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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10일(어버이 주일)
룻기 3:11~18
우리의 가정이 안식처가 되려면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본문접맥적 주제설교 형식
김규태 목사
where?
고(故) 이어령 선생이 한 공중파방송에서 <이어령의 100년 서재>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명동 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설문 조사 형식으로 물어보았습니다. “집에는 무엇이, 누가 있어야 행복할까요?” 그 질문에 “어머니”라고 대답한 사람도 있었고, “아내”라고 대답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중에 이렇게 대답한 자가 있었습니다. “집에는 dog, 즉 ‘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때 이어령 선생이 그 말을 받아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dog의 앞뒤 글자를 바꾸면 무엇이 되지요? God, 하나님 입니다. 집에는 God(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공중파방송에서 한 지성인이 외친 ‘집에는 하나님이 계셔야 행복하다’라는 외침을 듣고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출처: 왕대일, 「일상에서 만나는 구약의 언어」(두란노, 2025);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5년 8월호), 251쪽에서 재인용.
오늘 본문에는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 한 가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시어머니의 이름은 나오미였고, 며느리의 이름은 룻이었습니다. ‘나오미’란 이름에는 “기쁨”이란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잃고, 두 아들까지 잃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기쁨’이라고 부르지 말고 ‘고통’이란 뜻을 지닌 ‘마라’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나오미의 가정이 베들레헴을 떠난 이유는 양식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 모압으로 이주했지만, 그곳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상실의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어느 날,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데리고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룻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룻도 시어머니처럼 남편을 잃고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룻이 계속 상실감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돌봐야 할 시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룻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매일 밭에 나아가 떨어진 보리 이삭을 줍는 일을 했습니다.
먼 옛날, 남편 없이 여인 둘이 지내는 일이 어떠했을까요? 남편은 일종의 울타리와 같은 역할을 해줍니다. 그런데 자신을 보호해 줄 울타리 없이 두 여인이 스스로 생계문제를 해결했을 때, 그들이 느꼈을 막막함은 얼마나 컸을까요?
더구나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시간은 일꾼들이 보리 추수를 마치고 타작마당에 모여 추수의 기쁨을 누리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룻의 가정은 어떠했습니까? 누군가는 추수의 기쁨을 누리는데, 룻의 가정은 그들처럼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며느리 룻을 위해 안식할 곳을 구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절에서 나오미는 룻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야 하지 않겠느냐”(1절)
나오미가 룻에게 말한 ‘안식’은 ‘보금자리’를 의미합니다(새한글성경). 나오미는 룻에게 안식을 가져다줄 ‘보금자리’를 구해주고 싶어 했습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오늘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에도 룻이 구한 안식이 있습니까? 가정은 안식이 머무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가정이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국가데이터처(옛, 통계청)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인 가구가 처음으로 800만 가구를 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36%로 역대 최고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특히 1인 가구의 약 20%가 70세 이상이 독거노인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소득과 자산은 우리나라 전체 평균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외로움을 느낀 이들이 훨씬 많다고 합니다. 1인 가구의 경우, 몸이 아플 때, 돈이 필요할 때, 우울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답한 비중이 전체 평균보다 낮았습니다.
-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251209071900002?utm_source=chatgpt.com
실제로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2025년 사회조사 결과’를 보면, 10명 중 4명이 ‘외롭다’라고 답했습니다. 13살 이상 인구 중 약 38%가 ‘평소 외롭다’라고 응답했고, ‘가끔 외롭다’라고 응답한 이들은 33.5%, ‘자주 외롭다’라고 응답한 이들이 4.7%였습니다. 특히 사회적 교류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고립·은둔 고위험군’이 15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출처: https://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1228654.html?utm_source=chatgpt.com
최근 여러 조사에서 나타난 한국 사회의 모습은 단순히 혼자 사는 사회를 넘어, “정서적으로 고립된 사회”가 되어가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특히 가족 안에서도 대화 단절, 관계 피로, 외로움, 정서적 거리감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what?
그렇다면 우리의 가정에 안식이 머무르게 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요?
첫째로, 우리의 가정은 책임을 통해 세워집니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라”라고 명령합니다(3절). 여기서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으라”라고 한 말은 성적인 유혹을 시도하라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이 명령은 당시의 문화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고, 상실의 아픔을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전환하라는 몸짓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이희성, 「생명의 삶」, 두란노, 2026년 5월호, 52쪽).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라고 명령했는데, 이러한 표현도 성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기업 무를 자에게 보호와 책임을 요청하는 청혼 행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4절; 이희성, 52쪽).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룻은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잠을 자고 있던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에 누웠습니다. 잠에서 깬 보아스가 깜짝 놀라자, 룻은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라고 청혼합니다(9절).
룻이 이렇게 보아스에게 청혼할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입니까? 보아스가 룻의 기업을 무를 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9절). 당시 이스라엘에는 “기업 무를 자” 제도가 있었습니다. ‘기업 무를 자’를 히브리어로 “고엘(גאל)”이라고 부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가난하여 땅을 팔았으면, 친족 중에서 가장 가까운 자가 기업 무를 자가 되어 땅 갚을 대신 지불하고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식이 없이 죽었다면, 가장 가까운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맞아 자식을 낳아 주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낳은 자식은 죽은 자의 기업을 이어받아 죽은 자의 이름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업 무를 자는 ‘대신 책임지는 사람’,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키는 사람’, ‘무너진 가문을 다시 세우는 사람’입니다.
당시 나오미의 가정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습니다. 남편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기업도 잃었습니다. 가문의 미래도 끊어질 위기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한 가정이 소멸할 위기에 처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며느리 룻은 간곡히 요청합니다.
“우리 가정을 책임져 주십시오.”
“무너진 이름을 다시 세워 주십시오.”
보아스는 이러한 룻의 행동을 성적인 유혹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추측할 수 있는 단서가 무엇입니까? 보아스는 룻이 “젊은 자를 따르지 않았다”라고 평가했기 때문입니다(10절). 룻은 육체적인 소욕을 따르는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보아스는 룻을 ‘현숙한 여인’으로 이해했습니다. 11절에서 보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룻이 현숙한 여인’이라는 평가는 보아스 한 개인의 평가를 넘어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평가였습니다. 룻은 공동체로부터 현숙한 여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보아스도 룻을 현숙한 여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렇게 평가한 이유는 그녀가 무너진 가정을 세울 수 있는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잠언 31장에는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현숙한 여인은 무너진 공동체를 세웁니다. 현숙한 여인은 남편을 세우고, 자녀를 세우고, 가정을 세웁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라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자기에게 청혼하는 룻을 ‘육신의 정욕에 물든 자’가 아니라 무너진 가정을 세우는 ‘현숙한 여인’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책임 있는 자세로 룻의 청혼에 응답합니다. 보아스는 “당신이 나의 기업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라는 룻의 이야기를 듣고,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라고 축복합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노라고 룻에게 약속합니다.
다만, 보아스는 자기보다 먼저 기업 무를 책임을 진자가 있다는 사실을 룻에게 알려줍니다. 보아스는 개인적인 감정에 매이지 않고, 여인을 향한 욕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보아스는 공동체의 질서 안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보아스의 책임적인 자세는 다음 날 날이 밝자 ‘성읍 문’에서 나타납니다. 당시 ‘성읍 문’은 공적인 평가와 명예가 형성되는 공간이었습니다. 보아스의 약속은 어두운 밤 타작마당에서 둘만의 은밀한 약속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성읍 문’이라는 공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약속을 신실히 이행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개인의 약속은 공적인 자리에서 지켜져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도 개인적인 체험을 넘어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사실,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는 우리의 가정을 세우는데 책임적인 자세가 중요하다는 교훈보다 더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우리의 가정에 안식이 머무르려면 우리의 책임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만,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가정은 은총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룻이 시어머니의 명령에 순종해서 보아스에게 나아갔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만 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가 할 말을 네게 말하리라”(4절) 룻의 순종도 중요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보아스의 응답과 책임도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한계는 보아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현숙한 여인으로 이해하고, 자신은 기업 무를 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보다 먼저 기업 무를 책임을 진 자가 자기 책임을 보아스에게 양도했을 때의 일입니다. 분명 룻에게는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었기에,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회를 주셔야만 가능했습니다.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에는 인간의 책임이 강조됩니다만, 그보다 더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은총의 절정을 고엘 제도에서 보게 됩니다. 보아스는 룻과 나오미를 위해 기꺼이 기업 무를 자가 되어 줍니다.
보아스는 무너진 가정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이름을 살리고, 상실의 아픔을 겪는 가정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어 줍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고엘 제도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보아스의 모습은 하나님 은총의 절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고엘이 되십니다.
우리도 죄로 인해 무너진 존재였고, 영적으로 가난하고, 무기력하며,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될까요?
how?
사역자 잭 프로스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군인 출신으로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습니다. 머리를 반드시 짧게 깎아야 했고, 말 한마디 친근하게 한 적 없는 전형적인 군인이었습니다. 잭 프로스트는 그런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집을 나가 마약을 파는 가게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약 중독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그와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그가 일하는 가게를 1년 동안 400번 찾아올 정도로 끈질겼습니다. 그러나 잭 프로스트는 고집스럽게 아버지를 외면하며 단 한 번도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잭 프로스트는 기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고, 이후 사역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는 곧 유명한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는 탓에 교인들과도 불화했고, 아내와 자식들과도 관계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어느 날, 잭 프로스트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를 새롭게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들’이 아닌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을 만나기 위해 아들이 일하는 가게의 문이 닳도록 찾아온 아버지의 애타는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 아버지가 나를 끝까지 기다리고 계셨구나!”
하나님을 믿은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과 친밀한 만남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공동체에 모인 우리가 받는 가장 큰 축복은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을 만남으로 우리 삶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출처: 김병삼, 「액션 플랜」(두란노, 2015);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0년 1월호), 169쪽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가정이 안식처가 되기 위해서는 책임과 함께 은총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안식은 책임 없는 자유에서 오지 않습니다. 책임지는 사랑과 함께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만 우리의 가정은 안식처가 됩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이 참된 안식처가 되어 하나님을 노래하고, 행복을 나누는 아름다운 일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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