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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펜젤러 선교사의 묘지.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에 상륙한 후 처음 한 기도가 세겨져 있다. |
양화진은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한 조선의 근대화에 영향을 끼친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 묻힌 선교사들 중에는 일제시대에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헌신했던 선교사들도 있다. 이들이 뿌리고 간 복음의 씨앗은 이 땅에서 썩어져, 복음을 받기만 했던 한국교회가 이제는 많은 선교사들을 세계로 파송하게 되는 결실로 나타났다.
양화진을 관리하는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담임 이재철 목사) 측은 “양화진에 묻혀있는 선교사들의 삶은 선교 200주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한국교회의 소중한 자산이자 밑거름”이라며 “양화진을 한국교회의 성지로서 또한 민족사의 기념비적인 장소로서 기억하고 존속하는 것은 우리시대의 요청”이라고 양화진의 역사적 의미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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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펜젤러 선교사의 묘지를 보고 있는 학생들. |
역사적 배경 양화진(楊花津)은 한강을 중심무대로 삼은 조선왕조의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였다. 양화진의 깊은 강에는 대규모 선박들이 하역할 수 있어 제물포로 들어오는 전국 각지의 생산물이 양화진을 통해 도성과 궁궐로 배분됐다. 하지만 이러한 입지조건 때문에 양화진은 한성을 넘보는 외적들이 쉽게 들이닥칠 수 있는 국방의 취약지이기도 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양화진의 전략적 중대성은 더욱 부각돼 영조 30년에 군사적 주둔지로서 군진이 설치되기도 했다.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응징하고자 프랑스 군함 세 척이 1866년 9월 양화진까지 침범했다가 10월 강화도에서 패퇴하는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의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는 더 심해졌고, 결국 대원군은 양이에게 더럽혀진 한강을 사교들의 피로 씻는다고 하면서 양화진 앞 강물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물들였었다. 또한 양화진은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던 김옥균이 1893년 조선왕실에 의해 효수 당한 곳이기도 하다.
외국인 묘지로서 양화진의 시작 대원군의 섭정을 종식시키고 고종의 친정체제를 구축한 명성황후와 외척들은 서구열강들과 국교를 수립했다. 이때에 선교사로 들어와 의술로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은 알렌은 우리나라의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의 원장이 되기도 했다.
알렌에 이어 광혜원(이후 헤론에 의해 제중원으로 명칭이 바뀜) 원장이 된 헤론은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다가 이질에 걸려 33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게 됐다. 당시 헤론의 시신을 어디에 매장할지가 화두로 떠올랐다. 날씨가 매우 더웠던 관계로 헤론의 시신을 당시 유일하게 외국인 묘지로 사용되던 제물포까지 옮기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에 유족과 선교사들은 미국공사 허드를 통해 한성 가까운 곳을 매장지로 요구했다. 당시 조선은 통상지역안에 외국인의 묘지를 무상으로 조성해야 한다는 수호통상조약을 영국과 체결하고 있었는데, 허드는 최혜국 조례를 근거로 헤론의 매장지를 한성 가까운 근처에 요구했고, 결국 조선은 양화진을 매장지로 정했다. 이때가 1890년 7월 말이었다.
선교사묘지공원의 조성경위 한편 양화진은 1913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이후 토지대장에 소유자가 ‘경성구미인묘지회’로 등기됐었으나, 태평양 전쟁으로 모든 외국인이 강제출국 당하면서 법적 명의자가 없는 상태가 됐다. 8·15 광복과 6·25 전쟁 이후 언더우드 2세(원한경)와 언더우드 3세(원일한)가 ‘경성구미인묘지회’ 대표로 등기됐다.
1979년 서울시는 지하철 2호선 공사를 위해 묘지를 이전하려고 시도했었다. 당시 서울시의 계획을 막기 위해 양화진을 찾았던 오리 전택부 선생은 “양화진 외인묘지는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폐허지였고, 흉터처럼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곳이었으며, 아무도 돌보지 않는 쓸쓸한 땅이었다”며 당시의 양화진 상황을 묘사하기도 했다. (‘양화진 선교사 열전’인용) 결국 이때까지 외국인 묘지 대표란 단지 법적명의자였을 뿐 실제적인 관리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결국 1985년 6월 17일 ‘경성구미인묘지회’가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이하 기념사업회)에 묘지소유권을 이전함으로 불평등조약 95년만에 원상회복됐다.
기념사업회는 쓰레기와 잡초만 무성했던 이곳을 묘지공원으로 가꾸었다. 2005년 5월 마포구청은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서울외국인선교사묘지공원’을 조성했다. 기념사업회는 2005년 7월에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창립예배를 드리고 양화진 묘역과 선교기념관 관리운영에 관한 일체의 책임과 권한을 교회에 위임했다.
한편 100주년기념교회는 지난 2007년 양화진 기념관을 빌려 예배를 드리던 유니온교회와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지의 소유와 관리권을 놓고 갈등을 빚기도 했다.
양화진의 개요 공식명칭은 ‘서울외국인선교사묘지공원’이며,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해 있다. 묘역면적은 13,224㎡(약 4000평)이며 무덤은 517개 있다. 최초의 피장자는 J.W 헤론이며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에서 관리를 맡고 있다.
잠들어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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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대각성 100주년을 맞아 지난 2006년 5월 감리회에서 세운 영적대각성운동 기념비. 1903년 원산, 로버트 하디에서 시작된 회개운동은 1907년 평양대부흥의 기폭제가 됐다. 하디는 1935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세상을 떠났으나, 그가 한국에서 선교할 당시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은 두 딸이 서울 양화진 묘역에 묻혀 있다. |
젊음을 바쳐 열정으로 조선땅에 복음을 전하다가 숨진 선교사들, 그리고 은퇴 후 고국으로 돌아가 죽은 뒤에도 육신은 한국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한 이들, 함께 한국에 왔다가 배우자를 먼저 이 땅에 묻고 홀로 사명을 다한 뒤 합장된 사람들, 또한 선교사들의 어린 자녀들 등 이곳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묻혀있다.
이곳에 묻혀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꼽자면 감리교를 한국에 전파한 아펜젤러 선교사를 들 수 있다. 아펜젤러는 드루신학교 학생신분으로 미국 북감리회 학생선교사로 자원해 조선에 들어왔다. 아펜젤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일환으로 교육사업을 시작했고,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또한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안에 삼문출판사라는 인쇄소를 만들고, 기독교 소책자들과 ‘독립신문’ 등을 인쇄하기도 했으며, 언더우드, 스크랜턴과 더불어 성경번역위원회를 최초로 조직해 한글성경번역에도 상당한 공헌을 했다.
J.P. 캠벨 선교사는 1897년 44세의 나이에 남감리회 첫 번째 여성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서 ‘배화학당’을 세우고 여성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배화학당의 기도실에서는 정기적인 예배가 드려졌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한 모임은 종침교 근처에서 종교교회로, 또 다른 모임은 자하교 근처에서 자교교회로 발전했다. 캠벨 선교사는 1920년 11월 12일 신병으로 소천했다.
D.A.벙커는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1886년에 한국에 들어왔다. 육영공원이 양반자제들의 학업태만과 재정지원의 중단으로 문을 닫자 벙커는 배재학당으로 옮겨왔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토론위주의 공개적인 방법을 도입했고, 물리학, 화학, 수학, 정치학 등 새로운 교과도 채택했다. 또한 아펜젤러가 순직한 후에는 배재학당의 2대교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당시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산당하고 중심인물들이 수감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벙커가 아끼던 제자 이승만도 함께 한성감옥에 투옥되던 사건이 있었다. 벙커는 동료 선교사들과 힘을 모아 한성감옥 수감자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했고, 결국 이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져서 그들은 자유롭게 차입도 하고 전도도 할 수 있게 됐다. 결국 이러한 일을 통해 이상재, 이원긍, 안국선 등 12명의 고관 출신 양반과 선비들이 최초로 예수를 믿게 됐다.
벙커는 배재학당을 사임한 후 조용히 전도와 교육 사업을 하다가 1928년 73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이후 미국에서 소천했지만, 한국 땅에 유골을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양화진에 안장됐다.
이외에도 새문안교회와 조선기독교대학(이후 세브란스의대와 합쳐져 연세대학교로 발전)을 설립한 언더우드, 백정과 가난하고 억눌린 백성을 위한 전도를 했던 무어, 언론인으로서 억눌린 한국사람들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베델 등 한국의 선교와 근대화, 그리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많은 이들이 양화진선교사묘지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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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아펜젤러나 언더우드 같은 유명한 선교사들의 묘지도 있지만,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는 선교사들의 묘지도 있다. 이들의 헌신으로 한국교회는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나라가 될 수 있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