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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1
삿 5:1-12
1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
2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3 너희 왕들아 들으라 통치자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4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5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 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6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7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
8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 때에 전쟁이 성문에 이르렀으나 이스라엘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9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10 흰 나귀를 탄 자들, 양탄자에 앉은 자들, 길에 행하는 자들아 전파할지어다
11 활 쏘는 자들의 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일을 전하라 이스라엘에서 마을 사람들을 위한 의로우신 일을 노래하라 그 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12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네가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
삿 5:1-12 / [드보라의 승전가] 드보라는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던 날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과 함께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2) `이스라엘이 원수와 싸우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겨레가 한 마음으로, 이 전쟁을 내 일로 생각하여 다른 일 모두 제쳐놓고 즐거운 마음으로 싸움터에 나갔다. 높이 높이 여호와를 드높이자. 3) 너희 왕들아! 너희 ㄴ) 지배자들아! 너희는 내 말 좀 들어 보아라. 나는 이처럼 노래하리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노래하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 노래 올리리라. (ㄴ. 군주) 4) 여호와 우리 주님, 주께서 세일 산악지대에서 나오실 때 주께서 푸른 땅 에돔 들녘에서 우리에게로 나아오실 때 땅의 지축이 뒤흔들리고 하늘조차 휘몰아쳐 구름이 비를 쏟았습니다. 5) 산이란 산마다 여호와 앞에서 흔들흔들거렸습니다. 저 시내산조차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6)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살던 시대에도 야엘이 살던 시대에도 큰 길로 다니는 사람 하나도 없었지. 인적이 드문 오솔길만 찾아다녀야 하였지. 7) 사람다운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어. 이스라엘 마을마을마다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지. 오! 드보라! 그대가 일어서기까지는 이스라엘의 어머니 그대가 일어서기까지는 8) 저마다 새로운 신들을 자기 신으로 모시다가 적군이 성문에 들이닥쳐 전쟁이 일어나도 이스라엘 4만 민병대 가운데에 방패 가진 사람 하나도 없었네. 창 가진 사람 하나도 없었네. 나서서 싸우려고 무기 가진 자, 눈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었지. 9) 내 마음 이렇듯 기쁠 수 있을까? 이스라엘을 이끄는 민병대장들이여! 제 몸 돌보지 않고 겨레 이스라엘이 쓰러질까 염려스러워 있는 힘 다하여 싸움터로 뛰어나기는 용사들이여!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이내 마음, 어찌하여 여호와를 드높이지 않으랴! 10) 흰 암나귀만 타고 다니는 자들아, 값비싼 돗자리만 깔고 사는 팔자 늘어진 자들아, 큰소리치며 대로를 활보하는 자들아! 너희는 한번 생각해 보아라. 11) 들어 보아라, 저 소리를 샘물가마다 목자들이 몰려들어 기뻐 소리 지르지 않느냐? 여호와께서 거두신 승리를 소리쳐 노래 부르지 않느냐? 이스라엘을 이끌고 거두신 그 놀라운 승전보에 뛸 듯이 기뻐하며 노래 부르지 않느냐? 이스라엘 마을마을마다 여호와를 섬기는 겨레가 기뻐 날뛰며 마을밖으로 뛰쳐나오는구나. 12) 드보라여! 깨소서, 일어나소서. 일어나소서, 일어나소서. 어찌 우리가 소리쳐 기쁜 노래 부르지 않으리오. 바락이여! 떨치고 일어나소서.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어서 서둘러 그대가 사로잡은 포로들을 끌고 가소서.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병거 구백 대를 끌고 온 시스라의 군대를 오합지졸 물리치게 하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고백입니다.
이날에 드보라와 바락이 노래하여(1-5) 이스라엘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상대를 크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므로 드보라는 바락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땅을 흔들고 산과 들판을 흔드시며 비와 구름을 통하여 능력을 나타내시며 이스라엘에 임하셨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늘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고 매일 그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구체적으로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6-12) 드보라가 일어나기 전에 삼갈의 날과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다고 합니다. 대로로 다니면 대적들이 약탈을 하거나 아니면 중한 세금을 물렸기에 행인들이 오솔길로 피하여 다닌 것입니다. 무법천지였던 당시의 시대상황을 말해줍니다(6). 또한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마을에는 백성을 보호할 성곽이 없었기에 외세의 침략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오지 않는 폐허가 되었다는 뜻입니다.(7)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이 드보라가 등장하기 까지 계속되었습니다(7). 이스라엘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이지 않았습니다(8). 여기에서 사만 명은 남자들을 말합니다. 그 남자들 중에서 방패와 창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쓰실만한 방패와 창이 없었던 것입니다(8). 그렇기에 여자인 드보라가 사사로 부름을 받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드보라를 세우신 것입니다. 드보라가 세워지고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하였기에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11절의 내용은 귀한 자들이나 천한 자들이나 다 여호와의 공의로운 일을 전하고 그의 의로우신 일을 노래하라고 합니다. 드보라는 깨어 노래하고 바락은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가게된 것을 노래합니다.
적 용 : 드보라가 자신의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향한 노래를 보면서 나의 노래, 나의 인생 시편을 써보시기 바랍니다.
글을 쓰는 한 남자가 거의 수만 페이지에 이르는 원고를 많은 시간을 투자해 완성했습니다. 절친한 지식인 친구에게 검토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집에서 일하던 아주머니가 쓸모없는 종이뭉치로 알고 그 원고를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 남자는 충격을 받고 다시는 그런 글을 쓰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과 실의에 빠져 우울한 날을 보내던 어느날 공사장에서 벽돌을 한 장씩 쌓아 높은 벽을 만드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나도 한 장씩 글을 다시 써보자.’ 그리고 그는 처음보다 더 좋은 글을 완벽하게 재생했습니다. 이 남자가 바로 프랑스 혁명사를 지은 토머스 칼라일입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길을 가다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걸림돌이라 하고, 강자는 디딤돌이라 한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우리 인생, 내 앞에는 디딤돌만 있다고 선포하고 살아갑시다.
< 설 교 >
여호와의 구원이 임할 때
사사기 5:1-31
4장에서 절망 중에 있을 때 그들을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5장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4장에서 이야기하지 아니한 부분으로 드보라가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찬양하는 면이 나옵니다. 먼저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이 있기 전의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해서 먼저 함께 보겠습니다. 본문 6절~8절에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잠깐 볼 수 있습니다. 6절에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도다”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하는 데가 바로 북쪽입니다. 삼갈은 어딥니까? 3장 31절에 보면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삼갈이 죽인 사람이 블레셋 사람들입니다. 이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남쪽에 있습니다. 남쪽에 삼갈이 사사로 있을 때에 북쪽은 그 삼갈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입니다. 거기에는 가나안 백성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에 외부 침입자들이 있습니다. 아람 족속, 암몬이나 모압 족속, 제일 아래에서 에돔 족속이 침입하지만, 외부 말고 그 가나안 땅 안에서 보면 북쪽에서는 주로 원래 그 땅 거민이었던 가나안 거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대적합니다. 남쪽에는 외부에서 온 블레셋 족속이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블레셋 족속이 지금의 가사지방-블레셋 지방, 필리스티아(Philistia) 지방에 살았습니다. 그들과의 전쟁이 계속에서 나중에 다윗왕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래서 남쪽은 블레셋과의 대적이고 북쪽은 가나안이나 외부의 세력과 대적합니다. 그 삼갈의 시대에(남쪽에서 삼갈이 사사로 있을 때에) 남쪽에서 블레셋과 모든 문제가 있을 때에 북쪽에서는 가나안 족속들과 문제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때에 “대로가 비었고 모든 사람들은 소로로 다녔더라”고 합니다. 대로로 가면 어떻게 됩니까? 거의 무정부 상태에요. 수많은 강도와 도둑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강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힘 있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합니다.
이것을 피해서 일반 서민들은 소로로 다닙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삶의 핍절함과 괴로움을 대변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서울에 가면 종로길을 한번 가보십시오. 그 넓은 종로길 말고 바로 그 옆에 우리 교회 복도길같이 좁은 골목이 있는데 그 길 이름이 피맛골입니다. 종로와 같이 광화문에서부터 종로를 따라서 작은 피맛골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거기가 음식점 골목이 되어 있는데, 원래 조선시대에 평민들이 다니던 길이 바로 피맛골이에요. 피맛골이라는 말 자체가 말을 피한다-피마(避馬)입니다. 양반이나 유력한 사람들은 대로로 다니면서 말을 타고 다니고 가마타고 다닙니다. 그렇게 길이 넓음에도 불구하고 평민들은 거기를 못 다니고 피맛골로 다녀요. 거기로 다니면 좁으니까 얼마나 복잡하겠어요? 마치 그와 같은 면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시대에 압제하는 사람들이 있고, 가나안 백성들이 대로로 다니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포함을 행하니까 그들이 대로로 다니지 못하고 소로로 다니는 그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대적이 외부에서 쳐들어와도 그들을 구원할만한 리더가 없습니다.
7절에 보니까 “이스라엘에 관원이 그치고 그쳤더니…” 그들은 리더가 없습니다. 그들을 구원할 만한, 어떤 힘을 모을만한 사람이 없어요. 심지어는 그들에게는 무기도 없습니다. 8절 끝에 보십시오. “…이스라엘 사만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고” 방패와 창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도울 힘도 없이 괴로움을 당하는 그들의 삶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남쪽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대적을 하고 있는 때에 북쪽에서는 원래 그 땅의 토착거민이었던 가나안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게 하던 바로 그 때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의 때가 꼭 안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이 고통의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임하게 되는 것을 찬송합니다.
그것이 4절, 5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내렸나이다” 세일과 에돔이라면 바로 사해바다 남쪽입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이 진행하신다는 거예요. 그 진행이 어떤 의미냐면 5절에 보니까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온 산이 진동한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저 시내산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그런데 이 뒷말은 조금 해석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는데, 그 여호와는 바로 시내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역사하시던 하나님, 시내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십니다.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온갖 화염과 천둥과 이 산이 흔들리고 진동이 있었던 바로 그 장면, 그 장면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일, 에돔에서부터 올라오시더라, 구름을 몰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가나안 족속-시스라와 철병거 9백승을 대적해서 일어났을 때 그 백성들이 다 모여서 있던 곳이 밥그릇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 같은 가파른 데가 있는 다볼산에 다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서는 우는 사자처럼 수많은 말들의 소리와 철병거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내려오기만 해 봐라, 다 짓밟아버리겠다.” 그렇게 하고 있는 때입니다. 위에서는 “여기는 못 오지?” 하지만 마음은 얼마나 떨리겠어요? 그런데 남쪽에서부터 구름이 몰려옵니다. 천둥 번개가 칩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그 시내산에서 임하실 때 천둥, 번개와 구름으로 그들에게 임하신 그 능력의 하나님이 바로 그들에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삶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언제 주님이 가장 확실하게 보입니까? 내 인생이 잘 되고, 내가 이 세상에서 성공가두를 달리고 있을 때에는 물론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크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기쁨 속에서는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우리의 양심 속에서는 말씀을 하시며, 고통 속에서는 소리를 치신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우리가 보통 모든 인생길에서 아무 일도 없을 때에는 하나님이 옆에 계신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께 감사함에도 불구하고 잘 알지 못해요. 그러나 우리가 환난과 어려움 속에 있을 때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을 간구하게 됩니다. 갈급하게 기다리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도 인생길을 가다가 어려움이 닥칠 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때, 인생의 고통이 우리에게 닥칠 때, 하나님을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 때 하나님을 향해서 고개를 들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큰 소리로 외쳐서 “내가 여기 있다!” 말씀하실 것을 들으실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다볼산 위에서 떨고 있다가 갑자기 “우르릉 쾅 쾅!” 구름이 몰려오면서 비가 쏟아지는데, 그리고 아래를 보고 있으니까 갑자기 그 무적과 같은 시스라의 철병거 9백승이 진흙탕에 빠져서 서로 빼려고 온갖 난리인 것입니다. 그때 바락의 전투명령이 내립니다. “내려가자!”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전혀 물리칠 수 없었던 시스라의 군대들, 철병거 9백승이 아무쓸모없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막 비가 오는 그 순간에 그들도 알았을거에요. 비가 오면서 철병거가 못 움직이게 된다는 것을 그들도 알았을 겁니다. 그 빗소리, 그 천둥과 번개 치는 그 소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들렸겠습니까?
마치 서부 영화속에서 주인공이 인디언들에게 포위당하고 있고 가슴 졸이면서 싸우고 있을 때 오로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뭐겠습니까? 기병대의 나팔소리입니다. 그 기병대의 나팔소리 같은 것이 그들에게는 “우르릉 쾅 쾅!” 천둥 번개치는 소리였습니다. 좀 더 한국식으로 이야기하면, 춘향전에서 “춘향아, 네가 수청을 들지 않겠느냐?” 하고 악한 사또에게 고문당하고 있을 때 “암행어사 출두요!”하는 것입니다. 그 때 이방도 막 마루 밑으로 들어가고 모든 탐관오리들이 다 숨는 그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풀리지 않고 절망중에 있는 모든 환경이 급전해서 바뀌는 그 순간에 그 손길은 누구에서부터 옵니까? 하나님께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길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삶을 지켜봐주시고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적당한 때, 알맞은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끝까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선을 행하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십시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보면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마지막에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그 면을 확실히 붙들고, 피곤하지 않게 끝까지 그 길을 간다면,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그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는 주의 백성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원하러 오실 때에, 물론 믿지 않는 자리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입니다. 마치 출애굽기 때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오직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이 싸우셔서 자기 백성들을 건져내십니다. 그런데 일단 자기 백성 된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구할 때, 그때는 하나님이 혼자 일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동참을 요구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간구하고 무슨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구할 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혼자 하시는 일들이 거의 없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기에 동참해서 싸우기 시작하는데, 드보라와 바락이 “이제 다 같이 우리가 이 가나안 백성을 대적해서 싸우자!”하고 전부 경문을 보내고 모을 때에 많은 부족들이 왔지만 안 온 부족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11절 후반부터 23절까지는 바로 그 두 가지 면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여기 보면 에브라임 지파, 베냐민 지파, 스불론, 잇사갈…, 계속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해서 순종해서 같이 싸우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오지 않은 백성들이 나옵니다. 15절 후반부부터 보십시오. 르우벤은 어땠습니까? “르우벤 시냇가에 큰 결심이 있었도다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 앉아서 목자의 저(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찜이뇨 르우벤 시냇가에서 마음에 크게 살핌이 있도다” 이들도 “우리가 같이 대적해서 하나님의 대적들과 싸우자!”하는 경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르우벤은 모든 지도자들끼리 모여서 상의를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동참해서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런데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돌볼 양떼들이 많다. 이것들을 어떻게 하고 우리가 갈 수 있는가? 갈 수 없다.” 그래서 거기서 다같이 만장일치로 결의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르우벤은 안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길르앗은 “길르앗은 요단 저편에 거하거늘…” 그들은 가려고 생각해보니까 다른 지파들보다 자기들이 손해가 더 많아요. “아니, 저 사람들이야 스불론이나 납달리는 바로 옆 동네라 별로 경비도 안 들지만, 우리는 가려면 요단강을 건너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손해를 봐야 하는데 왜 우리가 가야 되는가?” 안 갑니다. 눈 앞에 거친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 하려고 합니다. 단 지파는 어떻습니까? “단은 배에 머무름은 어찜이뇨…” 단 지파는 지금 배를 이용해서 많은 돈을 벌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하는 일이 지금 바빠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다 함께 모이자!” 할 때 안 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하나님의 그 부르심에 응하지 않습니다. 결국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한 싸움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이익 때문에요. 마치 예수님께서 말세에 대해서 이야기하실 때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나는 장가가야 되고, 나를 소를 사야 되고, 나는 밭에 가야 되고….” 온갖 우리의 삶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을 이유가 얼마든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일이 없어서 나옵니까? 바로 그 뒤에 스불론과 납달리를 보십시오. 18절입니다.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려고 할 때에 당장에는 많은 손해가 있습니다. 당장에는 여러분의 삶 속에 희생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고통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땀을 흘려야 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편히 쉬고 싶은 그 시간을 하나님께 드려서 수고해야 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생각해 보십시오.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여기 르우벤이나 길르앗이나 단 지파나 아셀 지파는 안 갔습니다. 전부 같이 모여서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이 북쪽 지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볼산에 다 모였습니다. 다볼산에 모인 그들이 무슨 경험을 합니까? 처음에는 그들이 다볼산에 올라가서 덜덜 떨었겠죠? 하나님의 뜻대로 오긴 왔는데 밑에서 철병거 9백승이 우르렁거리고 있으니까 덜덜 떨었겠죠. ‘야, 이거 우리 잘못 왔나보다. 차라리 그냥 곱게 옛날처럼 소로로 다니면서 가늘고 길게 살걸. 왜 구태여 나와서 이런 일을 당하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리죠? 철병거 9백승이 완전히 물에 잠기고 진흙탕에 잠겼죠?
바락이 이제 전쟁을 선포합니다. “자, 이제 내려가자!” 여기는 1만명, 밑에는 많아야 2천명, 1대 5입니다. 아무리 싸움 잘 하는 적군이라 할지라도 5명이 붙어서 팔 하나씩 잡고 다리 잡고 머리잡고 흔들면 이기는 것 아닙니까? 그 전쟁은 쉽죠. 쉽기도 하고 제가 생각할 때에도 신나는 전쟁인 것 같아요. 하나님의 일은 처음에는 마치 내가 희생하면서 뭔가 하나님께 도움을 주는 것 같지만, 일단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면서 보면 신납니다. 재미있습니다. 맛이 있어요. 남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는 군대 이야기입니다. 군대 이야기를 시작하면 여자들은 옆에서 “또 한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들끼리 군대 이야기하기는 참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남자들 중에서도 군대 이야기하기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방위도 있고 면제도 있어요.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은 거기서 신나게 이야기합니다. 안 갔다 온 사람들은 대면대면 합니다. 현역들이 재미있는 거예요. 한번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해 봅시다. 그 이스르엘 평지에서 가나안 백성들을 무찌른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아마 일생을 두고 그 이겼던 무용담을 서로 나눌 것입니다. “내가 그 때에는 그랬지~” 그 얘기 나올 것 아닙니까? 신나서 이야기할 거예요. 그 기분이 일생동안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전쟁에서 한 번 승리한 경험이 있다는 것, 하나님의 전쟁에 내가 동참해서 그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내가 이겼던 그 경험, 이것은 대단한 겁니다. 요즘에 TV광고에 보니까 이런 광고가 있어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데 1분이면 됩니다.” 그 광고 보셨어요? 남의 집에 신문 대신 던져주기 6초, 어르신과 함께 횡단보도 걸어가기 몇 초, 밤샘한 후배에게 커피 타주기 몇 초…, 다 합하니까 1분도 필요없어요. 그런데 그 1분을 투자한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상대편에게도 기쁨을 주었을 뿐만 아니고 그 일을 한 내가 더 기뻐져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뭔가 좋은 일, 착한 일,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살릴 뿐만 아니고 내 생명을 살립니다. 훨씬 더 기분이 좋은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선교지를 다녀오신 분들, 사람이 바뀝니다. 우리가 돕는 교회에 한번 갔다 오신 분들은 기분이 달라집니다. 어느 사회복지단체에 갔다 오시면 또 달라집니다.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다시 하게 됩니다. 하면서 우리의 삶이 달라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 얼마 전에 TV에서 한 고등학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지하철 역에서 어린 아이가 아장 아장 걷다가 갑자기 플랫홈 밑으로 떨어진 거예요. 전동차가 들어오고 있는데 떨어진 거예요. 엄마도 놀래고 모든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데, 반대편이 있던 그 고등학생이 쏜살같이 뛰어 내려가서 그 아이를 잡아채서 도로 자기 편으로 확 도망갔습니다. 그새 전동차는 들어오구요. 그리고 반대편 플랫홈으로 올라가는데 주변사람들이 다 잡아주고 도와줘서 올라갔습니다. 그게 전부 지하철 CC TV에 잡혀서 TV에 방영됐어요. 갑자기 인터넷에서는 그 학생이 영웅이 됐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시간이 흘러서 한 방송국에서 그 후로 어떤 일이 벌어졌나하고 그 학생을 찾아갔습니다. 원래 그 학생은 공부도 잘 못하고 그냥 보통이래요. 그렇다고 운동은 잘 했냐하면 운동도 그냥 보통이라고 합니다. 그저 아주 평범한 학생이에요. 그 전과 후도 특별히 달라진 게 없어요. 공부가 더 나아진 것도 아니고 운동을 잘 하게 된 것도 아니에요. 그냥 그렇습니다. 그런데 친구에게 달라진 게 뭐 없냐고 물어봤더니 친구가 하는 말이 옛날에는 그 학생이 소심하게 그냥 구석에서 조용히 있던 학생이었대요.
그런데 그 일 이후에 훨씬 더 밝아지고, 긍정적이 되고, 적극적이 되었답니다. 마지막에 그 학생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학생이 하는 말이 슬프고 힘들 때, 어려움이 있을 때, 그 때 그 일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 어린아이 하나를 구했던 그 일, 그때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했었는데 그 일을 다시 생각하고 나서는 자기 마음에 다시 슬픔도 없어지고, 마음에 짐도 없어지고, 괴로움도 없어지고, 마음이 기뻐진다고 합니다. 인생을 보는 안목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세상이 아름다워져 보이는 겁니다. 세상이 바뀌었습니까? 아닙니다. 그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에요. 하나님은 믿는 백성들에게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이렇게 안 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에는 동참하게 하십니다. “너도 같이 끼어서 일을 해라.” 동참하게 하시지만, 그 동참하는 일이 실패할 일이 절대로 아니에요. 다볼산에서 내려오는 백성들이 그들이 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겠습니까? 우리는 1만명, 저들은 2천명인데요. 이미 적들의 철병거는 하나님이 무력화시키셨는데요.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고 온갖 악을 대적해서 싸울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이길 수 있게끔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동참하게 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서, 그 싸움을 위해서 나의 작은 것, 나의 지금 하고 있는 것 중에서 포기할 일이 생깁니다. 금전적으로도 포기해야 되고, 희생하고 헌신해야 될 일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 희생과 헌신은 하나님 일에 동참한 뒤에 오게 되는 기쁨과 축복과 생명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 순종해서 다른 사람에게 복음도 증거하고 도움도 줄 때에 그 사람만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명에 더욱 활력을 불어넣는 귀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축복을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헌신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이 명령을 다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은 르우벤 지파나 길르앗 지파, 단 지파, 아셀 지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했던 에브라임 지파와 스불론과 납달리가 있습니다. 그 두 부족의 나중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며 헌신한 그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죠, 기분도 좋아지죠, 보람도 있죠, 내 삶의 의미를 비로소 다시 찾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불순종한 사람들은요? 이러한 모든 축복을 받지 못할뿐더러 그 삶은 계속해서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이 무의미한 삶처럼 느껴지게 되고 이 세상의 기쁨과 쾌락을 찾지만, 진정한 의미의 안식이나 만족이나 행복은 없습니다. 이 차이입니다. 바로 이런 면을 여기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24절부터는 이제 그 시스라가 죽은 장면이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슬로우 비디오로 나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성경도 슬로우 비디오가 있다는 것 아십니까? 27절이 바로 그 슬로우 비디오 장면입니다. “그가 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그의 발 앞에 꾸부러져 엎드러져서 그 꾸부러진 곳에 엎드러져 죽었도다” 같은 말이 계속 세 종류의 다른 말이 반복,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게 서부 영화에서 악당이 죽을 때의 슬로우 비디오입니다. 성경도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두 사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두 이방 여인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24절에 보니까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 그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복되도다…”고 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28절에 보니까 시스라의 어미가 나옵니다. 두 사람의 위치를 세상적으로 비교해보십시오. 겐 사람 헤벨의 아내인 야엘은 방랑자입니다. 유목민입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뜻에 순종하여서 하나님 뜻 한 가운데에서 시스라를 죽이죠? 여기서 보니까 어떻게 이렇게 했는지 모르겠는데, 머리 정수리에 못을 박았습니다. 이 야엘은 복을 받은 백성이라 하고, 반대편 시스라의 어미를 보십시오. 채색옷을 입었습니다. 왕궁 같은 곳에서 편안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가 자기 아들 시스라를 기다립니다. 이제 승리하고 노략물을 가져오고, 처녀들도 붙들어 올 것이라고 기다리지만, 이미 우리가 그 전쟁의 모든 결과를 알고 보면 어떻습니까? 불쌍한 여인입니다. 하나님의 뜻 반대에 있는 사람은, 비록 이 세상에서는 채색옷을 입고 있을지 모르지만, 비록 이 세상에서는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인생은 금방 판결이 날 것이고 괴로움을 당하는 인생일 것이며 그 끝은 극과 극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면이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앉은 모든 분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로 가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합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구원 중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동참하라고 권하십니다.
그리고 동참하는 그 누구에게든지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시겠다는 약속도 주십니다.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모든 축복이 없습니다. 부디 여기 함께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여기에 소망을 두고 동참합시다. 함께 순종합시다. 함께 뜻을 모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를 온전히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같이 동참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기쁨과 만족과 하나님의 복을 풍성히 받는 주의 백성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