와 집단적 의지의 아름다움에 사뭇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이제 간단히 소식 전하지요.
오늘은 어제 보다 더 많은 단체 대표들이 모여 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 및 항의방문을 했습니다.
어제 오신 단체 대표분들과 김제 기장 연합 대표 목사님, 민주노총 전북본부장님외 민노총 관계자분들, 가톨릭 정의평화구현사제단 신부님들, 전주시의원님들...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셨습니다.
역시 경찰들이 방패로 막아 나섰고요.
몸싸움 과정에서 민노당 전북도당 위원장 하연호님이 경찰의 방패로 입술이 터졌음을 아울러 전합니다.
공안탄압규탄, 국가보안법철폐를 위한 기자회견자료와 항의방문 과정을 담은 사진 몇 장 같이 첨부해 올리겠습니다.
앞으로 매일 단체별로 돌아가며 검찰청 항의방문단을 조직해서 대응하기로 하였습니다.
다만 내일은 故 허세욱 님 민족민주노동열사장으로 모두 서울에 가기로 하였답니다.
깊은 밤입니다. 이 밤 모두들 편안한 휴식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2007년 4월 17일 김형근 씀
첫댓글 가슴이 울컥이고 슬프군요
눈물겹습니다...ㅠ 며칠 전 한 방송의 9시 뉴스에서 유권자가 "맞아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DJ의) 아들을 찍겠다.'라는 말을 "왜 유권자로 하여금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하게 하느냐, 정치인으로서의 각성과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라며 김 전 대통령을 비판하던 전여옥이 생각납니다.
'전두환, 박정희 세력에게 맞아 죽을지 모르지만 홍업씨를 찍겠다'는 뜻인데도 전여옥의 혓바닥은 대통령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는 여자가 최고위원으로 있는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으면 5공과 유신정권으로 회귀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하지요.
초록 글! 눈물이 납니다. 현실은 그 분들을 더 비참하게 하는것같아 더욱 슬픕니다.
넘 슬프다 모두들 어떡게 되었나요 종아니님 지금도 이런일이 있습니까?
전여옥은 나팔수 박정권 전정권 그 수제자는 그 뒤에 있습니다 국민의 여론이 무서워 허위장 한 민주세력 예 이 주시합시다
다음 정권은 한나라당이라고 봐야죠,지금 얼치기 개혁을 하다가 그나마도 지지를 못받고있는 노무현 정권.....개혁세력들은 니탓,네탓,따집니다.국민들은 개혁에 대해서 냉소하고 있습니다.한나라당으로 향하는 민심,과소평가하면 않됩니다.
처참한 역사입니다. 이글을 보고 눈물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공안당국은 이런 사람을 왜 이리 빨갱이로 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