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6851]星湖先生-蘭竹帖 三首
원문=성호전집 星湖先生全集卷之六
蘭竹帖 三首
守節虛心儘可詩。貞姿惟許嶺松知。
休煩淇岸猗猗盛。看到天寒始見奇。
朱天使至號蘭嵎。九畹餘香是友于。
寫與東方爲正則。秪今留作景賢圖。
王孫繪竹意還殊。偃葉橫柯衆態俱。
醉袖翩翻豪士舞。不因風雨廢歡娛。
《난죽첩》 3수〔蘭竹帖 三首〕
절개 있고 마음 비운 모습은 참으로 읊을 만한데 / 守節虛心儘可詩
곧은 자태는 산 위의 소나무만이 알고 허여하였네 / 貞姿惟許嶺松知
기수에 무성한 대나무를 번거로이 말하지 말지어다 / 休煩淇岸猗猗盛
추울 때에 보아야 기이한 자태를 비로소 알게 되리라 / 看到天寒始見奇
난우라는 호를 가진 주 천사가 왔을 적에 / 朱天使至號蘭嵎
구원에 남은 난초 향을 이에 벗하였네 / 九畹餘香是友于
동방에다 그려 주어 법도로 삼게 하니 / 寫與東方爲正則
지금도 남아 현자를 존모하는 그림이 되었네 / 秪今留作景賢圖
왕손이 대나무를 그린 뜻이 또한 특출했으니 / 王孫繪竹意還殊
누운 잎새 가로지른 댓가지 온갖 모습 갖추었네 / 偃葉橫柯衆態俱
취한 소매 너울너울 펄럭이며 호걸이 춤을 추네 / 醉袖翩翻豪士舞
비바람 몰아쳐도 즐거운 춤을 멈추지 않는 듯이 / 不因風雨廢歡娛
[주-D001] 난죽첩(蘭竹帖) :
중국 명나라의 문신 주지번(朱之蕃, 1546~1624)이 1606년(선조39)에 황손(皇孫)의 탄생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사신으로 왔을 때에 허균(許筠, 1569~1618)이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접대를 맡았는데, 그때에 주지번이 직접 난초와 대나무를 그려 허균에게 선물하였다. 당시에 묵죽(墨竹)과 매화, 난초를 잘 그리기로 유명했던 종실(宗室) 석양정(石陽正) 이정(李霆, 1554~1626)이 주지번의 그림에 화답하여 비에 맞은 대나무와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두 떨기를 그려서 허균에게 주었다고 한다. 허균은 이 그림들을 가지고 당시의 명사(名士)들을 찾아가 시를 받은 뒤에 총 17장의 시화첩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이 《난죽첩》이다. 주지번은 금릉(金陵) 사람으로, 자는 원개(元介)ㆍ원승(元升), 호는 난우(蘭嵎)이다. 만력(萬曆) 23년(1595)에 진사시(進士試)에 1등으로 급제하였고 벼슬이 이부 시랑(吏部侍郞)에 이르렀으며 서화(書畫)에 조예가 깊었다. 《星湖全集 卷56 蘭竹帖跋》
[주-D002] 곧은 …… 허여하였네 :
대나무와 소나무만이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곧은 절조를 가지고 있어 기품이 상통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주-D003] 구원(九畹)에 …… 벗하였네 : 주지번이 난초를 그려 준 것을 비유한 말이다.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내가 구원의 땅에다 이미 난초를 심고, 다시 백묘의 땅에다 혜초를 심었노라.[余旣滋蘭之九畹兮 又樹蕙之百畝]”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04] 왕손(王孫)이 …… 특출했으니 : 종실 석양정 이정(李霆)이 대나무를 그려 준 것을 가리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양기정 (역) | 2016
王孫繪竹意還殊 왕손회죽의환수
偃葉橫柯衆態俱 언엽횡가중태구
醉袖翩翻豪士舞 취수편번호사무
不因風雨廢歡娛 불인풍우폐환오
왕손이 대나무를 그린 뜻이 남달라서
누운 잎새 휜 가지 온갖 모습 다 갖췄네
취한 소매 너훌너훌 호걸의 한바탕 춤
풍우 때문에 흥겨움 멈출 수 없다는 듯
- 이익 (李瀷, 1681~1763), 『성호전집(星湖全集)』 권6
「난죽첩(蘭竹帖) 3수(首)」중 세 번째 시
[출처] 바람의 절정, 그 '삽시간의 황홀'을 찾아서|작성자 새오늘
위의 시는 성호가 《난죽첩》이라는 화첩을 보고 쓴 것이다.
《난죽첩》이 만들어진 유래는 이러하다. 명나라 신하 주지번(朱之蕃, 1546~1624)이 조선에 사신으로 왔을 때 허균에게
대나무와 난초를 그려 선물했는데, 거기에 화답하여
종실(宗室) 석양정(石陽正)이 우죽(雨竹)과 풍죽(風竹)을 그려 주었다.
허균이 그 그림을 들고 당대의 명사들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어주기를 청하여 열일곱 장의 시화첩으로 만든 것이다.
▶이정(李霆), <풍죽(風竹)>,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허균에게 그림을 준 이 석양정이 바로 한국 회화사에
묵죽(墨竹)의 최고 거장으로 평가받는
탄은(灘隱) 이정(李霆, 1554~1626)이다.
그는 세종대왕의 현손이다. 성격이 원래 속진의 탁함을 싫어했기에,
평생을 공주(公州) 탄천(灘川)의 월선정(月先亭)에 은거했다.
월선정은 달이 뜨고 바람이 불면 어느새 매화 향기와 그림자가
방안에 가득하고, 고요히 누웠노라면 솔바람과 대숲 바람이
넘실거리는 곳이었다. 임진왜란 때 그는 일생일대의 큰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왜적의 칼에 오른팔이 거의 잘리는 상처를 입은 것이다.
화가에게는 치명적인 불행이었음에도 고통을 딛고 창작에 몰두하여
드디어 입신(入神)의 경지에 올랐다.
그의 묵죽을 일러 이항복은 ‘신묘품(神妙品)’이라 극찬했고,
이정귀는 ‘천기묘운(天機妙運)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찬탄했다.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그의 묵죽이 담긴 8폭 병풍을
뜰에 내놓았더니 까막까치가 날아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탄은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청명한 바람이 불어와 몸을 감싸듯, 정신이 맑아지고 기운이 상쾌해진다.”고
입을 모은다. 그래서 중국으로 사행(使行)을 떠날 때 그의 그림을 챙겨갔고,
이를 본 중국 문인들도 그의 그림 한 장 얻기를 갈구했다고 한다.
현재《난죽첩》을 볼 수 없으니 이정의 다른 <풍죽(風竹)>을 놓고 위의 시를 감상해보자. 적막한 바위에 뿌리를 박고서 밀려오는 거센 바람 앞에서도 의연히 버티고 선 대줄기와 댓잎들이 보인다. 부러질지언정 휘둘리진 않겠다는 당찬 의지가 느껴진다. 그러나 그림을 계속 보다보면 우리는 서서히 알아차리게 된다. 어느덧 대나무가 바람과 하나되어 너훌너훌 춤추고 있다는 것을. 마치 소매를 펄럭이며 마냥 흥에 겨워 사위를 멈추지 않는 고고한 춤꾼처럼.
“대 그림은 반드시 먼저 가슴에 대를 이뤄야 얻을 수 있다.[畵竹必先得成竹於胸中]”는 소동파의 말이 있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정은 ‘가슴에 천 이랑의 대를 품고 세한(歲寒)에도 푸르름을 지닐 수 있었기에 끝내 청아한 자아를 지켜냈고, 거친 바람을 오래 견뎌내며 온몸으로 품에 안다가 어떤 절정의 황홀한 순간, 문득 해탈의 미소를 머금게 된 초인(超人)’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글쓴이 이기찬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출처] 바람의 절정, 그 '삽시간의 황홀'을 찾아서|작성자 새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