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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니체는『선악의 저편』이 '2000년경'에야 읽힐 수 있다고 1886년 질스 마리아에서 쓴 한 편지에서 말하고 있다. 니체는 왜 이 책을 자신이 죽은 지 백년이나 지난 2000년경에나 제대로 읽힐 수 있다고 설정하고 있는 것일까? 이 책에서 니체가 진정으로 의도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1886년 8월에 출판되어 나온 이 책의 부제 '미래 철학의 서곡'이 말해주고 있듯이, 우리는 니체가 이 책을 인류의 미래 정신사의 지도를 그리고자 하는 의도로 저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악의 저편』은 니체의 가치전도와 새로운 철학의구상 시기인 1881년에서 1886년까지 5년 간의 노트와 단상 기록을 기초로 씌어졌다. 그는 1886년 10월 26일에 친구이자 화가인 라인하르트 폰 자이트리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선악의 저편』은 "내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일종의 주석서"라고 말하고 있다. 몸, 대지, 디오니소스, 생명, 여성성, 건강, 자유, 지혜, 고귀한 덕, 위버멘쉬, 영원회귀사상 등 『차라투스트라』에서 문학적으로 다루어진 내용을 이 책에서는 한층 사색적으로 다루며 새로운 미래철학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선악의 저편』은 위험한 책이다!
기존의 서양의 사유방식에 대한 대항적이며 동시에 대안적 철학을 모색하고 있기에 니체는 자신의 저서가 '위험한 책'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스위스 작가 비트만이 1886년 9월 16~17일자로 〈베른지(Berner Bund)〉에 쓴 『선악의 저편』의 서평의 내용, 즉 이 책이 다이너마이트같이 위험한 책이라는 내용을 주위 사람에게 편지로 알리기도 했다. 이는 그 스스로도 이 저서를 서양의 전통적 사유나 형이상학, 문명을 파괴하는 다이너마이트의 위력을 가진 위험한 책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니체의 이 책은 '현대성 비판', '현대 과학', '현대 예술', '현대 정치'를 다룬다.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가까운 것, 시대, 우리 주변에 있는 것", 즉 현대성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문제 의식화할 것을 요구한다. 가장
가깝게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은 그러나 더 깊은 성찰적 사유를 요구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근원적인 사유방식과 연결되어 있는 형이상학의 문제이다.
'주체' 란 없고, 또한 다양한 사유가 가능하다!
니체는 형이상학의 문제를 언어철학적, 역사적, 심리학적 차원에서 다룬다. 그는 현대성 비판을 형이상학, 즉 주체의 문제에서 시작한다. 그는 '자아' 혹은 '나' 를 지칭하는 '주체' 개념을 해체한다. 그는 데카르트가 가정하듯 하나의 이성적 주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대중의 미신' ('주체의 미신', '자아의 미신', '영혼의 미신')이라고 비판한다. 주체란 충동과 정동의 내적 활동에 대한 이름일 뿐, 하나의 원자와 같은 실체로서의 주체 또는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에게 자아란 단순한 이성적 주체가 아니라, 무의식, 정동, 충동 등이 함께 작동하는 몸의 총체적 활동에 대한 이름일 뿐이다. 인간의 자아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프로이트(S. Freud)와 라캉(J.Lacan)의 정신분석학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는 언어철학적 지평에서 사유의 방식을 문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인도, 그리스, 독일 철학 사이에서 성립되는 언어 유사성은 유사한 문법적 기능과 유사한 문법 철학을 낳게 하고, 더 나아가 초지상적인 독단적 사유를 인간에게 전파하게 한다. 이에 대해 그는 문법에서 주어 개념이 제대로 발달되어 있지 않은 우랄 알타이어권의 철학자는 인도유럽 언어권의 철학자와는 세계를 다르게 응시하며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언어의 구조가 사유의 구조를, 사유의 구조가 세계관의 구조를, 세계관의 구조가 세계에서 인간의 삶의 방식을 규정한다는 니체의 주장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계가 실은 다양한 세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유럽중심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며 다른 세계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니체의 다원주의적 세계해석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 초석이된다.
진리는 여성이다!
니체는 형이상학의 근본 오류를 현대 자연과학적 진리관에서도 발견한다. 그는 이 책의 서론에서 진리를 독단론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여성'에 비유한다. 지금까지 미숙하게 파악했던 독단주의자들의 진리 이해가 빈사상태로 있으며, 그는 진리를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진리란 여성이며, 우리는 진리에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진리는 순수 의지에 의해 추구된 객관성이나 과학성의 산물이 아니라고 보며, 그는 서양의 전통적 사유문법을 해체하고자 한다. 그는 진리의 결정불가능성을 존재를 드러내고 감추는 여성적 작용, 즉 존재의 놀이(유희)로 파악하며, 이를 디오니소스, 미궁, 바우보(Baubo), 생명, 여성 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한다.
현대예술은 영혼의 울림을 상실했다!
니체의 현대 예술에 대한 논의 역시 현대성 비판과 연결되어 있다. 현대 예술은 그 고귀한 취미를 잃어가고 있고, 유럽 영혼의 위대한 소리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예술은 보다 높은 인간, 고귀한 인류를 양육할 영혼의 울림을 주지 못하고, 협소한 민족주의적 경향을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영혼을 치유해야 할 예술이 깨어진 영혼으로 만들어낸 작품의 진열장이 되고, 고귀한 영혼 자체가 결핍된 대중 도취적 아첨의 역할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독일 음악이 유럽 영혼을 위한 목소리를 상실하고 단순히 조국애로 전락하는 위험에 처해 있다고 비판한다. 예술에 대한 이러한 니체의 비판은 현대성 비판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여전히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게 한다.
현대의 정치운동에는 인간의 퇴화라는 생리과정이 담겨 있다!
니체는 '문명', '인간화', '진보'라고 부르는 유럽의 민주화 운동의 도덕적·정치적 배후에 인간의 퇴화라는 생리학적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고 고발한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평준화와 평범화라는 무리동물적 인간이 형성되며, 고귀하고 보다 높은 인간 유형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맥락에서 자본주의나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이념도 비판한다. 그가 철학적 희망을 건 것은 고귀한 인간 유형의 창출이었다. 그가 '자유정신'을 추구한 것은 문명과 진보라는 이념 아래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작은 이해관계에만 관심을 가지며 소인이 되는 현상, 즉 인간의 퇴화현상에 대한 대안의 모색이었다. 그의 철학적 관심은 자유정신의 육성에 있었다.
자유정신은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구현된다!
니체에게 현대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바로 자유정신의 인간을 육성하는 데 있다. 그에게 "미래의 철학자는 자유정신"이며, '진정한 철학자'는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다. 그는 자신의 가치가 무리 속에 매몰되고 평준화되어 자기 소외 속에서 살아가는 병든 시대적 본능에서 인간의 진정한 과제는 바로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선과 악의 저편에서 과거와 현재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긍정하며, "가장 대담하고 생명력 넘치며 세계를 긍정하는 인간의 이상"에 새롭게 눈을 뜨는 개안(開眼)의 훈련을 요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 책의 궁극적인 의미를 가장 반(反)현대적인 인간 유형인 "귀족적 인간(gentilhomme)을 길러내는 학교"로 규정한다
이 귀족적 인간은 전통적 가치에서 해방되고 선과 악의 저편에서 선의 가치를 새롭게 창조하는 자유정신을 뜻한다.
『선악의 저편』의 현대적 의미
『선악의 저편』에서는 진리/여성의 문제, 문체, 영혼, 언어문법과 사유문법, 심리학으로서의 철학, 자유정신, 자기해방, 종교적 신경증, 인간 심리의 통찰, 도덕의 자연사, 꿈의 해석, 민주주의, 지성인 담론, 큰 정치, 쾌락과 고통의 문제, 문화와 자연성, 반유대주의 비판, 현대이념, 주인도덕과 노예도덕, 고귀한 인간 등 실로 많은 주제들이 다루어진다. 이 책은 현대철학에서 수많은 논쟁의 산실이 되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사유의 시발점 역시 이 책의 서문이다. 진리와 여성을 비유하는 니체의 문제의식은 데리다의 존재론적 담론이나 코프만의 정신분석학적 담론으로 확장된다. 진리와 사유, 세계이해와 해석의 문제를 제기하는 니체의 문제의식은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며, 다원주의의 문제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제기함으로써 새로운 문명의 사유문법을 열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니체는 인간 삶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나 심층적인 인간의 내면적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철학은 심리학적 통찰의 언어를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니체적 통찰은 현대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융의 분석심리학, 아들러의 개인심리학, 랑크의 의지심리학 등 심층심리학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놓았고, 또한 이러한 이론적 지평 위에서 게스탈트치료, 인본주의 심리치료, 실존주의 심리치료, 로고테라피 등 현대의 수많은 심리치료의 이론
들이 개발된 것이다. 최근 아헨바하의 철학실천이나 철학상담치료이론에도 니체는 많은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가 이 책에서 건져낼 수 있는 또 하나의 문제의식은 인간 소외나 왜소화 현상을 겪고 있는 현대인의 실존적 문제이다. 후쿠야마가 니체에 기대어『역사의 종말』에서 말하고 있듯이 현대인은 자신의 삶의 가치나 존재의미를 스스로에게 창출하는 대신에 사소한 이해관계에 매달리는 '최후의 인간(the last amn)'으로 살아간다. "인간은 그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니체의 주장처럼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창조하며 삶을 조형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선과 악의 이중성, 삶의 모순과 역리를 깊이 이해하고 이를 넘어서는 노력을 해야 한다. 『선악의 저편』은 현대인이 겪고 있는 자기 소외라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자기 찾기의 과제와 치유의 메시지를 함께 전해 준다.
김정현 교수(철학과)
<필자소개>
고려대 철학과와 대학원 철학과 졸업,
독일 뷔르츠부르크(Wurzburg)대학교 철학박사.
현재 원광대 철학과 교수, 한국니체학회 회장.
세계표준판 니체전집(21권, 책세상) 편집위원 역임.
역저로 『니체의 몸 철학』, 『니체, 생명과 치유의 철학』,『철학과 마음의 치유』,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이상 니체),『기술시대의 의사』(야스퍼스)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