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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3일 연중 제31주일
제1독서 : 신명 6,2-6
제2독서 : 히브 7,23-28
복 음 : 마르 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사랑의 이중 계명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내가 중심이기를 멈추고, 상대가 나의 중심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향한 이기주의적 움직임을 포기하고,
다른 이를 향하여 내가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민범식, 『하느님 길만 걸으세요』, 156-165면 참조).
그래서 만일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가 나에게 있다면
그 사랑은 아직 성숙한 사랑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내가 기쁘기 때문에, 내가 충만해지기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면 아직도 내가 중심에 있고 그 사랑은 나를 향한 움직임입니다.
반면에 사랑하는 상대의 행복을 바라고,
상대의 완성을 위하여 기꺼이 나를 희생할 마음이 있다면,
진정으로 성숙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자신의 중심이 되고 자신이 상대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생애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보다 하느님께서 먼저이시고, 이웃이 먼저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당신을 바치신 것은 참으로 하느님과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포기하신 ‘너-중심적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이것은 분명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상대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진정한 사랑 안에서는 상대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됩니다.
상대가 불행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고,
상대가 행복하면 내가 불행해진다는 사고로는 이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상대가 중심이 되는 진정한 사랑 안에서 아주 쉽게 이해되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이웃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 여기는 사랑이
우리 안에 깊게 자리하기를 주님께 청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사 마치고 복사들과 함께 제의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대복사를 선 아이의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오늘 너무 긴장해서 몇 군데 틀렸다는 것입니다.
전례 때 종종 틀렸다면서 찾아오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례는 ‘맞다, 틀리다’의 관점이 아닙니다.
바른 자세와 바른 순서에 따라 바른 전례 예식이 거행되는 것은
우리의 일치와 정성스러움이 드러나기에 좋습니다.
하지만 이것 자체가 전례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헌장 10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례에서, 특히 성찬례에서, 마치 샘에서처럼 은총이 우리에게 흘러들고,
또한 교회의 다른 모든 활동이 그 목적으로 추구하는
인간 성화와 하느님 찬양이
가장 커다란 효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엇이 맞는지 틀리는지의 관점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서 우리 존재가 진정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화 되고 있는지
그리고 참되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기준만 기억한다면 틀린 것이 보이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만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판단도 맞는지 틀리는지였습니다.
이 판단이 예수님을 향해서도 이루어지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틀렸다’라고 말했고,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의 판단은 오로지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분명히 틀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오히려 그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종교적인 민족이었고 그들은 모세의 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계명을 인간 생활을 외부적으로 종교화하여
지켜야 할 계명 248개의 조항, 금기의 조항 361개 조항,
모두 합해서 613개의 조항으로 세분화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많은 계명을 다 지키는 것도 힘들었고,
이 조항들을 지키느라 다른 것들을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613개의 조항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단죄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생활하는 데 중요하고 본질적인 계명이 무엇이냐는
종교적인 질문을 예수님께 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야기하십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 계명의 핵심이고,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맞다, 틀렸다’라는 말로 상대에게 때로는 아픔과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 전에 사랑의 기준으로 따져보았으면 합니다.
사랑만이 가장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11월의 첫 주일.
가을도 아름답게 익어가고, 단풍도 아름답게 익어가고, 사랑도 아름답게 익어갑니다.
<가을처럼 아름답고 싶습니다> - 이채
가을에 오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의 등불 하나 켜 두고 싶습니다
가을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진실한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가을엔
그리움이라 이름하는 것들을
깊은 가슴으로 섬기고 또 섬기며
거룩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싶습니다
오고 가는 인연의 옷깃이
쓸쓸한 바람으로 불어와
가을이 올 때마다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세월
꽃으로 만나 낙엽으로 헤어지는
이 가을을 걷노라면 경건한 그 빛깔로
나도 물들고 싶습니다
그대여!
잘 익으면 이렇듯 아름다운 것이
어디 가을뿐이겠습니까
그대와 나의 사랑이 그러하고
그대와 나의 삶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거룩한 말씀이라고 불리는 ‘셰마 이스라일’을 들려줍니다.
유다인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맨 먼저 배우는 것이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되는 바로 이 '셰마'라는 신앙 고백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적어도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이 기도를 정해놓고 드린다고 합니다.
또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를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기 위해
이마와 왼쪽 팔에 경구갑을 부적처럼 붙들어 매고 다녔고(신명 4,8-9 참조),
옷자락에 술을 달고 다녔습니다(민수 15,37-39).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십계명에 6백 조항이 넘게 보태어져 실천할 수 없게 되었고,
또 어느 계명이 큰 계명인지 토론이 계속되었는데,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도 이 질문을 예수님께 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주었던 계명으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 29)
이 말씀은 먼저, ‘하느님의 존재’ 와 ‘우리의 존재와의 관계’에 대한 계시입니다.
곧 ‘한 분이신 우리 주님 하느님’과 ‘그분의 것,
곧 그분의 소유’의 관계를 드러내며,
바로 이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사랑’임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원천이요 근거요 바탕이
바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임을 밝혀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근거요 이유입니다.
그러니 이 관계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히브리: 아헤브, 희랍: 아가페오)은
본능적 호감과는 구별되는 ‘신실함’과 ‘충성’을 드러냅니다.
곧 ‘온 마음과 온 목숨과 온 정신과 온 힘을 다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12,34)고 할 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근본적으로 구약의 ‘사랑의 계명’은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모세가 말한 ‘구약의 계명’과 예수님의 ‘새 계명’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사랑의 계명과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은 어떻게 다를까?
우선, 구약에서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둘째 계명의 ‘이웃 사랑’은 제한적입니다.
곧 여기서 말하는 ‘이웃’이란 동포로 한정하거나
함께 사는 이방인들까지를 포함시킬뿐 입니다(레위 19,3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카 10,30-37)에서 보여 주듯이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일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마태 5,44-48).
또한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완전히 바꾸어 새 계명으로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시하십니다.
또한 나아가서 오늘 복음에서 보여 주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신명 6,4-5)과 ‘이웃 사랑’(레위 19,18)을 한데 묶으시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사랑의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이요,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인 셈이 됩니다.
물론 이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내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24항)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먼저 ‘형제의 일부’가 되어주는 일로 이루어져 갑니다.
마찬가지로 좀 더 확장해서 표현해 본다면,
내가 형제의 일부가 되고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은 곧 ‘하느님 사랑’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이중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곧 ‘남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사랑이 살아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17).
오늘 이 시간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가운데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사랑이 살아있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많은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은 어떻게 생겼을까? 사랑은 남을 돕는 손을 가졌으며,
가난한 자와 곤궁한 자에게 재빨리 달려가는 발을 가졌으며,
비극에 처한 자를 알아보는 눈을 가졌으며,
사람들의 한숨과 슬픔을 경청하는 귀를 가졌습니다.”
“사랑에는 수고로움이 없습니다.
만일 수고를 느낀다면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탓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새기고 손발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사랑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마라스머스’ 라는 병을 아십니까?
이 병은 외롭게 자란 아이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병입니다.
증상은 신체 발육이 부진하고 온몸에 힘이 빠져 시름시름 앓는 증세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병은 영양결핍이나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결핍’이 원인입니다.
사랑을 한창 공급받아야 할 아이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랑을 표현하지 못할 때 이 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이병에 대한 의사의 처방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무엇일까요?
예, “매일 사랑을 고백하세요!”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좋은 약이랍니다.
사실 매일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부부간, 부자간에 고부간에는 물론 이웃 간에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서로의 관계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질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당신이 저를 사랑하듯
“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부간에도 “여보 사랑해!”라는 표현을 자주 하시길 바랍니다.
남자들은 대개 ‘그냥 눈빛만 봐도 알지, 그것을 꼭 표현 해야 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사랑한다”는 말을 꼭, 그리고 자주 듣고 싶어합니다.
사실 남자들도 “사랑한다”는 말에 무덤덤 해 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기뻐합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자녀와 듣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들로부터 “사랑한다”는 표현을 듣게 될 때 모든 피곤이 풀립니다.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도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줄 때 삶의 활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합니다!”라는 표현을 자주 하시길 권합니다.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사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써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행위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테레사 효과를 아시지요?
미국 하버드 의대생들을 봉사 활동에 참여시킨 후
체내 면역 기능을 측정해 보았더니 면역 기능이 크게 증강되었답니다.
또한 마더 테레사의 전기를 읽게 한 다음 인체 변화를 조사했더니
그것만으로도 생명 능력이 크게 향상되고
인체에 도움이 되는 항체가 생기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구진은 이렇게 봉사활동을 하거나 봉사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면역 기능이 높아지는 것을 두고 마더 테레사 효과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랑을 하면 할수록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고 사랑을 확산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주님을 차지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은 모든 계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선언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사랑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요한복음13장34절 이하에서 주님은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바로 우리가 따라야 할 사랑의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나의 벗이 된다”(요한15,13)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태5,46) 하시며 끼리끼리의 사랑을 경계하셨습니다.
1요한 3,14에 보면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말하고 있고
1요한4장20절에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적고 있습니다.
로마서 13장8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 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지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요, 사랑은 손발에서 열매 맺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랑에 대해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루카12,34) 하고 이르셨습니다.
운동 경기에서 골인한 것과 골을 넣을 뻔한 것은 분명 다릅니다.
홈런과 파울은 같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과 가까이 있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그러므로 머리에 있는 사랑을 가슴으로 끌어내리고
가슴에 담긴 사랑을 마침내 손발로 행해서 풍성한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지식의 앎이 아니라 사랑의 구체적 삶이 살아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드시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아들아, 사랑한다!” “딸아,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한다는 이 한마디가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을 표현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어려움 안에서도 아버지의 사랑으로 여전히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언제나 주님을 향한 희망 안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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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에 사는 하와가 아담에게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아담에게 “자기 나 사랑해!” 하고 물었지요.
그러자 아담이 “그럼”하고 대답했어요.
하와가 다시 “정말 나를 제일 사랑하는 거지?” 물으니,
아담이 “그렇다니까?”하고 대답했어요.
“내가 제일 이뻐?” 하와가 묻자
“야! 여기 너 밖에 다른 사람이 더 있니?”
아담이 대답했답니다.
거듭거듭 확인하려는 하와나 그렇게 멋없이 대답하는 아담이나…
천생연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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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레바논에 ‘UN 평화유지군’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평화유지군은 레바논과 이스라엘이 서로 싸우지 않도록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군대라고 합니다.
절대적인 강자인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함부로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도 했다고 합니다.
최근에 이스라엘은 평화유지군을 향해서 공격했고, 탱크로 진격했다고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평화유지군이 부상했다고 합니다.
유엔은 이스라엘에 강력하게 경고했고, 평화유지군에게 속했던 나라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레바논에서 철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일랜드의 군인들은 평화유지군에 남아서
끝까지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해서 책임을 다하겠다고 했습니다.
위험할지라도, 전투 중에 목숨을 잃을지라도
레바논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유엔에 보고하겠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아일랜드 군인들이 레바논에 남도록 했을까요?
그것은 아일랜드도 영국으로부터 침략받았던 약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가정 방문 중에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청년은 3년 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청년은 우크라이나로 가서 봉사하겠다고 했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말렸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청년은 우크라이나로 떠났고,
안타깝게도 청년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한 후에 사망했습니다.
무엇이 청년을 우크라이나로 떠나게 했을까요?
미국에 있으면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죽음의 덫이 놓여있는 우크라이나로 떠나게 했을까요?
그것은 더 높이 날아오르려는 갈매기의 꿈과 같은 겁니다.
그것은 벗을 위해서 목숨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야 했던 부모님도
이제는 슬픔을 딛고, 아들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은 목숨을 바쳐서 이웃을 돕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는 신앙이기도 합니다.
사랑에는 4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랑을 받는 단계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합니다.
들숨이 있어야 날숨이 있습니다.
한동안 많이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사람이 되셨습니다.
흙 속에 있는 씨앗은 물과 햇빛을 받아야 싹이 나옵니다.
사랑받는 아이는 면역력도 강해지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생깁니다.
두 번째는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기가 남을 생각하며 감동할 수 있고,
자신의 애정을 특별한 존재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느낌은 사랑받는 것보다 한결 흐뭇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그것에 엄청난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도, 역경도, 굶주림도, 죽음까지도 이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자신의 애정을 남에게 투사하고 나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쏟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단계의 사랑은 받는 사랑과 주는 사랑과 비교할 때 한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사랑을 주기 위해서든, 받기 위해서든, 남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주거나 받는 존재에게 실망하거나 배신당할 염려도 없습니다.
네 번째 보편적인 사랑의 단계입니다.
이는 무제한의 사랑입니다.
애정을 받고, 남에게 투사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나면,
사랑을 자기 주위의 사방팔방으로 전파하기 시작하기도 하고 사방팔방에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이 보편적인 사랑을 부르는 이름은 생명, 자연, 대지, 우주, 기, 하느님처럼
문화와 민족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합니다.
지금 나의 사랑은 어떤 단계의 사랑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부족해도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식어 하느님 아버지를 잠시 외면한다고 해도
끝내 우리를 버리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면 기다리지 못하곤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식어 버리면 그들 역시 사랑이 식어 버리곤 합니다.
2024년도 이제 2달 남았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미워한 이웃을, 나를 미워한 이웃을 용서하고
넓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께 용기와 힘을 청합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 십자가로 하느님과 우리를 화해시키셨고,
우리의 이웃과 이웃을 화해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인간에 대한 사랑의 동기와 이유로 제시하실 만큼 밀접히 결합하신다.
인간이 위대한 존재로서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존재가 필요하다.
하느님이 죽는 곳에서는 인간도 죽게 된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신명기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그 무엇보다도 그들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찬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데 있다.
예수께서는 어떤 계명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인지 묻는 율법 학자에게
신명기의 말씀을 상기시키시면서, 그 계명에 다른 계명,
즉,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가까이 놓으신다.
이 계명도 구약성서에 나타나지만, 동족만을 가리킨다(레위 19,18).
마태오는 첫째 계명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한다(22,39).
루카는 두 계명을 종속관계로 보지 않고(10,27),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모두 이웃으로 간주하고 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10,30-37).
마르코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첫 자리에 놓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두 번째 자리에 놓은 것을 보면 유일신론적 배경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항상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 첫 자리에 계셔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위대성이나 품위도 올바로 갖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두 사랑이 서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두 사랑은 서로 교차하며 서로를 요청한다.
즉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 종교이다.
오로지 이웃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그
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통해 사랑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절) 하시고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40)라고 하신다.
이 두 계명은 다시 율법 학자의 말로써 강조되고 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32-33절).
즉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을 다 같이 사랑할 때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잘못하기 쉬운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전례 행위가
하느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국한해 그 의미를 빈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형제들에게 펼 때,
하느님은 사회적인 분이시며 위대한 창조를 하시는 분임을 증거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저절로 형제들에 대한 봉사가 되고,
또한 구체적인 필요에서 구현되기에 참된 예배가 된다.
우리가 주일을 지내는 의미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주일미사는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바쳤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제대에 봉헌하는 것이다.
봉헌예물은 바로 우리의 삶인 것이다. 이것을 항상 잊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알아들은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라고 칭찬을 듣는다.
율법 학자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충만히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의 나라는 현재 이 자리에서 가까이할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실체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가까이 와 있다.
예수께서는 누가 당신 가까이 있는지를 아시고 또 명백하게 규정하신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사고가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제직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자발적으로 봉헌하신 당신의 희생으로
무엇이 참된 예배인지를 확실히 가르쳐 주셨다.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내용이다.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본성이며,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요청이다.
이 요청은 이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의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작은 일에서부터 이러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참된 예배를 우리도 이제 이 미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미사가 더 기쁘고 하느님 앞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몸만 왔다 갔다 하는 타성적인 신앙생활 그래서 아무 맛이 없는 신앙생활, 전례 생활이 아니라,
기쁘고, 감사하며 더 앞으로 나아가는 적극적이고 활기찬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하느님을 말로만,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선입견이라는 것이 무섭습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수시로 예수님과 충돌하는 사람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입니다.
그러다 보니 율법학자나 바리사이 하면 다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서도 참다운 신앙인, 예수님께 우호적인 사람들도 꽤 있었습니다.
참 진리를 찾기 위해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코데모는 참으로 열려있는 율법학자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스승인 가말리엘은 사도들을 보호해 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다가온 율법학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보여준 말투나 태도는 다른 율법학자들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복음서에 통상적으로 등장하는 다른 율법학자들은
떠보기 위해, 논쟁하기 위해, 사슬에 얽어매기 위해 악의적인 마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율법학자는 여러모로 달랐습니다.
다른 스승과는 확연히 다른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고 싶어 좋은 의도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가 던진 질문은 참으로 기본적인 질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정말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당시 유다교에는 총613개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계명이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가 하는 것은
당시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어떤 계명은 굉장히 무겁고 부담스런 계명이 있었는가 하면
어떤 계명은 가볍고 지킬만 했습니다.
적극적인 계명이 248개였고 소극적인 계명이 365개였습니다.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착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신명기6장 4절을 인용하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그냥 말로만, 입술로만, 기도문 만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함에 있어 적당히,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해, 모든 에너지를 다 투자해서 성심성의껏 사랑하라는 당부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조금은 불성실하고 미온적인 태도, 소극적이고 미지근한 신앙에
일침을 가하는 따끔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은 세상에 반은 하느님께 걸쳐놓은 우리 삶의 모습을 반성케 합니다.
친절하게도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가 묻지도 않았는데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시면서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을 가르쳐주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사실 당시 유다인들에게 있어 이웃은
절친한 친구들, 동료들, 좋은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은 보다, 보편적이고 확장된 의미의 이웃입니다.
착한 사람뿐만 아니라 악한 사람들,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의롭고 깨끗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죄인들과 부정한 사람들, 아군뿐만 아니라 적군, 원수들조차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이 얼마나 보편적이어야 하는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듯 관대하고 폭넓은 이웃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을 뒷받침하는 토대입니다.
그간 할례나 안식일 규정, 정결례와 관련된 율법에 목숨을 걸어왔던
율법학자들에게는 뼈아픈 일이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이자 최우선 순위는
사랑이라는 진리를 명명백백하게 만천하에 선포하십니다.
사랑의 계명과 관련된 예수님의 가르침은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든다든지, 율법의 근본을 흔든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계명을 원래의 자리로 환원시킨 너무나도 합당하고 당연한 조치였습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유대교 율사와 대화하신 내용을 알립니다.
율사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구약성서」 율법 중 두 조항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신명기」(6,4-5)의 계명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레위서」의 계명입니다.
질문한 사람이 유대교 율사이기에 예수님은 그가 잘 아는
「구약성서」의 율법 구절들을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의 어떤 문헌에는
오늘의 율사가 한 것과 같은 질문이 있고, 유대교 당국의 답이 있습니다.
그 답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 것, 피를 흘리지 말 것,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지 말 것, 안식일을 범하지 말 것이다.”
유대교는 사랑을 첫 계명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유대교가 사랑을 말할 때는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마태 5,43)는 식입니다.
그 사랑은 미움에 반대되는 友好的인 자세를 의미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유대교의 가르침을 그 근본에서 흔들어 놓았습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인간은 두려운 하느님을 섬겨야 합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섬기는 길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의 絶對君主와 같이 군림하고, 인간은 무서운 군주 앞의 奴隸와 같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모든 의무를 한마디로 요약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제한 없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동시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자신과 같이 소중히 생각하면서 이웃을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루카복음서」가 전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10,29-37)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이 强盜 맞은 사람을 돌보아 준 것이
하느님이 두려워서 한 일도 아니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은 강도 맞아 죽게 된 사람을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서,
그를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였습니다.
요한 사도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닫는다면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1요한 3,17)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우리의 마음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확인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불쌍히 여기는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쳐주고, 맹인을 눈뜨게 하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한 것은
모두 불쌍히 여기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의 몸짓 안에 살아계셨습니다.
초기교회는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 불쌍히 여김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기원 후 100년경에 기록되었씁니다.
그 「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
그대들이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13,34-35)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은 이웃을 보는 우리 시선의 중심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람이 이웃을 볼 때, 그 시선의 중심에 있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웃은 사랑하되 원수는 미워합니다.
예수님은 시선의 중심을 자기 앞에 있는 이웃 안에 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은 이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웃의 상황에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아기를 키우는 어머니는 시선의 중심을 아기 안에 두고,
그 아기의 상황에 참여합니다. 아기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웃을 선택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필요가 우리의 사랑을 결정한다고 생각하십니다.
앞에서 언급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서
그 주인공은 강도 맞은 사람을 만나, 그에게 필요한 일을 모두 하였습니다.
그것이 불쌍히 여기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초기부터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시면, 인류 모두가 우리의 兄弟姉妹들입니다.
「요한의 편지」는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실상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고, 사랑하는 모든 이는
하느님에게서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 4,7)
사랑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체험한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이어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모른다.”(4,8)고도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그 사랑의 원천은 하느님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사랑의 원천이십니다.
같은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로 흐르고, 또 우리에게서 이웃에게로 흐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그 흐름을 차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면서 그 사랑 안에 머뭅니다.
오늘 복음의 율사가 예수님에게 한 질문은 ‘첫째가는 계명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개의 계명을 말씀하셨지만, 실제로는 ’사랑하라‘는 하나의 계명입니다.
오늘의 율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알아들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 율사로서는 할 수 없는 파격적인 발언을 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낫습니다.”
이 율사는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말씀을 듣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律法을 지키고 祭物을 바쳐서 두려운 하느님으로부터 혜택을 얻어내는
자기중심적 신앙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는 신앙이 하느님 사랑의 흐름 안으로 들어서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율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율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졌던 선입견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財物, 勸力, 名譽 등에 대한 愛着으로 선입견을 갖습니다.
그 선입견은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런 것에 대한 애착보다는 이웃의 필요를 더 소중히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김에서 사랑이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는 사람은 불쌍히 여기는 하느님을 자기 생명의 원천으로 삼아 실천하며 삽니다.
그것은 個體유지나 種族유지의 본능을 넘어 하느님에게로 跳躍하는 사랑입니다.
인간의 본능이 요구하는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느님이 動機가 된 도약이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