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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일 토요일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 첫째 미사
제1독서 : 욥기 19,1.23-27ㄴ
제2독서 : 로마 5,5-11
복 음 : 마태 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어제 천상 교회의 성인들에게
지상의 나그네인 우리 구원을 위하여 전구를 청하였으며,
오늘 위령의 날에는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연옥 영혼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어제와 오늘, 이 두 날에 걸쳐 우리는 천상 교회와 지상 교회
그리고 연옥에 있는 이들이 하나임을 기억하며,
서로 기도해 주고 영적인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세상을 온전히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그 안에서 서로 온갖 것을 주고받습니다.
죽음 이후의 생명을 믿고 희망하는 교회는
이러한 관계가 세상을 떠난 이들과도 지속된다고 믿습니다.
성인들의 통공에 대한 교리는 이처럼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이
모두 주님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거룩함을 나누고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 나아가고 있는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은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자비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을 떠나보내고 세상에 남은 이들은 그리움과 더불어,
살아생전에 더 잘해 주지 못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통공의 교리는 우리가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들이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맞아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영혼을 기억하며
그들이 평안한 쉼을 얻도록 기도하는 하루로 보내기를 바랍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난달은 너무나 바쁜 일상의 연속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무엇인가에 집중할 일이 생겨서 통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두통도 있고, 피곤함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 문득 제 집무실에 있는 너저분한 많은 것들이 눈에 보였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사실 제 집무실에 많은 사람이 오거든요.
그 사람들이 이 지저분한 모습을 모두 보았을 테니까요. 곧바로 정리에 들어갔습니다.
지저분한 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자주 사용하는 것은 눈에 잘 띄는 곳에 두었습니다.
1~2시간의 정리 끝에 제 마음에 드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계속 가지고 있었던 두통과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모든 병의 원인이 ‘스트레스’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스트레스 대처법의 첫 번째가 ‘방을 치워라!’라고 하더군요.
집이든 직장이든 어수선한 상태가 불안 증대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정리 정돈을 하지 않으니,
불안이 생기고 이것이 스트레스가 된다는 말에 공감됩니다.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기에 힘듦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도 당연히 우리가 따라야 할 것들입니다.
이를 하지 못하니 평화가 없고, 고통과 시련만 가득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
일의 우선순위는 즉시 처리해야 할 중요하고 급한 일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냥 삭제하고 무시해야 할 중요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은 일에
온 힘을 기울여 스트레스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죽은 모든 이,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삶에 대해서도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이 분명히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이 세상 안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사랑을 무시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죽음 이후 힘듦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 없이 살면, 주님과 함께할 수 없기에
평화 대신 불안과 좌절만 가득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날,
우리도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 이 세상 안에서 스트레스 없이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나뭇잎들 내내 달려와, 단풍이 되었습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사라져가는 아름다움입니다.
사라져 없어져가는 아름다움입니다.
‘죽음’의 아름다움입니다.
단풍!
이토록 아름다운 변색!
그런데 사실 잎들은 가슴 속, 이미 단풍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미 있었던 것이 드러나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그 단풍을 본 것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도 매한가지 일 것입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었던 것이 드러나게 되는 일일 뿐일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을 우리가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으려 했을 뿐일 것입니다.
그러다가 막상 그 죽음을 마주치게 되면,
마치 새로운 사실을 맞은 듯이 죽으면 안 되는 것처럼
반겨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일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은 당하기 전에는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러나 우리가 눈 감고 지낸다 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절대 극명의 현실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 우리는 바로 이 현실 앞에서, 이미 죽은 이들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죽음’과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봅니다.
‘죽음’은 참으로 하나의 진정한 만남일 것입니다.
다름 아닌 그분과의 만남일 것입니다.
우리가 희망하다가, 마침내 그 희망하던 분과 만나는 바로 그 일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죽음’은 그분과 만나는 통로요, 그분께 드리는 마지막 선물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욥기>는 바로 이러한 만남의 희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계심을.
~내 살갗이 이처럼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기 19,25-27)
욥은 ‘죽음’에서 하느님을 뵙고 체험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 만남의 희망을 보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성 베네딕도는 말합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수도규칙 4,47)
이 가을, 떨어지는 단풍 잎새 하나에서 희망을 봅니다.
‘만남’을 봅니다.
그것은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이미 있는 ‘죽음’을 보는 것입니다.
이미 내 안에 계시는 그분과의 ‘만남’입니다.
결국 우리는 죽으면서 그분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죽음’은 슬픔을 넘어 아름다운 희망입니다.
사실 우리는 ‘영원’을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본래 영원불멸한 존재인 우리의 영혼이 영원하면서도 영원한 줄을 모르기에
이 세상의 한계와 제한을 통하여 영원한 존재임을 배우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악을 보면서야 선이 무엇인지를 배우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죽을 몸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
오늘도 우리는 ‘죽음’을 몸에 달고 다닙니다.
하루하루 죽으면서 삶을 살아갑니다.
새싹처럼, 내 몸 안에서 단풍을, 곧 ‘죽음’을 성숙시켜 갑니다.
아니, 영원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마지막 교부 철학자인 보에티우스(470~524)는 말합니다.
"흘러가 버리는 지금이, 시간을 만들고 머물러 있는 지금이 영원을 만든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이익보다 손해 볼 줄을, 자신보다 타인을 존중할 줄을,
옳기보다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강해지기보다는 약해지고, 능력을 갖추기보다는 무력해지고,
현명하기보다는 어리석어지게 하소서!
부서져 사라지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옳고도 지는 것이 사랑의 길임을 깨닫게 하소서.
해결하기보다 해결 받기를 즐겨하고,
해결사가 아니라 해결 받아야 할 존재임을 알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홀로 고독할 줄을 알게 하고, 진정 당신이 주님 되소서. 아멘.
죽음을 두려워 마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위령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언젠가 맞이할 죽음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이며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믿고 오늘을 이미 영원으로 알고 최선에 최선을 다해 살면
마침내 주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고
세상에 오시어 몸소 인간의 죽음을 겪으셨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서
죽음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과정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그리스도 덕분에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 안에서 그분과 완전히 한 몸이 되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누리게 됩니다’
교회는
‘은총 가운데에서 죽은 이는 더 이상 정화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곧바로 하느님의 품인 천국에 들어가고,
은총의 상태에서 죽었으나 정화가 필요한 이는
그 정화가 끝난 뒤에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믿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래서 지상을 순례하는 교회는 죽은 이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기념하는 성찬례를 봉헌하며 기도를 바칩니다.
서로 통공하는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 사이에서 다른 지체에 영신적 도움을 주는 기도는
다른 지체에 희망과 위로를 줍니다’(죽은 이를 위한 올바른 기도).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 안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지금 여기서부터 이미 천상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편한 쉼이 아니라
자기 힘에 알맞으면서도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힘들고 어려운 모든 이에게 그 쉼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30). 하시는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은
하루의 생활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멍에는 틀림없이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엘리지오 성인은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주님이 정하신 때에 죽기를 원한다.
이는 죽음으로써 만이 하늘에 계신 그리운 아버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당당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순간순간의 기회들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편히 쉬게 하신다.’고 약속하심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요, 희망입니다.
“죽음은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성 안눈시아따).
우리는 부활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없이 부활은 있을 수 없으니 죽음은 부활의 문을 여는 출발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뜻대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 최선을 다할 수 있음을 기뻐합시다.
오늘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면서도 나의 죽음을 통해 주어질 천상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사람들은 언짢은 죽음을 두려워하나 언짢은 삶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이 새롭습니다.
오늘 여기서부터 하늘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Hodie mihi, cras tibi)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오늘의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최선에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여러분의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드시길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해 지는 곳과 해 뜨는 곳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고 잠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리저리 부는 바람이며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눈이며
무르익은 곡식을 비추는 햇빛이며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당신이 숨죽인 듯 고요한 아침에 깨면
나는 원을 그리며 포르르 날아오르는 말 없는 새이며
밤에 부드럽게 빛나는 별입니다.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습니다. 죽지 않았으니까요” (어느 인디언 기도).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컴퓨터와 인터넷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10년이 넘은 컴퓨터는 배터리가 부풀어 올라서 터질 뻔했다고 합니다.
컴퓨터를 잘하는 형제님이 배터리를 새로 주문하였고,
컴퓨터 내부를 새롭게 업그레이드해 주었습니다.
예전의 프로그램과 조금 달랐지만 금세 익숙해졌습니다.
사제관 인터넷도 파란불과 빨간불이 번갈아 들어왔습니다.
파란불일 때는 인터넷이 잘 되는데 빨간불일 때는 인터넷 사용이 어려웠습니다.
인터넷 회사에서 직원을 보내 주었고,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파란불이 들어오니 막힌 길이 뚫린 것처럼 시원했습니다.
나무를 옮겨 심으면 뿌리를 내릴 때까지 몸살을 앓는다고 합니다.
나무도, 토양도 서로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면 거기에서도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졌던 나쁜 습관들, 이 세상에서 가졌던 죄의 습성을 버려야 할 겁니다.
시기, 질투, 욕망, 나태, 편견, 분노, 탐식과 같은 걸 버려야 할 겁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전에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을 때입니다. 모두가 축하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은 배가 아팠는지 다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노벨상 위원회에 로비’했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그건 노벨 평화상의 권위를 훼손하는 발언이었습니다.
작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작품이 새롭게 조명되었고, 모두가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문인 중에 배가 아팠는지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강 작가에 대한 한림원의 평가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문학상 후보 중에 한강보다 뛰어난 작가가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한림원은 한강이 여자라서 노벨상을 준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한림원 심사위원들이 후보 작가들의 서류를 놓고 선풍기를 돌린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건 같은 민족으로서 축하해 주지 못하는 시기와 질투의 발언이었습니다.
서산대사는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이라는 시를 남겨주었습니다.
“눈 덮인 길을 걸어갈 때면 발걸음을 신중히 하여라.
오늘 내가 가는 길은 뒷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세상을 떠난 모든 분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어떤 분들은 욕망의 바벨탑을 쌓으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부활의 십자가를 지고서 살았을 것입니다.
욕망의 바벨탑에 묻혀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한 영혼들의 전구를 구하며
우리들 또한 부활의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2024년 위령의 달입니다.
지나온 나의 발걸음이 욕망의 바벨탑을 쌓으려는 것이었다면
내려와서 부활의 십자가를 지고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나온 나의 발걸음이 뒷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향한
희망의 발걸음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위령 감사송’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은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새로운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을 기억하며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드리고,
아직 연옥에 남아 있는 분들을 위해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날이다.
그리고 우리도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죽음을 생각하고
현재의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은 연옥이 어떤 곳인가를 한번 보겠다.
연옥은 끝이 있는 일시적인 정화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로서 누구나 결점은 있으며, 완전한 인간은 없다.
그래서 스스로 죄스런 인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더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하느님을 뵙는 순간 자기 자신 스스로 판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발전 가능성은 죽은 다음에는 없다.
그러므로 결점이 있는 부당한 인간으로서 완전하신 하느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조그마한 결점도 용납이 안 된다.
이같이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서 살아갔지만,
인간적 약점 때문에 가지게 된 부족한 것과 결점을 기워 갚는 그것을 연옥이라고 한다.
이 연옥은 마지막 정화단계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죄스러운 결점이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통해서
정화되고 구원이 성취되는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연옥론(煉獄論)은
하느님의 성성(聖性), 정의, 자비를 명백히 보여주며,
인간을 절망과 윤리적인 경솔함으로부터 지켜주고,
더구나 죽은 사람도 도와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증하여 줌으로써
많은 위로와 도움을 주고 있다.
연옥에서의 영혼은 자신의 죄에 대해 정화 받는다.
이 세상에서는 죄에 대한 보속을 선행이나 기도로써 대신에 할 수 있으나
연옥의 영혼은 더는 무엇을 할 수 없고,
수동적인 형태로 하느님의 정의로 내려진 벌의 고통을 견디는 것으로
정화와 속죄되는 상태이다.
이 영혼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고통을 즐겁게 수용함으로써
죄에 대한 유한적(有限的)인 벌의 보상을 하면 확실하게 정화되는 것이다.
연옥의 고통이란 모든 사람에게 같지는 않다.
각자가 지은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된다.
그다음 연옥 영혼은 하느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므로
고통으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그 고통의 기간이나 엄중함도 지상교회의 기도와 선업(善業),
신자들의 기도로 단축 또는 경감시켜 줄 수 있다.
연옥의 영혼들을 도와줄 수 있고 그들의 고통을 경감 내지 단축해 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그 예를 들어 충분히 이해가 가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빚을 다 갚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면,
자녀는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그 빚을 대신 갚으려 할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 더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그분을 위해서
아직은 무엇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대도(代禱)를 한다고 할 때,
즉 대신 고행(苦行)한다든지 대신 속죄(贖罪)의 선행을 하느님께 보여 드린다고 할 때
그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다.
그분을 위해서, 그분의 명예 회복, 하느님의 모습을 닮음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기 위한 이 행위는 돌아가신 부모의 빚을 갚아서
그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는 것보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받아주실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주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미사를 봉헌하며,
이 미사를 통해서 지상교회는 연옥의 영혼들과 통공을 나누고,
만일에 그 영혼이 정화되어 하늘나라에 있다면,
그 기도의 은혜는 다른 영혼에게 베풀어지며,
천상에 있는 그 영혼은 아직도 이 지상에서 순례하고 있고,
많은 어려움과 박해 속에 있는 지상교회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또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나이다."하고 고백한다.
연옥의 영혼은 그곳에서 자신의 죄를 다 보속 한 후에는 하느님의 생명에 나아갈 것이며,
천국에서 하느님을 직접 뵙게 되고, 그분의 신비에 잠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시적 정화의 장소인 연옥은
모든 영혼이 하늘나라에 들어감으로써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이 영혼들을 위한 특별 기간(위령성월)도 마련하고 있지만,
그들이 하루빨리 완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느님께 일치하도록 선행으로써,
기도로써, 미사를 통하여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항상 모든 성인의 통공을 기억하면서이다.
그들을 위한 기도나 선행은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 본다면 바로 우리 자신들을 위한 기도이다.
이 미사 동안 우리가 사랑했고, 우리를 사랑했던 돌아가신 부모와 형제
그리고 친지들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자.
교회가 연옥에 대한 가르침을 정식으로 정의한 것은 리용 및 피렌제 공의회(1274년 및 1439년),
그레고리오 13세 및 우르바노 8세의 신경(信經),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에 반대하여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이었다.
언젠가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에 도달했을 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눈길 교통사고로 생사를 오가는 과정에서
임사 체험을 했던 헨리 나웬 신부님은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요르단 강을 살짝 건너갔었을 때 받았던 가장 강렬한 느낌은 극진한 환대였습니다.
환한 웃음, 활짝 두 팔 벌린 세상 자상하신 분으로부터 세상 따뜻한 환영을 받았을 때,
평생토록 나를 억압해 왔던 두려움, 상처, 분노, 굴욕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편안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특별한 임사 체험 이후 헨리 나웬 신부님은
우리에게 이런 권고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여러분 각자 죽음의 순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 하는
위대한 순간이 될 수 있도록 잘 준비하십시오.”
오늘 위령의 날은 먼저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사실 아직 이 땅 위에 남아 있는 우리들의 날이기도 합니다.
먼저 떠난 이들은 남아 있는 우리를 향해 무언의 외침을 건넵니다.
“오늘은 내 차례요, 내일은 네 차례!”
우리 역시 떠날 날들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으니,
이왕이면 좀 더 충만하게, 좀 더 열정적으로, 좀 더 기쁘게 이 세상을 살다 오라는
먼저 떠난 분들의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마치 불꽃놀이 불꽃처럼 순식간에 하루가 소진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날도 그렇게 순식간에, 섬광처럼 다가오고 사라질 것입니다.
관건은 순간순간을 하릴없이, 영양가 없이 보낼 것이 아니라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게 계획하고 구성해야겠습니다.
며칠 전부터 저는 자기 전에
작은 노트에 내일 꼭 처리해야 할 사소한 일들을 순서대로 메모합니다.
어떤 날은 한 페이지가 꽉 차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들이 엄청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보다 알차게, 보다 계획적으로, 보다 충만하게 엮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 숱한 날들을
선물로 주시면서 바라시는 바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다가 당신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 인간적인 행복도 포함되겠지만,
궁극적으로 영적인 행복이요, 주님 안에서 행복입니다.
산상 수훈을 통해서 강조하시는 바로 그 행복입니다.
죽음은 사실 우리의 삶 속에 이미 스며들어있습니다.
또한 삶이란 것도 죽음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삶과 죽음은 항상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도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미 ‘작은 죽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일선에서의 물러남, 질병, 노화, 소외, 실패, 고독...
우리는 매일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안에 실재하는 다양한 죽음의 요소들을 대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살아있으면서도 매일 작은 죽음을 체험합니다.
결국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또한 삶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순되는 말처럼 보이지만
삶은 시시각각 죽음으로부터 위협받고 있기에 더욱 소중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반대로 죽음이 없다면 끝도 없이 반복될 죄와 악습, 병고와 고독...
도대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죽음이 있어 기나긴 한 인간의 생이 정리되고 완성되니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요.
아리송하지만 결국 죽음 안에 삶이 있고 삶 안에 죽음이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에 도달했을 때,
우리들의 지난 삶은 어떻게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요?
절대로 우리가 보낸 세월의 양으로 평가받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가 관건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하루하루를 얼마나 충만하고 의미 있게 살았는가가 중요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고 표현합니다.
반대로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는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고 말합니다.
참삶은 의미 있는 삶, 가치 있는 삶, 깨어있는 삶, 현재에 충실한 삶,
주님의 생명력으로 가득한 삶, 결국 사랑의 삶입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하루하루가
그저 하루 삼시 세끼 섭취하고 연명하는 데 만족한 삶이 아니라,
하루하루 의미 있고 충만한 삶으로 엮어가는 것,
축복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비결이 될 것입니다.
삶과 죽음과 연옥
박상대 마르코 신부
교회는 전례력상 마지막 달이 되는 11월을 위령의 달로 정하고,
한달 동안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특히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며,
언젠가는 맞이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간 살아온 삶을 반성하여 회개의 삶을 살도록 권고한다.
가능하면 11월 한달 동안 자주 세상을 떠난
부모, 형제, 친지, 知人들의 묘지를 찾아가 기도하고,
그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연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11월 2일 위령의 날은 정확히 1030년경 개혁수도회로 이름난
프랑스의 클뤼니수도원(베네딕토 수도원)의 대수도원장 오딜로(Odilo)가 처음으로 시작하여
온 세계교회로 퍼졌다.
오딜로 대수도원장은 수사들에게
“비록 그들의 죽음이 너와 무관하다 하더라도 자주 불쌍한 영혼들을 기억하라.”고
강조하였다.
오늘날 오딜로 성인은 연옥의 불쌍한 영혼들의 수호성인으로 통한다.
생명을 가지고 세상에 사는 모든 존재는 죽어야 한다.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도 식물도 언젠가 한 번은 죽어야 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움과 불안을 주면서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된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는 것은 분명한 順理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 고귀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육신이 죽은 뒤에도 다른 차원의 생명의 원리가 지속됨을 우리는 알고 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를 증명해 주셨다.
진정한 삶은 어쩌면 죽은 뒤에 가능한 것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하느님과의 일치는 죽었을 때 비로소 완전히 이루어진다.
따라서 죽음은 우리가 믿고 바라는 영원한 생명에로 옮아가는 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죽음은 의미 있는 사건이며,
죽음으로 말미암아 삶이 더욱 값지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죽음이 곧바로 하느님과의 일치를 가져오고,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죄 중에 세상을 떠난다면 천국에 바로 들지 못하고
연옥이나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도
“연옥은 실제로 존재하며, 여기에 있는 영혼들은
살아있는 신자들의 기도와 미사성제로 도움을 받는다.”고 선언하였다.
육신과 분리된 영혼은 자신을 위해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따라서 淨化 상태에 있는 연옥 영혼들의 가장 큰 고통은
하느님의 영광을 보면서도 그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다.
아직 지상에 살아있는 우리가 연옥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우리의 기도에 힘입어 연옥의 영혼들이 하루빨리 천상에 이른다면,
그들이 천상 교회에서 지상의 우리들을 위해 전구 해 줄 것이다.
이를 가리켜 “성인들의 통공”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옥의 영혼들이 하루빨리 천국으로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며,
이러한 기도는 현세에 사는 지상교회의 소중한 의무인 동시에 자랑스런 특권이다.
지상의 교회에 속한 우리는 자신들의 삶과 죽음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회개하고 기도하며, 준비하여야 한다.
사도 바울로는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필립 1,21)라고 하였다.
이는 곧 “죽는 것이 이득이고 사는 것이 형벌이다.”는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말과도 같은 의미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삶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삶은 분명 커다란 무게이고 짐이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삶의 모든 멍에를 지고 사셨던 예수님 때문에 힘과 위안을 얻는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28절)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