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11월호에 졸작 ‘삼겹살’이 실렸습니다. 신현식 지도 교수님의 천거를 받아 얼떨결에 실린 것입니다. 수필들을 읽어보니 언감생심 제가 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네요. 내로라하는 분들의 글은 심오하고 진중하군요. 그런들 어쩌겠습니까, 못난이가 있어야 잘난 이도 있을 거라 자위해 봅니다.
삼겹살 / 김상영
시골이나 도회 할 것 없이 음식점이 많이도 생겼다. 입이 쩍 벌어질 만큼 비싼 곳도 있지만 헐한 음식점도 있다. 나 같이 주머니가 훌쭉한 사람들은 비싸다는 곳은 가지 못하고 이 집 저 집 싼 곳을 가게 된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고 가게 되니 가랑비에 옷 젖는 격이다. 그래서 찾은 곳이 만만한 삼겹살 구이집이다.
삼겹살은 좀 침침한 골방에서 먹어야 더 맛이 난다. 그 방은 좁아서 아늑해야 하고 적당히 지저분해야 한다. 기름때 낀 포마이카 상의 나사가 헐거워 꺼떡거려도 상관없다. 가스레인지는 기름얼룩이 붙어있어도 좋다. 방바닥에 사려놓은 가스 줄을 궁둥이로 슬쩍 밀치고 앉은들 어떠랴.
고기마다 어울리는 불판이 있을 거다. 돌 판이니 뭐니 해도 삼겹살엔 그저 툭박진 무쇠로서, 둥근 귓바퀴에 동그란 걸개가 떨렁거리며 멋을 좀 부린 불판이 좋다. 거기에다 자글자글 노릇노릇 잘 구워질 수 있도록 윤나게 질이 났으면 더 좋다.
삼겹살에 파절임이 빠진다면 팥소 빠진 찐빵이요 고무줄 없는 팬티다. 그런 파절임은 낙동강 하구 명지대파처럼 대가리가 허여멀쑥하고 굵어서 그 달콤한 즙이 입안을 한가득 적셔주니 더할 나위 없다. 상치와 들깻잎은 기본인데 사각대는 배춧속까지 등장할 때가 있어 그들먹하고도 푸짐하다.
고기는 숙성된 것으로서 맛있다 소문난 걸 내놓고 돈 천 원 더 받으니 나무랄 생각이 없다. 바다 건너왔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진국 같은 주인을 만났으니 제대로 맛이 날 거다.
주인장은 아줌마가 편하며, 기둥서방 없는 과부는 더 편하다. 뚱뚱한 데다 궁둥이마저 펑퍼짐하면 푸짐하고 후해 보인다. 살 뺄 여유 없이 장사에 전념하였을 것이므로 그만큼 음식 맛이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인네 뱃살을 숨기기엔 월남치마가 좋겠으나, 나 좋아라고 한물간 그 치마를 입어 줄 리는 만무하다. 바지를 입은들 어쩌랴, 소주 회사 판촉용 앞치마로 월남치마 시늉을 해주는 것으로 만족할 일이다.
반찬 쟁반을 든 손은 여느 촌부처럼 툭박지고 설거지하다 그냥 들어온 양, 젖은 손이 좋다. 그 손에 들린 살얼음 살짝 낀 소주병은 구식舊式 방망이 수류탄을 닮아 우리를 쓰러뜨릴 기세다.
주인장이 정식定食에나 올리는 생선구이를 슬쩍 들이미는 건 단골손님에 대한 정표라서 고맙다. 그뿐이랴, “너거는 어예 그클 다정하이꺼?”하며 부러워 해주는 주인장이 좋다. 삼겹살의 온전한 맛은 인정이 가미되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언감생심 옛 시골에야 삼겹살이 있었을쏘냐. 큰일 치를 때 삶아 빚어내는 넓적 살을 장물에 찍어 먹으면 그만이었다. 목기쟁반에 걸쳐진 초승달 같은 그 돼지고기는 딱 한 쪼가리가 고작이었다. 끓는 물을 끼얹어 식칼로 대강 민 탓에 그조차도 털이 숭숭 난 것이 얻어걸릴 때가 있었다.
삼겹살 구이가 돼지고기의 진수란 걸 알게 된 것은 걸신들린 그 세월을 지나 대처에서 살 때였다.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고, 고소한 그 맛에 홀딱 반한 나는 하루가 멀다고 퇴근길 동료와 어울려 삼겹살집을 거쳤다.
그렇게 삼겹살집을 거친 이유도 가지가지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혼자는 외로워서, 복잡한 일 괴로워서, ‘자네 한 번, 나 두 번’ 사게 되는데, 그렇다 한들 얻어먹을 때는 불안하고 내가 낼 때는 허리가 휘청하니 분위기와 음식 맛을 제대로 느끼겠는가. 그래서 즐겨 가게 되는 곳은 그 칙칙한 삼겹살집일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내 안식의 전당은 삼겹살집이다. 그런데 요즘 들락거리는 삼겹살집의 친애하는 아줌마도 자꾸만 방을 늘리고 새 시설을 갖추고 싶은 욕심을 가진 듯하다. 그 명당이 없어진다면 마음 편히 갈 수 있는 곳이 또 하나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이다.
돈을 벌고, 나보다 더 훌륭한 고객을 맞고 싶은 것을 어찌 말리겠는가. 다만 내가 들락거리는 장터에만은 오래도록 그냥 그대로 남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면 나는 어느 어스름한 저녁, 술 고프고 출출할 때 내 친구들을 몰고 그 집으로 쳐들어갈 것이다. 소주 일병과 맥주 이병을 우선 청한 뒤 간을 맞추고서, 불판이 달궈질 아까운 막간에 잔 대어 보자고 외칠 것이다.
"위하야!" 그러면 아내는 은근한 잔소리로 말릴 것이다. "앗따, 고기 꾸버지마 조근조그이 마시소." 나는 그 소리를 노래처럼 들으며 느긋해 할 거다. 나는 불판의 불을 조절하여 삼겹살에 걸맞게 세 번만 뒤집어 최고의 맛을 낼 것이다.
술병들이 대책 없이 나뒹굴 때쯤이면 알딸딸한 기운을 빌어 옆 상에 앉은 이웃들에게 고기 근이나 소주 몇 병을 호기롭게 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이웃도 세상을 얌전하게 사는 사람들이니 나를 보고 어느 동네 뉘 집 손인지 알아차리고, 수십 년 만에 귀향하더니 인사성 밝고 참 인정 있다 할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