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서로 사랑할 때(요13:31-3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이 무엇이길래 사람들은 사랑받지 못하면 생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죽음까지 불사하는 것입니까? 바로 여기에 우리 인간의 깊은 고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안고있는 모든 문제, 매우 복잡한 것 같지만 실상은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한 마디로 사랑의 문제입니다.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은 사랑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깊은 내면 속에 사랑의 갈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받고 주면서 행복을 찾게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살아가는 이유조차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의 죄성이 점점 강화되어서 지금 사람들은 자기 밖에 모를 정도로 자기 사랑에 젖어 있습니다. 이것이 타락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는 바로 우리의 사랑이 점점 변질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나를 넘어서 이웃에게 향할 때 진정한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사랑받지 못하면 인간의 내면속에서부터 외로움과 절망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변질되고 그 사랑이 병들어가면 우리 사회가 점점 어두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오늘 이 시간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향하여 "지금은 서로 사랑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음성을 한 분도 예외없이 다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사랑보다 더 위대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보다 더 강하고,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이 힘들다고 느낄수록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지금은 서로 사랑할 때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그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보다 실감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배경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성만찬을 들고 계시던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식사 도중에 가룟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2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버렸습니다. 그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이제 목전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주님은 얼마 후에 가룟 유다가 몽둥이와 창을 든 대제사장의 군사들을 이끌고 자신을 잡으려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몰려올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 후에 당할 그 참혹한 십자가의 죽음을 '영광'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예수님도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영광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를 앞에 놓고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요한복음 17장 4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요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인간을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몸은 병으로 쓰러지거나 무덤에 갈 수밖에 없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축복을 안겨 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바로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가 그것을 막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지 않고서는 이뜻은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그 십자가를 져야 할 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 나면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하나님이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룸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영화롭게 한 예수님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시어 부활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를 이 세상 모든 인류를 구원할 영원한 구원자로 높이 세우셨으며 하나님 오른편에 앉히사 온 천하가 그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주 곧 하나님이라 고백하게 만들었습니다(빌2:9-11).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자 하나님은 그를 높이 들어 세우심으로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있어 십자가의 죽음은 부들부들 떨면서 억지로 끌려가는 비참한 죽음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자기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계시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기 시작한 것이 십자가의 죽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 그런 긴장된 순간부터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랑하라'는 말은 56회 나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고별 설교하시는 13장에서 21장 사이에 44회나 나온다는 사실은 매우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라'는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그의 제자들을 앉혀 놓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씀들 가운데 가장 핵심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이 이와같이 마지막 떠나는 장면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실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줄 믿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3년을 따라다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 예수님이 너무 갑자기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처형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런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는 그들의 믿음도 파산하고, 인격도 파산하고, 꿈도 파산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정신적인 위기와 영적인 위기의 때에, 모든 위기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이 상황을 만날 때 그들로 하여금 꿋꿋하게 버틸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끈이 무엇이겠습니까? 돈이겠습니까? 명예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보셨습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살아남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고 보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강조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목전에도 사랑만이 우리를 붙들어주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사랑의 진가는 어려울 때에야 비로소 나타나는 법입니다. 만사가 잘 되고 형통할 때 다정하게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다니는 부부들을 보면 보기에 아름다운 장미와 같습니다. 그러나 향기없는 장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미의 진짜 향기는 깊은 밤중에야 비로소 맡을 수 있다고 합니다. 부부가 정말 사랑합니까? 그 사랑의 향기를 맡고 싶습니까? 생의 위기를 만나 가족이 험하고 좁은 길을 함께 걸을 때 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어려움이 있다고 서로 비난하고 외면한다면 그동안의 사랑이 가짜였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진짜 사랑을 실천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 사랑의 표준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에게 사랑의 표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가 그 표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아무 조건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잘 살 때나 못 살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그 어느 때든지 무조건 사랑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한번 사랑하고 끝나는 사랑이 아닙니다. 한번 마음을 주셨으면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사랑의 표준에 맞추어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듣다가 보면 정말 사랑할 자신감을 잃어버립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목사의 입장에서도 사랑한다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습니다.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그래도 쉽습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안 미워하면 그만이니까요. 그러나 사랑하라는 말씀은 정말 부담스럽습니다. 목사니까 저절로 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서로사랑의 표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라는 말은 하지만 정말 현실은 답답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실천하기 어렵다고 포기해 버립니까? '교회에서 늘 하는 소리 아니냐? 하지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도 약하고 손발도 약하고 입도 약하고 다 약한데 어떻게 하냐?'하며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을 위로하는 것으로 만족합니까?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요일 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성경을 날마다 묵상하고 성경공부도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줄줄이 꿰며 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사람도 하나님을 조금 알 수는 있지만 진짜 하나님을 진짜 아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기가 어렵다하여 사랑하기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머리로는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알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안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모습은 예수님을 닮아갈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리라." 제자는 선생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는 선생을 닮아야 합니다.
제자는 선생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예수님처럼 사랑해봐야 합니다. 그 어떤 변명을 늘어놓든지 간에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이라는 이 표준에 맞추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2. 사랑의 대상을 정해주셨습니다.
누구를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서로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서로가 누구입니까? 일차적으로는 제자들끼리입니다. 가룟유다를 제외한 열 한 제자들 말입니다. 예수님은 거창한 인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서로 사랑하라 할 때 서로는 내 아내요, 내 남편이요, 내 자식이요, 함께 예배드리는 옆에 있는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입니다. 멀리있는 사람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마음에 두고 사랑하라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할 것 없습니다.
C.S. 루이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로서의 개개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인류를 사랑한다고 하는 거창한 타이틀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은 대개가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가까운 데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전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옆에 있는 남편을 보고 "여보, 내가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를 통해 전세계를 사랑하는 것이 되고, 동시에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옳은 말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너무나 논리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의 '서로'는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삶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이와 같은 때에 우리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서로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막연히 사랑해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있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사랑은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1)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
골고다현장에서 넋을 잃고 돌아온 제자들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너나 가릴 것없이 그들은 다 실패자요, 배신자요, 비겁자였습니다. 자신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상처와 좌절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었겠습니까?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였을 것입니다. 그들을 주저앉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격려의 말 한마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무슨 값을 많이 지불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의 말, 격려의 말 한마디가 사랑을 대변할 수 있을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세상은 너무 경쟁적이고 폭력적입니다. 남편과 아내 둘 다 직장생활하시는 분들은 서로의 환경을 잘 알 것입니다. 생존 경쟁 사회에서 남보다 어쨌든 더 앞서야 한다는 절박한 경쟁의식 속에서 하루종일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면 하루를 피곤하게 보내고 가정으로 돌아옵니다. 이럴 때 식구끼리 서로가 주고받는 한마디의 위로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이라고 하는 분은 위대한 학자요, 위대한 성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저술가입니다. 그분은 '위로'라고 하는 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위로라고 하는 것은 외로운 사람과 함께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위로한다는 것은 고통을 가져가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함께 있으면서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내가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고통을 감당할 수 있어요. 두려워하지 마세요.'라는 의미의 말 한마디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위로가 필요한 때입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위로합시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합시다.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2)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한번 제자들의 입장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수모의 죽음을 당하는 것을 지켜본 그들은 누가 자기들도 붙들려 오지 않을까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실제로 열 한 제자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숨었습니다. 이럴 때 마태가 갑자기 베드로를 보고 "당신은 수제자가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여 우리를 망신시킬 수 있느냐?" 하며 대든다고 해 봅시다.
그리고 다른 제자는 요한에게 "자네는 말이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바로 옆에까지 가서 서 있었지 않은가? 거기서 뭐하고 있었는가? 대제사장과 좀 안다면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수를 쓰지 못했나?"라며 불평을 하고, 안드레는 누군가에게 "네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그물을 버리고 좇아가지 않았으면 나도 안 따라갔을거야. 그랬더라면 갈릴리에서 고기를 잘 잡고 있었을 텐데 지금 내 꼴이 뭔가? 네가 괜히 흥분해 가지고 나서는 통에 오늘 내가 이 꼴이 됐잖아." 하며 서로를 탓하고만 있다고 해 보십시오. 그 분위기가 어떠했겠습니까?
잘못하면 우리도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서로 탓만 할 뿐 용서하지 못하는 그런 살벌한 분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용서를 공동체 생활의 접착제라고 말했습니다. 옳은 말이라고 봅니다. 용서는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깨어지지 않도록 하나로 묶어주는 접착제입니다. 용서하면 공동체가 절대 무너지지 않습니다. 가정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부부가 헤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면 이 접착제가 끊어지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맙니다.
복음송 작곡가 최용덕집사님이 고향교회에 있을 때에 동료집사와 사소한 일로 말다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가깝던 사이가 서먹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최용덕 집사는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지"라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자기가 먼저 손을 내밀고 용서를 구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얼마 안 되어 그 집사님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장례식 후 그 집사님의 부인이 유품을 정리하다가 일기에서 "내가 예수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사람은 최용덕 집사다. 왜냐하면 그는 나에게 예수님을 믿도록 전도해 주었기 때문이다."라는 글을 발견하고 최용덕 집사님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최용덕 집사님은 큰 충격을 받고 옹졸해서 용서를 구하지 못하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밤새 울면 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찬송을 지었다고 합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 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기를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기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 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교만한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 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 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 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고 서있네. 어찌 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
우리 모두는 완전한 사랑을 갈구하고 있지만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피차 용서해 주어야 할 빚을 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가정 식구들을 용서하는 것은 특별히 더 중요합니다. 마음의 상처는 보통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오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먼데 있는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입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개가 가장 가까운 식구들로 인해서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을 만하면 또 상처를 받습니다. 나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의 상처를 또 긁어 피를 냅니다. 우리가 이러면서 한 가정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평안하고 형통할 때는 상처를 주거나 받거나 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처를 받는다 해도 쉽게 아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려워지고 세상살이가 빠듯해 지고 여러 가지 면에서 긴장이 고조되면 나도 모르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용서란 자기를 해방시키는 행위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면 그에게 감정이 상했다는 정신적 부담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반면 용서하지 않으면 자기의 감정을 상하게 한 그 사람들을 늘 마음속에 품고 미워하는 부담을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용서하면 그런 부담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나도 살고, 내 가까이 있는 가족과 사랑하는 이웃들도 삽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용서하고 있는 지, 그렇지 못한 지는 어려운 위기를 만났을 때에야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평소에는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려운 경제 사정 때문에 가정에서 웃음이 사라져 버리거나 갑자기 어떤 문제가 터지자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때가 많습니다. 갑자기 터져 나온 문제를 빌미로 삼아 남편을 괴롭히고, 아내를 괴롭히는 것은 아직 상한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용서한 줄 알고 덮어두었는데 사실은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응어리 때문에 가정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깨어지고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못나고 무능한 남편이라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평소에 돈 잘 벌어 줄 때 흥청망청 쓰기에 바빴던 아내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서로가 용서하고 끌어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어려운 위기를 함께 웃으면서 대처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용서가 곧 사랑인 것입니다.
3)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 인내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면서 인내를 여러 번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옛 속담에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참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험하고 가파른 길을 오르면서 함께 참는 것만큼 큰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승리는 끝이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을 가지고 달리면, 그것이 끝에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끝을 놓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고 불평하고 낙심하면, 결국 약속을 소유하지 못하고 다시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40년 간 동안 계속하였으며, 마지막 순간에 결국 낙심하여 약속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낙심이란 바라는 것에 대한 소망을 놓아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시험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의 테스트를 통과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끝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는 자가 약속의 복을 받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 한파가 지나가는 동안은 우리가 추워도 참아야 됩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여보, 우린 참을 수 있어요. 염려하지 마세요." "여보, 나 괜찮아요.? 직장 못 가는 것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한두 달 푹 쉬세요. 그다음에 기도한 다음에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 무엇이든지 한번 해보자구요." 이러면서 서로 참는 모습을 보여 주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 가정을 위기 속에서 행복하게 만드는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꼭 실천할 일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서로 위로하고, 용서하고, 인내하자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한두 번 실천하는 것을 그치지 말고 한평생 동안 계속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식구끼리 나누는 사랑은 끝까지 가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은혜없이는 안되는 사랑입니다. 은혜를 받아야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34절).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더욱더 사랑하십시다. 지금은 서로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