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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프랑수아 샤틀레
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이며 1968년 5월 혁명, 베트남전쟁 반대운동 등 동시대의 크고작은 사건들과 투쟁에 적극적
으로 참여한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 프랑수아 샤틀레의 1979년 방송 대담을 정리했다. 8회에 걸친 대담을 통해서
샤틀레는 서구의 합리성의 여정을 따라가며 철학과 이성의 역사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다.
이성의 역사
저자는 전형적인 프랑스 좌파 지식인었다가 이 후 소련 공산당의 일련의 전체주의적인 태도를 보고 批공산당
反자본주의적 삶을 형성한 철학자로서 거의 평생 동안 온갖 종류의 전쟁과 그리고 자본주의적 불평등 질서
에 도전을 행한 실천적 지식인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한 축에서는 공산주의라는 전제주의적 요소의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데에 바쳐져 있으
며 다른 한 축에서는 자본주의적 불평등과 전쟁 체제를 비판하는 데에 촛점을 두고 있음은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그는 서양에서의 이성이 했던 역할이 다른 지역에서와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 사화
를 합리화하는 과정으로서 파악한다.
요즈음 유행하는 말로 이야기한다면 이성이 한 사회를 묶어세우는 사회적 담론으로서의 기능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는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합리화된 어떤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와중에 이성
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서양사회에서는 이성이 이러한 기능을 담당했고 다른 지역에서는 다른 것들이 이러한 기능을 담당했
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신체적 요구에 의해서 마련된 자연적인 어떤 틀 위에 사회적 위기라든가 아니면 지배
계급의 요구에 의해서 규범적 이성, 혹은 절대적 이성, 즉 신으로 포장된 어떤 것이 들어와 인간의 생명에
의 색채를 바래게 하여 규격화되고 화석화된 전제적인 담론 구축을 시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일련의 시도가 서양의 역사 속에서 플라톤을 축으로 하여 기독교, 그리고 헤겔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이야기함으로서 저자는 헤겔주의의 적자인 자본주의를 맹렬하게 비판을 하고 그와 동시에 헤겔
의 서자인 마르크스주의마저 어떤 합리화의 언저리에서 추방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절대적인 거대한 것으로 인간의 움직임을 동력화시키는 강압적인 틀에
움직여서는 안되는 것이고 우리의 신체가 요구하는 자발적이고 의지적으로 합리적인 틀에 의해 움직이는
우리의 체제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에 대한 참여는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합리적인 움직임에 절대 이성이라는 거대한
목적론의 타이틀을 걸고 제동을 걸고 있는 규범화된 강압적인 이성에 도전하는 것이며 결국은 역사를 합리
적인 역사를 창조해내는 역사에의 돌입을 가져옴으로서 새로운 인간 관계를 형성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절대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행하고 있는 모든 억압적 이성에 반기를 드는 것은 - 예를
들어 계급적 불평등, 여성차별, 제국주의, 자본주의자들이 벌이는 전쟁, 혁명 수호를 위한 제국주의적 침략,
혁명 고취를 위한 폭력적 운동 - 실천, 즉 행위라고 강조하는 것이며 이는 결국에는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합리적인 힘을 동력화시켜 각각의 주체자가 살고 있는 합리화의 현장에서 각각의 새로운 인간 관계
속에서 어떤 질서를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강제적인 태생적 기독교를 거쳐 유사 분위기의 마르크시즘을 지나 서양적 보편주의에 물들어 있다가 - 즉
이 저자가 이야기하는 전형적인 절대 이성의 전제주의적인 틀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했던 - 요즈음 담론이
주는 지역성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두고 무엇을 찾고 있는 필자에게 저자의 글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
왔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
우선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서양의 역사에 절대 이성 - 신 - 으로 존재했던 것들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에
대한 것의 재인식이요 따라서 역사에의 참여라는 것이 어떤 절대적인 보편성에 대한 투신이 아니라 인간의
기술이 구체화되는 담론의 지역적인 공간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며 최종적으로 이는 인간의 신체의 반응
속에서 나오는 힘을 동력화시키는 인간의 자발적인 의지에 대해서 다시금 인식하게 했다는 것이다.
저자를 통해 필자가 다시금 확인한 것은 진정한 사회라는 것은 거대한 어떤 목적론적 틀에 - 근대국가,
하나님 나라, 공산주의적 이상 사회, 미륵 세상, 그리고 국수적 민족주의 따위의 - 의해서 움직여서보다는
자신의 신체의 것을 그리고 그것을 실현화 시키는 자기 속한 사회에서의 적극적인 참여가 가장 능동적인
역사에의 참여요 가장 이상적인 삶의 건설이며 동시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규범화된 폭력적인 이성으로
부터 벗어나는 첩경이라는 평범한 사실의 재확인라고 하겠다.
62.필립 라꾸 라바르트
필립 라쿠 라바르트(Philippe Lacoue-Labarthe)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독일 낭만주의의 사조와 하이데거 사상에 영향을 받아 시와 정치라는 두 축을 접목하여 미학적 관점에서 근대 철학
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1978년 초기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문헌을 연구하여 장-뤽 낭시와 함께 공저 (문화적 절대)를 펴냈다.
자크 데리다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거리를 두면서 근대성에 깔려 있는 지각 불가능한 한계에서 표출되는 문학,
예술, 정치를 해체적 관점에서 두루 연구하였다.
주요 저서로 (철학의 주체,활자판)(1979),(근대인들의 모방 활자판)1986)(하이데거;시의 정치)(2002) 등이 있다.
라꾸라바르트의 지점은 바그너의 음악에서 동일화를 증명하려는데 있다. 모든 걸 삼키는 동일화는 파쇼를 의미한다.
바그너라는 색신은 원파시스트라는 법신으로 라꾸라바르트에 의해 못이 박힌다.
63.르네 지라르
‘욕망의 삼각형 이론’으로 유명한 르네 지라르는 문학을 바탕으로 연구를 시작했지만 역사학·인류학·사회학·철학·종
교학·심리학을 넘나들며 인간을 탐구했다.
그의 독특한 연구 분야는 다름 아닌 ‘인간의 욕망’이다. 그에 따르면 개인의 욕망은 개인 고유의 것이 아닌, ‘타인이
원하는 것’이다. 욕망하는 개인은 그 욕망을 부채질하는 매개체를 통해 어떤 대상을 욕망하게 된다는 욕망의 삼각형
이론을 제시했다.
사람은 타인을 모방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타인 또는 어떤 물건이라는 매개체를 모방함으로써
욕망을 달성하고자 한다는 의미다.
그는 이런 종류의 욕망으로 인해 사람들이 대상을 차지하기 위해 갈등을 일으키고 폭력을 행사한다고 봤다.
이같은 생각은 그의 첫 작품인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을 비롯해 『폭력과 성스러움』(1972)과
『희생양』(1982) 등의 30여 권의 저작을 관통한다.
그는 개인들의 집합인 사회의 폭력에 대해서도 나름의 설명을 찾아냈다.
그는 사회가 개인 간의 갈등으로 심각한 위기 상황에 다다르면, 하나의 희생양을 찾아 그에게 모든 비난과 죄의식을
전가하고, 그들 자신들은 비난과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난다고 봤다.
이런 과정을 통해 희생양을 제거한 사회는 더욱 결속력이 세진다.
인간의 욕망과 사회의 폭력 메커니즘에 대한 그의 사상은 밀란 쿤데라 등에게 영향을 줬다.
프랑스 현대 철학의 거장 미셸 세르는 그를 ‘인간과학의 다윈’으로 표현했다. 지라르는 73년 프랑스 아카데미상을
받았으며, 2005년 프랑스 지식인이 최고의 영예로 여기는 한림원(아카데미 프랑세즈) 종신회원이 됐다.
64.알베르 카뮈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프랑스어: albɛʁ kamy, 1913년 11월 7일 ~ 1960년 1월 4일)는 프랑스의 피에 누아르
작가, 저널리스트 그리고 철학자이다.
많은 작가들이 개인의 부조리에 대해 정의하고 해석하여 왔으며, 부조리의 중요성에 관한 그들 나름의 생각에 대하
여 글을 써왔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일반적인 종교들이 우리가 신의 존재에 도달하는 것을 막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부조리를 지적
하는 키르케고르를 언급하며 부조리를 개인적인 경험의 범주로 인지하였다.
카뮈는 부조리주의의 창시자가 아니며 부조리주의 철학자로 계속 여겨지는 것을 후회했다.
카뮈는 《시지푸스의 신화》를 출판한 이후 점차 부조리주의에서 관심이 멀어졌다.
연구자들은 카뮈의 사상을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과 구별하기 위하여 부조리의 패러독스를 말한다.
카뮈의 부조리에 관한 생각은 1937년 발간된 그의 첫 에세이집 《안과 겉》에 나타나 있다.
부조리 테마는 1938년 발간된 그의 두 번째 에세이집 《결혼》에 좀 더 세련되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에세이들에서 카뮈는 부조리에 관한 철학적인 설명을 하거나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고, 대신에 부조리의
경험을 투사하고 있다.
1942년 카뮈는 인간 존재의 삶에 존재하는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인 《이방인》을 출판하였고 이어 동시에 부조리에
관한 문학적 에세이인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를 출판하였다.
그는 또 부조리 논리를 추구하는 로마 황제 칼리귤라에 관한 연극을 작성했다.
그러나 이 연극은 1945년까지 상영되지 못했다.
1943년 7월에서 1944년 7월까지 익명의 독일인 친구에게 보낸 4개의 편지에서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드러낸다. 첫 번째 것은 1943년 the Revue Libre에서, 두 번째 것은 1944년 Cahiers de Libération에서, 세 번째 것
은 1945년 Libertés신문에서, 출판되었다. 4개의 모든 편지들은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이름으로 1945년
에 작품집 《레지스탕스, 반역, 그리고 죽음》에 수록되어 출판되었다.
카뮈는 부조리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의미심장한 기여를 하였고 확실한 대답으로서의 니힐리즘을 거부하였다.
카뮈는 자신의 삶을 통틀어 독일의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 같은 전체주의의 다양한 형태에 관하여 수많은 반대성명
을 발표하고 반대행동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젊은 시절,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치하에 있던 프랑스에서 유명한
레지스탕스 저널 콩바(combat)의 편집장을 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을 수행하였다.
카뮈의 잘 알려진 사르트르와의 결별은 이러한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와 연관되어 있다. 카뮈는 근본주의자의 이름안
에 사르트르에 의해 신봉되는 대중정책이 전체주의에 호응하는 것임을 간파했다.
이는 공산주의 경찰국가에 대한 맹공뿐만이 아니라 대중혁명정책에 관한 의문을 드러낸 《반항하는 인간》이라는
그의 작품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카뮈는 소비에트 연방의 가혹한 통치를 비판했으며, 1957년 감정에 사로잡혀 1956년 헝가리 혁명 일주년을 기념하는
연설에서 소련군의 잔인한 진압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65.가스통 바슐라르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년 6월 27일 ~ 1962년 10월 16일)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가장 저명한
위치에 오른 프랑스의 철학자이다.
그의 중요 작업들은 시와 과학철학 분야이다.
과학철학에서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장애와 인식론적 단절(obstacle épistémologique et rupture épistémologique)
의 개념을 도입했다. 바슐라르는 20세기 후반에 미셸 푸코와 루이 알튀세르와 같은 많은 프랑스 철학자들에 영향을
미쳤다.
바슐라르는 프랑스 바르 쉬르 오브의 우체국 직원으로 근무한 다음, 물리학을 전공한 뒤 철학을 연구하였다.
바슐라르는 1930년에서 1940년까지 디종 대학교의 교수를 거친 뒤 파리 대학교(소르본 대학교)에서 과학사와 과학
철학을 강의하였다.
새로운 과학적 정신(Le nouvel esprit scientifique,1934)이나 과학적 정신의 형성(La formation de l'esprit scientifique)
과 같은 바슐라르의 과학철학과 과학사에 대한 연구들은 - 과학적 정신에 대한 정신분석의 한 종류로, 더 자세히 말하
자면 과학의 발전에서 심리적 요인으로서의 - 역사적 인식론에 대한 그의 관찰에 근거한다.
예를 들어 바슐라르는 하이젠베르크의 <<양자론의 물리학적 원리>> 1장을 사례로 들어 광입자설과 빛의 파동설을
각각의 이론을 보완하면서 다 같이 옹호한다. (새로운 과학적 정신, 4장)
바슐라르는 한 이론이 다른 입장에서 장점을 취해 내재하는 결점을 보완할 수 있는 과학에서 심리학적 교육의 중요
성에 대한 우수한 사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장애(obstacle épistémologique)라는 개념을 만들어 어떻게 과학적 진보가 지적 형태의 특정
유형에 의해 저지되는지 논증한다.
인식론의 한가지 과업은 과학에서의 과학자들이 장애를 극복하고 지식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하여 지적 형태를 명확
하게 만드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오귀스트 콩트의 과학을 연속적인 진보로 보는 — 상대성이론과 같은 과학사의 불연속적인 특징을 보여
주는 과학적 진보에 의해 대체된 — 실증주의에 반대한다.
바슐라르는 과학사에 대한 저작에서 "인식론적 단절"의 개념에 따라 불연속성을 강조했다. — "인식론적 단절"의
용어는 바슐라르는 거의 쓰지 않았으나, 알튀세르를 통해 유명해진다.
이런 이유로 그는 과학사에 대한 연속적인 관점을 지지한 에밀 메이에르송에 대해 비판한다.
바슐라르는 새로운 이론들이 새 패러다임 안에서 개념들의 의미를 바꾸면서 낡은 이론들과 통합하는 것을 보여주
었다. (예를 들어 뉴턴과 아인슈타인 이론의 두가지 다른 의미의 질량의 개념) 이렇게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유클리드
기하학과 모순되지 않으며 큰 테두리 안에서 통합된다.
데카르트적 인식을 가진 합리주의자로서 (비록 그가 "비데카르트적 인식론"의 경향이 있지만 새로운 이론으로서 데
카르트적 인식론의 뒤를 잇는다. - "새로운 과학적 정신", 결론 부분) 바슐라르는 일반적 지식에 대해 "과학적 지식"
을 대치시키고, 오류는 단지 부정성이거나 착각이라고 여겼다.
(과학적으로, 우리는 진실을 긴 오류의 역사적 교정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경험을 공통적이고 근원적인 착각
(illusion première)의 교정이라고 생각한다.
인식론의 역할은 개념의 (과학적) 제시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 개념들은 단지 이론적 제안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개념들은 추상적이면서 구체적인 양면을 가지고 있으며, 기술적이며 교육학적인 활동을 퍼뜨린다.
이것은 왜 전구는 추상적-구체적 대상의 한 예로써 과학적 사고의 대상인지 설명해 준다.
인식론이 작동하는 원리를 알기 위해서는 과학적 지식을 거쳐 지나가야 한다. 인식론은 과학적 추리를 정당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일반적인 철학이 아니다. 대신에 인식론은 과학사의 한 부분을 제시해 준다.
바슐라르는 합리성과 비합리성 사이의 이중성에 반대하였다. 예를 들어 확률론은 합리성을 심화시켜 현실을 복잡
하게 하는 또 다른 길이다.
(켈빈 경 같은 사람이 어느 정도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더라도 )
"새로운 과학정신"에서 그의 주된 명제 중 하나는 근대 과학이 과정 철학으로 흡수될 수 있는 "관계의 존재론"으로
사물의 고전적 존재론을 교체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에 따르면 물질과 광선의 물리적 개념은 물체와 운동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과 일치한다.
그러나 두 개념이 별개이고 물체가 존재론적으로 실제한다고 생각한 고전 철학에 반하여, 근대 과학은 광선과 물질
을 구별하지 못한다.
정확하게 보면 고전적 인식론에 따른 인식의 상태인 고정된 물체를 검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인식론에 따라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비데카르트적 인식론에서 데카르트주의에서의 "단순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이론과 실험에 의해 만들어지고 계속하
여 개선되는 복잡한 대상만이 존재한다. (VI, 4)
직관은 원초적이지 않고, 만들어진다. (VI,2). 이 주제는 바슐라르를 구성주의 인식론의 한 부류를 지지하게 한다.
바슐라르의 작업들은 인식론 외에도 시, 꿈, 정신분석, 상상 등의 많은 논제를 다룬다.
불의 정신분석(1938년)과 공간의 시학(1958년)은 그의 저작들 중에 유명한 것이다.
토머스 새뮤얼 쿤은 알렉상드르 쿠아레에 의해 새로이 재해석되는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coupure 또는 rupture
épistémologique)의 개념을 사용하여 그의 패러다임의 전환 이론을 제시하였다.
알튀세르, 조르주 캉길렘(소르본에서의 그의 계승자)과 미셸 푸코 역시 바슐라르의 인식론에 의지한다.
66.알렉상드르 코제브
알렉상드르 코제브는 1948년 미국을 여행하며 역사의 끝과 인간의 지위를 상실한 주체를 목도한다.
코제브가 역사의 끝을 확신한 것은 부정성의 소멸 때문이었다.
자기를 실현한 정신이 만나게 되는 풍경은 안전함이 끝없이 펼쳐진 세계, 인공적 안온함이 부정성을 거세해버린
세계였다.
부정성을 통해 변증법적 운동을 지속하는 ‘인간’은 자연과의 투쟁을 전제로 한다. 자연은 예측불가능하다.
자연의 부정성은 생명을 위협하는 타자성을 전제한다.
그러나 1948년 대량 생산과 소비를 반복하는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타자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부정성을 마주하여 자기를 실현하려는 변증법적 운동도 없었다.
존재하는 것은 배고픈 욕구를 빠르게 채워줄 패스트푸드, 진정성에 근거한 고민과 번뇌를 대체할 볼거리와 즐길
거리, 통증을 잠재워 줄 진통제와 죽음을 통제하는 병원, 그리고 아프지 않은 몸과 근사한 몸매를 위해 늘어선
헬스클럽이었다. 거기엔 역사가 없었다.
그리고 역사의 종말과 함께 인간 역시 멸종해 있었다. 그곳엔 ‘동물’만이 존재했다.
대량 소비 사회에서 주체는 욕구에 지배된다. 무엇을 먹어 맛있다는 감각을 만끽할지, 어떤 병원에 가서 덜 아픈
시술을 받을지, 어느 트레이너를 선택해 근육을 단련해야 더 섹시한 몸매를 만들지 같은 것이 그의 관심거리다.
물론 삶에 부정적 계기와 어려움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실현의 계기인 부정성이 아니다.
더 맛있는 음식과 더 쾌적한 여행과 더 안락한 생활을 위한 장애물, 가급적 만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고, 운 나쁘
게 만나도 빨리 치워버려야 할 방해물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사라지고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부정성을
탈수시켜버리는 ‘동물’만 존재하는 것이다. 코제브는 역사와 인간의 종언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역사가 끝난 이후 인간은 새가 둥지를 틀고 거미가 거미줄을 치듯이 건축물과 작품들을 만들 것이고, 개구리와
메뚜기가 그러하듯이 음악을 연주할 것이며, 어린 짐승처럼 놀고 다 자란 동물처럼 사랑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러한 행위들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신 이렇게 말해야 한다.
풍요와 충분한 안전 속에서 삶을 영위하게 될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 이후의 동물들은 그들의 예술적, 성애적,
유희적 행동들을 통해서 만족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끝은 동물로 귀결되지 않았다. 1956년, 일본을 방문한 코제브는 동물과는 다른 포스트 휴먼을
발견한다. 욕구와 쾌락을 멀리하고 강한 자기 통제를 보이지만, 내면과 진정성을 상실한 주체, 타자의 형식에
맞춰 자신을 전시하는 존재. 코제브는 이를 ‘속물’이라고 불렀다.
“탈역사의 일본 문명은 ‘미국적 생활방식’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아마 일본에는 ‘유럽적’ 혹은 ‘역사적’ 의미의 종교, 도덕, 정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서는 순수한 상태의 속물주의가 ‘자연적’이거나 ‘동물적’인 소여를 부정하는 규율을 만들어내고 있었는데,
이러한 규율들은 전쟁과 혁명의 투쟁이나 강제노동에서 태어난, 즉 일본과 다른 나라에서 ‘역사적’ 행위를 통하
여 태어난 규율들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것이었다.
노카구(能樂)나 다도(茶道)나 꽂꽂이 등이 보여주는 일본 특유의 (이에 필적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속물주의의
정점은 상층 계급의 전유물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집요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 예외 없이 철저하게 형식화된 가치에 기초하여,
즉 ‘역사적’ 의미에서 ‘인간적’인 내용을 완벽하게 박탈당한 그러한 가치에 기초하여 현재를 살아간다.”
역사란 주체의 자기실현이다. 역사에는 부정성과 마주하여 질적 변화를 담보하는 변증법적 운동이 요청된다.
규율과 형식은 그 과정에서 탄생한다. 인간은 규율과 형식을 통해 동물성을 지양하고 부정성과 대결하며 역사를
형성한다.
그러나 속물에게는 이 과정이 뒤집혀져 있다. 즉 역사를 형성하는 부정성이 없음에도 형식적 부정성을 만들고 가
상의 대립을 향유한다. 다시 말해, 부정의 계기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하고 대립하여 주체를 형식에 맞
춰 재단한다.
거기엔 내면이 없고, 진정성이 없고, 고양되는 실체가 없다. 핵심은 주체를 형식에 맞추어 텅 비워놓는 것이다.
코제브는 할복을 예로 든다. 즉 할복을 해야 할 이유나 진정성이 없음에도 할복이라는 형식을 채택하여 자살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할복한 주체가 아니다. 할복이라는 ‘형식화된 가치’다. 속물은 고양되지 않는다.
속물은 타자의 형식을 물신화하고 재생산한다. 거기에는 역사가 없다. 반복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하여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일본인도 원칙적으로는 이 순수한 속물주의에 의해서 무상의 자살을 행할
수 있다(고전 시대 사무라이의 칼은 어뢰나 비행기로 바뀔 수 있다). 이러한 자살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내용
을 갖고 있는 ‘역사적’ 가치에 기초하여 수행되는 투쟁 속에서 맞이하는 생명의 위기와는 무관한 것이다.”
역사의 끝에서 우리는 인간으로 살 수 없다.
부정성이 제거된 완벽한 환경 속에서 달콤한 먹거리와 더 튼튼해진 근육을 갈망하는 동물이 되거나, 타자의 형식
과 욕구에 완벽하게 부합되도록 자아성형과 통제를 감행하며 미소짓는 속물로 살 수 밖에 없다. 동물과 속물로
전화한 우리는 니체의 ‘최후의 인간’을 닮았다.
부정성과 진정성을 앞에 두고 우리는 “사랑이 무어냐? 창조가 무어냐? 동경이 무어냐? 별이 무어냐? (...) 이렇게
묻고 눈을 깜박거린다.” 최후의 인간은 독일어 Der letzte Mensch의 번역어다. 흥미롭게도 코제브에 의해 속물로
명명된 일본인들은 ‘末人(말종인간)’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동물과 속물은 감각과 인정욕구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더불어 생존으로 모든 것을 축소
시키며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우리가 무엇을 상실했는지 아프게 환기시킨다.
그것은 헤겔을 대할 때 선명하게 드러난다. 진정성의 인간으로 육화한 헤겔을 대할 때, 동물과 속물로 변한 우리
는 불편하다. 하지만 분노하지 않는다. 우리는 혐오한다. 분노는 부정성을 맞이하여 부정의가 전제될 때 품는
감정이다.
그러나 혐오는 다르다. 분노와 비슷한 감정이지만 개인의 기호, 즉 취향이 반영된 감정이다.
분노가 공적인 성격을 지닌다면 혐오는 개인의 호오를 반영한 사적인 감정이다.
거기에는 자아와 부정성을 고양시키는 보편성의 차원이 결여되어 있다.
다르게 말한다면 우리가 상실한 것은 공적지평이다.
주체의 진정성은 자신의 취향과 인정욕구를 폐쇄적으로 추구하는 ‘덕후의 자기 윤리’(4)로 전락했다.
타자는 부정성으로 감지되지 않는다. 불편할 뿐이다.
부정성의 타자는 나의 취향과 미감을 거스르는 것으로 환원된다. 그럴 때 부정성은 가차없이 혐오의 대상이 된다.
저런 것이 내 앞을 얼쩡거리는 것은 운이 나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시라도 빨리 치워버려야 한다.
그렇게 조림돌림을 시행하고 혐오발언을 쏟아부어 대상을 제거한다.
그 뒤에 남는 것은 만족스런 감각과 인정욕구뿐이다. 공적 지평은 사라지고 사적 차원으로 회귀한다.
상황은 간단하지 않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속물과 동물은 주어졌지, 선택의 대상이
아니었다. 공적지평을 망실시키고 생존의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사회적 압력은 나날이 높아져 간다.
압력을 견디다 못해 우리는 혐오와 조리돌림을 시행한다. 그 끝에 남겨진 것은 허탈감과 무력감이다.
그런 우리를 보며 헤겔은 눈물을 흘린다. 어쩌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우리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진정성을 회복하여 다시 인간으로 고양될 수 있을까? 헤겔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는 전진하지 후퇴하지 않는다. 거기엔 비약이 없다. 현재의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처음으로 되돌리는
기만도 없다. 더불어 각 시대에 처한 개인은 “그 시대의 아들”이며 “자신이 속한 시대를 초월한다고, 로도스 섬을
넘어가리라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p100)일 뿐이다.
다만 “부정적인 것의 곁에 머무르면서 그것을 직시함으로써 자신의 진리를 획득하는 능력을 지니게”(p52)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67.폴 비릴리오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독특한 철학예술 사상가 폴 비릴리오이다.
지각과 체화 문제에 대한 철학적 관심을 기본으로, 사회와 정치 발전 문제에도 중요한 인식을 보태고 있다.
그의 사유 폭은 놀라우리만치 넓어서 다방면의 학문에 없어서는 안 될 준거점을 제공한다.
현대 테크놀로지, 속도, 질주학, 속도공간, 빛시간, 가상화, 시각기계, 가상 현존, 사막화, 원격현전, 순수전쟁, 제4전선,
정치 공간, 정치 시간, 시간정치, 예술 사고…….
폴 비릴리오는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이래 우리 시대의 정치와 사회, 예술 논의에서 빠지지 않는 독특한 위치의 사상
가이다.
비릴리오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사상가인 것은, 아마도 그의 저작이 테크놀로지 문제에 대한 철학의 지속적 관여에
근거하기 때문일 것이다.
21세기를 사유하는 현대 사상가
폴 비릴리오Paul Virilio(1932~ )는 근본적으로 지각과 체화embodiment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나, 사회와 정치 발전
문제에도 깊은 조예를 드러낸다.
그는 지속해서 다양한 주제에 관여하여 전쟁 및 군사전략의 문제, 영화의 역사, 현대 매체 및 통신의 속성, 우리 시대
문화 및 예술 생산의 형편 등을 다룬다.
그의 사유 폭은 놀라우리만치 넓어서 다방면의 학문에 없어서는 안 될 준거점을 제공한다.
정치와 국제관계이론 및 전쟁학, 매체 및 사회이론, 미학, 도시계획 및 환경 사유를 망라하는 비릴리오의 광범위한
관심사 안에서 테크놀로지 문제가 중심이 되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테크놀로지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비릴리오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사상가인 것은, 그의 저작이 테크놀로지 문제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 지속적으로
관여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릴리오의 저작은 테크놀로지가 어떻게 왜 지금까지 인간 경험의 형성 및 역사 발전에 근본이 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인지를 보여 준다.
우리는 테크놀로지를 주로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본다. 다시 말해, 특정 목적에 사용하는 도구로 본다.
이때 이 도구 자체를 중립적 혹은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곧잘 가정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분명 우리의 일상과 운동, 통신 형태가 우리가 사용하는 테크놀로지로 구조화되고 결정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비릴리오는 “인간과 테크놀로지가 순환 관계에 놓여 서로를 결정짓고 서로에게 작용”하는 방식을 고찰한다.
속도는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었나
처음부터 비릴리오는 인간과 테크놀로지 사이에 존재하는 이 순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특히 운송과 통신을 아우르는 전송 테크놀로지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비릴리오는 속도의 사상가이자, 전송속도 증대가 개별 지각을, 사회생활과 정치 생활 및 문화생활을 결정지은
방식을 사유한 사상가로 널리 알려졌다.
비릴리오는 속도나 상대운동을 우리 경험이 펼쳐지는 고유 영역 혹은 매체로 바라본다.
현대 운송 및 통신 테크놀로지로 인해 우리는 빠르게 이동 및 통신할 수 있지만, 그 대신에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일이 늘었다.
이렇듯 그는 시간 및 공간 조직과 상대운동, 즉 감속과 가속이 개별 및 집단의 시공간 파악력을 결정짓는 방식에 관심
을 기울인다.
벤야민과 후설의 영향
비릴리오의 전망과 접근법은 20세기 초 큰 영향력을 발휘한 사상가들과 연속성을 갖는다.
비릴리오는 테크놀로지 형태에 따른 감각 지각의 ‘조직’이나 ‘훈련’을 이해하려 한다는 점에서 발터 벤야민의 뒤를
따르고, 지각에 대한 이해에서는 에드문트 후설이 세운 현상학의 사유 방법에 기댄다.
그 결과, 비릴리오는 현상학적 사유의 전통을 계승하기도 하고 넘어서기도 하면서 테크놀로지의 현대성과 우리 시대
의 사회, 정치 및 문화 형식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요 불가결한 개념적ㆍ이론적 자료를 계속 제공하는 영향력
있는 프랑스 사상가로 꼽힌다.
68.피에르 클라스트르
피에르 클라스트르(Pierre Clastres,1934~1977)는 프랑스의 정치인류학자이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한국에는 이 책만이 번역되었다.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파라과이와 베네수엘라의 인디언들과 함께 생활하며 연구를 했다.
오래 전 뒤르켐이 '종교 생활의 기본 형태'를 원시 사회를 통해 연구함으로써 중요한 성과를 거둔 것처럼 클라스트르
가 '정치 생활의 원초적 형태'를 원시 사회를 통해서 밝히려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시도였다.
클라스트르는 폭력과 국가, 지배, 복종의 문제를 자신의 필생의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야만의 상태를 종식하기 위해서 인류에게 국가가 필요하다는 홉스의 견해에
반대하여, 그리고 마르크스의 변증법적인 사회진화를 부정하고 원시사회는 국가로 발견되지 않은 사회가 아니라
국가라는 기계에 대항하는 사회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 내에 존재하는 독단적인 권력 행사를 견제하기 위한 장치들은 사실 그 내부에 저항의 원리를 귀속
시켜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행사하는 권력은 반드시 억압과 압제로 귀결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비자연적인 국가 상태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일방적인 권력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순수한
작동으로서 여기고 이것과 적당한 합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존재론적 차원에서 그와 같은 과정 자체를 철저
하게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국가는 역사적 발전 단계가 아니라 개개인들을 착취 억압하는 기계이며, 사회가 만들어낸 잉여를 한 곳에
집중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각각의 개인들은 자신의 삶의 필요 이상의 노동을 하게되고, 그렇게 생산된 잉여는 권력을 가진 소수의
몫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착취에 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클라스트르가 말한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이다.
이 사회의 특징은 잉여 생산물의 철저한 파괴, 뚜렷한 정치와 권력의 분리 등이 있다.
69.칼 포퍼
칼 포퍼는 1902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개신교로 개종한 유대 혈통의 중산층이었다. 그러나, 포퍼는 생애 내내 인종이나 혈통에 의해 사람을
분류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자신도 스스로 유대인으로 분류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나치즘에 대해서도 시오니즘에 대해서도 모두 반대하였다.
포퍼는 부모로부터 루터교 신앙을 물려받았으며 빈 대학교를 수료했다.
그의 아버지는 장서 수집가였으며 12,000 ~ 14,000 권 가량의 책을 개인 서고에 모았다.
포퍼는 아버지로부터 책들과 함께 도서 수집벽도 함께 물려받았다.
1919년 포퍼는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어 학생 사회주의 협회에 가입하였으며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포퍼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유물론에 회의를 품게 되어 탈당하였으며 이후 사회자유주의를 지지하였다.
그는 1928년 심리학 박사 학위를 획득하였으며 1934년 첫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를 출간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심리주의, 자연주의, 귀납론, 논리실증주의 등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서술하였다.
1937년 나치의 준동과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인해 포퍼는 뉴질랜드로 이민하여 캔터베리 대학교의 철학 강사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1946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대학교의 런던 정치경제학교(LSE)에서 논리학 및 과학적 방법론을 강의하
였다. 1949년 교수에 임용되었으며, 1976년 런던 왕립 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포퍼는 세속적 휴머니즘 협회의 회원이었으며 스스로를 불가지론자이기는 하나 기독교와 유대교의 도덕적 전통을
존중하는 사람이라 밝혔다.
70.윌라드 반 오만 콰인
윌러드 밴 오먼 콰인(Willard Van Orman Quine, 1908년 6월 25일 ~ 2000년 12월 25일)(친지들은 그를 "Van"이라 칭했다)
은 분석철학의 전통을 따르는 현대 미국의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이다.
1930년부터 70년 후 그가 사망하기까지, 콰인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하버드 대학교와 계속적인 관계를 맺었다.
처음에 그는 하버드의 학생이었으며, 그 다음에는 철학 교수이자 수학 교사였고, 마지막에는 퇴임 후에도 여러 저서
를 새로 펴내거나 개정한 명예 교수였다.
그는 하버드에서 1956년부터 1978년까지 에드거 피어스 철학과 학과장(Edgar Pierce Chair of Philosophy)으로 재임했다.
최근 철학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한 인터넷 투표에서 콰인은 지난 200년 사이의 철학자들 중 가장 영향력이 큰 다섯
철학자 중 한 명으로 꼽혔다.
그는 1993년에 "언어와 의사소통 학습이 어떤 식으로 사회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증거들에 기초해 있는지에 관한, 그리
고 그러한 사실이 인식론과 언어의 의미 이론에 끼치는 영향에 관한 그의 체계적이고 날카로운 논의들 때문에 1993년
롤프 쇽 상(Rolf Schock Prize)의 논리학 및 철학 분야의 최초 수상자가 되었다
콰인은 철학은 개념 분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관점에 동의하는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분석 철학의 전통에 정면으로
맞선다.
그의 중요한 저작으로는 분석 명제와 종합 명제의 구분을 공격하고 의미론적 전체론의 한 유형을 옹호하는 "경험주의의
두 도그마" 1951)와, "두 도그마"의 입장을 발전시킴과 함께 악명 높은 번역 불확정성 논제를 소개하는 "단어와 대상"
(1960)이 있다.
또, 그는 "우리가 어떻게 해서 불충분한 감각 자료에 기반하여 정교한 과학 이론을 발전시키는지에 관한 발전된 과학적
설명의 제시를 시도하는, 영향력 있는 자연화된 인식론의 한 유형을 발전시켰다.
, 그는 그의 "과학 자체로부터 나온 자료들에 기반하여 과학을 이해하려 한 체계적인 시도(systematic attempt to understa
nd science from within the resources of science itself)"때문에 과학 철학에서도 중요하다.
이러한 견해로부터 그의 "과학 철학이면 철학으로 충분하다(philosophy of science is philosophy enough)"라는 경구가
나온 것이다.
71.움베르토 에코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미학자, 언어학자, 철학자, 소설가, 역사학자다.
1932년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피에몬테주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변호사가 되길 원한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그는 토리노대학교에 진학해 중세 철학과 문학을 전공했으며 1954년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6년에서 1964년까지 이탈리아 라디오-텔레비전에서 문화부장으로 일하면서 토리노대학교에서 강의했다.
그 뒤 피렌체와 밀라노에서 가르치다 1971년 볼로냐대학교의 철학 학부 기호학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2007년 은퇴
했다. 은퇴 후에도 열정적으로 저술활동에 몰두했으며 2016년 2월 19일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학술 활동
움베르토 에코의 초기 연구 분야는 미학이었다.
그의 첫 저서는 자신의 박사 논문을 발전시켜 발표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문제(Il problema estetico in San
Tommaso)〉(1956)다. 1962년에는 미학 분야에서의 주요작품인 〈열린 작품(Opera aperta)〉(1962, 개정판 1972·
1976)이 출간되었다.
이 저서는 현대음악과 상징주의적인 시, 프란츠 카프카와 제임스 조이스 등의 문학이 근본적인 모호함을 가지고 있
어서, 해석하고 창조하는 과정에 독자나 청중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유도한다는 내용을 시사한다.
이 저서로 움베르토 에코는 학자로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움베르토 에코는 기호학(記號學)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기호학이란 간단한 신호부터 복잡한 언어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호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기호학과 관련된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영어로 발표한 〈일반 기호학 이론(A Theory of Semiotics)〉(1976)과 〈
기호학과 언어 철학(Semiotics and the Philosophy of Language)〉(1984) 등이 있다.
1971년에는 최초의 국제 기호학회지인 〈베르수스〉의 편집자를 맡았으며, 1974년에는 국제기호학회를 조직해 활동
하기도 했다.
그는 여러 저서를 통해 미학과 기호학뿐 아니라 문학 비판, 미디어 문화 연구, 인류학 등 또 다른 분야를 계속 탐구했다.
비평과 역사, 커뮤니케이션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대부분이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
기호: 개념과 역사(Il segno)〉, 〈매스컴과 미학(Apocalittici e Integrati)〉,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Il Superuomo
di Massa)〉, 〈해석의 한계(I Limiti Dell' Interpretazione)〉, 〈구조의 부재(La Struttura Assente)〉 등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는 2000년대 들어 수백 명의 학자로 구성된 유럽 문명 프로젝트가 진행하는 〈중세(Il Medioevo)〉
시리즈 기획에 참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