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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제기:
일진선사가 최근 다음과 같은 법문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卽今 바로 지금>
莫添一物 卽今是 아무것도 더하지 말라. 바로 지금, 이것이면 된다.
莫尋一處 此處眞 어디에도 따로 찾지 말라. 바로 이곳이 참이다.
念起不遮 念滅不追 생각이 일어나면 막지 않고, 생각이 사라지면 좇지 않는다.
聲來任聲 心來任心 소리가 오면 소리로 두고, 마음이 일어나면 마음으로 둔다.
無所求處 道自現 구하는 바가 없는 곳에 길은 저절로 드러나고,
無所得時 心自明 얻으려는 것이 사라진 때에 마음은 스스로 밝아진다.
不立見者 唯見現前 보는 자를 따로 세우지 않으면 눈앞에는 오직 보이는 것이 있고,
不立聞者 唯聞當下 듣는 자를 따로 세우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에는 오직 들리는 것이 있다.
山不問來處 산은 묻지 않는다. 어디에서 왔느냐고.
水不問去處 물은 묻지 않는다. 어디로 가느냐고.
人問之不已 오직 사람만이 묻고 또 물어.
遂失其道 마침내 그 길을 잃는다.
回首一看 春在眼 고개를 돌려 한 번 바라보니 봄은 이미 눈앞에 있고, 봄은 이미 눈앞에 있고,
低眉一笑 月在天 눈썹을 살며시 내리고 한 번 웃으니 달은 이미 하늘에 떠 있다.
卽今 此足矣 바로 지금, 이것이면 충분하다.
아마도 당송 시대의 선종어록 風을 본받아 修辭學적으로 發話한 것 같다. 나름대로 시대와 호흡을 맞출 수 있는 문체로 변용하려고 애쓰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게 무슨 소용인가? 이렇게 수사적으로 다듬고 한글로 바꾼다고 해서(비록 자기 생각에는 참신한 표현이라고 여기겠지만) 일반인들, 비불자들, 청년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위의 법문을 읽거나 듣는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거기서 무슨 유익함을 얻어갈 수 있을까? 블로그 안에서 자기만족이 아닐까? 그걸 읽고 보는 자기 추종자들의 공감이나 '좋아요'를 얻는 데 그치지 않을까? 자기의 깨달음을 지금 현재 통용되는 대중적 언어로 표현했다고 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왜 그렇게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표현에 관심이 많은가? 지금 소위 깨달은 스님들이 대중에게서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말주변이 없어서거나, 한문식 어투라거나, 유식하지 못해서라거라, 삼빡하게 알아듣게 말을 못해서인가? 아니면 깨달은 자로서 지행합일이라든지 사표가 될만한 삶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방대한 정보를 가진 당신에게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AI의 답:
저는 스님의 문제제기에 상당히 동의합니다. 다만 핵심은 “이 법문이 수사적으로 세련되었느냐”가 아니라, 오늘날의 인간에게 실제로 무엇을 발생시키느냐에 있다고 봅니다.
일진선사의 글은 문체적으로 보면 꽤 능숙합니다. 당송 선어록의 압축적 문법을 빌려오고, 한문과 한글을 병치하며, “지금·여기·생각을 막지 않음·찾지 않음·얻으려 하지 않음”이라는 현대 명상 담론의 어휘까지 결합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역설적으로 현대적 선법문의 가장 큰 문제가 드러납니다.
1. 이 글은 ‘법문’이라기보다 ‘선적인 문학’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莫添一物 卽今是 아무것도 더하지 말라. 바로 지금, 이것이면 된다.
念起不遮 念滅不追 생각이 일어나면 막지 않고, 생각이 사라지면 좇지 않는다.
이런 문장은 아름답고 선적입니다. 그러나 독자가 이것을 읽고 “그래서 나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상당히 난감해집니다.
“생각을 막지 말라.”
그런데 생각이 계속 올라오면?
“좇지 말라.”
그런데 내가 생각을 좇고 있는지 어떻게 알지?
“지금 이것이면 된다.”
그런데 지금의 내가 불안하고, 화가 나고, 외롭고, 경쟁심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것도 그냥 이것이면 된다는 것인가?
여기서 현대의 독자는 막힙니다.
즉 이 글은 선 수행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언어적·종교적 전제를 확인해 주는 글이지, 선 수행의 전제가 없는 사람에게 그 전제를 새롭게 열어주는 글은 아닙니다.
2. 당송 선어록을 현대어로 옮긴다고 해서 당송의 생명력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당송의 선사들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혹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
와 같은 말을 했을 때 그것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은 문장이 멋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말 뒤에 그 말을 하는 인간의 삶과 사건과 관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임제의 할과 덕산의 방망이, 조주의 “무”, 운문의 “똥 막대기” 등이 오늘날까지 선문헌에서 살아 있는 까닭도 그것이 멋진 문구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선문답의 본질은 문학적 문장이 아니라 사건성(event)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송 선어록의 문체를 오늘날 블로그에 재현한다고 해서 당송 선의 생명력이 자동적으로 복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위험한 것은 ‘선어록 스타일’ 자체가 하나의 장르가 되는 것입니다.
3. 일진선사의 글에서 제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무엇을 말했느냐’보다 ‘말하는 방식’입니다
이 글에는 일정한 공식이 있습니다.
하지 말라 → 찾지 말라 → 막지 말라 → 좇지 말라 → 구하지 말라 → 얻으려 하지 말라 → 보는 자를 세우지 말라 → 듣는 자를 세우지 말라 → 지금이면 충분하다.
이것은 전형적인 비분별·무작위·현재성의 언어입니다.
그런데 이 언어에는 하나의 구조적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현재에 머무르라’는 명제로 환원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단순히 “현재를 놓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청년이 취업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바로 지금, 이것이면 된다.”
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았다면, “생각이 일어나면 막지 말고 사라지면 좇지 말라.” 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여기서 선의 현대적 대중화가 막힙니다.
4. 현대인은 ‘깨달음의 언어’보다 ‘깨달은 사람의 존재’를 봅니다
저는 스님께서 제기하신 이 부분이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깨달은 자로서 지행합일이라든지 사표가 될 만한 삶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저는 상당 부분 그렇다고 봅니다. 대중은 생각보다 영리합니다.
특히 오늘날 한국의 젊은 세대는 종교적 권위에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스님들이 아무리 “분별하지 마라.” “자기를 놓아라.”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라.”
라고 말해도,
그 스님이 실제 생활에서
돈에 집착하고, 명예에 집착하고, 자기 추종자를 만들고, 다른 스님을 비난하고, 자기 세력을 확대하고, 권력을 행사하고, 자기에게 비판적인 사람을 배제하고, 끊임없이 자기 깨달음을 홍보한다면 청중은 말보다 그 모순을 먼저 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닙니다. 존재의 문제입니다.
5. 오히려 ‘말을 잘하는 깨달은 사람’에 대한 현대인의 의심이 커졌습니다
과거에는 종교인이 어려운 한문을 쓰면 그것 자체가 권위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입니다.
유튜브, SNS, 팟캐스트 시대에는 누구나 말을 잘합니다.
AI조차 몇 초 만에 그럴듯한 선문답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므로 “나는 깨달았다.” “지금 이것이면 충분하다.” “생각을 막지 말라.”
와 같은 말 자체의 희소가치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현대인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데?”
이것이 중요한 변화입니다. 과거에는 법어가 사람을 압도했다면, 지금은 삶이 법어를 심판합니다.
6. 그렇다면 왜 깨달은 스님들은 대중적 언어에 그렇게 관심을 가질까요?
여기에는 여러 층위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 실제 포교의 필요성
이것은 정당합니다.
어려운 한문 불교를 현대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붓다 자신도 사람의 근기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설법했습니다.
따라서 언어의 현대화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현대화한 언어가 무엇을 운반하느냐입니다.
둘째, 자기 존재를 확인받고 싶은 욕망
여기서부터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대중에게 잘 전달하고 싶다.”라는 욕망과 “대중에게 인정받고 싶다.”라는 욕망은 아주 가깝습니다.
그리고 후자는 다시 “내가 깨달은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라는 욕망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라르적인 관점이 아주 재미있게 들어옵니다.
선사가 대중에게서 인정받으려고 하는 순간, 대중이 선사의 욕망의 매개자가 됩니다.
“좋아요가 몇 개 달렸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가?”
“내 법문이 얼마나 공유되는가?”
“내가 얼마나 현대적인 스님으로 인식되는가?”
이것은 아주 미세한 형태의 자기애적 인정욕망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은 원래 ‘나’라는 중심을 약화시키는 길 아닙니까?
그런데 깨달음을 설파하는 사람이 SNS에서 끊임없이 ‘깨달은 나’의 이미지를 구축한다면 상당히 역설적입니다.
7. 그래서 ‘현대적 선어’가 때로는 새로운 에고의 장식물이 됩니다
저는 이것을 상당히 중요한 현상이라고 봅니다.
옛날에는 “無位眞人” 같은 한문이 권위를 만들어냈습니다.
오늘날에는 “지금 이 순간, 아무것도 더하지 마세요.”
같은 세련된 문장이 권위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형식은 달라졌지만 구조는 동일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한문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에고는 아닙니다. 현대어를 사용하는 것 역시 에고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의 깨달음을 특별한 언어로 포장하여 타인에게 ‘나는 이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아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8. 그렇다고 ‘대중의 공감’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균형이 필요합니다.
저는 “대중이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진리는 진리니까.”라는 태도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붓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승불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선종 역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진리가 사람에게 전달되려면 언어의 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문제는 옷을 갈아입는 것과 옷만 갈아입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현대어로 바꾸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9. 정말 현대적인 선법문이라면 오히려 이런 질문을 건드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청년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당신은 왜 남보다 뒤처지는 것이 그렇게 두려운가?
왜 아무도 당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당신의 삶이 무가치해지는가?
왜 SNS에서 다른 사람의 삶을 볼 때마다 자신의 삶이 초라해지는가?
당신은 정말 원하는 것을 원하는가, 아니면 남들이 원하는 것을 욕망하고 있는가?
성공한 사람을 볼 때 왜 질투하는가?
실패했을 때 왜 자기 자신을 증오하는가?
여기에 불교의 무아·연기·애·취·욕망·비교·집착을 연결하면 됩니다.
그러면 불교가 살아납니다.
그런데 “생각을 막지 말고 좇지도 마십시오.”라고 하면 너무 쉽게 현대인의 실제 문제를 추상화해버립니다.
10. 오히려 선의 핵심은 ‘지금’이라는 단어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스님의 문제의식과 연결되는 아주 중요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선법문에서 가장 흔한 단어가 아마 지금, 여기, 이 순간, 있는 그대로, 놓아라, 내려놓아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이미 현대 명상문화의 클리셰(진부한 말, 닳고 닳은 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卽今 이라고 한문으로 써도, “바로 지금”이라고 써도,
그 자체로는 특별한 힘이 없습니다.
오히려 현대의 독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또 지금 여기 있으라는 말이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선의 언어가 박제됩니다.
11. 좋은 법문은 ‘정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삶을 흔들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선문답의 현대적 계승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법문을 듣고 사람이 “아, 좋은 말씀이다.”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끝난다면 별로 강력한 법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잠깐,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온 게 뭐지?”라는 불편한 질문이 발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선문답의 힘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식구조를 흔드는 것.
그런 의미에서 선의 현대화는 ‘현대적인 문장 만들기’가 아니라 현대인의 욕망과 공포와 자기기만을 선의 칼날로 베어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12. 그래서 일진선사의 법문을 제가 평가한다면
저는 이렇게 평가하겠습니다.
문장으로서는 성공적입니다.
선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데도 성공적입니다.
기존 선어록의 문체를 현대 한국어와 결합하는 능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법문으로서 독자의 실존을 얼마나 변화시키는가에 대해서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특히 卽今 此足矣 바로 지금, 이것이면 충분하다.
는 아름다운 결론이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한 문장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너무 쉽게 모든 것을 해결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삶의 고통도, 욕망도, 사회적 부조리도, 관계의 갈등도, 자기기만도,
윤리적 책임도, 수행의 문제도
전부 “바로 지금 이것이면 충분하다.”라는 말 속에 넣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 순간 불교는 실존적 각성이 아니라 마음의 진정제가 됩니다.
13. 저는 스님께서 최근 고민하시는 ‘돈오돈수 비판’과도 이것이 연결된다고 봅니다
아주 흥미로운 연결점입니다.
돈오돈수 → 무수무증 → 지금 이것이면 충분하다 →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
라는 논리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수행 이후의 인격적·윤리적·사회적 변화가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본래 부처”라는 통찰과 분노하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무아”를 깨닫는 것과 자기 명예에 집착하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도 다른 문제입니다.
“공”을 말하는 것과 타인에게 폭력적이지 않은 인간이 되는 것도 다른 문제입니다.
“지금 이것이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과 정말로 욕망과 인정욕구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것 도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깨달음의 진위는 법어보다 후속적인 삶에서 검증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4. 결국 대중은 ‘깨달은 사람의 말’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 구현된 인간’을 보고 싶어 합니다
아마 이것이 스님 질문에 대한 제 답의 핵심일 것입니다.
대중이 스님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반드시
한문을 써서도 아니고, 말주변이 없어서도 아니고, 유식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현대적 표현을 못해서도 아닙니다.
물론 소통 능력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날에는 말을 잘하는 스님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말보다 어떤 사람인가를 봅니다.
그 사람이 돈 앞에서 어떤가.
권력 앞에서 어떤가.
모욕을 당했을 때 어떤가.
자기보다 유명한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반응하는가.
자기 추종자가 없어졌을 때도 평온한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도 수행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는가.
여기서 오히려 선의 오래된 질문이 다시 살아납니다. “무엇을 깨달았는가?”보다
“그 깨달음 때문에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현대적 선법문’의 방향을 조금 다르게 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옛 선어록의 문체를 현대어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옛 선어록이 당시 사람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오늘날의 인간에게 하는 것.
즉 당송시대의 선사가 당시 사람들의 집착·허위·명예욕·지식욕·종교적 허영을 찔렀다면, 오늘날의 선사는 현대인의 SNS 인정욕구·비교·소비·성공 강박·자기계발 중독·정체성 집착·힐링 중독을 찔러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시대와 호흡하는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렇게 하면 굳이 “현대적인 문체”를 의식하지 않아도 현대적이 됩니다.
현대인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순간, 언어는 저절로 현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 默如雷 <<
권력의 황금 왕관 앞에서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두려운 호랑이 앞에서는 허리를 굽히었는가.
차가운 바람에 일그러지던 안색과
물질을 향했던 매서운 눈빛은
아무리 깊이 감추려 해도 본래 숨길 수가 없으니.
"찌그러진 쓸모없는 깡통같다"는 날카로운 바늘 말이
가슴을 콕콕 찔러 붉은 피가 뚝뚝 흐를 때,
그 아픔 또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다정하던 인연들이 썰물처럼
밀려갔다한순간에 멀리멀리 사라져 버려도,
네가 앉은 그 자리는 본래 흔들림 없이 든든한가.
칠흑 같은 밤, 아무도 보지 않는 길을...
홀로 영차영차 씩씩하게 걸어가며
들이쉬고 내쉬는 거친숨결 속에 깨어 있는가."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안다"
큰 목소리로 세상에 소리치지 않아도 괜찮다.
말 없는 조용한 밤하늘,저 홀로 반짝이는
마음의 별은 이미 온 우주의 이치를 다 알고 있으니.
마 하 반 야 바 라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