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라
(히 12: 1-13)
언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설정한다.
옛 언약은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규정한다.
이러한 옛 언약 관계를 규정한 것이 모세율법이다.
그래서 모세율법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은 여호와 백성임을 말한다.
율법은 이스라엘과 옛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질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개혁신학(칼빈주의 신학, 장로교 신학)은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율법은 이스라엘이 능히 지킬 수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언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출24:1-11).
이스라엘은 두 번이나 여호와께서 제시한 율법을 지키겠다고 말한다(출24:3,7).
이를 여호와께서 인정하셔서 언약이 체결된다.
모세는 언약의 피를 여호와의 단과(출24:6) 이스라엘 백성에게 뿌려서 언약이 체결된다(출24:6).
이처럼 단과 백성들에게 피를 뿌림은 생명으로 도장을 찍는 일이다.
이처럼 시작된 구약의 하나님 나라는 율법으로 경영된 율법 나라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중에서 누가 중한 율법을 범하면 죽임을 받는다.
그러나 경한 율법을 범하면 속죄제를 드리며 형제에 대한 허물을 범하면 속건제를 드리도록 한다.
중한 범죄는 사형에 처하나 경한 범죄는 벌금 처분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법적인 집행은 율법 아래의 관료들을 통해서 집행된다.
그들은 모세 당시에는 천 부장과 백 부장, 오십 부장과 십 부장이며,
공생애 당시에는 율법의 최고 통치기관인 산헤드린 공회나
하급관료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통해서 집행되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의는 언약에 대한 신실함을 말한다.
옛 언약내용인 율법에 신실하면 이스라엘은 종(머슴)으로서 의롭다.
그러나 우리가 새 언약내용인 그리스도 복음에 신실하면 하나님 아들(자녀)로서 의롭다.
그런데 여호와의 옛 통치질서인 율법 통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일로 온전케 된다.
이는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심이 믿는 자의 아버지가 되심으로 온전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 의이다(롬3:21).
온전한 그리스도의 믿음이 나타남
하나님 구원역사는 언약 갱신의 역사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따라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구원역사를 믿음이 오기 전과 온 후로 구분한다(갈3:23-29).
믿음이 오기 전은 여호와께서 옛 백성과 동행하던 시기이다.
이는 죄 아래에서 시행된 모세율법을 따라 이스라엘과 함께하던 때이다.
따라서 옛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지 못하였다.
이는 구약의 믿음은 참되고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히11:34).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신다(갈4:4).
예수께서는 영원 전부터 아버지를 알고 신뢰하는 믿음으로,
아버지께 대한 흔들림이 없는 믿음으로,
십자가 죽음을 향하여 한 걸음씩 나아가신다.
아버지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다.
죄가 요구하는 죽음의 자리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되고 온전한 믿음이 최초로 나타난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 아래에 매인바 되었으며(갈3:23-24),
그때는 몽학 선생 아래에 있던 종이었으나(갈3:24),
믿음이 온 후에는 하나님 아들(자녀)로서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갈3:25-29).
이에 대하여 로마서도
“이제는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고 말한다(롬3:21-22).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하고 참된 아들의 믿음에 참여하여 하나님 아들(자녀)로 세워졌다.
하나님 아들(자녀)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의 결과이다(롬3:21).
하나님의 의는 언약에 대한 신실함을 말한다.
언약 당사자의 의로움은 언약에 신실함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언약에 신실하셔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시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으면,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이 언약 당사자로서 의무를 신실하게 이행하면,
언약내용인 모세율법을 따라 여호와의 백성으로 행하면,
그들은 의로운 백성이다.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율법을 수정하고 교정한 내용이 복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모세가 똑똑하고 완전해지더라도 예수가 될 수 없듯이,
아무리 온전하게 수정하고 교정하더라도 율법은 복음이 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율법은 죄 아래에서 시행된 여호와의 뜻이며 통치질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교정하고 수정한다고 한들 율법은 죄를 없이 하지 못하며(히10:4, 11),
그 아래에 있는 자를 온전케 하지 못한다(히7:16-19, 10:1).
이는 율법 자체가 죄 아래에서 시행된 여호와의 뜻과 통치질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신 것이다(갈4:4).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백성을 속량하여 아들로 세우기 위함이다(갈4:5).
그래서 예수께서는 갈릴리 사람들을 부르셔서 제자로 세우신다(마4:18-22).
율법으로는 흠이 없던 사울을 속량하셔서 바울로 세우신다(빌3:5-11).
만일 공생애 당시에 모세나 사무엘,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있었다면,
그들이 예전의 방식처럼 모세율법을 붙잡고 여호와를 섬겼다면,
제사장이나 서기관, 바리새인처럼 조상 때부터 행한 율법을 고집하고 예수를 거절한다면,
그들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로부터 영원한 정죄를 받았을 것이다(마23:1-39).
믿음을 온전케 하신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는 믿는 성도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이전의 허다한 증인들처럼 믿음의 경주하라는 것이다.
믿음의 선진은 그들의 중보자를 믿음으로 여호와를 섬긴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고난과 핍박이 주어지더라도 신앙의 경주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종말의 경주는 이전의 선진들 경주와는 다르다.
이전 선진들 경주는 그들 중보자를 믿음으로 한 신앙의 경주이었으나,
종말에서의 신앙의 경주는 아들 중보자를 믿음으로 하는 신앙의 경주이다.
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신앙의 경주이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우리의 중보자 예수를 믿음으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 가운데서 신앙의 경주하라고 권면한다(히12:1).
여기의 모든 무거운 것들과 얽매이기 쉬운 죄는 율법 아래의 삶을 의미한다.
율법은 죄 아래에서 시행된 여호와의 뜻과 통치질서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율법에 부착한 삶은 의롭고 경건한 삶이다.
율법은 옛 세상을 밝히는 유일한 여호와 계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보면 율법의 빛은 어둠이고 죄이다.
율법은 악하고 천한 이 세상의 초등학문이다(갈4:8-11).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형제들에게 율법이 명하는 할례나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자키지 말라고 말한다(갈4:10).
예수께서도 유대인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초대하신다(마11:28-30).
여기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율법의 짐이다.
이는 율법 아래에서 예수 자신에게 나아오라는 초대이다.
이처럼 히브리서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 가운데서 신앙의 경주하라고 권면한다.
이는 이전 선진의 믿음과는 다른 참되고 온전한 믿음의 창시자,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기게 하는 참되고 온전한 믿음의 시작자,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신앙의 경주하라는 것이다(히12: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긴다.
이것이 종말에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롬3:22).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기게 한다.
이 믿음은 옛 선진이 아니라 우리에게 허락된 믿음이다.
이처럼 종말에 나타난 믿음에 대하여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고 말한다(롬3:21-22).
이처럼 옛 선진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
옛 신진들은 믿음으로 휘장으로 가리신 여호와와 동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기는 믿음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는 참되고 온전한 믿음이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들은 믿음으로 증거를 받고 누렸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
그들이 받지 못한 약속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기는 일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앎이 영생이다.
이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가운데 이루어졌다.
따라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말한다(히12:39-12:2).
이처럼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으로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활하셔서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히12:2).
그 결과 선진들 믿음의 행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온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옛 선진의 믿음을 온전케 하신 믿음의 주이시며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다(히12:2).
하나님 징계는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다.
예수께서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히12:2).
따라서 우리는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히12:3).
왜 우리에게 고난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징계하기 때문이다(히12:7-8).
여기의 징계는 죄로 인한 징계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미움과 핍박을 말한다.
세상이 미움과 핍박을 함은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 아들이기 때문이다(요15:18-19).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핍박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이 주는 고난과 핍박은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를 받지 않도록 한다(히12:10).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받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고 말한다(요15:18-19).
이처럼 징계는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징계와 미움을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허용하신다(히12:10).
이는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참여케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을지라도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악을 행하는 자의 결과는 심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을 행하여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참여케 한다.
이러한 고난은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히12:12),
곧은 길을 만들어서 우리의 다리가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한다(히12:13).
하늘에 속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