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엥! 저놈은 그때 주루에서의 그 금뎅이 놈! 저 자식 이곳의 시선을 한 몸에 다 받겠군.
잘생기고, 배경 좋고, 무공까지 강한 놈을 왜 처음에 하게 하냐고.
여기 있는 여자들은 죄다 뿅 가겠구먼. 더럽다 더러워."
"백형, 이번 철혈투는 말이오. 대전표를 교묘하게 정과 사의 대결로 짜놓은 것 같지 않소?
마치 일부러 짠 것 같단 말이오."
"당연하지 이 친구야. 정사 대결장을 만들어야 생사비무(生死比武)에 피가 난무하지.
그래야만 돈 싸들고 구경 온 놈들도 더 재미있어 할 것 아닌가.
여기 있는 우리들은 저들의 심심풀이 장난감이라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툭툭 던지는 백산의 말은 생사투인(生死鬪人)의 신세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돈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싸우는 인간들. 인간사 중 가장 추악한 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생사투인들이 처절하게 싸우면 싸울수록 위에서 보는 사람들은 즐거워한다.
한마디로 목숨을 가지고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 시작되었군."
백산은 자신의 품에서 술병 하나를 꺼내들고 한 모금을 마시며 같이 사온 만두 한 개를 집어들었다.
"캬! 역시 싸움구경을 할 때는 술이 있어야해."
"암, 그렇지 술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구경을 하겠나. 헐헐헐!"
"엥,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한 소리는 아니고? 누구쇼? 냄새나는 영감은?"
"아! 사숙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백산과 구소운이 놀란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온 거지노인을 쳐다보았다.
거의 봉두난발에 가까운 머리칼이며 남루한 옷차림이 길거리에서 구걸하다 막 나온 사람처럼 지저분했다.
"헐! 헐! 내가 내 발로 간다는데 누가 말려? 야, 이놈아. 쳐다보지만 말고 냉큼 술이나 줘!"
백산은 자신을 바라보며 술병을 달라고 외치는 노인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사숙? 그러니까 이 거지 양반이 구형의 사숙이라 이거지?
이거 원 아무리 같은 동문이지만 하고 있는 꼬락서니가 하나도 안 틀리고 똑 같냐.
영감은 왜 또 이렇게 냄새까지 나는 거야."
"어이 영감! 옷이 더러운 것은 용서가 되는데 몸이 더러운 것은 용서를 못해요.
그러니 씻고 오시오. 그럼 술을 줄 테니."
"이것 보게, 소형제. 지금 어디서 씻는단 말인가."
구소운이 사숙이라고 부르는 거지노인은 개방의 전 전대 방주인 풍신개였다.
전전대 방주면 사조라고 부른다. 관속으로 들어가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이 거지는 아주 정정했다.
풍신개도 소운에게서 이 녀석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무공은 별 것 없어 보이는데 묘한 구석이 있는 친구라고. 풍신개가 보기에도 그랬다.
비무장에서는 죽음의 비무가 펼쳐지고 있는데도 마치 이곳에 유람 나온 녀석처럼 술병을 들고서
낄낄거리며 소운과 노닥거리고 있다.
무엇이 이놈에게 이런 자신감을 심어주고 있는 것일까.
백산에 대한 풍신개의 첫 느낌은 참 편한 놈이라는 것이었다.
얼굴에 난 흉터로 보았을 때 세상사 걱정 없는 부잣집 도련님은 절대로 아니다.
그렇다고 저 어린 녀석이 어떤 경지에 이른 것 같지도 않고.
백산의 모습에서 무엇인가를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았다.
그래도 역시 가장 어울리는 것은 삼류건달이라는 말이다.
귀공자든 절대무인이든 삼류건달이든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금은 오로지 술만 있으면 된다. 풍신개의 생각이었다.
"소형제, 그러지 말고 술 좀 주게나. 이미 비무(比武)도 시작했는데 가기는 어딜 가나?"
"아! 글쎄, 비무 시작이고 뭐고 안 돼요. 나에게 병이라도 옮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씻고 오면 드린다니까요."
백산이 풍신개가 누구인지 알 리도 없었지만 혹여 알았다 하더라도 그의 기준에 안 되는 것은
죽어도 안 되는 것이 그였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이봐, 소형제. 너무 하는구먼. 소운이 말을 듣고 나의 전 재산을 털어서 자네에게 열 냥을 걸었네.
그 정도면 술 한 모금 줘도 될 만하질 않나. 안 그런가?"
"잠깐! 잠깐! 지금 나에게 이 백산에게 돈을 거셨다고 했소?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쇼.
이렇게 거지새끼처럼 해 가지고는 무슨 돈이 있다고 나한테 돈을 걸어요.
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 말고 저쪽으로나 가보쇼."
"소운에게 물어보면 알 것 아닌가. 나는 못 믿어도 소운이는 믿을 것 아닌가."
필사적이었다. 술 한 잔에 체면도 팽개치고 자존심도 버리고 풍신개는 백산에게 매달렸다.
구소운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백산은 그제야 표정이 풀어지며
입 꼬리를 귀밑에 걸고 풍신개를 향해 환하게 웃어보였다.
"크 하하하! 좋습니다, 영감님. 이 강호무림(江湖武林)에 드디어 이 백산을 알아주는 이가 생겼군요.
자 드세요, 영감님. 알고 보면 저도 멋진 놈입니다.
그리고 영감님은 오천 냥의 행운을 잡은 것입니다. 이제 영감님은 고생 끝 행복시작이라고요.
원래는 이익금의 절반을 제몫으로 받아야 하는데 소운이나 영감님이나 형편이 별로인 것 같아 보이니
제 몫을 포기하죠. 이럴 때 좋은 일 한번 하지 언제 또 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영감님!"
마치 자신의 돈을 투자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백산이었다.
이미 백산의 허풍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된 구소운은 가만히 있었고,
술을 마시던 풍신개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백산을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에고, 조금 있다 가서 돈을 걸어야 되겠구먼. 나중에 탈나기 싫으면….'
순간의 기지로 술은 얻어먹고는 있으나 백산을 쳐다보는 풍신개의 눈에는 신기한 기물을 발견한 듯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리고 저놈의 허풍이라니, 허풍도 저 정도면 중증에 해당한다.
마치 자신이 투신이라도 된 양 말하고 있는 백산을 보고는
구소운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이놈 원래 이런 놈이냐는 표정으로.
"소형제! 자네 말하는 폼이 꼭 투신이 된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저기 지금 자네의 경쟁자가 열심히 비무를 하고 있는데 보지 않아도 되나?"
비무대에서는 백무천이 음혈색마 반고인을 거칠게 몰아치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는 손을 멈추고 반고인에게 피할 여유를 주고 있었다.
"저거 봐요. 저 자식은 끝낼 수 있는데도 일부러 가지고 놀고 있어요.
적어도 강자라면 저렇게 해서는 안 되죠. 상대에게 고통 없이 빨리 끝내주는 것이 강자다운 면모 아닌가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저렇게 하고 있어요. 아마 만족감이겠죠?
보아라. 바로 내가 정천무룡이다. 천무맹의 삼 공자이며 차기 맹주 후보다. 바로 이런 뜻 아닌가요?
저런 나쁜 놈 새끼."
풍신개의 얼굴이 침울하게 변했다.
이 삼류건달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정파인 들의 자만심, 아니 힘깨나 있는 자들의 오만이라고 해야 옳다.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무조건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들.
어쩌면 그런 모습들이 자신들이 강호에서 추방하고 싶어하는 마(魔)이고 사(邪)이고 패(覇)일지도 모른다.
정의(正義)라는 이름으로 켜켜이 포장을 한 나머지 저 깊은 속에 있는 진실한 정의가 보이지 않는
현실, 바로 이것이 무림과 자신들의 현주소였던 것이다.
이어서 '광!'하는 소리가 들리고, '캐액!'하는 마치 짐승이 죽어가는 듯한 소리를 지르며
음혈색마 반고인의 머리가 깨져 나갔다.
군중들의 환호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반고인을 사냥감을 몰듯이 가지고 놀다 죽여 버린 백무천은 오만한 표정으로 관중석을 쳐다보며
가볍게 목례를 해보였다.
"자네 백무천의 저 환상적인 보법 보았나? 아예 보이지도 않더구먼.
저것은 무공이 아니라 환상이었어. 이번에 나는 정천무룡 백무천에게 전 재산을 다 걸었네.
자네도 걸었나?"
"미친 새끼들!"
백산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곳인 것 같았다.
한 인간의 죽음을 두고 즐거워하는 인간들.
자신도 그런 부류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고,
뭔지 모를 씁쓸함에 갑자기 욕지기가 치밀었다.
"영감! 오래 살았죠?"
심각한 표정으로 있던 백산이 느닷없이 이상한 질문을 해오자 풍신개는 얼떨결에 대답을 했다.
"벌써 한 팔십은 되었으니 오래 살았다고 볼 수 있지."
"그럼 말이요. 저렇게 죽으면 자신의 죄 값을 치르고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반고인 저 녀석은. 그리고 정파의 신룡(神龍)이라는 저놈은 반고인을 죽일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팔십 년 이상을 살아온 풍신개는 백산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공명심(功名心), 이것이 인간에게는 가장 무서운 적이지.
특히 명예와 체면을 중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말이야….'
풍신개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 또한 저놈과 별 다를 바 없는 놈일지도 모르지요.
조금 후에는 나의 상대를 개 패듯이 죽여야 될 테니까. 목적달성을 위해서 말입니다."
"자네답지 않게 무척 심각한 것 같구먼."
풍신개가 백산의 모습을 보며 너무 감상에 빠진다 싶었던지 은근슬쩍 농담을 던졌다.
"맞습니다. 나 같은 놈이 무슨 심각씩이나, 그냥 되는대로 살면 그만인 것을.
모두가 다 자기 멋에 산다는데 제가 이러쿵저러쿵 할 일은 아니지요. 잠이나 자러 가야겠네요."
구소운에게 비무 전에 깨워달라는 말을 하고 백산은 자신의 숙소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백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풍신개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놈."
"글쎄요. 어떤 인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아니 판단이 서질 않아요."
"두고 보면 알겠지."
* * *
"어이! 백형! 그만 일어나요. 백형 차례라고요…백형!"
"아이! 누구야 이거 모처럼 만에 단잠을 자고 있는데. 엇! 구형 구형이 여기까지 웬일이요.
무슨 일 났소?"
"이 친구가? 정신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자기 비무가 오후인데도 태평스럽게 잠이나 자고…
정말이지 백형은 대책이 안서는 사람이라니 까요?"
"아! 맞다. 오후에 시합이 있었지. 갑시다, 구형!"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난 백산은 황망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 자식은 왜 자꾸 꿈에 나타나는 거야? 찾을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아니, 백형. 어찌 그럴 수가 있어요? 이건 장난이 아니라 생사비무라고요, 생사비무.
지금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잠이 와요. 잠이 와? 하여간 백형처럼 무신경한 사람은 처음 봤어요."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백산을 향해서 구소운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허허! 구형. 오늘 잔소리가 너무 심한데. 누가 보면 마누라 바가지 긁는다고 하겠소."
백산은 구소운에게 농담을 던지며 비무장으로 천천히 들어서고 있었다.
사인도(死人刀) 진천(辰泉)은 비무장으로 들어오고 있는 백산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내심으론 기뻤다. 첫 상대가 이름도 없는 사람이니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만사가 불여튼튼 이라고 모든 것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
그의 눈에 비친 백산이란 저놈은 겁을 잔뜩 집어먹은 듯 심각한 표정으로 온몸을 덜덜 떨며
관중석의 한곳만 계속해서 응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떨림은 정도가 심해서 이제는 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녀석의 시선은 관중석의 한곳에 고정되어 떨어지질 않고 있었다.
진천은 궁금했다. 저곳에 과연 무엇이 있기에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며,
저놈이 한 가닥 기대의 빛을 보이며 쳐다보고 있는 것인가. 고개를 돌려서 확인하고 싶었다.
저 녀석이 기대를 걸고 쳐다보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진천의 얼굴에 초조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를 악다물고 백산을 노려보았다.
놈의 상태를 파악해 보기 위해서 전음을 날렸다.
'내가 너 같은 놈들의 생리를 잘 알지.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큰소리를 탕탕 치다가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지금의 네놈처럼 온몸을 떨게 되지, 죽음이 두려워서 말이야.'
사인도 진천의 전음에도 불구하고 백산은 그의 오른쪽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심판관의 시작소리가 벌써 울렸으나 백산의 떨림은 점점 더 심해져갔고,
이제는 관중석에 있는 중인들까지도 알아차렸는지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천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백산을 향해서 마지막 전음을 날렸다.
'관중들도 지겨워하니까 이제 그만….'
순간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던 백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오르며 두 주먹을 힘차게 말아 쥐는 것이었다.
진천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백산이 보고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 진천의 귓가에 '바보.' 하는 조그마한 비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온천지가 깜깜해졌다.
그리고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사인도 진천이 천천히 바닥에 쓰러졌다.
관중석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앞서서 비무를 했던 두 사람이 그랬듯이 이번에도 혈전(血戰)을 기대했던 관중석에서는
너무나 어이없는 결과에 할 말을 잊은 듯 정적이 흘렀다.
아무리 한쪽이 죽어야하는 생사비무라지만 비무 상대자 간에는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이 있다.
적어도 통성명 정도는 하고 나서 암습을 하든지 독을 뿌리든지 하였던 것인데,
지금처럼 끝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다쇠 불알 백산 승리!"
"비겁하다! 이게 무슨 비무냐. 애들도 그렇게 싸우지는 않는다. 집어치워라!"
사인도 진천에게 돈을 걸었는지 여기저기에서 백산을 향해 비난하는 외침이 나오고 있었다.
그런 관중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가운 비무장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인도 진천을
일별한 백산은 관중석을 향해서 환하게 미소를 지은 다음 유유히 비무장을 빠져나갔다.
비무장 밖에는 풍신개와 구소운이 백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시다, 영감! 이제부터는 외상으로 술 먹어도 된다죠?"
그랬다. 생사비무(生死比武)의 일차 전에서 승리한 생사투인(生死鬪人)은 만상투인루의 모든 것을
외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죽음을 향해서 달리고 있는 생사투인에게 주어지는 약간의 배려인 모양이었다.
백산 일행이 막 주루로 들어가려고 할 때,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백무천 일행과 맞닥뜨렸다.
"어이! 안녕하신가, 버러지씨. 자네의 비무는 잘 보았네. 역시 버러지에 어울리는 수법이더군."
얼굴에 가득 경멸의 표정을 담은 백무천이 백산을 향해서 이죽거렸다. 역시 그의 생각 대로였다.
근본도 없는 천한 놈들이 강호 정의를 수호하고 약한 자를 돕는 무림인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겠는가.
어디서 잔재주 몇 가지를 배워 무림인 행세를 하고 다니는 이런 놈들을 보면
그냥 밟아버리고 싶어지는 백무천이었다.
자연히 이런 놈과 같이 동행하고 있는 개방의 인물에게도 선배로서의 제대로 된 대접을 할 수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명문정파(名文正派)의 어른께서
어찌 이런 버러지 같은 놈하고 어울리고 계신지요. 많은 후배들이 배울까 걱정됩니다."
뼈가 있는 말이었다. 아무리 지금은 활동을 하지 않고 있지만 한때는 개방 방주였던 풍신개였다.
그런 그에게 처신 좀 잘하라고 충고를 하고 있었다.
굳어진 얼굴로 한동안 백무천을 응시하던 풍신개는 이내 표정을 풀며 어색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 그게 험험! 소운이하고 친구라서 말일세."
그리고는 휘적휘적 주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짝! 짝! 짝!
백산이 큰 동작으로 박수를 쳤다.
"금뎅이 자네 정말 멋있군. 아무리 연장자고 무림 대 선배라고 해도
장차 무림을 이끌어갈 신룡(新龍)을 몰라보면 자네처럼 그렇게 따끔한 충고를 해야 돼.
저 얼마나 무례한 행동인가.
정천무룡 백무천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버릇없게 주루 안으로 들어가 버리니 말이야.
내가 다시 가서 저 영감에게 훈계를 하도록 하지."
네 녀석이 얼마나 잘났기에 어른에게 훈계냐 하는 백산의 일침이었다.
얼굴이 붉어지고 있는 백무천을 유심히 바라보던 백산이 묘하게 입가를 씰룩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일세. 나도 자네 비무는 잘 보았네. 아주 통쾌해 보이더군.
공포에 절어있는 놈을 쥐새끼 밟듯이 한방에 밟아버렸으니까 말이야.
부모님께 자랑하면 아주 기뻐할 것 같은데 잘 기억했다가 나중에 집에 돌아가면 꼭 말씀드리게."
백무천의 얼굴이 붉은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자신도 잘못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악인에게 고통을 주면서 죽이려 했던 것이 약간 도를 지나쳤다는 것을. 그도 인정하고 있었고
주루에서 그의 사형인 운학자(雲鶴子)에게 약간의 질책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이 음혈색마 반고인을 죽인 것에 대해서 이런 하찮은 버러지 같은 놈에게까지
비난을 받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놈은 그렇게 죽어도 싸지. 무림을 좀먹는 해충이거든.
그리고 그런 해충을 박멸하는 것이 나의 일이고 말이야.
자네 같은 무식한 놈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런 것을 두고 일벌백계(一罰百戒)라고 하는 거야.
그놈 하나를 죽여서 다른 색마가 생겨나는 것을 방지하는 것.
자네도 그런 해충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군."
마지막 말을 하는 백무천의 얼굴에는 네놈도 해충이 되기를 바란다는 의지가 표면화되어
살기와 함께 나타나고 있었다.
백무천과 운학자 일행이 서서히 멀어져갔다.
'큰 해충…작은 해충. 어떤 놈이 더 해악을 끼치는 것일까?
작은 해충이야 나뭇잎 몇 장만 죽이지만 큰 해충은 나무 전체를 죽이게 되는데….'
멀어져 가는 백무천 일행을 쳐다보는 백산의 눈동자가 깊어지고 있었다.
'아이고. 내가 무슨 헛생각을. 저놈은 저놈 멋에 사는 것이고 나는 내 멋에 사는 것인데,
나에게 피해만 안 주면 되지 큰 해충이든 작은 해충이든 무슨 상관이냐.'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상념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백산은 주루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구두파의 인물들이 백산을 향해서 직각으로 인사하며 맞아들였다.
"어? 너희들이구나. 구두 아저씨 어디 있어? 오! 저기 있었구먼. 내가 한턱 낼 테니 갑시다."
일행은 주루 한켠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이! 아저씨 얼마나 걸었소?"
"무슨 말인가…."
"이 양반이 다 알면서 왜 이러나 이거. 나에게 얼마 걸었냐고요."
"오천 냥 걸었네."
"그것밖에 안 걸었어요? 그러니 평생 그런 꼴로 살지."
백산의 입매가 비틀어지며 강 구두를 비난하는 얼굴로 툴툴거렸다.
"참 소운, 시합은 언제야?"
강구두를 노려보던 백산이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소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빨리도 물어보네요. 왜 좀 더 노시다 비무 끝나면 물어보지요?"
구소운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있는 백산이었다.
그래도 약간은 미안한 감이 있었는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아! 그게 너무 다른 일에 신경을 쓰다 보니…."
"모래 아침입니다."
"아직 많이 남았구먼. 그럼 그때까지 잠이나 좀 자 볼거나?"
강구두를 향해서 인상을 쓴 백산이 밖으로 나갔고, 이어서 강구두와 일행도 볼일이 있다며 나갔다.
미묘한 표정을 지은 풍신개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구소운을 쳐다보았다.
"방에서는 저 녀석에 대해서 소식 같은 것 들어온 것이 없느냐?"
"몇 가지가 들어왔어요. 십 년 전에 이곳에 나타나서 강구두를 도와 구두파를 만들었다는 것과
그때 초인파의 두목이었던 살인비도(殺人飛刀) 마천택을 제거했다고 하고요.
그리고 얼마 전에는 백수의 제왕이라는 마령호(魔靈虎)의 호피를
만금돈노(萬金豚奴) 석숭에게 팔았다는 것밖에는 사문이 어딘지 사부가 누구인지는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어요."
과연 무림의 최대 방파인 개방이었다.
뇌룡현의 촌무지렁이인 백산에 대한 정보가 술술 풀려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실력이 있는 것도 같고, 어떻게 보면 떠버리 허풍쟁이 같고,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는 놈이란 말이야.
뭐 특별히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으니 두고 보는 수밖에…."
그때 백산은 표운을 찾기 위해서 생사투인(生死鬪人)이 머무는 방들을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표운의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생사비무(生死比武)는 계속 진행되었고,
만상투인루에는 돈을 딴 자의 환호와 잃은 자의 탄식이 교차하고 있었다.
오늘은 구소운의 첫 생사비무가 있는 날이었다.
백산은 술과 만두를 사서 풍신개와 같이 앉았다.
"제기랄! 이곳은 술이 너무 비싸요.
가장 싼 화주 한 병에 은 다섯 냥이 뭐요? 순 날강도 같은 놈들."
백산은 투덜거리며 자신이 사온 술과 안주를 주섬주섬 자신들의 앞에 내려놓았다.
"죽기 전에 원 없이 쓰는 것인데 뭐가 그리 아깝나? 어차피 비무하다 죽어버리면 다 필요 없는 것인데."
"그래서 가장 비싼 것을 사왔죠."
백산이 내놓은 것은 여아홍 열 병, 만두와 구운 오리 세 마리였다.
"자넨 정말 통이 크군. 분명히 성공할 거야. 잘 먹음세."
만면에 웃음을 지은 풍신개는 게걸스레 오리 한 마리를 들고서 뜯어먹기 시작했다.
"아! 이것은 소운이 앞으로 달아놨습니다."
"커억!"
입안에서 열심히 절삭작업을 당하고 있던 오리가 풍신개의 입이 벌어진 사이에
밖으로 튀어나와 날갯짓하며 날아가고 있었다.
"아 그게, 아직은 생사비무 결과를 몰라서 안 된다고 하기에 소운이 못 내게 되면
내가 대신 낸다고 그랬거든요. 너무 그렇게 감격해하지 말고 빨리 듭시다."
백산은 여아홍 한 병을 입안으로 처넣었다.
"캬 - 아-! 바로 이 맛이야. 우물우물. 영감, 그렇게 멍하니 있지 말고 한잔하쇼."
입안에 음식을 가득 집어넣은 백산이 정신 차리라는 듯이 풍신개의 얼굴을 향해서 손을 휘휘 저었다.
"내 살다 살다 거지새끼 벗겨 먹는 놈을 만나게 될 줄이야. 아이고, 이걸 소운이 저놈에게
어떻게 말해야 되나? 이놈이 그랬다면 믿어주지도 않을 텐데…어이구 골이야."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풍신개를 현실로 끌어들인 것은 여아홍이 몇 병 안 남았다는 백산의 말이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풍신개는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먹고 보자는 생각으로 백산이 들고 있던 술병을 거칠게 낚아챈 풍신개는
술들을 입안으로 쏟아 붓기 시작했다.
이때 생사비무장에서는 소운과 구월마도(九月魔刀) 창파의 비무가 한창 있었다.
관중들의 함성소리와 함께 창파의 검이 팔방풍우(八方風雨)의 수법으로 소운의 전신을 노리고 지쳐들고,
소운은 술 취한 듯 비틀거리면서도 간발의 차로 검을 피하고 있었다.
"앗, 취선보(醉仙步)다!"
"개방에서 실전(失傳)된 취선보를 여기서 보게 되다니?"
소운의 걸음걸이가 더욱더 현란해지자 관중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검을 소운의 가슴으로 찔러가던 창파의 입에 살소가 맺히고
그의 검(劍) 끝에서 무엇인가 번쩍 하며 튀어나갔다.
창파의 웃음에 이상함을 느낀 소운이 전력으로 몸을 틀며 허리춤에 있던 손을 힘차게 뿌렸다.
챙-!
암기였다. 창파의 검 끝에서 발사된 암기가 소운의 연검에 막혀서 떨어졌다.
암기를 쳐낸 소운은 당황하고 있는 창파를 향해서 자신의 검을 맹렬하게 찔러 넣었다.
푸욱!
살이 찔리는 거북한 소리와 함께 창파의 심장에 소운의 연검이 깊숙이 박혔다.
창파의 몸뚱이가 바닥으로 쓰러짐과 동시에 관중들로부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휴! 위험했네. 비열한 자식, 꼭 야비한 티를 내요.
취익! 허억! 내가 저런 더러운 침을 뱉다니. 이게 다 백형 때문이야. 우씨.'
백산의 침 뱉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배워버린 소운은 그것을 백산 탓으로 돌리며
풍신개와 백산이 있는 곳으로 갔다.
투인 대기석에 도착한 소운은 너무나 어이없는 광경에 입이 쩍 벌어진 채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끄윽! 그러니까 영감한테… 그 무어냐, 피…도 뭐? 아니 피독주라고?
크읍, 그래 피독주라고…하는 놈이…있다는 것…아-뇨. 꺼-억, 그것은 얼-마-나 나갈…까요?"
"참, 그리고 네놈이…마령호(魔靈虎)…꺼억…를 잡았…다…고 하…던…데… 그거 정…말…이…냐?"
인사불성이었다. 주변에는 온통 술병이 나뒹굴고 술병 옆에서 풍신개와 백산이
서로 술주정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쭈우욱-캬아! 엉? 안-주-가- 떨…어…졌…네? 어 저기 점원이 있구먼."
"어이! 점원 여기 오리구이 한 마리 더 꺼-억!"
그러나 백산이 부른 그 점원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야, 이-놈-아. 저 녀석 점-원…이 아닌 것 같-지 않-냐?"
"어? 그-러-고 보-니 그…런-것 같-네-요. 어-디-서 많이 본 얼굴…."
"사숙니…임!"
소운의 목소리가 아무도 없는 비무장을 가득 채웠고
풍신개와 백산은 술이 번쩍 깨는지 눈을 동그랗게 치뜨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누구는 비무대에서 목숨이 오락가락하고 있는데 사숙이랑 친구라는 인간들은 격려는 못할망정
이곳에서 술이나 먹고 있어요? 이게 말이 되요? 말이 되냐고요."
"아이고, 소운아. 이건 절대, 절대 나의 의지가 아니다.
나는 조용히 이곳에서 응원이나 하려고 했는데 저 웬수 같은 자식이 술을 턱하니 가져오는 거야.
그것도 싸구려 화주가 아닌 여아홍, 그 말로만 듣던 여아홍 아니냐.
너도 알다시피 내가 여아홍 하면 끔벅하지 않냐. 저놈, 저놈이 웬수야!"
"아이고 영감, 무슨 사람 잡을 소릴 하는 거요.
나야 이 술은 소운이 비무 끝나면 자축하려고 사온 건데 영감이 먼저 먹고 있자 해서 시작한 거 아뇨.
왜 생사람을 잡아요. 나잇살이나 먹은 양반이 어디서 거짓말이요!
소운, 나는 말이야 너의 사숙의 기분 맞춰준 죄밖에 없다고. 잘못은 저 영감에게 있다고."
처절했다.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려고 풍신개와 백산은 입안 가득 게거품을 물고서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야 인석아, 내가 언제?"
"됐어요. 그만해 내가 뭘 더 바래요. 둘 다 똑같아요."
풍신개와 백산은 서로를 쳐다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풍신개가 백산을 향해서 전음을 날렸다.
'돈 이야기는 벙긋도 하지 마라. 그것마저 들키면 너와 나는 최소한 사망이다. 이놈아, 알았냐?'
"알았소."
"알긴 뭘 알아요?"
얼떨결에 풍신개의 전음에 대답을 해버린 백산을 소운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소리쳤다.
"아무 것도 아니야. 힘들 텐데 빨리 가서 쉬라고."
소운의 어깨를 두드리며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백산이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땐 정말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소운이 멀어지자 백산과 풍신개는 안도의 숨의 내쉬면서 주루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감, 어디 가쇼?"
"그런 네놈은 어디 가느냐?"
"나야 배가 고파서 밥 먹으로 가는 거지요."
"나도 밥 먹으로 간다, 이놈아."
"에이 영감이 무슨 돈이 있다고 밥을 먹으러 가요. 돈이라고는 먹고 죽자 해도 없으면서."
"클클클! 밥은 네놈이 사야한다.
안 그러면 지금 소운이에게 가서 오늘 일을 전부 일러바칠 거야. 알아서 해, 이놈아."
"치사한 영감 같으니라고. 하여간 누구하고 똑같아요. 그러나 저러나 잘 계시려나?"
백산은 가만히 밖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티격태격하면서도 풍신개 영감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사부가 자꾸 생각나는 것이었다.
"누구를 말하는 거냐?"
"사부요. 나이도 많은 노인네가 잘 있나 모르겠네. 날씨가 조금 쌀쌀한 것 같은데…."
"엥? 네놈에게도 사부가 있었냐? 네놈의 사부도 참 한심하다.
너 같은 놈을 제자라 길러 놓고 얼마나 근심이 많을까."
그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백산은 가만히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다음날도 백산은 계속해서 비무장으로 구경을 나갔다.
어김없이 술과 안주를 챙겼고, 그 곁에는 언제나 거지 한 명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나야 이렇게 자주 술을 먹어서 좋기는 하다만 도대체 무슨 일로 이곳 비무장을 계속해서
들리는 거냐. 그것도 설씨 성을 가진 자가 비무할 때마다 오는 것 같은데."
술 때문에 백산을 따라 다니는 것은 아니었는지 백산이 비무장에 온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백산은 말없이 비무장만 주시하고 있었다.
생사비무(生死比武) 일차전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지금 비무대에서는 백산이 찾고 있는 설씨 성을 가진 자 중에서 마지막 인물이 비무를 하고 있었다.
"야! 이 녀석아, 술 안 먹고 뭐 하느냐."
조금 전부터 백산은 자신과 친숙한 어떤 기운을 느꼈기에 연신 몸을 움찔거렸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느껴지고 있었다.
백산은 천천히 자신의 감각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투명한 기운이 흘러나와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고,
곧이어 자신에게 친숙한 느낌을 주었던 그 기운이 잡히기 시작했다.
"비무장, 비무장이다!"
갑자기 큰소리로 외친 백산은 비무대를 주시했다.
"영감, 지금 저곳에서 비무하는 자들이 누구요? 빨리 좀 말해 보시오."
풍신개는 다급한 마음에 자신에게 경어를 쓰고 있는 백산에 대해
네놈이 웬일로 하는 표정을 지으며 의뭉스럽게 쳐다보았다.
"지금 비무하고 있는 놈들은 낙양(洛陽)에 있는 무림세가(武林世家)인 설가장의 장남
설가치룡 설태만과 독안수(獨眼獸) 인육(引六)이란 놈들이다.
네놈이 신경 쓸 만한 인물이 아닌데…혹시 저들 중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게냐?"
천하제일의 무림세가인 설가장이지만
이곳 뇌룡현의 촌놈과 관련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자세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럼 혹시….'
뭔가 알고 있는지 풍신개의 표정이 변했다.
그러나 백산은 풍신개의 표정에는 관심도 없이 오직 비무대 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설태만? 설? 설 공자. 낙양(洛陽). 그래 저 녀석이 바로 표운이다."
그제야 백산은 표운이 설태만이란 이름으로 이곳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무대에서는 설태만으로 화한 표운이 상대방을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내 끝날 것처럼 보였다.
"휴! 괜히 걱정했네. 비무 끝나면 만나서 무슨 사정인지 알아봐야 겠네…."
백산은 설태만 아니 표운이 잠시 자신을 쳐다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흡사 어린 시절 표운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백산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며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전신을 강타했다. 백산을 향해서 웃어보이던 표운이
자신의 검을 힘차게 뻗으며 상대에게 뛰어들었다.
"안-돼!"
푸-욱!
백산의 외침소리와 칼로 찌르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표운의 심장을 관통한 검이 등 뒤로 빠져나와 있었다.
표운을 찌른 인육(引六)도 자신의 검이 표운의 심장을 관통했다는 것에 의아해하고 있는지
얼이 빠져있었다.
즉사였다.
백산이 뛰어 들어갔을 때는 표운의 숨은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
백산을 향해서 웃음 짓던 그 모습 그대로 죽어있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천무맹에서 그런 마단을 어떻게 구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것만은 알 수가 없었다.
백산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 녀석이 죽으려고 하지 않았다면 인육이라는 놈은 결코 표운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백산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표운의 비무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왜! 왜 이 바보 자식아!"
백산의 고통에 찬 외침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다음날 백산에게 한 통의 서신이 도착했다.
나의 마지막 모습을 누군가가 기억해주는 것은 행운일까? 미안한 걸까?
나는 전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네 녀석이 나의 모습을 보아준다고 생각하니 마지막 길이 그리 서럽지는 않을 것 같구나.
죽음이라는 것. 빠르고 늦은 차이만 있을 뿐, 그 누구도 피하거나 돌아갈 수 없는 삶의 과정일 뿐인 것을….
나의 죽음에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행복한 일이 아니겠냐고. 자꾸만 가슴속을 뚫고 나오는 삶에 대한 애착을
그녀의 얼굴을 그리며 꼭꼭 묻었다.
나는 결코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녀의 가슴속에서 살기 위해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 조그마한 삶의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곳은 영원한 나만의 공간이다.
령. 이름자 하나만으로도 나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했던 그 이름.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아련히 저려온다.
평생을 병치레로 고생만 하다 처음으로 잡은 행복, 차마 그것을 깨트릴 수 없었다.
낙천수사(樂天修士) 표운(彪雲), 그것이 내 이름이었다.
백산, 너에게는 미안한 말일지 몰라도 나는 많은 시간 너를 잊고 살았다.
사방으로부터 조여 오는 삶의 무게가 과거를 추억하도록 놔두지를 않더구나.
네 녀석이 떠나고도 령이와 나의 삶은 변화가 없었다.
령이는 줄곧 아프고 나는 낙양 거리를 헤매며 뭇 사람들의 주머니를 노리고….
의외로 변화가 먼저 찾아온 것은 령이었다.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남자를….
그런 그녀가 이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른 채 나에게 부탁을 해왔다.
자신의 남편을 구해달라고, 오직 나만이 구할 수 있다고.
나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승낙하고 말았다.
그녀가 나에게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한 첫 부탁이었다.
그녀의 기뻐하는 모습, 그녀의 즐거워하는 모습, 그녀의 웃음, 그녀의 희열에 찬 표정,
비록 나를 향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즐거웠다.
아니 행복했다는 것이 제대로 된 표현일 거야.
언제나 병치레로 고달팠던 그녀의 얼굴에서 처음 보는 행복감이었다.
나는 하늘에 감사했다, 마지막 가는 길에 행복해하는 그녀의 얼굴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녀의 웃는 모습이 나의 가슴을 따사로이 데우고 있다.
백산, 나의 죽음에 너무 슬퍼하지는 말아라.
이제 이곳에서 나는 설가치룡 설태만으로 죽게 되겠지.
너에게도 목숨을 바쳐서 이루어야할 목표가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리라 생각한다.
나에게는 령이었다.
령의 행복이 내 삶의 유일한 목표였다.
그것을 위해서 이 길을 선택했고 후회나 아쉬움 같은 것은 없다.
다만 네 녀석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
아주 먼 훗날, 오래도록 먼 훗날 다시 만나자, 미친 곰 새끼.
-표운
편지를 읽어주던 구소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병신 새끼, 그렇게 뒈질 거면서. 병신 새끼."
표운을 욕하는 백산의 목소리의 떨림이 점점 커지고
그의 몸으로부터 분노의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죽음의 기운이었고 세상에 대한 분노의 기운이었다.
'왜 마지막까지 그런 개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건가.
우리들 같은 천한 놈들은 행복해지면 안 되는 건가.
왜 조금이라도 행복하다 싶으면 그것을 시기하는 놈이 나타나는가.'
백산의 가슴이 미어터질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정말 개 같은 세상이야."
"백형!"
한쪽 구석에서 백산이 뿜어내는 분노의 기운에 얼굴이 새파랗게 변한 구소운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백산을 부르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백산은 마음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소운,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리쇼. 그 녀석을 데리고 와야겠소."
백산은 표운의 서신을 품속에 넣고는 방을 나서서 표운이 묵었던 방을 향해 뛰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손을 내밀려는 순간 방안으로부터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녀석의 시신은 가지고 가야 되겠지?"
"일단은 이곳에서 가지고 나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설 공자의 죽음을 알려야 되겠지.
그리고 적당한 곳에 가서 버리면 그것으로 끝이지 뭐."
쾅!
문을 박차며 굳은 표정의 백산이 성큼 방안으로 들어섰다.
갑작스런 백산의 방문에 흠칫 놀란 두 사람이 재빨리 검을 뽑으며 외쳤다.
"누구냐? 누군데 설태만 공자의 영면을 방해하느냐? 썩 꺼져라."
유난히 설태만을 강조하며 백산을 향해서 소리치고 있었다.
"내 친구 표운을 데리러 왔다. 방해하면 죽는다."
백산의 몸에서 죽음의 기운이 자우룩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친구의 유골을 찾기 위해서 참고 또 참고 있었다.
자꾸만 사라지려고 하는 이성을 부여잡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곳에 네놈 친구는 없다. 그리고 설 공자에게는 네놈 같은 친구도 없었고…."
눈빛을 교환한 두 사람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백산을 향해서 검을 휘둘렀다.
자신을 향해서 죽음의 살기를 뻗어내는 검을 가만히 응시하던 백산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그의 손목에 있던 수천비(手天匕)들이 죽음의 빛을 뿌리며 두 개의 검을 잘라냄과 동시에
그들의 목 앞에 멈춰진 채로 있었다.
"선택해라. 남을 놈과 돌아갈 놈을."
순간 백산을 향해서 검을 휘둘렀던 두 사람의 표정이 해쓱하게 변했다.
자신들의 눈앞에서 죽음이 빛을 뿌리고 있는 비도(飛刀)를 쳐다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선택을 못 하겠다? 그럼 내가 선택하지."
백산이 두 사람의 목에 있던 비도를 천천히 치우면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목을 위협하던 비도가 치워지자 두 사람의 몸이 비호처럼 백산을 향해 쇄도하며
자신들의 최후 절기를 펼쳤다.
방안 가득 난무하는 검광(劍光) 속에서 나직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왼쪽 놈!"
뒤이어 번쩍 하는 빛과 함께 방안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오른쪽에 있던 장한 한 명의 이마에는 백산의 사천비(死天匕)가 깊숙이 박혀있었다.
"가라! 가서 설태만과 그놈의 아비에게 알려라. 내가 찾아갈 것이라고."
백산에게 쏟아져 나오는 살기는 남은 장한의 삶의 의지조차도 빼앗아버렸는지
고개만 끄덕인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백산은 조용히 표운의 시신을 안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와서 강구두를 불러 화장과 유골의 보관을 지시했다.
친구를 보내고 바라보는 밤하늘은 참으로 황량했다.
"그 녀석은 행복할까?"
"그럴 거예요. 알아주지도 않는 상대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마저도 기꺼이 버린 사람이라면 이제는 행복해야 되겠죠."
만상 투인루가 보이는 갈대밭에 백산과 소운이 나란히 서 있었다.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즐독합니다,
즐독입니다
즐~~~감!
즐감합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