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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차달(柳車達) 대승공의 왕건(王建) 지원배경
하정공파 광주종친회장 夏谷 류재균
1. 서론
영암군 신북면 모산 문화류씨 집성촌에서 동네 어른들과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구전으로 들어온 선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문헌근거로 확인하기 위해 왕조실록을 확인하고 자료 수집과 정리과정에서 습득한 사료 중에 문화류씨 시조 류차달 대승공(이하 선조 존칭 생략함)과 왕건 부분을 소개합니다.
조부와 부의 선조 위선정신을 계승 발전하는 방법이 문화류씨 구전 자료를 문헌상에서 확인하여 널리 알리는 길이기에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문화류씨 시조 류차달 대승공 탐구를 위해 수년 동안 고서와 신간 판매 서점과 도서관, 해당종중 족보 확인 차 관련종중을 방문하고 비문을 확인하고 남도지방 역사학회 학술발표에 참여하고 학술지를 정리한 자료입니다.
류차달이 왕건에게 수레와 군량미를 제공해서 고려 개국 2등공신이 되셨는데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군웅활거 시대에 왕이 아니고 궁예 장수에게 많은 재물을 조건 없이 제공 했는지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 가는 과정입니다.
2. 류차달 대승공 아버지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박은봉저, 책과함께출판사, 2007)에 의하면 왕건은 원래부터 성씨가 없었던 집안으로 할아버지는 작제건 아버지는 용건인데 도선국사가 용건에게 천지 대운수를 얻으려면 아들 이름을 왕건으로 하라는 말을 듣고 성씨를 왕씨로 바꾸었으니 왕건家 성씨가 작씨→용씨→왕씨(王家 : 개성왕씨)로 바꾸어집니다(작제건 용건 왕건은 고려사에 등재된 이름입니다)
아자개 아들이 견훤으로 성씨가 아씨→견씨로 바꾸어지고 백옥삼→배현경(경주배씨 시조) 김행→권행(안동권씨 시조) 삼능산→신숭겸(평산신씨 시조) 지중익→어중익(충주어씨 시조) 등 왕족이나 호족들의 성씨가 당대에 바꾸어지는 경우가 후삼국시대 사회상입니다.
신라왕자→승려→양길부하에서 한때 전국 2/3를 지배했던 궁예아들 청광의 아들(궁예손자) 김경은 순천김씨 시조가 되고 차남 신광의 아들 김경의 증손이 광산이씨 시조 이종금입니다.
특별하게 토반 전주류씨 류방헌 묘지명에 의하면 류기후(신라각간, 증조)→류법반(후백제 우장군, 조부)→류윤겸(대감, 부)으로 이어지는 성씨도 있으나 선조 이름이 4대를 넘지 못하던 시대에 류차달 아버지는 류씨인지 다른 성씨인지 알 수 없으나 유주 호족으로 해상무역상입니다.
신라 말 정치적 혼란기에 지방 세력가들 중에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해상 세력가들이 조선술의 발달로 대외 무역이 번성하고 국가의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나 민간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정주 류천궁은 왕건이 나주로 출전할 때 군함을 수리하고 군량을 마련하는 막대한 경제적 부담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주포구를 중심으로 서해안 무역에 종사했기 때문입니다(정청주, 신라 말 고려 초 호족연구, 일조각, 1996년)
왕건 29명 부인중에서 황후로 봉해진 분은 6명이고 나머지 23명은 부인이었고 왕건 생존 시 황후로 봉해진 분은 류천궁 딸 신혜황후 뿐이고 5명은 사후에 그 소생들이 임금이 되었기에 추존되었으나 둘째황후 장화왕후 오씨(이도학,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 김영사, 2000)를 903년 이후에 나주에서 만났기에 류천궁 딸은 나주출전 이전에 혼인하고 903년 지원할때 흥률사에서 수백년(수십 년)전부터 형제처럼 지낸 류차달에게 지원을 요청합니다.
고려사에서 이제현이 "강보육은 태조의 외증조부가 되는데 추존하는것은 잘못된 것이며 의조 세조 태조 모두 끝자가 건자로 끝나니 예가 아닌데 당시 삼대가 같은 이름을 가지면 삼한의 왕이 된다는 말이 있었다는 것은 후대에 지어낸 말에 불과하다"라 비판합니다.
왕건 가문은 강호경→강충→강보육→강보육 딸 진의(증조모)+당 선종→작제건→용건→왕건으로 이어졌고(고려사 세계, 정인지편찬) 궁예의 강씨황후 가문은 강호경→강충→강보전→강순산→강만루→강연창→강씨황후로 이어집니다(신천강씨대종회).
송악 왕씨와 신천강씨는 피를 나눈 사이고 패서지역 호족으로 강력한 유대관계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씨가 자주 바꾸어진 후삼국시대 류차달 선조가 약4800년전 중국 황제로 시작하여 하후우→사씨→단군조선 왕조명→기자조선 왕수긍→신라 차무일로 박혁거세가 차씨 성을 하사했다는 것은 허구입니다.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 자신도 성이 없었고 박처럼 생긴 큰 알에서 나왔다고 해서 후손들이 성을‘박으로 붙여 주었습니다(과목별 학습백과 한국사 초등, 천재교육 편집부, 2001년)
수많은 학자들이 동원된 고려사에서 왕건 선조도 4대 이상은 알 수 없는데 유주에 호족인 류씨 선조가 황제부터 차무일 류차달까지 희씨성으로 9세, 사씨성으로 11세, 왕씨성으로 58세, 차씨성으로 32세, 류씨성으로 5세 합계 115세까지 기록이 있다는 소설은 사실이 아닌 일을 사실처럼 꾸며서 만든 허구입니다.
조선 태조가 1392년 정도전 등에게 명하여 1395년(태조 4)에 고려 태조부터 마지막 공양왕까지 37권의 고려사를 편찬 후 1414년(태종14)에 하륜 등이 개수하도록 하였으나 하륜이 1416년(태종16)에 죽어 개수 작업이 중단되었고 1419년(세종1)에 류관 변계량에게 다시 개수 작업을 계속하도록 하였고 1423년(세종 5년)에 류관 윤회에게 다시 개수하게 하였는데 주로 호칭과 정도전이 지닌 편향된 시각의 왜곡을 수정하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어 정몽주를 깎아내린 것을 다시 충신으로 평하여 기록합니다.(모 성씨에서는 류관이 고려사를 개수하면서 “성은 차씨 이름 달”이던 차달에게 성씨 柳를 붙여 柳車達로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고려 개국공신 명단에 류차달은 어디서 왔다는 말인가?)
1424년(세종6)에 윤회가 교정하여 편찬한 고려사 이후에도 신개 권제 등이 찬술하였고 이계전 어효첨에게 교정하도록 하였으며 1449년(세종31)에는 춘추관에 전지하여 다시 편찬하도록 합니다.
이 때 김종서 정인지 이선제 등에게 이 일에 대한 감독을 맡겼으나 실제 작업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석형 김예몽 하위지 양성 류성원 이효장 이문형 등 당대의 최고 문관들이 참여하여 1451년(문종1)에 새로 고려사를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 (年表)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 2권으로 만들어 냅니다.
이후 김종서가 1452년(문종2)에 고려사를 요약하여 고려사절요 35권을 만들었고 1454년(단종 2년)에 고려사 간행에 착수 합니다.
이렇게 수많은 학자들이 동원되어 왕건 선조를 기록하였는데 강보육 국조원덕대왕 추존이 잘 못이다 작제건 용건 왕건 3대가 이름에 건자가 들어간 것이 잘 못이다 등등 그리고 4대 이상 선조를 알 수 없는데 일게 호족을 누가 연구해주어서 황제부터 류차달까지 115세(대) 까지 세계를 안다는 것인지 허구입니다. 모두 차원부설원기에 써진 차천로 작품입니다. 이 허구 원파록을 지금도 믿는 류씨가 있어 슬픈 현실입니다.
고려사에 의한 왕건의 4대는 왕건이 왕이 된 후 추존한 국조원덕대왕 의조경강대왕 세조위무대왕 태조입니다. 즉 손호술 작제건 용건 왕건(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입니다.
世宗實錄地理志 文化縣 편에 柳씨는 來姓(이주한 성씨)이라고 되어 있어 문화 류씨가 문화현 토성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이주하여 왔기에 류차달 선조(父, 祖父)가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여 儒州로 왔고 유주가 류차달 8대손이며 고려 고종 최씨 무인정권기 때 류경 위사공신의 공으로 문화현으로 승격되였고 고려 초부터 문화 지역의 토착 세력인데 대승공 선조(父, 祖父)는 황해도 정주 신천 해주 평산 등 어디에서 무역을 하여 부를 축적했는지 유주로 오기 전 부를 축적한 지역의 기록이 없으나 류차달을 고구려 후손으로 보기에 황해도에서 부를 축적한 호족입니다.
3. 以車爲達과 車運達糧의 허구
견훤과 신라와 여러 번 교전한 왕건이 出車給餉 以車爲達이라하여 수레에 군량을 싣고와 군사를 먹이고 전쟁을 승리하게 해준 류차달에게“以車爲達”에서 車達 이름을 하사했다는 허구(사실이 아닌 일을 사실처럼 꾸며 만듦)와 류차달이 20대 나이에 많은 재산을 왕건에게 지원할 부는 류차달 아버지 재력입니다.
이차위달과 차운달량은 2012년 류주환교수 건의를 받아들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삭제된“차원부설원기”에 차천로가 창작한 내용입니다.(※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 “차원부”는 검색되지만 “차원부설원기”는 삭제되어 검색되지 않습니다)
또 갑자보(1864년)의 대승에 제수됨과 아울러 車運達糧의 뜻을 취하여 車達의 사명을 받았다는 내용도 차원부설원기에 근거한 표기입니다.
왕건이 궁예의 장수로 903년 금성(나주)에 침투하여 10여개 현을 접수하지만 견훤이 모르는 왕건의 일방적인 점령이었지만 후백제 견훤과 909년 염해현 전투에서 처음으로 직접 전투를 하였고 918년 고려를 개국하여 태조왕이 됩니다.
왕건이 왕이 되기 15년 전부터 왕건을 지원한 이름이 류차달인데 以車爲達 또는 車運達糧로 차달이란 이름을 왕건이 하사했다면 류차달은 이름 없는 상태로 왕건을 지원했다는 이야기가 되기에 류차달 이름을 왕건이 하사(賜名)한 것이 아니며 유주지역 류차달家 柳씨는 황해도 어느 포구에서 무역으로 부를 축적했고 류차달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유주지역으로 이주해 온 성씨입니다.
호족들이 전국에서 판을 치고 있던 후삼국시대 태봉과 후백제 신라에 독립적인 호족 세력이 널려 있었고 결국 수도 인근에서 비교적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정도였고 수도(철원 전주 경주)를 벋어난 지역은 신흥 호족들의 지배 아래 있었고 류차달 아버지는 유주를 지배하는 황해도 호족입니다.
궁예는 초기에 충청도 경북 지역 대동강 유역 평양을 수복하였고 왕건을 시켜 나주를 탈취하고 견훤을 수전에서 박살내 후백제에게 큰 타격을 주었지만 궁예는 국호를 마진 다음에 태봉으로 바꾸고 자신을 미륵이라고 자칭하고 중앙집권화를 진행하면서 패서(황해도) 호족들의 인심을 잃게 됩니다.
무역중심지 황해도 호족으로 염주 유긍순, 신천 강씨, 정주 류천궁, 황주 황보씨(황주군)신정황후, 류차달家, 작제건을 위해 예성강 하구지역에 영안성과 궁실을 지을 정도로 세력가인 백주(황해도 연안)의 유상희등이 있는데 904년에 궁예에게 항복한 연백지역 유긍순을 제외하고 신천군 왕건 외고조인 강씨(강효경, 신천강씨의 시조, 손자 강보육은 국조원덕대왕으로 추존됨), 개풍군 신혜황후 아버지 류천궁, 황주군 신정황후아버지 황보제공, 해상세력으로 부와 무력을 축적하여 유주로 온 류차달 아버지 등이 해상세력을 만들어서 부와 무력을 축적하여 송악으로 온 작제건과 용건을 도와주게 됩니다.
승훈이 아빠 역사이야기(이영민, 신라 말의 호족세력에 대한 고찰, 다움 블로그)에 의하면 나주 오씨 다련군 조상은 당의 상인으로 흥해 해외무역을 위해 신라로 건너와 정착합니다. 풍수지리설을 발전시킨 도선과 그의 제자 경보가 영암 출신이고 영암 최씨가 이 지역에서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 호족으로 용건에 협력하고 혜성(槥城)은 아산만의 남쪽 연안지역으로 호족 복지겸 선조는 당에서 와서 혜성에 거주했는데, 해적을 소탕하고 백성을 모아 보호했고 강주(진주)에서도 해상세력 왕봉규가 있었고 울산은 당 일본과 통하는 국제항으로 박윤웅 호족이 해상세력 출신 호족으로 용건을 지원하지만 압해(현 신안군)에 능창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여러 섬 군소 해상세력과 결속해 왕건의 수군에 대항합니다(강봉룡, 서남해 지역에서 벌인 왕건과 견훤의 쟁패, 목포대 역사문학부 교수)
4. 문화류씨 본관(관향 문화현)
세종실록지리지 문화현 항목에 "토성이 吳 康이요 망성이 盧 仇 羅 表 任 영호(令狐)요 래성은 柳 金이요 續姓은 李 崔이다. 인물은 첨의 중찬 문정공 류경이다. 원종 때 사람이다." 라는 기록(채하 류주환, 2008.9.20.)에 의하면 류차달家는 문화현의 래성이며 다른 곳에서 온 성씨라는 것으로 류차달 아버지가 다른 곳에 살다가 문화현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신라 때부터 지배권력 층이었던 金씨 朴씨 토전주류씨 등 다수 있었고 지방호족들에게 왕이 성씨를 나누어준다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또 특별히 일정한 개인들에게 성씨를 내려주었다는 사성(賜姓) 기록들이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반면 전국을 대상으로 성을 내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류차달 아버지가 황해도지역에 살면서 부를 축적한 인물로 부를 축적하는 데 시간이 어느 정도는 걸릴 것인데 세종실록지리지에 '래성'이라는 것은 문화에서 부를 축적하고 그것으로 왕건의 삼한통합을 도울 수 있는 기간은 최소한 짧거나 최대한 넓게 생각하면 류차달 아버지는 다른 지역에서 부를 축적했고 그 부로 후삼국통일에 기여하고 언제쯤인가 문화현으로 옮겨가서 그곳에서 류차달이 생을 마감합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래성 기록을 보면 문화로 옮기기 전에 이미 '류'라는 성을 쓰고 있었고 고려 개국 전부터 문화(유주)에 살던 것은 아니었고 다른 지역의 호족이었다가 옮겨갔고 그 자손들은 문화 지역에서 향리(鄕吏)로 지내다가 대승공7세 류공권 때에 이르러 현달하여 중앙무대로 옮기게 됩니다.
대승공께서 고구려 사람이었는지 신라 사람이었는지 백제 사람이었는지 하다못해 중국 사람이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구월산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던 분이라면 고구려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故 이수건 교수 입장입니다.
황해남도 삼천군은 대승공께서 살았던 신천군 일부 지역이었으나 1952년 문화면 5개리를 통합하여 황해도 삼천군을 신설되었고 면을 없애고 문무면 월남리 초리면 흥학리 달천리를 병합하여 달천리로 개편합니다.
신천군은 단군이 도읍을 평양에서 아사달산(구월산) 장당경(藏唐京)으로 천도하여 나라를 다스린 단군문화 발상지로써 고구려시대에는 승산 고려조에는 신주, 근세조선조 (태종13년 1413)대에 신천으로 지명이 변경되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문화현은 구월산이 뻗어 내려와 달천온천 삼천온천 신천온천 등 질좋은 유황온천이 있으며 산좋고 물좋고 농산물이 풍부해서 정말 살기 좋은 고장입니다. (이북5도민회 중앙연합회, 서울 종로구 비봉길)
1428년(세종10) 하정공 류관은 상소를 올려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이 단군 때 아사달산이라 하였고 고려는 유주로 승격시켰으며 안악군 신당에 단웅천왕 단인천왕 단군천왕이 모셔진 삼성당이 있는데 유사(관청)에 명하여 국가관 확립과 조선족 긍지를 가지도록 하였습니다.
5. 왕건을 지원하게 된 배경
장보고를 신라조정에서 제거한 이후 당과 무역하던 삼국 해상 호족들은 해적으로부터 보호해줄 세력의 필요성을 실감합니다.
류차달 시대 해상호족으로 왕건을 도와준 호족 중에 류천궁은 선박수리소에서 군함을 수리하도록 하고 군사를 먹이는 경제적 지원을 하였고 오다련은 적군(당시 왕건은 적국 장수임)에게 군사 침투로 안내할 인적자원을 제공하였고 견훤장수 능창의 근거지를 왕건에게 알려 준 해상 호족들은 작제건 오다련 아버지 류차달 아버지 류천궁 아버지의 형제동맹으로 맺어진 사해형제동맹들입니다. 궁예장수인 왕건을 목숨 걸고 도와준 호족에 류차달 가문이 존재합니다. 남쪽 호족들에게 왕건을 도와주도록 설득한 지식인들은 광양 옥룡사 도선국사와 제자들입니다.
삼국 해상 호족들은 君子는 血肉의 親형제만을 兄弟라 하지 않고 敬과 禮로 맺어진 四海同胞를 모두 형제로 생각하라는 논어 구절에 나오는 형제동맹(司馬牛 四海兄弟)을 맺어 스스로 해상호족끼리 뭉치고 함께 해적소탕 작전을 수행하게 됩니다.
형제동맹(司馬牛 四海兄弟)은 論語 顔淵篇에 나온 문구이고 문화류씨 무자보 총목 113쪽 흥률사 중수 樑上所記書(상량하는 곳에서 기록한 글 : 상량문)에 “훌륭한 禪道場으로서 삼한의 보소가 될 뿐만 아니라 4해황제의 一區福地(하나의 상서로운 지역)가 되었다”에서 나온 四海兄弟同盟입니다.
도선국사가 용건 집에 가서 왕씨로 바꾸라고 했고 도의선사가 흥률사 터를 잡을 때 그 제자들인 妄躬荷佛 무리(輩, 같은 계열(선종)에 여럿이 함께 모여 있는 떼)들이 흥률사를 짓고 번창하니 사해황제가 왔습니다. 사해 황제 중 2명이 작제건 류차달 아버지라는 것은 류차달이 조건 없이 왕건을 도와준 근거입니다.
당시 경전과 교리에 중심을 두는 교종(화엄종)이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한 국가 지배 사상으로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는데 참선만으로 인간 본연의 품성을 깨닫고 부처가 될 수 있다는 " 중생이 부처 " 라는 도의의 설법(실천설법)은 신라 왕권(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뿌리를 흔들어대는 행위였다.
(진전사지 보조선사탑비, 이근우 부경대역사학과 교수)
고려왕조 개창의 사상적 기반인 도의 선종은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다하여 메추라기의 작은 날개를 자랑하는 무리들이 큰 붕새가 남쪽으로 가려는 높은 뜻을 헐뜯고 기왕에 공부했던 경전 외우는 대만 마음이 쏠려 선종을 마귀 같다고 비웃었다(문경 봉암사 보물 제137호 지중대사 적조탑비 비문)의 교종 무리(輩)와 다른 선종을 妄躬荷佛輩(자유롭게 참선을 행하여 깨달은 중생 무리)라 비웃었습니다.
사마천 장자열전에 의하면 북쪽바다에 큰 물고기가 붕새로 변하여 6개월간 남쪽으로 간 것을 매미와 메추라기가 비웃습니다. 붕새가 북쪽 넓은 사상을 두고 남쪽으로 간 것은 방황과 자유를 말합니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에 도를 아는 사람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삶의 도는 자기의 욕망을 통제하고 조절함으로 행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장자는 시비와 차별을 철폐하고 모든 사람의 가치를 동등하게 존중하는 철학입니다.
흥률사가 세워진 것이 805년이며 신라 흥덕왕(재위: 826∼836)이 도의선사(헌덕왕13, 821년귀국)에게 절터를 잡으라 했고 망궁하불 제자들(輩)이 절을 짓고 승려들이 모이니 선도장이 되고 4해호족(황제)의 복지로 이들이 흥률사에서 자주 모여 황제라 칭했고 수백 년 후에 신인이 의자에 졸고 있었는데 청의동자가 왕장군에게 군량이 떨어졌다는 꿈을 꾸었다니(1689년 기사보에 이글은 스님들이 지은 것으로 과장되었지만 고적으로 예전 어른들이 버리지 않는 연유을 알린다고 기록함) 830년경에 도의선자 제자들이 참선과정으로 절집을 짓는 공사를 시작했고 승려들이 모여들고 삼한의 복지(명당)이 되었고, 846년 장보고가 죽고 851년 청해진을 해체된 후에, 4명 호족 중에 류차달 아버지(4해 황제 수백 년후 신인이 흥률사에 오기에)가 계셨다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말하는 神人이 류차달이라는 것은 1352년(공민왕5) 법원선사가 흥률사를 중창하고 개조할 때 신인을 류차달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장군이 아니면서 고려 개국공신인 호족은 류차달 이도 윤신달입니다. 윤신달은 왕건에게 군왕의 도리를 조언했고 이도는 금강에 홍수가 났을 때 배를 제공했다는데 류차달은 4형제동맹이 아니면 지원할 근거가 없습니다.
1. 흥률사 상량문(무자보 총목 114쪽)
무릇 이 절이 처음 세워진 것은 정원21년 을유(805년)이다. 당시 신라 흥덕뢍(흥덕왕은 당나라 경종 문종 시대에 해당하므로 원정연대와 相違 다르다함)이 도의선사를 시켜서 절터를 물색하던 중 여러 사람 중에서 망궁하불이란 무리가 있어 이 터를 잡고 정결하고 알맞은 규모로 집을 지으니 그 뒤로 승려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이로부터 훌륭한 선도장으로서 다만 삼한의 보소가 될 뿐만 아니라 4해황제의 일구 복지가 되었다. 수백년이 지나는 동안 세태가 어려워지고 사람들도 줄어들어 사원이 퇴락하고 창고가 비게 되니 승려들이 찾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절이 있는 산골 속에 한 마을이 있어 5,6호가 거주하였는데 꽃나무가 어울려 피어나고 닭과 개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곳이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의관이 순박하고 모발이 옛 사람과 같아 장생하는 술법으로 생활하는데 찾아오는 사람은 다만 흥률사의 승려들뿐이었다. 그중에 한 신인이 있으니~~~이하 생략함
2. 흥률사 중수 상량문을 분석해 보면
① 805년 흥률사 창건
② 821년 도의 선사 당나라에서 귀국
③ 신라 흥덕왕(재위: 826∼836)이 도의선사에게 절터를 찾으라함(相違라는 말로 미루어 흥덕왕이 아닐 수 있음)
④ 구월산에 패엽사 월정사 흥률사 낙산사 달마사 등이 있었음
⑤ 도의선사 제자들 망궁하불 무리들이 터를 찾아 절집을 지음 : 3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무르다 821년(헌덕왕 13) 귀국하여 선법을 펴고자 하였으나, 당시 사람들이 교학(교종)만을 숭상하고 무위법(선법)을 믿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아직 시기가 오지 않았음을 깨닫고 설악산 진전사로 들어가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제자 염거에게 남종선을 전하고 죽었고 염거의 제자 체징은 전라남도 장흥의 가지산에 가지산파를 세워 크게 선풍을 떨쳤습니다. 그런데 이 때 도의를 제1세 염거를 제2세 자신을 제3세라고 하여 도의를 가지산파의 개산조로 삼았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의)
지방호족들이 신라말에 중앙왕실의 권위가 떨어진 틈을 타 크게 대두하면서 선종을 신봉하였고 선종은 경전에 의존하던 교종과 달리 참선이라는 새로운 수행법을 제시한 것으로 妄躬荷佛輩는 자신의 몸을 참선으로 수행하여 부처를 책임지는 수행법외에 더 구할 것이 없다는 가르침을 따르는 승려들이 제자로 모여 흥률사에서 터를 잡고 집을 지어 선도장이 되어 삼한의 귀한 장소가 되고 4해 황제(호족)이 왔고 수백 년 후(수십 년 후라고 해야 년도가 맞음) 신인(류차달)이 흥률사에서 졸고 있었다가 꿈을 꾸었고 다시 수백 년 후(1356년)후세가들이 흥률사를 중창하면서 신인이 류차달이라고 합니다.
⑥ 846년 장보고가 죽고 851년 청해진을 해체됨
⑦ 4해 황제 수백 년 이후에 神人이 한 분 있었고 꿈에 왕장군이 군량이 없어 위급하다는 청의동자가 있었다
⑧ 후세가(後世家)들은 공을 탕의 이윤과 주의 여상과 비유하여 신인의 성명을 류차달이라하였다(문화류씨무자보 총목 115쪽에 “그 공이 탕왕의 이육과 주무왕의 여망과 같음으로 태조께서 그 선인에게 이름을 류차달이라 내렸다”로 기록함)
⑨ 후세가(1356년 공민왕5) 중창 때 쓰인 글로 후세가 이전에는 신인이 류차달이란 기록이 없습니다. 여기서 4해황제에 작제건과 류차달 아버지가 있습니다. 류차달이 왕건과 동시대 인물이므로 류차달과 왕건이 부를 축적한 것이 아니고 그들 선조인 작제건과 류차달 아버지가 축적한 부(재력)입니다.
왕건은 아버지 할아버지 이름이 나오지만 류차달 아버지 이름을 알 수 없고 작제건 류차달 아버지이후 수백 년 후 후세가들이 신인이 류차달로 기록합니다.
류차달 아버지가 2012년 삭제된 차원부설원기에 나오는 류보림이라 타 문중에서 주장하는 말을 믿는 사람이 있어 슬픈 현실입니다.
류차달이 당대에 본인이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였다기보다는 류차달 아버지 때 축적한 부가 류차달에 이어지고 루차달 아버지의 조언과 작제건家와 교류가 있었기에 류차달이 왕건을 군량미로 지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류차달 아버지 이름을 알 수 없어 더 연구가 필요합니다.
일부 말하기 좋아하는 분들이 류차달 출생년도를 880년으로 추정하는데 류차달을 비롯하여 류천궁이 왕건(877~943)을 처음 지원한 시기가 금성전투가 있던 903년입니다. 880년으로 보면 류차달 나이가 23살입니다. 고려건국 918년은 38살입니다. 그래서 류차달 아버지 조언이 있었기에 용건의 아들 왕건을 지원합니다.
이홍직(국사대사전, 백만사, 1975)에 의하면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은 청년시절에 당나라로 건너가서 장사를 하여 많은 재산을 모으고 송악에 돌아온
작제건은 많은 땅을 사들이고 평주 지방의 세력가인 각간 두은점의 딸과 결혼했고 용건은 그의 맏아들이었는데 용건은 대궐 같은 집을 지은 그 이듬해 정월 왕건을 얻습니다. 용건 부인은 한씨고 용건은 송악군 사찬(沙粲)으로 송악군을 궁예 휘하에 들어갔고 천하를 얻을 성인이 나온다는 도선의 말을 믿고 왕건 만들기에 실행으로 궁예를 찾아가게 됩니다.
용건이 궁예에게 가서 금성태수가 되고 발어참성 성주로 왕건(877~943)을 요청하였고 903년 궁예장수로 나주 출전할 때 왕건은 26살입니다. 류차달은 23살 왕건은 26살이라면 왕건 아버지 용건과 대승공 아버지 관련입니다. 왕건의 29명 처갓집과 궁예 견원 신라관리들 정선호족(전이갑) 기주호족(강훤) 송악호족(왕평달) 강주호족(윤웅 왕봉규 정예) 홍주호족(홍규) 골화현호족(황보능장) 수원호족(백탁) 청주호족(현율 경종 진선) 능성호족(구족달) 압해호족(능창) 등 수 많은 호족 군웅 활거시대 누가 최종승자가 되어 천하를 지배하고 통일할지 모르는 시국에 수 많은 호족과 그들 중 한 호족(궁예)의 장수인 왕건에게 해양세력들이 지원해준 것은 아버지들의 4해형제동맹 때문입니다.
6. 왕건의 후백제와 신라 전쟁 연표
① 846년 : 장보고 피살
㉮ 신라 조정은 염장을 보내 장보고 제거함
② 王建家 柳車達家 柳天弓家 吳多憐家등 4해형제 동맹 : (司馬牛) 四海兄弟
㉮ 장보고이후 해적을 보호해줄 곳이 없어 삼국 해상무역호족끼리 4해형제동맹을 맺음
㉯ 공자 제자 사마우(司馬牛)가 모두 형제가 있지만 나는 형제를 잃고 외톨이다. 라고 탄식하자 자하(子夏)가 그를 위로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어 모든 사람이 다 형제다. 그러므로 군자는 형제가 없다고 해서 걱정하지는 않는다.'하였다(※참고문헌 : 論語 顔淵篇)
㉰ 이들중 왕건조부 작제건, 류차달부, 류천궁부, 오다련부 등이 동맹을 맺은 결과 왕건을 지원함
③ 900년대 : 후삼국 해상호족
㉮ 유주(신천)지역 : 류차달(문화류씨 시조)
㉯ 송악(개성)지역 : 작제건(왕건 할아버지)
㉰ 정주(풍덕)지역 : 류천궁(신혜황후 아버지)
㉱ 금성(나주)지역 : 오다련(장화황후 아버지)
㉲ 백주(연안)지역 : 유상희(작제건에 충성)
㉳ 압해(목포)지역 : 능창(왕건에 대항)
㉴ 혜성(아산)지역 : 박술희 복지겸
㉵ 영암지역 : 최지몽(崔相昕 아들)
㉶ 영광지역 : 전종회(영광전씨시조)
㉷ 강주(진주)지역 : 왕봉규(당과 외교활동)
㉸ 울산 지역 : 박윤웅 등
(※참고문헌 : 고려사절요인물전)
④ 후백제 견훤과 서남해지역의 관계
㉮ 889년 : 견훤이 서남해 방수군 파견
㉯ 892년 : 광주 입성 후 곧바로 전주로 옮기려 했으나 9년 지체
㉰ 900년 : 전주 옮겨 백제 건국 선언
㉱ 901년 : 권훤이 신라 대야성(합천) 공격후 돌아오는 길에 나주로 가서 약탈합니다(서남해 호족들 저항으로 9년간 백제건국을 방해한 분풀이)
㉲ 장보고를 죽인 신라의 장수 출신인 견훤 보다는 서남해안 호족들 4해형제동맹으로 견훤에게 비협조적인 상태입니다.(견훤이 신라 장수 출신이기에)
⑤ 903년(1차) 910년(2차) 914년(3차) : 태봉 장수 왕건 금성(나주) 전투
㉮ 왕건이 서남해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해상 호족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 대표적인 호족은 나주오씨 영암최씨 영광전씨 등입니다.
㉰ 오씨 가문은 대대로 나주의 목포(영산포)에 살면서 해상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합니다. 나주 오씨는 그 세력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해상동맹 출신입니다.
㉱ 영암 최씨 역시 해상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한 후 유력한 호족으로 성장한 가문이었습니다. 영암은 덕진포라는 항구를 가지고 있어 해상교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 田宗會는 왕건이 서남해 지역을 공략할 때 큰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었습니다
㉳ 맹자 민본사상 서남지역에 전파한 백계산 옥룡사 도선국사와 제자와 곡성 대안사(태안사) 광자대사 윤다 등입니다.
(※참고문헌 :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⑥ 903년부터 류차달과 함께 왕건을 지원한 해상 호족
㉮ 903년 주사(舟師=해군)를 이끌고 광주 경계 해안 상륙 금성(나주) 10여 개의 군현 점령 :류천궁이 정주 왕건 수군기제에서 군함수리, 군사 식량 지원하였고 견훤은 대항할 기회 없이 금성을 왕건에게 넘겨줌
㉯ 909년 왕건과 견훤 첫 격돌 왕건이 해군을 이끌고 염해현(무안 해제면)에 상륙하여 중국 오월(吳越) 파견한 후백제 사신선 나포 진도군과 고이도 점령
㉰ 912년 왕건 서남해 공략에 나섰을 때 견훤은 전함을 목포에서 덕진포 배치하였으나 왕건이 바람을 이용한 화공책으로 완승
㉱ 912년 덕진포(전남 영암군 덕진면)대전 : 견훤은 덕진포에 주둔 왕건은 영산포에 주둔하였고 칼을 간 숫돌을 채굴한 礪石山天池(영암군 신북면 월평리)는 명주실 세 꾸리가 들어갈 만큼 깊고 가뭄이 들면 관개용수로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수량이 풍부한 사방 30m 정도의 지소(池沼)가 있다. 이 연못은 고려 태조 왕건과도 관계가 있다.
왕건은 나주는 쉽게 토벌했으나 영암을 토벌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시 왕건은 궁예가 하사한 용천검을 지니고 있었는데 오랜 전투 탓에 칼이 몹시 무디었다. 영암 지역을 토벌하는 데 고전하자 왕건은 용천검을 탓하며 화를 냈다. 이를 염려한 왕건의 부인(오다련 딸)이 매일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고 어느 날 기도를 하다 보니 발밑에 숫돌이 하나 놓여 있었다. 부인은 그 숫돌에 용천검을 갈아서 왕건에게 건네주었다. 다음 날 왕건은 전투에서 대승할 수 있었다.
그 후로 이 지역의 숫돌이 좋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수년을 두고 숫돌을 무한량 파내니 그곳에 못이 생겼고 그 깊이가 무한정 깊어져 중국까지 통하게 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자료)
㉲ 류차달 : 태봉국 왕건 수군 군량미와 고려개국 후 견훤과 전투에 군량미와 군량미 수송 수단 수레 제공하여 수천 명 군사를 먹일 식량을 류천궁보다 더 지원합니다.
㉳ 류차달은 2등 개국공신, 류천궁과 오다련은 공신이 아닌 것으로 보아 王建家와 柳車達家의 선조 때부터 해상호족으로 교류했고 이들보다 더 지원한 증거입니다.(왕건처족 중에 홍유는 공신임)
⑦ 918년 : 왕건등극(고려 개국)
⑧ 919년 : 고려 수도 개경으로 이전(이후 18년간 전쟁)
⑨ 920년~930년 : 고창(안동)전투를 류차달과 함께 지원한 호족
㉮ 920년 신라의 구원요청에 고려가 응함으로서 고려 건국후 후백제와의 첫 군사적 대립으로 보마군(步馬軍) 1만으로 대야성(陜川)과 구사군(창원지역)을 함락시킨 견훤은 군사를 진례성(茂朱)으로 옮깁니다.
㉯ 924년 : 견훤 曹物郡(안동 구미 김천 의성 지역)공격
견훤이 아들 수미강에게 대야 문소 2성의 군사를 내어서 조물성을 공격 하였습니다.(제1차 조물성전투)
㉰ 925년 : 연산진 전투
고려가 후백제 연산진 임존군을 공격하고 태조가 견훤의 군대와 조물군(제2차 조물성 전투) 전투
㉱ 927년 견훤은 근품성(尙州), 고울부(永川)를 습격하고 경주로 진격해 신라경애왕을 죽이고 왕의 족제 김부를 세워 왕(敬順王)으로 삼았다는 소식을 들은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공산에서 견훤과 결전했으나 크게 패해 신숭겸과 옷을 바꾸어 입은 왕건은 겨우 달아나 위기를 모면합니다.
㉲ 928년 청주로 쳐들어온 후백제군 3,000여 명을 격파하고 포로 300여 명을 잡았습니다. 제3차 조물성 전투가 벌어집니다.
㉳ 929년 태조는 영창에게 백제 대야성을 함락하라 명합니다. 고려수군 영창은 참모 최지몽과 장군 등과 함께 배를 타고 나주로 가서 남쪽에서 공격하고 홍유는 다른 장수들과 대야성으로 진격하여 추허조를 붙잡고 대야성을 함락합니다.
신라 말 합천 해인사 화엄司宗 두분 중에 관헤는 견훤의 福田(스승)이고 희랑은 태조(왕건)의 복전인데 해인사가 있는 대야성(합천)은 전략적 요충지로 합천 가야산과 지리산 일대가 후백제파와 고려파로 나누어져 대립할 때 희랑이 용적대군(승군)을 보내 후백제 왕자 월광을 물리칩니다(문명대, 해인사 목조희랑 조사진영상의 고찰, 미술사학연구회, 1978)(※대가야 월광태자 설 있으나 태조26년 943년에 해인사에 전답 500결을 시납한 내용을 판에 세겨 남기고 4대왕 광종이 949년 희랑에게 시호를 내립니다)
㉴ 929년 7월 견훤은 고창 전투에서 견훤은 승산이 없어 보였던 왕건에게 크게 패해 퇴각합니다. 왕건이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고창 지방 호족들의 적극적인 협조에 힘입어 한반도 재통일의 최종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투입니다
㉵ 929년 12월 고창에서 태조 유금필 등이 후백제군을 격파합니다.
⑩ 934년 : 운주(홍성)전투
운주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후백제의 전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견훤의 맏아들인 신검 계열과 넷째 아들 금강 계열의 갈등 대립이 극심하여 멸망에 이릅니다.
⑪ 935년 : 신라멸망(경순왕 고려에 항복)
⑫ 936년 : 태조 19년에 지금의 경북 구미 지방에서 고려와 후백제 일리천전투에서 고려군이 승리하여 후삼국을 통일하는 계기가 됩니다. 후백제 멸망 : 신검이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감금하여 935년 견훤이 왕건에 투항
7. 류차달 고려 개국공신과 대승공 사우
① 고려 개국공신
“한국의 역사 한국사(조선사연구회엮, 한울, 1988)에 의하면 후삼국시대 초기 상황은 수십만 단위의 병력이 움직이는 전쟁을 보다가 이 시대의 전쟁을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었고 고려와 후백제의 전면전도 동원된 양 측의 병력이 고작 수천인 경우가 다반사이며 일리천 전투에서 처음으로 만명 단위로 병력이 동원됩니다.
이 시대 호족들이 난립하여 국가 지방통제력이 극도로 떨어졌고 고려 통일 직전까지는 정상적인 병력 동원 체제를 구축할 수 없을 정도로 정부조직도 허술했고 전투라야 호족 가병정도 전투에서 왕건을 도왔다는 것은 흥률사 상량문에 의하면 4해동맹 때문입니다.
柳門家는 고구려 사람으로 류차달 아버지(류차달 할아버지)는 당나라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였고 부를 대승공에게 유산으로 전달(富 대물림)되었으며 류차달家 왕건家 류천궁家 오다련家 류덕영家(장덕황후) 등 선조들 형제동맹 영향으로 궁예 장수이며 한나라에 왕이 된다는 것이 불확실한 형제의 손자이며 아들인 왕건을 도와주게 됩니다.
류차달 아버지는 문헌상으로 알 수 없으나 현지에서 군량미를 확보하던 당시 전투상항은 민심을 얻지 못하니 천하를 얻으려면 점령지에서 군량미를 확보하지 말라면서 군량미를 운반할 수레 천대와 수많은 전투에서 군량미를 지원해 주었는데 대승공 당대 축적한 부(財力)라기 보다는 대승공 아버지가 무역으로 축적한 재력입니다.
왕건할아버지 부를 바탕으로 왕건아버지가 왕건의 발판을 마련해 준 것처럼 류차달 아버지나 할아버지 때부터 무역으로 富를 축적한 결과 형제동맹인 왕건에게 류차달이 군량미를 지원하게 됩니다.
류차달家 류차달은 황해도 래성(토성)으로 왕건으로부터 성씨를 하사 받지 않았으며 류천궁 오다련보다 높은 개국2등공신이기에 이들보다 왕건의 더 도움을 주었다고 봅니다.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고려태조통합삼한익찬벽상공신명록에 의하면 왕건은 918년 고려 개국하고 개국공신을 선정하면서 혼인정책에 의한 29명의 호족은 공신에 배제하였고 궁예를 몰아낸 5명은 1등공신으로 하고 호족과 장수를 2등공신으로 했는데 경제적 지원을 해준 호족은 류차달(군량과 수레)과 이도(군량과 배) 2명이며 3등 4등공신에도 경제적 지원 호족은 없으며 왕건처족으로 경제적지원한 류천궁 등이 있습니다.
“전라문화논총”(박천석,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1988) 논문 중 삼한공신일람표 발췌한 명단에 의하면 류차달은 고려삼한공신 명단에 있고 류천궁은 아래명단에 있으며 오다련은 명단에 없습니다.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高麗太祖統合三韓翊贊壁上功臣名錄이나 문화류씨 무자보 총목 113쪽 파평윤씨 족보에 의하면 1등공신은 왕건책사와 왕건을 추대한 4명이 1등 공신(계5명)이고 2등 공신 12명은 호족 장수들인데 왕건에게 경제적 지원을 한 공신은 류차달(군량미와 수레)과 이도(군량미와 배)며 3등 10명 4등2명은 호족과 장수들입니다.
高麗太祖統合三韓翊贊壁上功臣名錄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1등 공신
최응(崔凝)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2등 공신
유금필(庾黔弼)
김선평(金宣平)
장길(張吉)
류차달(柳車達)
이도(李棹)
함규(咸規)
김선궁(金宣弓)
홍규(洪規)
왕희순(王希順)
김훤술(金萱述)
윤신달(尹莘達)
박윤웅(朴允雄)
3등 공신
왕식(王式)
렴태(廉泰)
평견(評堅)
권행(權幸)
박희술(朴熙述)
능식(能寔)
권신(權愼)
염상(廉湘)
김전락(金全樂)
연주(連珠)
마난(麻煖)
4등 공신
박수경(朴守慶)
此下不錄
5명
12명
11명
2명
※출처 :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고려태조통합삼한익찬벽상공신명록(검색함) :
http://yoksa.aks.ac.kr/main.jsp 에서 검색창에“고려태조통합삼한익찬벽상공신명록”한 명단이므로 확인해 보십시오
※ 왕식을 왕식렴 동일인이고 족보에 진평(秦評) 견권(堅權)이 없고 렴태(廉泰) 평견(評堅)이 있음
※ 권행 : 안동권씨 시조, 본명 김행으로 고창전투 승리
㉮ 유금필(庾黔弼 ; 무송유씨 시조) : 마군장군
㉯ 김선평(金宣平 ; 안동김씨 시조) : 고창성주, 태조13년(930) 고창전투참전
㉰ 장길(張吉 ; 賜名 貞弼 ; 안동장씨 시조) 고창전투
㉱ 류차달(柳車達 ; 문화류씨 시조) : 왕건에게 군량수송 공을 세움
㉲ 이도(李棹 ; 전의이씨 시조) : 수백 척 배를 내주어 왕건이 금강을 건너 승리하게함
㉳ 함규(威規 ; 양근함씨 시조) : 광평시랑 평장사
㉴ 김선궁(金宣弓 ; 선산김씨 시조) : 선산호족, 태조와 숭선(구미)전투 승리
㉵ 홍규(洪規 : 홍주홍씨 시조) : 태조 비 흥복원부인의 아버지
㉶ 왕희순(王希順) : 왕건의 사촌 아들 손자
㉷ 김훤술(金萱述 ; 해평김씨 시조) : 경순왕 후손
㉸ 윤신달(尹辛達 ; 파평윤씨 시조) : 파주 파평산 출생, 왕건에게 인의와 도덕 충간
㉹ 박윤웅(朴允雄 ; 울산박씨 시조) : 태조 23년(940년) 박윤웅 대장군에게 하사한 윤웅곽암이 있음
② 대동사 대승공사우
문화현에 대승 류차달 서원을 정미년(영조3년,1727) 윤3월에 유생 류이항(柳以恒, 대승공24세 하정공후 효행록)이 주도하여 창건하여 문간공 류공원을 배향한다고 황해도 관찰사 이집(李潗) 문화현령 이태익(李泰榏)이 장계를 올렸는데 1714년(숙종 40) 이후 창건된 향현사(鄕賢祠) 영당(影堂) 생사당(生祠堂)을 모두 철훼하라는 명령을 영조17년(1741) 내렸습니다.
영조17년 7월 3일 반유와 7월 4일 권우가 갑오년 사원(祠院) 훼철하라는 예조 명령을 철회하라는 상소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는 이유가 서원 설치를 중앙 정부의 허가제로 규정함에 따라 儒賢을 배향한 사원만 남기고 19개 서원과 173개 사우가 철훼됩니다.
철훼된 서원 사우들의 어제(御製)나 누각(樓閣)의 현판(懸板)을 예조에서 서원등록(書院謄錄)에 기록하였지만 설총(신라학자) 최치원(신라학자, 경주최씨) 김양감(고려문종조 유학자, 김해김씨) 최충(문종조 유학자,해주최씨) 최유선(최충아들) 안유(안향, 공민왕조 유학자, 순흥안씨) 백이정(고려 말 주자학자) 이제현 권보(權溥) 이곡 이색 정몽주 길재 등 유현을 제외하고 고려 때 시조를 배출한 성씨들은 서원봉사에서 자손봉사로 전환하였는데 류차달은 1948년 남북이 막히기 이전까지 묘하에서 자손봉사를 했으며 안동권씨 시조 권행은 자손봉사를 하지만 고려조 권보처럼 시조는 자손봉사 후손유학자는 서원봉사를 하는 성씨도 있습니다.
대승공 묘하에 경사루(敬思樓)가 6.25 화재발생 전까지 존재하였고 문중 재산목록 회의록 장서등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현재 사우는 대동사뿐입니다.
청송심씨 조상 제사를 지내는 만세루(萬歲樓) 안동권씨 추원루(追遠樓) 영암 덕진면 영보리 전주최씨 존양루 기록에 의하면 루(樓)는 1층에서 제사 음식 준비를 하고 종중서류 재산목록 등이 보관하며 2층은 회의와 날씨불순 때 제사 지냅니다. 재사(齋舍)에서 루(樓) 마루는 문중회의나 음복(飮福)하였고 또한 날씨가 궂어 산소에 가지 못할 경우는 바라보면서 지내는 제사 곧 망제(望祭)를 올리던 장소입니다.
류차달 향사는 1945년 해방 전까지 묘하에서 자손 봉사를 하였으나(영조3년부터 17년까지 류공권과 합사로 모신 14년간 향사를 제외하고) 북조선 노동당이 창건된 1946년(김준엽 외 편, 북한연구자료집제1집, 고려대학교 출판부, 1969)에 인천으로 이주한 九月山大宗齋所 관리한 신천군 文武面 楸陵里 柳厚臣 墨坊宗中(무자보 총목 51쪽, 류후신은 대승공28세, 하정공아들인 만호공묘가 대승공묘우측에 있어 대승공묘를 류후신 집안 종중에서 관리하였음) 종원이 대승공향사 준비를 하려고 곡수(토지 임대료)를 받으려 신천군에 갔는데 종중재산을 공산당에서 접수하여 곡수를 받지 못하고 간단하게 주과포를 올리고 왔으며 그 이후 대승공 묘하에서 향사를 지내지 못 하였으나 1946년 음9월 호남유림과 전국 종원이 참여한 가운데 광주 동호동 좌상공파 종재로 1996년까지 50여년간 향사를 지냈으나 종재 부족으로 1997년 대동사 보존회(회장: 진주인 류근창)에서 20년간 향사를 지내다가 2018년 음 2월 15일 문화류씨 광주전남종친회(회장: 류금환) 주관으로 류차달 한분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광주 대동사는 1933넌 전국 문화류씨 각종 중에 통문을 보내 1934년 서울 광화문밖 종원집에서 회의를 하여 대승공 사당은 장당군 진서면 전재리 문간공 류공권묘역에 건립하기로 결의하고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왜경을 방해로 관계자이신 관암 류상열공이 감금되어 중단되었고 1945년 음력 7월 다시 논의하여 나주 동호리에 건립하기로 하고 나주 유림(성조유사 : 홍승은, 유림 : 정우선, 본손 : 류인구 류두석외, 주선설역 : 류인욱 류인중 류동열 류홍렬 류진열 류재풍 류재득 외) 이름으로 각 종중에 통문을 발송하고 좌상공후 류상열공 주도로 류인대공과 일가 유림과 외손 헌성금으로 대동사과 완공됩니다.
해방 후 1945년 10월 전국유림이 성균관 유도회 창립하였고 1951년 부산에서 전국유림대표자대회를 열어 전국유림 재산을 각 도 향교에 기부하기로 했고 광주유림은 1958년 9월에 유림총회를 개최하여 초대 광주유도회장으로 기남종을 선출하였기에 1946년부터 1958년 이전까지 대동사 참여 유림은 호남의 개별적인 유학자입니다.
영조3년에 예조에서 류차달 서원을 건립하라고 했는지 알수 없으나 영조17년 儒賢 배향이 아닌 서원 철훼를 취소하라는 상소를 영조가 기각한 왕조실록과 당시 서원과 관련된 인물의 불법행위까지 기록된 서원등록에 의하면 문간공 류공권과 함께 배향한 사우가 있었고 당시 붕당으로 학연 매개체인 서원을 연결 통로로 활용하였기에 영조가 서원철훼를 했으나 류차달 관련 사우는 경사루가 있고 류차달 향사를 모시는 곳은 광주 대동사와 동학사에서 박제상과 함께 향사를 모시는 동계사가 있습니다.
③ 나주 동호동에 대승공 사우가 건립된 근거
㉮ 왕건이 대규모 전투를 한 나주에서 군사적으로 도움을 준 오다련 김길이 나주출신이고
㉯ 대규모전투에 재정적 지원을 해준 류차달 후손들이 나주에 거주했기 때문입니다.
왕건이 903년부터 나주 전투를 참가할 당시 대동사가 있는 동호동은 나주였고 조선조에 문화류씨 후손들이 자리 잡고 이웃에 나주오씨 등이 토반세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본량면으로 재편됩니다. 나주군 본량면 동호리가 도로명 주소로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 587(광산구 동호동 본량신촌동길 47-8)입니다.
하정공후 대승공 18세 류용공(증대사헌) 용강(참봉)이 국반세력으로 이주한 곳이 나주 비읍(현 영암군 신북면)이며 대승공22세로 숙종8년에 대승공 묘비를 개수한 류상운이 나주(비읍 모산)출신이며 좌상공후 대승공 20세 류순장(사헌부감찰)의 배위는 부친 방귀온의 피화로 아들을 데리고 나주로 이거하였고 자손 중 21세 절(공조참의)후손들이 광산군 본량면으로 이주하여 집성촌을 이룹니다.
나주에 왕건이 궁예장수로 왔고 대승공 도와주었고 류차달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룬 곳입니다. 대승공 묘비를 개수한 충경공후 관, 외손 홍춘경, 검한성공후 희림, 하정공후 상운, 정숙공후 기영 등 내외손 다섯 분인데 나주에 집성촌을 이룬 후손들이 나주에 대승공 사우 건립하게 됩니다. 충경공후는 곡성에 검한성공후는 화순에 집성촌을 이루지만 문화류씨 전종원과 유림이 협의하여 나주에 대승공 사우건립을 결의합니다.
나주오씨 정묘보에 의하면 고려태조 왕건이 궁예조정에 처음 벼슬하여 수군장군이 되어 서해(나주)에 유진하고 목포에 이르러 오색구름을 보고 배로 금강진 흥룡동(나주 중흥리)에 이르렀는데 빨래하는 나주오씨(장화황후)를 만납니다.
김길(광산김씨 시조 김흥광 손자)이 신라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나 금산군(錦山郡,나주)으로 피신했는데 왕건의 나주 공략 시 금산(나주)의 왕자대(王子臺)에서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는 공을 세운 곳이 나주입니다.
왕건을 지원해준 류차달 대승공 업적을 보존하기 위해 나주 동호리에 대승공 사후를 1946년 건립하게 된 근거가 왕건이 전투를 시작한 나주이며 왕건을 지원해준 대승공 후손과 오다련 후손들이 집성촌이기 때문입니다.
8. 결론
① 류차달이 왕건을 도왔다는 처음 기록은 흥률사 상량문에 의하면 4해황제가 왔고 수백 년 후 류차달이 왔는데 왕장군을 도와주라는 꿈을 꾸었다는 것입니다. 기사보에 상량문이 과장되었다고 하니 4해황제→4해호족→4해형제→공자 제자 司馬牛 四海兄弟→4해 형제 동맹으로 수백 년→수십 년으로 연관 지으면 20대 약관나이에 왕건을 지원한 근거를 알 수 있습니다.
후삼국시대 고려나 조선 초 가병을 운영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재력과 권력이 필요합니다. 수많은 가병의 의식주와 전투 중 부상당하거나 질병의 치료비용 병기구입비용이 천문학적 경제력이 있어야 되는데 처음 류천궁과 왕건을 지원할 때 류차달은 20대초반(23살 추정)이기에 류차달 아버지가 아들 류차달에게 형제인 작제건 손자를 도와주라는 메시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4해형제에 작제건과 류차달 아버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② 일부 양심 없는 사람들이 류차달을 차달(성씨 차 이름 달)을 고려 개국공신으로 만들어 유포하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원파록을 다시 인정하려는 중원이 있는데 원파록과 관련 있는 타문 젊은이들이 과거 선조들이 관련 없는 문화류씨를 형제라 한 원파록이 허구라며 바른 종중사를 알리기 위해 카톡과 밴드를 운영하고 있는 사실을 모르는 일부 류문이 원파록에 나오는 황제 후손이며 왕건이 하사한 이름이 차달이라고 말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류차달은 왕이 되기전 궁예부하이며 장수 왕건을 지원했는데 류차달은 태조왕건이 고려왕이 된 이후 군량을 지원했고 이름을 하사 받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③ 일제시대 때 작성된 몇 분의 류릉 참배기에 의하면 재실에 영락보가 소장되어 있었고 재실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대승공께서 살던 집이 있었다는데 1926년 병인보 간행전후 10여 년간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류세영 종원이 1976년 병진보 수보시 대종회에 기증한 시도기에 차문은 한분도 없는 것은 1911년 친일파 이용원이 쓴(撰) 신도비를 동족이라고 차문이 세우고 대승공 묘제에는 참여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첫댓글 좋은 논문을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상기 내용 중에서 능성호족(구족달)으로 기록한 내용 엉터리임니다.
광평성 시중과 나주도대행대 시중을 역임한 구진(具鎭 仇鎭)의 아들이 구족달(仇足達 具足達)입니다.
영월을 기반으로 성장한 영월호족 출신입니다. 구족달은 능성구씨(능주구씨)와는 아무련 혈연 관련이 없습니다.
구진(구성길)과 구족달(구희)은 창원구씨의 시조와 시조의 아들입니다.
능성구씨(능주구씨)는 서기 1224년에 중국 남송에서 고려로 들어온 씨족입니다.
능성구씨의 시조는 구존유입니다. 신안주씨 족보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류재균 선생 글 잘 보았습니다
2012년 류주환교수의 건의로(차원부 설원기)가 한국 대백과사전 에서 삭제되었다니
만시지탄이 있으나 통쾌합니다
지식의 희롱과 역사의 왜곡은 봄에 눈녹듯이
언젠가는 만천하에 명명 백백 드러납니다
글 한줄에 날 밤을 새고 몇일 몇달을 보내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