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1- 24
영향력 / 박정식 목사
옆의 분과 인사 나누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나다니엘 호돈이라는 작가가 쓴 「주홍글씨」유명한 작품을 많이 알고 계실겁니다. 거기에 보면 주인공이 헤스터 프린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아미쉬라는 정통파 크리스챤들이 모여서 사는 그런 집단 촌락에서 살아갑니다.
이 사람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처지의 사람이었습니다. 남편이 그다지 사랑을 해주는 것도 아니었고, 멸시와 구박과 천대의 삶을 매일매일 살았단 말이지요. 그래서 그는 정말 사랑에 결핍된 나머지 용서받지 못할 죄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간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백일하에 드러나서 그 공동체 사람들에게 굉장히 충격을 안겨주게 됩니다. 그래서 이 공동체의 사람들은 이 여인에게 두고두고 이 고통을 느끼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한가지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이 여인이 입고 있는 옷에다가 A라는 알파벳을 새겨 놓토록 하는 것입니다.
흔히 '간통'이라는 'Adultery'의 낱말의 A자를 붙여놓고 두고두고 이 사람을 정말 비난하고 매도하려는 그런 의도에서 그렇게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그 공동체안에서 살긴 하지만, 항상 사람들에게 비난과 손가락질을 한 몸에 받고 살고 있었습니다. 매일 죽고싶은 심정이 한 두번 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내가 비록 죄를 지어서 이런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고 살고 있지만, 이렇게만은 살아갈 수 없다.' 나름대로 새로운 결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뭔가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딸을 데리고 매일매일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정말 최선을 다한 삶을 삽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섬김의 삶을 살 것인가? 나를 매도하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내가 섬김의 삶을 살 것인가?' 하면서 십 년 넘게 정말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여인이 동네를 지나가는데, 아이들이 놀면서 이 여인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옷에 새겨진 'A'자는 알파벳을 보게 되잖아요? 그래서 한 아이가 자기 친구들끼리 서로 물었습니다. "야! 저게 무슨 의미로 새겨 놓은거냐?" 그랬더니 이 여인은 벌써 압니다. 아이들 사이에 벌써 자신이 '간통녀'라는 이런 좋지 않은 말들이 또 쏟아질 것이라는 것을....... 그런데 들려오는 소리는 전혀 뜻밖의 소리였습니다. 귀를 의심할 만큼 그 중에 한 아이가 "그건 'Angel'의 약자인 'A'야! 알지? 천사" 그랬습니다. 자기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낙인찍힌 여인이지만,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과거로부터 정말 탈피해서 매일마다 최선의 삶을 경주한 그녀는 그런 영향력으로 새롭게 변화되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아이들의 눈에 비쳐진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간통을 저지른 잘못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천사 같은 여인이었습니다. 이것은 영향력입니다.
내가 바르게 살기로 결단하고, 그렇게 누군가를 섬기는 삶을 감당할 때 드디어 그 영향력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영향력의 결과입니다.
흔히 이 시대에 많이 난무하는 낱말이 '리더쉽'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C. E. O.들에게 필요한 것이 '리더쉽'이다, 혹은 목사들에게 필요한 것이 '리더쉽'이
다하고 리더쉽을 많이 강조합니다. 그런데 '리더쉽'의 의미가 뭡니까? 그것은 '영향력'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리더쉽은 영향력입니다.
누군가에게 명령하고 그들을 이끌고 그들을 끌고가는 것이 아니라 참된 리더쉽은 온 인격을 통해서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그 영향력을 통해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내게 하는 이것이 참된 리더쉽의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회로부터 지탄받은 한 여인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가족들에게도 지탄받던 한 여인의 연약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고 있습니다.
이 여자의 이름은 라합이었습니다.
그 여성의 직업은 성경에 기생이라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매춘부였습니다. 여리고 성의 매춘부 라합이라는 여자가 오늘 성경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중의 하나가 바로 이 매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 매춘이 존재했느냐는 것입니다. 원래 이 매춘들은 젊은 과부들이 많이 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지금과는 매우 다릅니다. 고대 시대에는 전쟁에 의해서 많은 남자들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한번 쓸고 지나가면 많은 남성들이 죽어 넘어지고 대신에 많은 과부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들은 먹고 살기 힘든 처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즉 유대인들에게 이 고아나 과부를 구제하는 법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굉장히 중요시 했습니다. 그 이유는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성을 판단든지, 그런 잘못된 삶을 살지 않도록 그 공동체에게 부여한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은 달랐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이 패역 했을 때 정말 우상숭배와 자기들의 욕심에 깊이 빠졌을 때에는 이 문제가 항상 하나님 앞에 문제꺼리 였습니다. 그래서 이방민족가운데 많은 경우는 이 젊은 과부들이 매춘을 했습니다. 이것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자식들을 데리고 혹은 자기 가족들을 건사하기 위해서 그들은 이런 굴욕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하루하루 그 영혼과 삶이 유린당하는 그런 처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평가는 받지 못했습니다.
가족들에게도 정말 경멸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먹고는 사는 처지이지만, 돌아져서는 정말 한숨쉬고 지탄하는 그런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여인의 집에 두 사람이 출현합니다.
낯선 두 명의 남자가 출현했습니다. 이 사람은 그들이 누군가를 단번에 알아차립니다. 옷차림새를 봐도 또 외형을 봐도 그들은 범상한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기 동족은 더더욱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싯딤'이라는 광야에서 보냈던 두 사람의 정탐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여기에서 왜 여호수아가 두 사람의 정탐꾼을 보냈는가? 하는데 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민수기 13장에서 하나님의 종 모세는 열 두명의 정탐꾼을 바로 이 가나안땅에 보낸 적이 있잖아요. 무려 38년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또 정탐꾼을 보냈을까? 그만큼 산세가 많이 변한걸 보고 싶었을까? 아니면 뭔가 지리적인 환경이 많이 변화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한번 이런 것을 파악하기 위해서 보낸 것일까? 궁금하긴 하지만, 실제로 그런면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면 지금처럼 급속도로 십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지 않습니까? 여전히 똑같은 지형, 똑같은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구태여 여호수아는 이런 위험을 감내하면서 두 사람의 정탐꾼을 보냈을까?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의미가 있었을 겁니다.
과거 민수기 13장에 보면 모세가 열 두명의 정탐꾼을 보내고 난 다음에 그들이 40일 동안 가나안 온 땅을 탐지하고 나서 돌아오게 되지 않습니까?
돌아와서 하는 그들의 보고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나타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그 땅은 아름다운 땅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 땅에 살고있는 원주민은 워낙 강대하다. 우리는 그들을 도무지 이기지 못한다."라는 절망적인 선언을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와 같다. 우리는 절대로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하는 것이 열사람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유독 다른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그 땅의 신은 그들을 떠났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뭐가 그렇게 그들의 대답이 극단적으로 되도록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가?,
아니면 자기들의 개념으로 바라보는가?
개념의 차이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느 쪽에 관심을 더 많이 두나요?
하나님을 통해서 현실을 보는, 믿음으로 현실을 보는 긍정적이고 신앙적인 사람들의 어떤 고백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다수결에 의해서 열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구나! 우리는 절대로 그 땅을 정복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미리 겁을 집어 먹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다시 돌아가자!"하면서 부정적인 행동을 해버리고 말았다 말이지요. 그때 두 사람의 정탐꾼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주인공 여호수아와 그의 동역자 갈렙이었습니다. 모든 1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어버리고, 이제 새로운 2세대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데 이 두 사람만 살아 남은 것입니다. 그들은 백성의 리더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두 사람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 열 두명까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현실을 보는 믿음의 사람 두 사람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백성들에게 뭔가를 어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다수결이 아니고, 현실을 보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우리가 미래를 향해 나가자는 그런 아름다운 믿음의 제안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슴속에 새로운 하나님의 비전과 확신을 점검하고 그것을 새겨놓고자 하는 여호수아의 거룩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새로운 비전의 현장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 약속을 붙들고 미래를 향해서 나가라."그랬습니다.
또 한가지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겠다는 신앙적인 의지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현실을 바라보지 않고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만을 의지하고 전진하겠다는 믿음의 의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아직도 모르고 있지만, 이런 배후에는 뭔가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이 담겨 있었다는 것입니다. 약한자, 천한 자를 역사의 전면에 픽업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의도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역사의 뒷 무대 속에 있는 누군가를 픽업하셔서 역사의 전면에 세우고자 이런 과정을 선용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포인트가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비전을 가슴에 품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결단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 속에는 하나님이 누군가를 역사의 전면에 세우셔서 그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뭔가 중요한 교훈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약하고 천한 사람을 당신의 역사 전면에 내세우셔서 그들을 하나님이 얼마큼 사랑하시는지, 또한 그들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비전을 이 땅에 이루어 가시는지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이 과정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어떤 유머입니다. 깜짝쇼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모릅니다.
그들은 어떤 자기들의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백성들에게 그것을 고취시키고 그것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두 사람의 정탐꾼을 보내지만, 그 배후에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계획을 갖고 계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약하고 천한 사람을 역사의 전면에 세우고자 하는 그분의 계획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성경에 참 많이 나타납니다. 정말 멋진 장면입니다.
우리가 신약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통행하십니다. 3장까지는 니고데모와 더불어 대화하시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파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유대에서부터 다시 갈릴리로 내려가시는데 주님께서 사마리아로 통행하십니다. 원래 정통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에는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쪽은 혼혈인들이 살기 때문에 버림받은 땅, 저주받은 땅으로 규정해버렸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빙빙 우회에서 길은 멀지만, 베뢰아 지역으로 해서 갈릴리쪽으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마리아를 통행하여야겠는지라."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드러나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한글 성경은 "예수께서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겠는지라." 하지만, 헬라 원문에서는 이것을 의지적인 표현을 담고 있습니다. 정확한 설명은 "예수께서 사마리아로 통행한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의지적이고 뭔가 대단히 계획적이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 사마리아로 가십니다.
유대인들은 가지도 않는 사마리아 땅에 가셨는데 뭔가 시간을 약속해놓은 것처럼 굉장히 바쁜 모습으로 비춰지는 주님의 어떤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그분이 허겁지겁 내달려서 드디어 시간 전에 수가라는 한 성 우물가에 그분이 도착합니다. 그때 그분이 우물가에서 쉬시잖아요. 그것은 그분이 그 시간에 당도하기 위해서 얼마큼 조급했는가를 우리에게 느끼게 한단 말입니다. 드디어 그분이 가서 '휴~우'하고 쉬고 계실 때 갑자기 한사람이 역사의 전면에 나타납니다. 누구였습니까? 왕의 행차였습니까? 위대한 제사장의 행차였습니까? 아닙니다. 한 여자가 물동이를 이고 그 정오의 뙤약볕을 머리에 안으면서 그 자리에 나타난 것입니다. 한 눈에 봐도 척 아는 여자입니다. 무려 남편이 다섯이나 있는 품행이 방정치 못한 여자였습니다.
바로 그 여자와의 만남을 위해서 주님은 그렇게 달려오신 것입니다.
"내게 물을 한 그릇 주십시오."
이 대화를 통해서 서로 대화가 오고가기 시작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드디어 당신을 계시하시고 그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사람에게 버림 당하고 매도 당했던 한 여인!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주님은 그렇게 가셨단 말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약하고 천한 자를 향한 주님의 관심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주님을 만난 다음에 어떻게 변화됩니까? "내게 내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새롭게 말씀하신 그 분을 와서 보라! 바로 이분에 메시야다." 변화된 것입니다.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성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메신저로 그의 인생은 탈바꿈한 것입니다. 이 멋진 변화의 가능성을 주님께서 바라보셨기 때문에 거기까지 오신 것입니다.
그 여인에게 예배의 감격을 채워주시고 진리에 대한 은혜로 풍성히 채우는 장면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한 주님의 관심입니다.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도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전을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자라는 믿음으로 그들을 갱신시키기 위해서 두 명의 정탐꾼을 파송하지만, 하나님은 그 배후에 이런 멋진 계획들을 감춰 놓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측량치 못할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정탐꾼이 여리고에 들어가자 마자 그들의 정체는 탄로가 나고 말았습니다. 2절 말씀 볼까요? 읽습니다.
"혹이 여리고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몇 사람이 땅을 탐지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그들의 정체는 보기좋게 탄로가 나버렸습니다.
아니! 여리고 사람들이 바봅니까?
그들은 이미 40년전부터 누군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땅을 출발한 다음에 이 가나안 땅을 향해서 온다는 정보를 수없이 듣고 있습니다. 그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 들어올 것인가? 그런데 그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옷매무새도 다르고, 외모도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한눈에 척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왜 처음부터 잡지 않고 그냥 나두었을까요? 아마도 그들을 뒤쫓아가서 그들을 산채로 생포하고 그들에게 뭔가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 역공작을 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그것도 모르고 그 성에 들어와서 라합의 집에 자신의 몸을 은신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정보가 보기 좋게 여리고 성에 있는 왕에서 들어가 버렸단 말이지요.
자 여러분! 왜 이 두 사람의 정탐꾼이 기생 라합의 집에 몸을 은신했을까요?
아마 좋지 않은 생각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막대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좋지 않은 행동을 할 일은 없겠지요. 그런데 왜 기생의 집에 자기들의 몸을 은신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마 두 가지 이유였을 것입니다. 그곳이 자기들을 숨기기 적당한 장소였을 것입니다. 지금의 어떤 매춘의 동네에도 그런 은신처가 많이 있지 않아요? 또 한가지는 거기서 어떤 많은 정보를 듣기 위해서였을겁니다. 오고가는 정보가 참 많을 것입니다. 거기에 은신했는데 그들의 은신은 보기 좋게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3절에 보면, 한번 읽어볼까요?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라합에게 이 소식을 전합니다.
"그들을 끌어내라. 그냥 들어가 잡으면 되는데 왜 끌어내라고 했을까요? 산채로 잡아야 되니깐 유인하라는 것이겠지요? 그들을 유인해서 바깥으로 데리고 나오면 우리가 그들을 산채롤 잡을 것이다."하고 나름대로 신호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라합이 뭐라고 대답을 하나요?
4절 말씀 보세요.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래요. 그리고 이미 나갔다고 합니다. 하얀 거짓말입니다. 아뭏튼 이렇게 하얀 거짓말로 두 사람을 쫓는 추격대를 따돌리고 두 사람을 자기 지붕에 있는 삼대에다가 숨겨놓습니다.
그런데 왜 이 여성이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 동족이 아니고, 자기 혈육은 더더욱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탄로가 나면 자기 생명을 내놓아야 되는데 이런 위험한 행동을 하느냐하는 사실입니다. 어떤 막대한 물질 때문입니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돈보다 귀한 것은 자기 생명일텐대요. 누구나 생명 귀한 것은 다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비밀이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번 8절부터 읽어 볼까요? 읽습니다.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내가 내 생명을 걸고 살려준다는 것입니다. 너희를 숨겨준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몇 가지 정보가 나오지요?
하나님에 대한 소문이 그 여인의 가슴에 신앙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른 모든 사람은 두려운 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만 이 소문은 유독 특별한 소문으로 영향력을 나타냈단 말이지요. 하나님에 대한 소문이 이 여인에게는 신앙으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입니다.
9절에 보세요. 9절에 보면 이 여인이 "이 땅을 너희에게 주셨다. 이 땅을 바로 너희에게 주셨다."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 가나안 땅을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또 10절에 보면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셨던 모든 능력에 대해서 이 여인이 낱낱히 알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 11절 이하에 보면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다."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정말 복된 마음입니다. 그냥 들렸던 어떤 풍문들이 그녀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로마서 10장 17절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했습니다.
이 여인이 모든 소문을 들었습니다만은 이 여인의 가슴속에는 정말 듣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풍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버리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하나님의 권능을 가슴에 담는 은혜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최소한의 정보, 최소한의 소문이지만, 이 정보와 소문을 통해서 그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싹트고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수한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 너무나 많이 알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어떤 믿음과 고백을 가지고 있나요?
정말 복된 마음은 듣는 마음입니다.
오늘 지금 똑같이 설교를 들어도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이 가슴속에서 그냥 와 닿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시간이 왜 이렇게 안가나?' 제가 첫째, 둘째, 셋째 안하는 이유는 첫째 그러면 벌써부터 자리를 깔기 시작하거든요. 그렇다고 매일 마지막으로, 끝으로 할 수는 없잖아요. 하긴 어떤 목사님은 그러시대요. 첫 번째 두 번째 그러시고는 마지막으로 그 속에 또 첫 번째..............
우리에게 듣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정말 복된 마음은 듣는 마음입니다.
솔로몬이 고백했던 대로 "하나님 제게 듣는 마음을 주십시오."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소문을 들었지만, 라합만이 이 소문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사건들을 확신하고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믿음으로 인해서 생명을 내건 결단과 행동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1절에 보면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평안히 영접했다. 거기 보니깐 믿음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믿음은 막연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그저 평안히 그들을 영접했다는 말이 나오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생명을 내건 것이었습니다.
걸리면 생명은 끝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라합은 자기 생명을 내건 모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에 위험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내건 결단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당신의 믿음은 행동으로 드러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 속에 담겨진 그 믿음은 우리 삶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행동으로 드러날 수 있어야만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 곁에서 그 믿음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13절 말씀부터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보무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17절 말씀 볼까요?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로 서약케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담아 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고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누가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그랬습니다.
생명으로 맹세하는 언약입니다.
라합은 내 생명을 걸고 여러분을 살려줍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당신의 생명을 걸고 우리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맹세하십시오. 생명으로 생명을 건 언약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 사람의 정탐꾼이 무엇을 제안합니까? 우리를 구원해주기 위해서 창으로 매달은 그 붉은 줄을 우리가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창문에다 매어 달아라. 그리하면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살리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해를 당하지 않으리라. 이것을 생명을 걸고 맹세하겠다고 지금 본문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 붉은 줄은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그들의 문설주와 임방에 발랐던 어린양의 피처럼 이것도 라합을 구원하는 독특한 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만 생명을 건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생명의 영향력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생명을 내걸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결단했을 때 그 생명은 가족 전체의 생명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가족을 구원할 때, 내가 이웃을 구원할 때는 적어도 생명을 내거는 영향력이 존재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하니깐 거기에서 그만 안주해버립니다.
'그래! 내가 예수 믿으니깐 언젠가는 되겠지.' 그러나 그들이 생명의 언약을 받기까지는 당신이 생명을 내건 뭔가 결단과 행함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랫토록 예수님을 잘 믿는 자매들이 계신데 제가 그분들에게 물어봅니다.
"왜 남편은 안오세요?" 물론 가끔은 오십니다. 무슨 아이들 재롱잔치 같은거, 또 자기 아이가 무대에 섰을때는 어김없이 오셔서 비디오도 찍고, 흐믓한 표정을 짓고 가시는데 그 다음부터는 또 안오세요. 제가 그렇게 물어보면 "목사님! 우리 남편이 워낙 사람 많은데 못 와서요. 그냥 저만 가라고 하고 집에서 애 봐주고 있어요. 그 정도면 좋잖아요?" 퍽이나 좋겠습니다. 얼마나 이기적인지 모릅니다. 그 생각 속에는 '나만 안 건드리면 된다.'는 아주 이기적인 마음이 조금은 깔려 있다고 봅니다. 나름대로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건져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뭔가 뛰어들 수 있어야 됩니다. 그에게 섬김을 다하고 영향력을 증대시켜서 어떻게든 예수 믿도록 하기 위해서 뭔가 행동해야 한단 말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인내할 수 있어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 더 섬겨야되고 그러기 위해서 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본을 보일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쉬운게 아닙니다.
생명을 내건 헌신과 결단을 통해서만이 그런 결과가 주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인 한명을 통해서 그 가정이 생명을 보장받습니다. 한 사람의 희생과 한 사람이 생명을 건 모험과 결단 때문에 그 집에 들어온 모든 자기의 피붙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생명의 보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합니다.
당신에게 그런 위대한 생명의 영향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