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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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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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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qSFlJwvux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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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무수한 고통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쁘고 환한 얼굴, 초긍정 낙관주의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말을 갈아탄 바오로 사도를 향한 유다인들의 증오와 분노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열성 유다교 신자요 촉망받던 미래 지도자감 청년 바오로였기에 유다인들이 느꼈던 상실감과 배신감은 대단했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 입장에서 배반자요 매국노인 바오로 사도를 절대로 그냥 놔두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개종은 수많은 다른 유다인들의 개종으로 이어졌기에, 어떻게서든 신속히 그를 제거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를 향한 극에 달한 유다인들의 반감과 적개심이 오늘 첫 번째 독서에 잘 소개되고 있는데, 참으로 끔찍한 광경입니다.
“그 무렵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사도행전 14장 19절)
몰려온 군중은 스테파노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바오로 사도에게 큼지막한 돌들을 인정사정없이 투척했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날아오는 돌세례에 바오로 사도는 순식간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유다인들은 바오로 사도가 죽은 줄 알고 쾌재를 부르면서 그를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습니다. 다들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듯 속시원해 했습니다.
다행히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워낙 정신력과 의지가 강한 분이라 치명적인 돌팔매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되찾았습니다. 비틀비틀 겨우 일어선 그는 피투성이인 몸을 이끌고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거의 죽었다 되살아난 상태에서 바오로 사도가 받은 정신적 충격이나 트라우마가 상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복음 선포 여정을 계속 걸어갔습니다.
제가 바오로 사도 같았으면 우선 응급실로 갔을 것입니다. 여기저기 상처난 부위 치료도 받고, 뇌파 검사도 받고, 진단서도 끊고, 고소장도 접수하고, 충분히 회복될 때 까지 몇달이고 휴양을 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상처투성이의 몸을 이끌고 데르베로, 데르베에서 리스트라로, 리스트라에서 이코니온으로, 이코니온에서 안티오키아로 발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끔찍한 고통과 박해 속에도 바오로 사도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했고 의연했습니다. 언제나 제자들을 격려하고 고무(鼓舞)시켰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행전 14장 22절)
주님의 복음 때문에 바오로 사도가 겪은 고통은 정신적이거나 심리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실제적으로, 육체적으로 끔찍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겪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신자들에게 소개하곤 했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 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코린토 2서 11장 23~27절)
그 무수한 고통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쁘고 환한 얼굴, 초긍정 낙관주의로 주님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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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apyxTzVsp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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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자녀의 양식을 위한 어머니의 자기 봉헌>
오늘 복음도 역시 요한복음으로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하는 이유를 최후의 만찬상에서 제자들에게 설명하시는 대목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당신이 아버지께 가야만 성령을 받아서 보내주실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니 아버지께 가는 방법이 비록 십자가의 죽음이기는 하나 오히려 성령을 받게 되므로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신비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잘 드러납니다. 성모님은 포도주가 없는 교회를 떠나 예수님께로 향하십니다. 포도주도 없는데 예수님께 가시는 성모님이 교회 처지에서는 섭섭하고 안타깝고 불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예수님께 믿음으로 포도주의 기적을 받아내십니다. 그렇게 교회가 성령의 포도주에 취해 다시 혼인 잔치를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는 어머니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오히려 즐거워해야 합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자녀에게 꼭 필요한 것을 받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젊은 부모들이 이 신비를 이해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내가 남편과의 사이가 좋지 않다면 남편으로부터 사랑이 오지 않아 자녀는 매우 불안해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어떤 아이는 아버지가 자신을 지우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 대인기피증과 불안장애를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혼자는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나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서라도 남편에게 자신을 봉헌하고 남편은 그런 아내에게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녀를 위해 부모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자녀를 위해 부모가 할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은 부모가 모두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봉헌하는 제대는 항상 십자가입니다. 부모가 먼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면 자녀 또한 자신들이 창조한 것이 아닌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게 되고 그 믿음이 자녀에게 전달됩니다.
아프리카 동부의 어느 부족은 아이의 생일을 정하는 그들만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날이나 잉태한 날이 아니라 아이가 어머니 마음에 들어온 날이 아이의 생일이 됩니다.
그러면 아이는 언제 어머니의 마음에 들어올까요? 이를 위해 어머니는 아기를 잉태하기 전 마음을 신에게 열기 위해 마을을 벗어나 숲의 나무 아래 가서 앉습니다. 앉아서 하늘에서 오는 노래를 기다립니다. 이 마을 부족은 모두 각자 자신의 노래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로 말하면 태몽과도 같은 것입니다. 최소한의 물과 음식에 의지하며 며칠씩 기다리다 보면 특별한 멜로디와 가사가 떠오르는데 그러면 아이가 마음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날이 아이의 생일이 되는 것입니다.
아내는 돌아와 남편에게 그 멜로디를 들려줍니다. 남편도 그 노래를 배워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함께 부릅니다. 자녀를 맞아들이는 준비입니다. 그렇게 잉태하면 배 속에 있는 아기를 부를 때마다 그 노래를 불러줍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온 마을 사람들이 아기를 환영하는 마음으로 그 노래를 부릅니다. 아기가 자랄 때도 결혼할 때도 그 노래를 불러줍니다. 심지어 잘못해서 꾸지람을 받아야 할 때도 온 마을 사람들이 그 노래를 불러줍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노래를 들으며 자신이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님을 다시 깨닫고는 하늘의 뜻대로 살려고 결심하게 됩니다. 물론 장례 때도 사람들은 그 노래를 부릅니다. 다시 신에게 그 영혼을 맡기는 것입니다. [출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나의 노래는’, 류시화, 더숲]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 가톨릭교회에도 적용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분이 아기를 잉태했을 때 신구약 성경을 두 번을 통독했는데 정말 남들과 다른 착한 아기가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분명 아기는 부모의 마음과 감정과 믿음을 먹고 삽니다. 그러니 부모가 그 믿음을 지니기 위해 십자가의 봉헌을 먼저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고 겁에 질려 도망쳐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제자들에게 줄 성령을 받으려 하늘로 가신 것입니다.
아기를 위해 하늘로부터 받는 노래가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자녀들을 믿음으로 지켜줄 것입니다. 아기를 잉태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아기에게 줄 성령을 먼저 받을 수 있는 믿음이 있느냐가 부모의 자격이 될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 사춘기 이전에 성모님이 그러하셨듯이 주님께 아이를 봉헌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부모가 먼저 하느님께 봉헌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부모가 받은 성령으로 자녀를 키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치 부모가 신에게 자신을 봉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성령께서 오시고 성령을 통해 그분이 우리 안에 사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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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27-31ㄱ :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27절) 평화는 내적인 조화이고 영적인 평온이며 마음의 순박함이고 사랑의 유대이며 자애로운 친교라고 할 수 있다. 평화는 미움을 없애며 전쟁을 그치게 하고 분노를 억제하며 교만을 없애고 인간애를 실천하고 불화를 잠재우며 원수와도 화해하게 한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평화를 실천할 때, 그 평화는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상속자가 된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상속재산으로 주셨다. 그러기에 이 평화는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 평화는 그분 안에 있고 그분에게서 온다. 그것은 당신의 현존에서 오는 것이다. 바로 그분이 우리의 평화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평화라고 우리가 믿을 때나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1요한 3,2) 때나 우리의 평화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유언형식으로 사도들에게 이 평화를 남기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하느님이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28절)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는 것이 좋은 일임을 말씀하신다. 이는 사랑하는 이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슬퍼하기보다 기뻐해야 함을 설명하시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위대하시다는 것은 당신이 하느님이시자 인간이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당신이 인간으로서 하신 말씀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시므로 더 위대하시고, 아들을 낳으신 분으로 위대하시고,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스럽게 해주십사고 기도하시므로 위대하신, 아버지로서 더 위대하신 분이다.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께 근원을 두고 있다는 말씀이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29절)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분께서 살아 계시고 당신 아버지께 올라가시는 것을 그들이 보게 되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믿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들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30절) 이 세상의 우두머리는 유대인들이나 로마민족만이 아니라,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권세와 권능들을 말한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들은 그들의 무지로 말미암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분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에게 속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말하는데, 그분에게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신 분이시기에, 아버지의 뜻을 어긴 일이 없으신 분이시기에 죄를 짓지 않으셨다. 그분이 돌아가신 이유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31)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아버지께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게 하려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다. 주님은 하느님의 능력으로 죽음을 파괴하실 것이며,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 될 것이다. 아드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다. 목숨을 바치시면서 까지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 자신을 바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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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주교회의 사무국장)]
주님께서 말씀하신 평화가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깨닫는 요즈음입니다. 일상적이고 편안한 옷과 같은 자연스러운 평화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하게 느끼는 나날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작은 일에도 걱정하고, 힘들어 하고, 두려움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믿음을 두기보다, 세속적인 것에서 기쁨과 평화를 찾으려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쟁과 다툼이 없는 상태나 외적인 안락함은 결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참된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이며,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참된 평화를 얻고자 하느님께 나아가고, 자신을 되돌아보며 회개하고, 하느님 안에 고요히 머무릅니다. 이러한 머무름에서 우리는 참된 행복을 얻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 2,14)이시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는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며, 원수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며, 자신의 잘못을 기워 갚음으로써(로마 5,6-11 참조) 얻어집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무덤으로 온 여인들에게 “평안하냐?”(마태 28,9) 하고 물으십니다.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신 그리스도’(콜로 3,11 참조)와 함께 있는 교우 여러분! “평안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이 흔한 인사는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합니다(콜로 3,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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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평화’는 예수님께서 신앙인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들’ 가운데에서 최고의 선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믿음으로’ 기도하면, 기도하는 그 순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게 됩니다. 그것은 큰 은총을 받은 일입니다. 물론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도 큰 은총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얻게 되는 평화는 그것보다 더 큰 은총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평화’가 무슨 물건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해서 우리가 자동적으로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어 누리려면 우리 쪽에서 잘 받아야 합니다. 우선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믿음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누리기를 희망해야 합니다. 믿음과 희망이 있어야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잘 받을 수 있습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마음이 산란해지고 겁을 내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거나 흔들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믿음을 굳게 지켜서, 내가 주는 평화를 잘 받아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주시는 평화는 일시적인 편안함이 아니라 영원하고 참된 평화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화는 ‘아무 일 없음, 몸의 편안함’ 등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영혼의 평화’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이 말씀은,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는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영혼의 평화가 아니라 몸의 편안함만 찾는 자들이 많다. 그들 때문에 마치 내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온 것처럼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얻으려면, 칼로 잘라내듯이 거짓 평화를 잘라 버려야 한다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최고의회 의원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때문에 로마 군대가 자기들을 짓밟을 것이라고 걱정하자(요한 11,47-48), 대사제 카야파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9-50) 이 말은, 민족의 평화를 위해서 예수님을 희생시키자는 뜻인데, 그가 생각하는 평화는 ‘몸의 편안함,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을 죽이고, 거짓 평화를 선택했습니다.)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요한 14,28)
예수님께는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고, 제자들을 버려두고 떠나시는 일도 아닙니다. 부활로 가는 과정이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여기서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이라는 말씀은, “너희가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는다면 내 말을 알아들을 것이고, 내 말을 알아듣는다면”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이 아버지께 가는 일이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광을 얻는 일이라는 것을(요한 17,1-5) 믿을 것입니다. 또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로 해석됩니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29-31ㄱ)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예고하신 것은, 그 일이 ‘모르고’ 당하시는 일도 아니고, ‘힘이 없어서’ 당하시는 일도 아니고,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는 일이며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나더라도, 즉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더라도 믿음을 잃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의 당부입니다. 이 말씀은, 각 개인의 인생에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앞일을 모릅니다. 살다가 어떤 일이 생기면, 그 일이 왜 생겼는지, 자기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어서 당황하거나 두려워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각 개인의 인생도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섭리’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자신의 인생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하느님의 사랑은 변함없음을 믿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쪽에서 스스로 포기하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목숨을 빼앗기는 일이 아니라, 당신이 내주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신다는 말씀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신다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인류 구원이라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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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마이클 셀던의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고 있습니다. 책에서 그는 ‘능력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성공하고, 많은 부를 소유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입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가난과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부익부와 빈익빈을 인정하는 논리입니다. 대부분의 재화를 상위의 소수의 사람이 독점해도 된다는 논리입니다. 2000년대를 풍미했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근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마이클 셀던은 이와 같은 ‘능력주의’는 기독교 윤리에서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기독교는 ‘상선벌악’의 신학을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 성공한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해석하였습니다. 미국이 위대한 것은 미국이 선하고, 정의로운 편에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반대로 재난과 고통은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회정의가 없는 긍정의 신학, 번영의 신학에 근거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긍정과 번영의 신학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와, 병든 이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들이 아픔을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그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라자로는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부자는 평생 부유하게 살다가 지옥에 가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이를 도와주라는 가르침입니다. 라자로는 비록 가난하지만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이를 도우면서 하느님 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능력주의를 말씀하시 않으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으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 위해서 였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박해를 받아들이고, 순교하였던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상선벌악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가 요구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욥처럼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때 감사했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실지라도 감사드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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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필종 도미니코 신부님]
<예수님의 마지막 인사, 평화>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상에서의 마지막 인사 말씀을 하십니다.
“내 평화를 여러분에게 줍니다”(요한 14,27).
평화의 인사는 보통 작별인사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고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도대체 왜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당신의 평화”는 다른 것입니까?
여전히 전쟁의 참상은 지구촌을 할퀴고 있으며, 힘센 나라는 주변의 약속 국가들을 그럴 듯한 외교적인 언사로써 요리하려 합니다. 한시도 이 지구상에 총성이 그친 적은 없었던 듯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으로 참혹합니다. 전쟁의 당사자들이 제일 많이 쓰는 단어가 바로 ‘평화’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이스라엘의 고도(古都)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를 말하며, 그들이 주고 받는 매일의 인사는 “샬롬” 곧, 평화를 말합니다. 우리 말로는 “안녕하십니까?”와 똑같은 의미입니다. 얼마나 평화가 부재한 체험이 가득하면 평화를 그토록 아침저녁으로 외쳐야 했겠습니까?
평화가 없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평화만큼 절실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이 단어만큼 그 의미가 퇴색하고 식상해버린 단어도 없다 싶습니다. 무의미해졌다는 말이 더 옳게 여겨집니다.
세상은 강자의 논리가 더 쉽게 적용되고 지배적인 듯이 보이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힘없고 빽없는 사람들이나 외쳐되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버린 지 오랩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그게 그렇게 다르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그분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는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들여다 볼 때 비로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유다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굳게 잠그고 있던 제자들에게 홀연히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여러분에게 평화!”(요한 20,20)라고 인사하십니다. 이 장면이 시사하는 바는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두려움이라는 벽으로 둘러싸인 그들의 그 벽을 없애주시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성서 본문은 “문들이 잠겨 있었다”(요한 20,26)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바로 우리 안에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벽들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그 벽들은 바로 우리 자신의 편견과 독선, 완고함과 아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종교와 이데올로기, 신념과 가치가 상충하면서 만들어 놓은 그 벽은 너무도 견고합니다. 우리는 그 안에 자신을 가두어 놓고 결코 밖을 향해 자신의 열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성채 안에서 마치 왕이라도 된 양 거리낌 없이 살아갑니다. 그 선과 벽은 숱한 오해와 비판, 단견이라는 자식을 낳고, 그 선과 벽을 더욱더 굳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 가운데 서시며 “여러분에게 평화!”를 선포하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벽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그 벽을 마치 있는 것처럼 생활하며 살고 있습니다.
가족 간의 벽, 친척들 간의 벽, 성당과 성당과의 벽, 교구와 교구 간의 벽, 종교와 종교 간의 벽, 지역과 지역 간의 벽 등등. 이런 것들을 너무도 당연시 하고, 그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벽이 없다 하시는데 우리는 자꾸만 그 벽을 높여갑니다.
이는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처럼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벽이 없다면 너무도 사는 것이 두렵게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의탁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느님만 믿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너무도 용기가 없는 우리들을 한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 바로 이어 나오는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일어나 여기서 떠나갑시다.”(요한 14,31)
그렇습니다.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서는 먼저 두려움에 사로잡혀 웅크린 자신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이는 용기를 상징합니다.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 벽을 과거와의 단절로써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옛 것은 허물어지고 새로운 아침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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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정민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
<평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미사에서 평화의 인사 전에 매일 듣는 이 말씀은 사실 예수님의 작별인사입니다.
유다인들의 일상적인 만남과 작별의 인사인 ‘평화’라는 말을 사용해 제자들에게 인사하시며, 당신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평화’는 단지 육신의 편안함뿐만 아니라 참된 행복과 자유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참된 행복의 원천은 이 세상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심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신부로 살든 수도자로 살든 그 부르심의 본성상 하느님과 멀어지면 그에게는 삶이 힘들어지게 마련입니다. 십여 년의 길지 않은 사제생활을 되돌아봐도 늘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신부, 수도자뿐이겠습니까?
사람 자체가 자신의 창조주의 목소리인 양심에 따라 살지 않으면 괴롭고 힘들기 마련입니다. 웬만큼 마음이 무디어져 그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원한다면 세상이 주는 거짓 평화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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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예수께서 주시려는 평화의 원천>
어제 복음묵상에서 언급하였듯이 요한복음이 전하는 최후만찬 석상에서의 원초적인 고별사는 13-14장으로 끝난다. 오늘 복음이 바로 고별사의 마지막 부분이다.
오늘 미사전례의 복음으로는 봉독되지 않지만 예수께서는 "자, 일어나 가자"(31b절)라는 마지막 말씀으로 고별사를 마감하시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최후의 몇 시간을 향하여, 즉 유다의 배반과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힘차게 걸어가신다. 제자들도 이 시간을 함께 지내도록 초대받는다.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언급된 '협조자이시며 진리의 성령에 관한 약속말씀'에 오늘 복음의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와 '예수의 다시 오심'이 연결된다.
예수께서 주시려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27절)고 하지만 사실 세상은 자신이 줄 수 있는 평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은 오히려 불안과 걱정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세상은 평화를 원하고 또 평화를 위해 노력한다.
평화란 평온하고 화목한 것으로 전쟁이나 분쟁의 상대적 개념이다. 평화의 내용과 의미는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여왔다. 동양문화권에서의 정적·내향적·비정치적인 데 비해 서양문화권에서는 동적·외향적·정치적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근대에 들어 세계평화는 앞의 전자에 해당되는 듯한 반전주의나 이상주의의 한 기둥과, 후자에 해당되는 듯한 국제주의나 현실주의의 다른 기둥으로 도모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철저한 반전주의의 입장을 취하여 왔다.
오늘날 세계평화를 위한 노력은 UN의 정신이 주도하고 있으나, 그 입장은 서양문화권을 대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로마제국주의 시대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와 중세기 십자군원정과 흡사한 것으로서 제국 내에서는 통일과 질서를 구현하면서도 제국 밖으로는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전쟁도 불사한다는 것이다.
만약 세상이 평화를 준다면 그것은 하늘이 주는 것이며, 하늘이 주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한시적인 만족에 불과하다. 예수의 제자들도 불안과 걱정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세상의 온갖 악과 고통과 두려움, 믿어지지 않는 세상 사건에 대한 하느님의 기나긴 침묵은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공동체에 머무는 자는 세상의 모든 걱정과 불안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떠나가심'은 '다시 오심'을 위한 것이다. 신약성서 공동체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곧바로 이어질 사건이나, 어떤 빠른 시간 안에 이루어질 재림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다시 오시기로 한 예수님이 기대한 시간 안에 오시지 않게 되자 세상의 마지막 시간에로 생각을 옮기게 된다. 이를 일컬어 초대교회가 경험한 '재림지체(再臨遲滯) 현상'이라고 한다.
상황이 어찌되었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의 약속은 불안과 걱정의 세상에 대한 모든 희망의 근거로 충분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온갖 불신의 요소를 제공하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하시는 것이다.(29절) 이제 마지막 시간이 목전에 다가왔고 세상의 권력자가 가까이 오고 있다.
세상의 권력자란 우선 사탄의 도구로 예수를 팔아 넘긴 유다(13,27)와 예수를 체포하러 오는 군대(18,3)를 구체적으로 의미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볼 때 이 권력자는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그래서 생명이 없고 죽음만 가지고 있는 세상의 권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세상의 권력이 잠시나마 예수보다 더 우세하게 보인다. 그렇다고 세상이 예수님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30절) 즉 죽음이 생명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대로 실천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31절)
그렇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강요에 의해 생명을 바치시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죽음에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며, 예수께서 아버지를 사랑하는 이유에서다. 결국 세상은 예수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만들어내는 죽음의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과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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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평화의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주님께서는 단지 남기고만 가신 것이 아니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고 하시며, 분명히 우리에게 상속재산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평화롭지 못하다면, 무슨 까닭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성경>에서 “평화”란 단지 외적으로 갈등이 없고 내적으로 고요한 상태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는 전쟁이 없는 조약이나 힘의 균형 상태나 평온하고 태평스러운 안정된 상태만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현존의 결과로 나타난 그분 다스림의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는 평화로,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 있고, 그리스와의 일치 안에 있을 때 충만해지는 평화입니다. 그것은 사랑과 정의와 진리의 실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서 평화를 선물로 받은 우리는 마땅히 평화를 지켜야 하고, 평화의 파괴를 막아야 하고,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타인을 위해 자신이 죽음으로써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자신의 것을 타인에게 내어주고 비워짐으로써, 타인을 떠받들고 자신이 낮아지고 작아짐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기에, 오히려 세상의 평화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기만적인 안전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바란다면, 오히려 하느님의 평화가 항상 우리를 뒤흔들어 놓기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이처럼, 우리가 평화를 얻는 길은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하오니, 주님! 평화를 위해 가시관을 쓰게 하소서.
누르고 빼앗고 장악하고 차지해서가 아니라, 내어주고 비워져서 평화로워지게 하소서.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가라앉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음에 평화롭게 하소서.
오늘 하루 평화롭기를 바라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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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주님!
평화를 위해 가시관을 쓰게 하소서.
창에 찔리신 당신 가슴으로 세상을 품게 하소서.
누르고 빼앗고 장악하고 차지해서가 아니라,
내어주고 비워져서 평화로워지게 하소서!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가라앉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음에 평화롭게 하소서.
오늘 하루, 평화롭기를 바라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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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14,27)
<참 평화!>
예수님께서 남기고 가신 평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어떤 평화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어떤 평화인가?
세상이 주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나, 내 뜻이 이루어졌을 때 찾아오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의 평화가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평화는 단순히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만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더욱 완전한 정의를 인간 사이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얻어지는 것입니다."(219항)
세상이 주는 평화는 고통이 찾아왔을 때, 쉽게 깨지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고통이 찾아와도 쉽게 깨지지 않는 평화입니다. 오히려 고통을 뛰어넘어 가게 해 주는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오늘 독서(사도14,19-28)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는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14,22)
고통을 뛰어넘어 가야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깨지지 않는 평화, 곧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간직하고 있어야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평화를 얻으려고 애쓰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떤 평화 안에 머물러 있는가?
오늘도 지나치게 세상이 주는 평화만 얻으려고 애쓰지 말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참 평화를 얻으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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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은 붙잡지 않습니다>
요한 14,27-31ㄱ (성령을 약속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 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사랑은 붙잡지 않습니다>
돌아오신다는 님을
흔들림 없이 믿기에
다시 만날 날을
새하얗게 바라며
떠나시는 님을
기꺼이 보내드리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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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종양내과 전문의가 쓴 책을 보았습니다. 환자를 보며 체험하고 느낀 점을 적은 에세이 책이었습니다. 이 안에서 인상 깊은 내용을 볼 수 있었습니다.
폐암 말기 환자가 있었는데 가족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혼했고 또 자식이 없었으며, 같이 살던 동거인도 병세가 깊어지자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이제 가능성이 없는 상황이라 호스피스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남동생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4~5년 전쯤 사업한다고 2억을 빌려 간 뒤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돈을 갚지 못했고, 그 뒤로 서먹서먹해져서 연락이 끊긴 것입니다. 호스피스팀의 노력으로 동생과 연락이 되었고 드디어 동생과 형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형은 뼈와 가죽만 남은 몸으로 산소마스크에 의지한 채 숨만 쉬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동생이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눈물을 펑펑 흘리며 형을 안았는데, 바로 그때 형이 동생을 보며 아주 힘들게 천천히 말했다고 합니다. “내 돈 2억 갚아라!”
이 세상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동생을 향해 내뱉은 말은 ‘돈’이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형은 평소에 ‘돈’을 첫째 자리에 놓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사랑을 말하지 못하고 돈을 말했다는 사실이 슬프게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자신이 제일 크게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과거의 순교자들은 죽음의 순간에서 “예수, 마리아”를 외쳤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외칠 것 같습니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죽음 앞에서 그분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모두를 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평화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지요.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같지 않다고 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주는 것이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이 세상을 더 힘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이 주님의 마지막 말씀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의 배반, 큰 사랑을 주었던 사람들이 반대편에 서서 주님을 향해 던지는 악의적인 말과 행동들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접지 않으십니다. 사랑을 지우는 이유가 그분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 그 사랑을 가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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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잘 지냅니다.>
누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누님의 지인이 갑곶성지 미사에 왔는데 제가 너무 살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누님이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사실 작년 12월 23일부터 오랫동안 5인 이상 집합 금지가 계속되어서 가족 모임 자체를 하지 못했습니다. 몇 달을 보지 못했으니 살이 쪘는지 말랐는지 알 수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문득 들은 생각은 살찌는 것이 왜 문제일까 싶었습니다. 그만큼 잘 먹고 잘살고 있다는 증거인데요. 물론 비만이 좋을 리가 없으니 살찌는 것을 걱정하겠지만, 매일 유산소 운동과 근육 운동을 하는 저이기에 굳이 걱정할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운동도 하는 사람과 운동만 하는 사람. 먹기도 하는 사람과 먹기만 하는 사람. 어떤 사람이 건강할까요? 운동도 하고 먹기도 하고…. 그밖에 다양한 활동을 하는 사람이 건강합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다양하게 하고 있으며, 또 규칙적으로 합니다.(그래도 살이 찌는 것은 왜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모두 잘 지내십시오. 저는 이렇게 살찌면서 잘 지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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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평화와 기쁨>
-주님의 참 좋은 선물-
참 많이도 가장 많이 고백성사시 보속으로 써드린 말씀 처방전인 다음 바오로 사도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주변 상황에 상관없이 항상 기쁨, 항상 기도, 항상 감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 때 참 평화의 삶일 것입니다. 이런 평화는 순전히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얼마전 읽은 교황님에 관한 기사 제목이 재미있었습니다.
“교황님은 성 베드로 성전에서 거룩한 묵주기도로 기도의 마라톤을 시작하시다.”
‘기도의 마라톤(Marathon of Prayer)’이란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5월 성모성월 마침내 기도의 마라톤 경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삶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죽어야 끝나는 평생 장거리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그러니 5월 성모성월 한달뿐 아니라 평생 꾸준히 한결같이 끝까지 ‘삶의 마라톤’과 더불어 ‘기도의 마라톤’ 묵주기도를 바쳐야 하겠습니다.
주변에서 보면 이런 훌륭한 한결같은 기도의 마라톤 선수들이 많습니다. 바로 이런 이들에게 주님은 참 평화를 선사하시고 이런 분들은 주변을 평화롭게 합니다. 사실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도 주님의 평화일 것입니다.
“교황 ‘북한, 준비되면 가겠다’”
는 5월2일자 가톨릭 신문 기사도 반가웠습니다. 교회 안팎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북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높아지고 있는 중에 교황님은 다시 방북에 대한 의지를 피력하셨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물론 세계의 평화에 세기적 전환점이 될 교황님의 기적적 북한 방문이 꼭 성취되었으면 소원이겠고, 이를 위해 우리 모두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참 평화의 선물을 찾아 끊임없이 수도원을 방문하는 이들입니다. 수도원이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은 주님의 평화 하나뿐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피정집 한 곳의 명칭은 ‘평화의 집’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집인 수도원은 평화의 집, 기도의 집, 환대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참 제가 좋아하는 영성체 예식중 주님의 기도후 평화의 인사 나눔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선물인 평화임을 깨닫습니다. 특히 강조하는 말마디는 ‘항상’입니다. 한 때는 부주의로 이 좋은 말마디를 빼놓고 지적후에는 명심하여 마음에 새기듯 힘주어 발음하는 ‘항상’입니다. 산상설교의 참 행복선언에도 나오는 평화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이 말씀을 고백성사중 말씀 처방전의 보속으로 써드렸을 때 기뻐하던 형제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참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참 평화를 갈망하나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이요, 평화와 전쟁을 살아가는 참 모순적, 역설적 존재인 인간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주님 현존 자체가 평화입니다. 오늘 주님은 제자들을 떠날 때도 평화를 선물하셨고 부활후 나타나셨을 때도 우선 선물한 것이 평화였습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선물하시는 평화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아무도 빼앗아 갈 수도 빼앗아 올 수도 없는, 우리가 거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내적평화입니다. 제 집무실 입구에도 예루살렘을 순례했던 분이 선물한 ‘샬롬SHALOM’이란 글씨가 새겨진 판이 걸려 있습니다. 고통중에도 함께 하는 평화입니다. 죽음도 박해도 그 무슨 고통도 빼앗아갈 수 없는 내면의 중심으로부터, 주님으로부터 샘솟는 평화입니다.
이런 평화는 단지 폭력의 부재라기 보다는 더 깊고 긍정적이 어떤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신다는 확신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그러니 주님이야말로 평화의 샘입니다. 바로 성인들의 특징도 이런 평화와 기쁨입니다. 성인들의 특징은 평생 휴식이 없었고, 늘 심신의 고통이 따랐다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죽어야 휴식인 성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끊임없는 고난과 병고, 노고의 와중에도 늘 샘솟는 사랑의 열정에 깊고 고요한 평화와 기쁨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모두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살아 있는 성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보십시오. 주님 평화의 반사체反射體처럼 그 존재자체로 주님의 평화를 발산發散하면서 희망의 표징이 되고 있습니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바쁜 분이 교황님일 것이나 교황님은 언제나 평화의 빛으로 가득한 분위기입니다.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제1차 선교 여정을 마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오기 까지의 지칠줄 모르는 끈기와 열정이 놀랍습니다. 다음 두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하고 말하였다.’(사도14,22)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머물렀다.’(사도14,27-28)
주님의 평화가 이런 지칠줄 모르는 한결같은 열정의 선교를 가능하게 했음을 봅니다. 안티오키아 평화의 교회 공동체에서 오래 머물면서 주님 평화로 영육을 충전시키는 제자들입니다. 때때로 수도원을 영적 주유소, 영적 충전소라 부르며 찾는 교구 사제도 생각납니다. 바로 우리 수도 공동체가 끊임없이 매일 평생 규칙적으로 바치는 공동전례기도가 바로 주님 평화의 발전소이자 평화의 샘임이요, 우리를 평화의 샘 공동체로 만들어 줌을 깨닫습니다.
정말 우리 마음이, 우리 공동체가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평화가 없다면, 기쁨이 없다면, 희망이 없다면, 감사가 없다면 얼마나 공허하고 삭막하겠는지요! 그러나 고맙게도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 은총이, 특히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공동체는 물론 우리 하나하나에게 평화와 기쁨, 감사와 희망을 가득 선물하십니다. 주님 평화의 성체를 모시면서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평화가 되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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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진정한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내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예수님께서 떠남을 전제로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가시지만 제자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남기고 가겠다고 하십니다. 당신의 부재에 제자들이 분리불안으로 주저앉지 않도록 미리 준비시키시는 듯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을 해 주시지요.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이 실현됨을 보면서 비로소 믿고 굳건히 설 수 있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평화가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무탈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상태가 세상의 평화라면, 예수님의 평화는 좀 다릅니다.
진정한 평화는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소명이 자기 안에 충만한 상태가 아닐까 합니다. 모두가 자기다움을 누리며 존재하는 평화의 상태는 각자 이기심과 탐욕, 타인의 기대나 시선에 안주하지 않는 투쟁이 전제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자기다움이라는 평화에 도달하여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각자의 부르심, 소명, 목적에 맞갖게 존재할 때 비로소 온 누리에 평화가 공존하는 것이지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어쩌면 앞으로 제자들은 산란하고 겁날 일을 많이 겪게 될 것입니다. 메시아라 믿었던 스승의 체포와 수난, 죽음은 물론 예수님의 부활 이후 교회가 겪게 될 박해까지 첩첩산중, 사실 갈수록 태산이지요.
그런 도전과 역경이 없을 때 누리는 심리적 감정적 안정감이 "세상이 주는 평화"라면, 그런 시련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담대하고 굳건히 하느님 자녀다움, 그리스도의 제자다움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바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입니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이 없다."(요한 14,30)
세상의 우두머리, 어둠의 권세가 덮쳐도 예수님은 그 힘에 휘둘리지 않으십니다. 악의 힘인 어둠이 빛이신 예수님께 어떤 권한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일찌기 예수님은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가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요한 10,18)라고 하신 바 있지요. 예수님이 맞이하시게 될 죽음은 인류를 구하시기 위해 스스로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신 온전한 자유의지의 순종이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안티오키아에서 파견되었던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여러 상황을 겪고 무사히 파견받았던 곳으로 귀환하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 14,22)
사도들은 신도들의 믿음과 성장에 기쁘고 감사하기도 하고 또 적대자들의 배척과 위협에 죽을 고비까지 넘기면서 그 일을 완수합니다. 좋은 일만 있지 않았고 그렇다고 나쁜 일만 있지도 않았지요. 꽃길만 걷지 않았고 가시밭길만 걷지도 않았습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스승의 길을 뒤따르면서 맞닥뜨린 모든 일을 평화 안에서 맞이하고 견디며 나갔다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평화입니다. 모든 것을 견디어낸 평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 자녀다움과 그리스도 제자다움, 주님의 신부다움을 잃지 않는 평화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 믿나이다. 알렐루야"(영성체송)
우리의 죄와 낡은 인간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그리고 찬란히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 부활의 기쁨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의미지요. 죽음을 각오한 이는 이미 평화를 획득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 존재하고 살아갈 때 평화롭습니다. 아무리 물질이 충족되어도 내면의 헛된 탐욕이나 남 눈치만 따라가다가는 진정한 존재적 평화에 도달하기 어렵지요.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존재적 평화, 소명을 충만히 살아가는 각자의 평화를 관상하고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평화의 성령께서 함께하시며 힘을 북돋아 주시고 믿음을 충실히 하도록 격려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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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기도 생활의 기본은 가정에서 시작해야
프랜시스 맥넛의 「치유 기도」라는 작은 책에서 부부가 함께하는 법을 배우라고 촉구한다. 매일 부부가 함께 기도함으로써 얻게 되는 기쁨 외에도 기도 생활이 중요한 이유는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아플 때 부부가 함께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맥넛은 가톨릭교회 공동체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응답자 중 20퍼센트만 어머니와 함께 기도한 적이 있다고 답했고, 3퍼센트는 아버지와 함께 기도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기도 생활의 기본은 가정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곧 기도 생활이 중심이 되는 삶을 바탕으로 한 헌신은 각 가정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오늘날 서구사회에서 그토록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교의 근본 가르침을 외면하게 된 이유도 바로 각 가정에서 그 기본을 세우는 데 실패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맞는 기도 방법 찾기」에서
♣갓난애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즉시 탯줄을 끊고 발목을 잡고 거꾸로 해서 첫 숨이 터지도록 해야 비로소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롭게 새사람이 됩니다. 세상의 탯줄을 끊고 비로소 하느님의 숨결로 숨을 쉬어야 영혼이 살아나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의 숨결로 숨쉬게 되어야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가족 기도 생활을 통해서 튼튼한 심장으로 그리스도인으로 비로소 살아갑니다. 가족 기도 생활을 통해 기도가 삶의 중심이 되지 않으면 영혼의 숨이 끊겨 죽은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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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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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1Ts2yn076A&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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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 27)
우리의
삶은
평화를
지향한다.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이다.
삶은 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평화는
우리관계의
참된
본질이다.
본질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참된 본질인
평화(平化)는
두려움이 아닌
삶의 의미를
되찾아주는
참된 관계
회복에 있다.
평화는
그래서
서로를
살린다.
욕망은 욕망을
만들어내지만
평화는 평화로
생명을 살린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주님께서
계셔야하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평화가 있어야
한다.
주님 자체가
참된
평화이시기
때문이다.
삶을 대하는
모든 것이
평화이다.
삶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주는
십자가의
평화이다.
평화는
어둠을 밝히는
참된 빛으로
우리를
치유한다.
평화는
구원의
빛으로
우리를
비춘다.
진정한 관계가
구원의
관계이며
평화의 관계임을
믿는다.
평화의 완성은
은총의 완성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매순간의
은총이다.
평화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은총의
새날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새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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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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