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인의 몰락, 갑술환국(甲戌換局) ♡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힘겹게 집권한 후 민가에서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유행했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라
철을 잊은 호랑나비 오락가락 노니, 제철 가면 어이 놀까
이 노래에서 미나리는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를, 장다리는 희빈 장씨를 의미한다. 그리고 양쪽에서 왔다갔다 날아다니는 호랑나비는 숙종을 말한다.
궁궐에서 쫓겨난 인현왕후(仁顯王后) 는 친정집이었던 안국동에 거주하며 임금이 계신 창덕궁을 늘 바라보면서 살았고, 왕의 마음도 노래와 같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숙종(肅宗)은 조강지처(糟糠之妻)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게다가 장희빈의 미모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었다.
또한 다른 후궁들을 질투하고 방자하게 행동한 장희빈의 태도는 더욱 숙종(肅宗)의 마음을 떠나게 했고, 여기에 숙종의 새로운 여인이 등장하니, 그녀가 바로 무수리 최씨였다.
무수리는 궁궐의 최하층 천민이었다.
최씨는 궁녀들의 옷을 빨아주는 천민이었고,
야사에 의하면 그녀는 인현왕후(仁顯王后) 의 직계 몸종이었다고 한다.어느날 숙종(肅宗)은 헛헛한 마음으로 궁궐을 거닐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방에 촛불이 켜져 있어 호기심에 가 보니 웬 어린 무수리가 상을 차려놓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그녀는 "오늘이 인현왕후(仁顯王后) 생신인데 궁궐 밖에 계시니, 이렇게라도 중전마마를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고 답하였다.
숙종(肅宗)은 무수리 최씨의 모습을 기특하게 여겨 그날 밤 그 방에서 그녀에게 술 한 잔을 따라 보라고 했다.
장희빈(張禧嬪)이 찬 밥이 되는 순간이었다.
숙종의 환심을 얻은 무수리 최씨는 훗날 아들 연잉군을 낳고 숙빈(淑嬪)이 되었다.
숙종(肅宗)의 마음이 장희빈에게서 멀어지자 이러한 마음을 눈치 챈 서인들은 재빨리 인현왕후(仁顯王后) 복위운동을 했고,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갑술환국(1694,甲戌換局)이었다
서인 김춘택이 인현왕후 복위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이 남인들에 의하여 숙종(肅宗)에게 알려졌다
그간 무능하고 편파적인데다 뻑하면 상대를 모략하는 남인에게 신물이 난 숙종은 이 모함을 기회로 남인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며, 왕비 장옥정(張玉貞)을 폐비하여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하여간 주관없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숙종(肅宗)의 변덕도 알아줘야 한다.숙종(肅宗)은 즉위한 후 20여 년에 걸쳐 정국을 뒤집어 엎기를 여러번, 남인과 서인은 서로 모함하고 역모를 고발하여 정정은 개판 일보 직전이었다.
숙종(肅宗)이 서인과 남인이 벌이고 있는 음모와 모함의 한 가운데서이를 해결할 대책에는 전혀 접근하지 못한 채, 당쟁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잔머리를 굴리는 동안 조선의 병은 시름시름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 장옥정(張玉貞), 사랑에 살다 죽다 ♡
장옥정(張玉貞)이 희빈(禧嬪)으로 강등되면서 그동안 잘 나가던 오빠 장희재(張希載)도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귀양길에 올랐다.
장희빈(張禧嬪)은 왕비 자리에서 쫓겨난 후 질투심과 원한으로 이를 갈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숙종도 정이 다 떨어졌는지 더 이상 장희빈의 처소를 찾지 않았으며, 장희빈(張禧嬪)도 왕과 왕비에게 후궁들이 날마다 올리는 문안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일종의 냉전이었으며, 이후 장희빈(張禧嬪)은 거의 8년간 잊혀진 후궁이 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장희빈(張禧嬪)은 취선당 골방 한 구석에 신당(神堂)을 차려놓고 두세 명의 무수리와 함께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자신이 중전으로 복위하기를기도하고 무당을 불러 저주하는 굿을 하게 했다. 이러던 중인 1701년 인현왕후가 덜커덕 종기로 죽었다.
그렇다면 장희빈(張禧嬪)은 다시 중전에 올랐을까?
인현왕후의 죽음은 장희빈의 바램을 이루어주기보다 오히려 그녀를 궁지로 몰아 세웠다.
인현왕후(仁顯王后) 가 저주로 죽었는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숙종은 장희빈(張禧嬪)이 중전을 홀대하고 저주하는 일을 벌였다면서 장희재를 처단하고 장희빈을 자진시키라고 명했다.이유는 인현왕후의 죽음이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라고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이 무고의 옥(巫蠱의 獄)에 관련하여 저주의 밀고를 한 인물이 바로 영조의 모친인 숙빈 최씨였으며, 당시 장희빈(張禧嬪)의 아들인 세자 이윤(李昀)은 14세였다
장희빈(張禧嬪) 처소의 계집종들과 장희재의 처가 잡혀와서 고문을 받았으나,장희빈은 절대 목숨을 끊을 수 없다고 버티었다.
대신들이 자진을 시키는 것은 너무하다고 말렸으나
숙종(肅宗)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사람을 죽여 나갔다. 결국 장희빈(張禧嬪)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사약을 마시고 죽었고, 그녀의 종 10여 명은 맞아죽거나 능지처참을 당했다
장희빈(張禧嬪)의 죽음은 그녀를 소재로 한 사극의 백미(白眉)를 이룬다.
사극을 본 사람이라면 발악하며 사약을 거부하는 장희빈(張禧嬪)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기록에서는 장희빈(張禧嬪)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대신 서인에 의해 쓰인 <수문록>에 의하면 '장희빈(張禧嬪)이 죽기 전에 세자에게 위해를 가해 병신으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장희빈
(張禧嬪)의 최후는 악녀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극적인 요소를 위해 각색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상 장희빈은 서인과 남인의 당쟁에 희생된 불쌍한 여자였을 뿐이다.재수없이 변덕스러운 숙종을 만났던 것이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숙종 28년, 장희빈(張禧嬪)을 사사시키고 10개월이 지나자 43세의 숙종(肅宗)은 왕비 간택령을 내렸다
세번째 왕비였으며, 간택된 여인은 숙종보다 27세나 어린16세의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