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마가복음 11:1-11)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에 대통령이 없는 상태라 청와대에 입성하려는 사람들이 총칼없는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청와대에 깃발을 꽂을지... 후보들은 일생에 가장 치열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승리하면 제왕과 같은 대통령이 되고 패배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옛날에 터키를 중심한 사라센 제국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수백년간 중동 이슬람 제국을 지배해 왔습니다. 강력한 제국이었죠. 서양세계를 지배하기도 했습니다. 투르크 제국은 서양의 기독교 세력과 막상막하의 강력한 제국이었습니다. 투르크 제국이 어떻게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었을까? 학자들이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강력한 왕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현재의 왕이 죽으면 왕자들은 각자의 성에서 다른 왕자와 전쟁을 합니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왕자가 왕이 되는데, 그 나머지 왕자는 모두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은 새로운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서 승리한 왕자만이 왕의 도성에 승리의 입성을 했습니다. 그 왕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철권 통치를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잔혹해 보이지만 이로써 강력한 제국을 유지했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 주일은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이 다윗왕의 도성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입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진정한 왕이십니다. 모든 왕들의 왕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연도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외국 갔다오면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흔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왕을 환영할 때 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종려주일은 우리 예수님이 왕으로 환영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 종려 주일에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큰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 일에서 우리가 새겨야 할 말씀은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귀를 끌어오라 하셨습니다. (1-3절)
예수님이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 두 제자를 마을로 보내시며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 하셨습니다. 주인이 뭐라 하면 주가 쓰시겠다고 해라 그러면 줄 것이라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 5-6절에 보면 나귀 주인이 나귀는 무엇 하려느냐? 묻고 제자들이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자 나귀 주인이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위대한 사역에 나의 조그만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협력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위대한 사역,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일에 나의 조그만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기꺼이 협조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감람산 기슭에 있는 나귀를 ‘오라’ 하시면 나귀가 스스로 오지 않겠습니까? 온 세상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욥기38:41) 짐승이나 새나 오라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는 것입니다.
경남 통영에 안정면이라는 곳에 안정중앙교회가 있습니다. 오래전에 그곳에 이집사님이라는 어부가 있었습니다. 교회를 건축하려는데 돈이 있어야죠? 작정헌금 250만원 해놓고...그 당시 1970년에 제가 그때 서울 살았는데 집 한 채 150만원 했습니다. 그 집사님이 엄청 많은 헌금을 약정하고... 어느 날 새벽 기도하고 나가니 고기 잡을 어장이 없어서 집 근처 얕은 바다에 낚시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엄청 큰 도미가 하나, 둘, 셋, 줄줄이 잡혔던 겁니다. 한 마리에 몇만원씩 하는 도미였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도미는 남태평양에 사는 도미라고 합니다. 충무 앞바다에서는 잡혀본 적이 없는 도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좋은 것은 일본사람들이 다 먹습니다. 그 도미 일본에 수출.. 여하튼 250만원 어치 도미를 잡고 다시 도미를 잡지 못했습니다. 이게 우연인 것 같습니까? 주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그 구원사역에 나귀가진 사람의 협조를 구했습니다. 그 나귀 주인은 주님의 일에 협력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때때로 큰 것을 요구하시기도 하지만 사소한 것, 지극히 작은 것을 부탁하시기도 합니다. ‘네 나귀 한번 빌려다오.’ 사소한 것입니다. 생명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집을 팔아 가져오라는 것도 아닙니다. 나귀를 아예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 종려 주일에 예루살렘으로 가신던 우리의 왕이, 그 주님이 오늘 이 자리에 오시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실까요? 주님의 부탁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응답하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을 많은 사람이 환영했습니다.
사람들이 손에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흔들며 노래했습니다.(요12:13)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고 찬송했습니다. 호산나는 주여 구원하소서 라는 말입니다. 연도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기다리던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들의 왕으로 환영했던 것입니다.
눅19:39에 보면 당시 바리새인들이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면선 못마땅해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왕인 줄을 모릅니다. 메시야 인줄을 모릅니다. 그러니 찬양하지도 않고 환영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싫어합니다. 책망합니다. 바리새인의 항의에 대하여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을 알아야 주님을 높이고 섬기고 경배하고 찬양합니다. 누가 주님을 제대로 알아봅니까? 누가 주님을 알 수 있습니까? 누가복음 10:21에 보면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했습니다. 어린아이 그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주님이 누구인지 알아봅니다. 그 사람만이 주님을 찬양하며 환영합니다.
이 종려 주일과 함께 주님을 알아보는 영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엘리사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도단이라는 성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아람 군대는 밤중에 몰래 도단 성을 포위했습니다. 도단 성에서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군사들로 겹겹이 포위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엘리사의 시종 게하시가 일어나 보니, 아람 군대와 병거들이 도단 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놀란 게하시가 엘리사에게 뛰어 가서 “우리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하고 소리쳤습니다. 상황을 보고 받은 엘리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그러자 하나님께서 게하시의 눈을 열어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게하시의 영안이 열리니 하늘 군대가 아람군대를 포위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우리도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환호하는 무리와 함께 우리도 종려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셋째,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자유의 행진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길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것이 자유를 위한 행진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 죽음의 노예로 사는 사람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위한 행진입니다.
그리고 자유를 위한 행진에는 가혹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1968년 4월 4일은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39살의 나이로 암살당한 날입니다. 4년전 1964년에 킹 목사는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나이 35세였습니다.
1963년 8월 27일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워싱턴 대 광장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나는 오늘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I have a dream today) 라는 그 연설은
‘.... 우리 흑인들 앞에 첩첩이 곤경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꿈을 버리지 맙시다. 언젠가는 미시시피주 까지도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피부의 색깔로서가 아니라 인격의 내용으로 평가받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 앨라바마주 에서도 흑인과 백인의 아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놀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 다함께 기도하고 함께 자유의 종을 울립시다.’
그리고 25만명의 흑인들이 자유를 위한 행진을 했습니다. 이 행진은 미국의 역사에서 인권에 대한 한 획을 그은 사건입니다. 그 행진 후에도 흑인에 대한 차별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6년 후,1969년 4월 4일, 킹 목사가 암살당했을 때, 수많은 흑인에 대한 차별법이 폐지되었습니다. 흑인에게 제2의 노예해방이 일어났습니다.
킹 목사의 이 자유의 행진은 바로 2000년전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행진에서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그 길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죄와 악의 노예, 죽음의 노예가 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단지 영혼만의 자유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고난과 슬픔을 당하고 질병과 가난으로부터 사람을 사람답게 하기 위한 행진이었습니다. 킹 목사는 미국의 흑인에게 조그마한 선물을 주었지만, 예수님은 온 인류, 온 세상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라는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나나 무스쿠리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그리스 사람입니다. 그가 부른 '자유를 위한 노래'(song for liverty)
라는 것이 있습니다.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서 노예들의 합창곡에 가사를 붙인 입니다.
When you sing, I'm singing with you liberty
당신이 노래할 때, 나도 함께 자유를 노래하고
When you cry, I cry with you in sorrow
당신이 울 땐, 나도 함께 슬피 울어요.
When you suffer I'm praying for you liberty
당신이 괴로워할 때, 난 당신에게 자유를 기도해요.
For your struggles will bring us a new tomorrow
당신의 고통은 우리에게 새로운 내일을 가져다 줄 거니까요.
Days of sad darkness and fear must one day crumble
어둠과 공포의 슬픈 날들도 언젠가는 무너져 버릴거예요.
For the force of your kindness and love make them tremble
당신의 친절과 사랑이 그런 것들을 모두 쫓아버릴 거니까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던 그 길은 자유를 위한 행진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영원한 행복과 자유를 주시려는 자유를 위한 행진이었습니다.
나귀 주인처럼 주님이 쓰시겠다면 기꺼이 제공하는 사람, 어린아이처럼 왕이신 주님을 알고 찬양하는
사람, 좌와 죽음의 노예인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신 그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