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나이 칠십이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 從, 隨也. 矩, 法度之器, 所以爲方者也. 隨其心之所欲, 而自不過於法度, 安而行之, 不勉而中也. 從은 따른다는 것이다. 矩는 법도가 되는 기물인데, 네모를 만드는 도구다. 자기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스스로 법도에 지나치지 않아서, 그것을 편안해하면서 행하므로, 힘쓰지 않아도 중도에 들어맞는 것이다.
朱子曰 聖人表裏精粗無不昭徹 其體雖是人 其實只是一團天理 所謂從心所欲不踰矩 左來右去 盡是天理 如何不快活 주자가 말하길, “성인께서는 겉과 속, 그리고 정밀함과 거칢에 환하게 통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 몸은 비록 사람이지만, 그 실질은 단지 한 덩어리의 天理일 따름이다. 이른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르더라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은, 좌우로 오고 가도 모든 것이 전부 天理라는 것이니, 어찌 쾌활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 程子曰: “孔子生而知之也, 言亦由學而至, 所以勉進後人也. 立, 能自立於斯道也. 不惑, 則無所疑矣. 知天命, 窮理盡性也. 耳順, 所聞皆通也. 從心所欲, 不踰矩, 則不勉而中矣.” 정자가 말했다. 공자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었으나, 또한 배움으로 말미암아 지극하게 되었다고 말한 것은, 후세 사람들을 권면하여 나아가게 하려 했기 때문이다. 立이란 이 도에 스스로 설 수 있다는 것이다. 不惑이란 의심하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知天命은 이치를 궁리하고 천성을 극진히 하는 것이다. 耳順은 듣는 말마다 모두 통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에 따르더라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면 애쓰지 않아도 중도에 맞게 되는 것이다.
又曰: “孔子自言其進德之序如此者, 聖人未必然, 但爲學者立法, 使之盈科而後進, 成章而後達耳.” 또 말했다. 공자께서 자신이 덕을 증진한 차례가 이와 같다고 스스로 말한 것은, 성인이 반드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을 위하여 법을 세운 것으로서, 그로 하여금 차근차근 배운 후에 앞으로 나가도록 하고 문장을 이룬 후에 통달하게 하려는 것일 따름이었다.
朱子曰 立 是物格知至而意誠心正之效 不止是用功處 不惑知天命 是意誠心正而所知日進不已之驗 至耳順 則所知又至極而精熟 聖人亦大約將平生爲學進德處 分許多段說 十五志學 此學自是徹始徹終 到四十不惑已自有耳順從心所欲不踰矩意思 但久而益熟爾 年止七十 若更加數十歲 也只是這箇路 不是至七十歲便畵住了 주자가 말하길, “선다(立)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앎이 지극해지고 뜻이 정성스럽고 마음이 바르게 된 효과이니, 단지 힘을 써야 할 곳에 그치지 않는다. 不惑과 知天命은 뜻이 정성스럽고 마음이 바르되 아는 바가 날로 증진됨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의 징험이다. 耳順에 이르면, 아는 바가 또한 지극하면서도 정밀하고 원숙해지는 것이다. 성인께서는 역시 크게 요약하여, 평생 학문을 하고 덕을 증진시키는 부분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서 말씀하셨으니, 나이 15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고 한 것, 이것은 배움을 이때부터 시종일관 행한다는 것이고, 나이 40의 불혹에 이르면 이미 저절로 耳順과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게 된다. 다만 시간이 오래 되면, 더욱더 원숙해질 따름이다. 나이 70까지 말하는 것에 그쳤지만, 만약 수십 세를 더한다고 할지라도, 그저 이 길일뿐이라는 것이지, 나이 70에 이르면 곧바로 선을 긋고 멈춘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胡氏曰: “聖人之敎亦多術, 然其要使人不失其本心而已. 欲得此心者, 惟志乎聖人所示之學, 循其序而進焉. 至於一疵不存, 萬理明盡之後, 則其日用之間, 本心瑩然, 隨所意欲, 莫非至理. 蓋心卽體, 欲卽用, 體卽道, 用卽義, 聲爲律而身爲度矣.” 호씨가 말하길, “성인의 가르침에는 역시 수법이 다양하지만, 그러나 그 요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본심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일 따름이다. 이 마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오직 성인이 보여주신 학문에 뜻을 두고, 그 차례를 따라서 나아가되, 하나의 흠결도 없고 만 가지 이치가 지극히 밝은 경지에 이른 후가 된다면, 곧 그것을 날로 쓰는 사이에 본심이 매우 밝아져서,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르더라도 지극한 이치가 아님이 하나도 없게 된다. 대개 마음은 곧 몸이요, 욕망은 곧 용이며, 몸은 곧 도요, 용은 곧 의이니, 내는 소리마다 음율이 되고, 몸은 곧 법도 자체가 되기 때문인 것 같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道言渾淪之體 義言隨事適意之用 신안진씨가 말하길, “道는 渾淪(理와 氣가 하나로 섞여 있음)한 體를 말하고, 義는 일에 따라 뜻에 적합한 用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史記夏記 禹爲人 敏給克勤 其德不違 其仁可親 其言可信 聲爲律身爲度 사기의 하기에 따르면, 禹임금의 사람됨은 민첩하기가 넉넉하고 능히 부지런하며, 그 덕은 이치에 어긋남이 없고, 그 인은 다가갈 만하며, 그 말은 믿을 만하고, 음성은 음률이 되고 몸은 법도가 되었다고 하였다.
朱子曰 胡氏不失其本心一段極好 儘用子細玩味 聖人千言萬語 只是要人收拾得箇本心 日用之間 著力屛去私欲 扶持此心出來 理是心所當知 事是心所當爲 不要埋沒了他 如修齊治平 皆要此心爲之 此心皆自有許多道理 不待逐旋安排入來 聖人立許多節目 只要人剔刮 將自家心裏許多道理出來而已 주자가 말하길, “호씨의 ‘그 본심을 잃지 않는다.’는 한 단락은 대단히 좋으니, 자세하게 음미하기를 다 써야 한다. 성인의 천 마디 만 마디 말은 그저 사람들이 제 본심을 수습하기를 바라는 것일 따름이다. 일상생활을 하는 사이에 힘을 써서 사욕을 막아서 제거하고, 이 본래의 마음을 붙잡아서 나오게 한다면, 理는 마음이 마땅히 알아야 할 바가 되고, 일은 마음이 마땅히 해야 할 바가 될 것이니, 그것에 매몰되어서는 아니 된다. 예컨대 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모두 이 마음으로 그것을 행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 마음은 모두 저절로 많은 도리를 갖고 있는 것이지, 쫓아다니면서 안배하여 들어오게 함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성인께서 수많은 節目을 세우신 것은 단지 사람들이 사욕을 제거하여 장차 자기의 마음속에서 수많은 도리가 나오기를 바라신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聲卽天地中和之聲 自然可以爲律 身卽天地正大之體 自然可以爲度 以此形容不踰矩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소리는 곧 천지의 중도에 맞고 조화로운 소리이니, 자연히 음률이 될 수 있고, 몸은 곧 천지의 正大한 體이니, 자연히 법도가 될 수 있다. 이로써 법도를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형용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又曰: “聖人言此, 一以示學者當優游宿泳, 不可躐等而進; 二以示學者當日就月將, 不可半途而廢也.” 또 말했다. 성인께서 이것을 말씀하신 것은, 첫째 배우는 사람에게 마땅히 충분히 침잠하고 음미해야지 등급을 건너뛰어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고, 둘째 배우는 사람이 마땅히 일취월장(날로 나아가고 달로 자라나다)해야지 중도에서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慶源輔氏曰 亟者 則躐等而進 怠者 則半途而止 亟心亡 則能優遊涵泳 逐級而進 怠心亡 則能日就月將 不極不止 聖人示學者實兼此二意 경원보씨가 말하길, “빠른 사람은 등급을 뛰어넘어 나아가고, 게으른 자는 중도에서 그만둔다. 빠르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여유롭게 노닐며 푹 젖게 하면서 등급을 쫓아서 나아갈 수 있고, 게으른 마음이 없다면, 능히 일취월장하여 지극함에 이르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는다. 성인께서 배우는 자에게 보여준 것은 실로 이 두 가지 뜻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愚謂聖人生知安行, 固無積累之漸, 然其心未嘗自謂已至此也. 是其日用之間, 必有獨覺其進而人不及知者. 故因其近似以自名, 欲學者以是爲則而自勉, 非心實自聖而姑爲是退託也. 後凡言謙辭之屬, 意皆放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성인은 나면서부터 알아 편안하게 행하였으므로, 본래부터 차근차근 쌓아나가는 점진적인 것이 없었지만, 그러나 자신의 마음속으로 이미 이런 경지에 이르렀다고 스스로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자신의 나아감을 홀로 깨달았지만, 타인은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근사한 것이라는 이유로 스스로 이름을 지음으로써, 배우는 사람이 이를 법칙으로 삼아 스스로 열심히 하기를 바랐던 것이지, 마음에 실제로 성인으로 자처하면서도 잠시 이를 위하여 겸손한 것은 아니었다. 뒤에 말한 모든 겸사 등등도 그 뜻은 모두 이와 같다.
新安陳氏曰 苟自謂吾學已到 則便不是聖人 신안진씨가 말하길, “만약 스스로 내 학문이 이미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한다면, 곧 즉시 성인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自名: 新安陳氏曰 自爲立與不惑等名 신안진씨가 말하길, “스스로 입과 불혹 등의 이름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問此章如何分知行 朱子曰 志學亦是要行而以知爲重 立是本於知而以行爲重 志學言知之始 不惑知命耳順 言知之至 立言行之始 從心不踰矩 言行之至 누군가 묻기를, “이 장에서는 知와 行을 어떻게 구분합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배움에 뜻을 두는 것은 역시 행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앎를 중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고, 선다는 것은 앎에 근본을 두지만 행함을 중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배움에 뜻을 두는 것은 知의 시작이라 말하고, 불혹, 지천명, 이순은 앎의 지극함이라 말한다. 선다는 것은 행함의 시작이라 말하고, 마음을 따라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은 行의 지극함이라 말한다.”라고 하였다. 十五志學是一面學一面力行 至三十而立 行之效也 志學與不惑知天命耳順一類 是說知底意思 立與從心所欲一類 是說到底地位 나이 15에 배움에 뜻을 두는 것은 한편으로 배우고 한편으로 힘써 행한다는 것이다. 나이 30에 이르러 서는 것은 행한 것의 공효다. 지학은 不惑, 知天命, 耳順과 더불어 같은 부류이니, 안다는(知) 의미를 말한 것이다. 서는 것은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른다는 것과 더불어 같은 부류이니, 도달한 경지를 말한 것이다.
聖人也略有箇規模與人同 如志學也 是衆人志學時 及其立與不惑也 有箇迹相似 若必指定謂聖人必恁地 固不得 若說聖人全無事乎學 只空說也不得 但聖人自有聖人底事 성인께서도 대략 규모가 있는 것은 남들과 더불어 같다. 예컨대 배움에 뜻을 두는 것도 뭇사람이 배움에 뜻을 두는 때인 것이다. 그 서는 것과 불혹에 미쳐서도, 서로 비슷한 자취가 있다. 그러나 만약 반드시 지정하여 성인께서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본래부터 안 되는 것이고, 만약 성인께서 전혀 배움에 일삼음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저 헛된 말이니 역시 안 되는 것이다. 다만 성인께서는 저절로 성인의 일이 있을 따름이다.
志字最要緊 直須結裹在從心不踰矩上 然又須循乎聖人爲學之序方可 志라는 글자는 제일 긴요한 것이니, 곧장 반드시 ‘마음을 따라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 위에서 끝내야 한다. 그러나 또한 반드시 성인께서 학문을 하는 순서를 따라야만 비로소 옳은 것이다.
問自志學而立至從心所欲 自致知誠意至治國平天下 二者次第等級 各不同 何也 曰 論語所云 乃進學之次第 大學所云 乃論學之規模 누군가 묻기를, “배움에 뜻을 두어서 서는 것에서부터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앎을 지극히 하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에서부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이 두 가지는 그 순서와 등급이 각자 같지 아니한데,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논어에서 말하는 것은 곧 배움에 나아가는 순서인 것이고, 대학에서 말하는 것은 곧 배움의 규모를 논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勉齋黃氏曰 十年而後一進者 亦聖人之心至此而自信耳 學雖已至而未敢自信 必反覆參驗 見其必然而無疑 然後有以自信 此尤足以見聖人之所以爲聖人也 苟惟謂聖人謙辭以勉人 則皆架空之虛辭耳 故集註雖以勉人爲辭 而終以獨覺其進爲說 면재황씨가 말하길, “10년 이후에 한 번씩 나아갔던 것은 역시 성인의 마음이 이에 이르러서야 스스로를 믿었던 것일 뿐이다. 배움은 비록 이미 그 수준에이르렀지만, 감히 자신하지 못하고서 반드시 반복하여 참고하고 징험하여, 그것이 반드시 그러함을 보고서 의심이 없어진 연후에 자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성인께서 성인이 되신 까닭을 더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성인께서 단지 겸손한 말을 함으로써 사람들을 권면하신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모두 가공의 허황된 말일 뿐이다. 그러므로 집주에서는 비록 사람들을 권면하였다는 것을 말하였으면서도, 끝에 홀로 자신이 진전되었음을 깨달았다는 점도 말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矩字尤爲此章之要 致知是要知此矩 力行是要踐此矩 立是守得此矩定 不惑是見得此矩明 知天命又識得此矩之所自來 耳順是見得此矩十分透徹 從心不踰是行得此矩十分純熟 矩者 何 此心之天則 是也 規矩皆法度之器 規圓 善於旋轉而無界限之可守 矩方 則有廉隅界限截然一定而不易 智欲其圓 行欲其方 故以矩言之 矩卽義以方外 是也 胡氏謂體卽道 用卽義 義字正爲矩字而發 쌍봉요씨가 말하길, “矩자는 더욱더 이 장의 핵심이 된다. 致知는 이 矩를 알고자 하는 것이고, 力行은 이 矩를 실천하고자 함이며, 立은 이 矩를 굳건히 지킬 수 있는 것이고, 不惑은 이 矩를 밝게 알아보는 것이며, 知天命은 또 이 矩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고, 耳順은 이 矩를 대단히 투철하게 알아보는 것이며, 從心不踰는 이 矩를 대단히 순수하고 원숙하게 행할 수 있는 것이다. 矩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마음의 天則(천연의 법칙)이니, 바로 이런 것이다. 規矩(컴퍼스와 曲尺)는 모두 法度가 되는 기물이니, 컴퍼스로 원을 그림에 있어, 빙 돌아가는 것에 능하여서 지켜야 할 한계가 없고, 곡척으로 네모를 그림에 있어서는, 廉隅(곧은 모서리, 방정한 품행과 견고한 절조)와 한계가 확연하게 있으니, 한번 정해지면 바뀌지 않는다. 지혜는 그 원만함을 바라고, 행실은 그 네모반듯함을 바라니, 이 때문에 矩(曲尺)로써 말하는 것이다. 주역에 이르길, 矩는 곧 義로써 밖을 방정하게 한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것이다. 호씨가 體는 곧 道이고, 用은 곧 義라고 말하였는데, 義자는 바로 矩자 덕분에 발현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自堯舜以至夫子 聖聖相傳 只到七十時 其心猶未敢自謂是聖人 若心實自聖而姑爲是退託 豈聖人之心哉 要之 志學者 此心所向之力 立者 此心所守之定 不惑者 此心所見之明 知天明者 心與理融而洞其所以然 耳順者 理與心會 其順也 自然而然 不踰矩者 此心此理渾乎爲一而有莫測其然者矣 十年一進 聖人之心 聖人自知之故 卽其近似以語學者 欲學者皆心夫聖人之心也 忘者不用其心 如何到聖處 助者 亟用其心 亦如何便到聖處 운봉호씨가 말하길, “요순으로부터 공자에 이르기까지, 성인들께서 서로 전해주었으나, 그저 나이 70에 이르렀을 때에도, 여전히 그 마음으로 감히 스스로 성인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마음이 실제로 성인으로 자처하면서도 잠시 이를 위하여 겸손해한 것이라면, 이 어찌 성인의 마음이겠는가? 요컨대, 배움에 뜻을 둔다는 것은 마음이 향하는 바가 강력하다는 것이고, 선다는 것, 이것은 마음이 지키는 바가 안정되었다는 것이며, 불혹이라는 것은 마음이 보는 바가 밝다는 것이며, 지천명이라는 것은 마음과 이치가 융합되어 그것이 그러한 까닭을 훤히 아는 것이고, 이순이라는 것은 이치와 마음이 합해져서 그 순응함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는 것이며, 법도를 넘어서지 않는 것은 이 마음과 이 이치가 섞여서 하나가 되지만, 그것이 그러함을 누구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다. 10년에 한 번씩 나아간다는 것은 성인의 마음을 성인 스스로 아시는 까닭이다. 그 근사한 것으로써 배우는 자에게 말한 것에 나아가서는, 배우는 자가 모두 저 성인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기를 바라신 것이다. 잊어버린 사람은 그 마음을 쓰지 않으니, 어찌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것인가? 拔苗助長을 하는 자는 그 마음을 너무 자주 사용하려 하니, 역시 어찌 곧바로 성인의 경지에 이를 것인가?”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聖人所志之學 大學也 大學之道知行爲要 此章分知之始知之至 行之始行之至 夫子一條盡之矣 聖學自志學而始 至從心不踰矩而終 始終惟一心學也 心之所之 謂之志 念念在道 大本立矣 心之所願 謂之欲 從容中道 大用行焉 其中節次 自志學而以序進 自有欲罷不能者 常人肆其心之所欲 皆私欲耳 烏知其所謂矩 賢人制其心之所欲 始能勉强而不出於矩 聖人之心 渾然天理 無一毫私欲之累 隨其心之所欲 皆天理 大用之流行 自從容而不踰於矩 學者苟能卓然立志以志乎聖人所志之學 循其序而知行並進焉 學與年俱長 德與年俱進 豈不能漸造於純熟之境 而於希聖其庶幾乎 신안진씨가 말하길, “성인께서 뜻을 둔 학문은 대학이었다. 대학지도는 앎과 행함을 요체로 삼았는데, 이 장에서는 앎의 시작과 앎의 지극함, 행함의 시작과 행함의 지극함을 구분하였으니, 공자께서는 한 줄기로 그것을 다한 것이다. 성인의 학문은 학문에 뜻을 둠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음을 따라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음에 이르러 끝나니, 시종일관 오직 마음의 학문인 것이다. 마음이 가는 곳을 일컬어 뜻을 둠을 말하니, 생각하는 것이 모두 마음에 있다면, 큰 근본이 선 것이다. 마음이 원하는 바를 일컬어 欲이라고 말하니, 조용하게 도에 들어맞으면, 큰 쓰임이 행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절도와 차례에 들어맞으려면, 志學에서부터 순서대로 나아가야 하니, 저절로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있게 될 것이다. 보통사람은 제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대로 방자하게 한다면, 모두 사욕일 뿐이니, 어찌 저 이른바 법도라는 것을 알겠는가? 현인은 제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통제하니, 비로소 억지로라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의 마음은 천리와 혼연일체이니, 터럭 하나만큼이라도 사욕으로 인해 연루됨이 없고, 그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르더라도 모두 다 천리다. 큰 쓰임이 흘러 행해지면, 저절로 조용하면서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는다. 배우는 자가 만약 우뚝 뜻을 세우고, 성인께서 뜻을 두신 학문에 뜻을 두고서, 그 순서에 따라 앎과 행함을 나란히 증진할 수 있다면, 학문과 나이가 함께 자라나고, 덕과 나이가 함께 나아갈 것이니, 어찌 점차 순수하고 원숙한 경지에 나아감으로써 성인의 경지까지 바라는 것이 거의 다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