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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4일 월요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제1독서 : 필리 2,1-4
복 음 : 루카 14,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12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 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가롤로 보로메오 성인은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지역에서
암브로시오 성인과 함께 크게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성인이 활동하던 때 교회 밖으로는 프로테스탄트가 부흥하고 있었고,
교회 안으로는 부패와 불의가 넘쳐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가롤로 성인은 밀라노 주교로서
트리엔트 공의회 정신을 바탕으로 교회 개혁에 앞장섰습니다.
그는 교회를 쇄신하고자 민감한 문제들도 두려움 없이 다루었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무질서하고 나태해진 것이
무지하고 게으른 성직자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성직자의 윤리와 생활 태도를 개선하고자 힘썼습니다.
성직자 교육을 위하여 신학교를 세우고,
평신도들의 교리 교육을 위해서도 애를 썼습니다.
또한 교구와 본당 운영에 대한 행정 체계를 재조직하고 사목 방문을 정례화하였습니다.
과감하고 엄격한 방식의 개혁은
당대 권력자들과 교회 내 여러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반발을 샀습니다.
이러한 반발에도 흔들림 없이 개혁을 실행하여
교회의 쇄신을 이룰 수 있게 한 덕목은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그는 주교 문장을 “Humilitas”(겸손)로 삼을 정도로 이 덕목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조차도 그가 겸손함을 인정하고 존경할 정도였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행하는 이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의 말과 행동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가롤로 성인은 세상에 올바른 신앙과 윤리적 생활을 선포해야 하는 교회가
그 무엇보다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건축가는 건물을 만들지만, 완성 후에는 집주인에게 열쇠를 내주고 떠납니다.
요리사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지만, 정작 그는 제때 식사를 할 수 없습니다.
기자는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사로 만들지만,
자신의 이야기는 잘 쓰지 않습니다.
어쩌면 세상의 수많은 직업이 바로 이런 모순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하지만, 대부분 남을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과 연결되어 있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자기의 일을 사랑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누구 때문에 자기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분이 있습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만나는 손님 때문에 힘들다고,
그래서 이제는 자기 일이 싫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리하는 것이 너무나 좋았던 어느 청년이 어느 유명 식당에 취직했습니다.
이 식당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워서 성장하겠다고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선배 요리사들의 괴롭힘이 너무 심했습니다.
신입이라 모르는 것이 당연한데도 선배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 이 청년을 혼냈습니다.
결국 이 청년은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요리 자체가 싫어졌다고 합니다.
충분히 이 청년의 행동이 이해됩니다.
그런데 먼저 모든 일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싫다는 생각을 버려야 했습니다.
사람이 싫다는 생각이 들 때, 자기가 사랑하던 일조차도 싫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사람이 ‘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합니다.
더구나 우리 모두 하느님의 창조물이기에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어렵고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사랑에서 시작하려는 마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여기에서부터 실마리가 잡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원래 이런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뿐이 아니라 사람들이 초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특히 소외받는 사람도 따뜻한 손길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들에게 보답받지는 못하겠지만, 하느님께 보답받는다고 하시지요.
우리 삶에서도 나를 반대하는 사람 때문에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미워할수록 하느님께 받는 보답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큰 보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초대를 베푸는 이의 태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 오히려 가난한 이들, 눈 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 14,12-13)
예수님께서는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도록 요청합니다.
곧 친구,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에 대조되는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은
보답할 능력이 없는 이들이 초대의 대상으로 제시됩니다.
이들에게 행한 은밀한 자선은 하느님께 대한 응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4)
이는 단순히 ‘초대한 이들에게 보답을 바라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나아가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는 단순히 자선이나
시혜를 베푸는 인간애 차원의 선행을 넘어, 신앙행위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고통받는 가난한 이 안에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현존하심을 드러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주었다.”(마태 25,35)
이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을 하늘나라의 보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보다
‘곤경에 처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가난한 이 안에서 예수님을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고통받는 그리스도를 알아 뵙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210항)
또 '새로운 복음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회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문화, 사회, 정치, 또는 철학의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입니다.
~ 이 선택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신
하느님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포함된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바랍니다.
~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 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로라는 초대입니다.” (<복음의 기쁨> 198항)
이는 우리가 ‘복음의 길’로 나아갈 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는 분명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우리는 ‘작고 가난한 이’, ‘가난한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2-13)
주님!
당신 말씀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식탁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생명을 건네게 하소서.
이제는 잔치를 베풀 줄 알게 하소서.
작은 이들을 초대하여 생명의 잔치를 베풀게 하시고,
저 자신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잔치가 되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성인의 무심한 은혜는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인은 자기가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잘 안 됩니다.
내가 베푼 것은 꼭 기억하고 남이 나에게 베푼 것은 곧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보답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14,1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지금 당장 보답을 받지 못하지만,
우리가 베푸는 하나하나는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됩니다.
저는 미국에 있을 때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려자들을 위해 무료급식을 하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본당에서도 한 달에 두 번 봉사활동을 가지만
그들을 돕는다는 것보다 함께하는 기쁨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매번 정성껏 마련한 음식이 모자람이 없었다는 것도 하느님의 안배입니다.
행려자들 앞에서 목사님은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선포했지만, 저는 그런 용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기회가 좋든 나쁘든 구애 없이 말씀을 선포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이 그리웠습니다.
그저 음식을 전해주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신 체면에 매여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어찌 되었든 화려한 잔칫상을 뒤로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분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의 수고와 땀으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가끔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같은 무리끼리 서로 왕래하며 사귄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끼리끼리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만 모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믿는 이들은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과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필요를 채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내색도 없이 그리고 요구도 없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모두를 품기를 주님께서는 기대하십니다.
끼리끼리가 아니라 소외된 이를 먼저 챙김으로써
하느님을 차지하는 행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성녀 소화데레사는
“나는 무엇이든 다 하느님을 위해서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아무런 손해도 볼 수 없고, 또 남을 위해 치른 수고는
언제나 한결 좋게 하느님께서 내게 갚아주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그것을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찾아 나서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이고
그들을 위한 행동은 보속이고 회개입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섬김의 삶으로 나설 때입니다.
사람에게서 인정받는 것보다 전적으로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아름답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아름답다"라는 말은 "알다"라는 동사와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알다"라는 말은 ‘사물의 본질을 이해한다.’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이것이 아름다움이 관련된 감정이나 개념과 이어질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아름"은 "너그러움" 또는 "품격"을 의미하는 옛말로,
넓고 포용력이 있는 아름다움을 뜻했다고 합니다.
현대 한국어에서 "아름답다"라는 말은
외형적, 내면적으로 훌륭하고 고귀한 것에 대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주로 자연경관, 사람의 외모, 마음씨 등
다양한 상황에서 긍정적이고 감동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아름다움은 시각적 요소에 국한되지 않고,
마음의 따뜻함이나 인격의 훌륭함과 같은 내적인 측면도 강조됩니다.
이러한 배경을 통해, "아름답다"라는 말은 단순한 외형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사람의 마음과 본질을 표현하는 의미로도 발전한 단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외면의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서 많이 노력합니다.
성형, 피부, 보톡스, 화장품, 운동, 다이어트는 외적인 아름다움을 가꾸는 방법입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내면의 모습이 아름다웠던 사람, 지난봄 하느님의 품으로 떠난 김민기 선생님의
‘아름다운 사람’의 가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세찬 바람 불어오면 벌판에 한 아이 달려가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새하얀 눈 내려오면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 있네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그이는 아름다운 사람이어라”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습니다.
꽃, 별, 구름, 개여울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천진한 아이의 웃음, 젖을 먹이는 엄마의 모습,
하루 일 마치고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사람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려왔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이 이상 더 아름다운 모습은 없을 겁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사제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사제의 글에 진한 감동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묵주 반지도, 시계도 끼거나, 차지 않는다고 합니다.
교우들이 묵주 반지나 시계를 선물해도 도로 주면서
대신 기도할 때, 시계를 볼 때 사제를 위해서 기도해 주기를 청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손에 아무것도 착용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미사를 집전하고 성체를 영해 줄 때, 반지나 시계가 먼저 보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고 합니다.
교우들이 온전히 성체를 먼저 볼 수 있도록 시계나 반지를 착용하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교우들이 ‘신부님이 미사를 정성껏 집전하시니 좋습니다.’라고 말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다른 모든 것들이 부족함에도 미사를 정성껏 집전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합니다.
오늘 드리는 미사가 생의 마지막 미사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미사를 집전한다고 합니다.
오늘 드리는 미사가 부모님의 장례미사라는 마음으로 미사를 집전한다고 합니다.
성사의 사효성(事效性)이 있어서 좋다고 합니다.
사제가 봉헌하는 미사는 비록 사제의 인품이나, 사제의 지식이 부족할지라도,
성사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성사가 된다는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저는 신부님의 글을 읽으면서 아름다운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는 아름다운 사람의 삶을 담담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당부합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좀 더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으므로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결혼하는 젊은이들이 하객들에게 축의금을 받으면서
그 축의금을 백혈병을 앓는 어린이들에게 기부하였다고 합니다.
부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세계의 인구가 80억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많은 어린이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많은 장애인이 불편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많은 병자가 고통 중에 있습니다.
우리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
선을 베풀어야 할 사람들에 대하여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는 사랑과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면서,
바로 당신이 공생활 중에 가난하고 억압받으며 소외된 사람들을 가까이하셨듯이
우리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과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하신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팔을 벌려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에 대한 보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모두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형제애로 서로 나누며 살아가라 하신다.
나눔을 통하여 그 사람은 자기의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하여 더 큰 것을 얻게 되고, 영적으로 더 성숙하게 되며,
하느님께서는 더욱 풍성히 갚아주실 것이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도 말했지만,
이 세상에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진정 무엇이 있는가? 거의 없다.
이 지상의 삶에서 쌓아두고 감추어 둔 것은,
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동시에 인연을 마감하고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따라, 그분이 그것을 나에게 맡겨주신 뜻에 따라서
올바로 관리하고 주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잘 사용하게 되면,
그래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나눈 것은 나의 죽음과 함께 다시 살아나서
모든 것이 나를 반기며 영원한 행복으로 초대할 것이다.
이러한 삶은 우리가 매 순간 깨어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것은 아주 작은 사건이나,
별로 가치가 없어 보이는 일에서조차 우리는 그것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나의 것을, 나의 시간을 그들과 나눔으로써
더 큰 성숙을, 기쁨을 체험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사랑과 봉사로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이다.
같이 식사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보니 제 어린 시절 걸인들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추운 겨울 다리 밑 같은 곳에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면 깡통을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밥 좀 주이소!’라고 외쳤습니다.
재수가 좋아 마음씨 좋은 마나님을 만나면 밥과 반찬을 좀 얻어서,
대충 요기를 하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분들에게 가장 기쁜 날은 혼례 날이나 회갑, 칠순 잔칫날이나 아니면 상이 난 날이었습니다.
그런 날 잔치의 주인들은 넉넉한 마음으로 오가는 행인들이나 걸인들에게도
넉넉한 한 상을 차려주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걸인들은 나름 달력을 하나 만들어
이 마을 저 마을 잔칫날을 미리 메모해서 허기를 달래곤 했습니다.
식사 한 끼 함께 나눈다는 것, 별것 아닌 듯 하지만 엄청난 위미를 지닙니다.
식사를 아무하고나 하지 않습니다. 주로 가족들과 함께합니다.
살짝 범위를 넓히면 친지들, 친구들, 동료들과 마음 편히 하는 것이 식사입니다.
유다 전통 안에서 식사(食事)에는 아주 큰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잔치나 축제 때에는 ‘ㄷ’자 모양의 식탁이 준비되었고, 3면에는 의자가 놓였습니다.
비어있는 공간으로는 종들이 드나들며 시중을 들었습니다.
유다인들은 포크나 나이프 같은 식사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음식을 먹었기에,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었습니다.
식사 전후 기도는 필수였습니다.
별도의 개인 접시는 준비되지 않고,
큰 그릇에 빵이나 요리가 담겨나오면, 함께 나눠 먹었습니다.
스프나 국은 빵에 적셔 먹었습니다.
잔치집에서 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한다는 것은 큰 친밀함과 친교의 표현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의 잔치상에 이왕이면 귀한 사람, 존경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
신분이 높은 사람을 초대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 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복음 14장 13~14절)
사실 과거 유다인들에게 있어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과 냉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될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인 규정으로 인해,
당시 장애인들이 받았던 싱처와 고통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공식적인 성전 예배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지체장애인들은 꿈란 공동체에 편입될 수 없었습니다.
시각장애인들, 청각장애인들은 성전에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일이 금지되었습니다.
초 세기교회 안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바오로 사도께서 크게 분노하신 흔적이 서간 안에 남아있습니다.
코린토 교회 신자들의 경우, 만찬 식탁에서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 대우가 벌어졌습니다.
폭식으로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굶주린 채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코린토 전서 11장 20~22절)
잔치집 식탁에서 벌어지던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직접 보신 예수님께서는 강력한 도전장을 던지십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초대를 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사심 없는 봉사를 실천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모든 것을 주면서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을 베풀라고 요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댓가를 바라지 않는 사심 없는 사랑의 실천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젠가 큰 선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라는 은혜로운 선물이 상급으로 부여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보상이 아니라 피안(彼岸)에서의 보상을 기대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시선이 부단히 이 세상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에 고정시키라고 당부하십니다.
지상의 권세는 하느님의 때가 오면 약함으로 바뀔 것입니다.
반대로 지상에서의 약함은 하느님의 때가 오면 그분의 힘에 의해 큰 권능으로 바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나약하고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이
내적, 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 훨씬 부유한 능력자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들을 강하게 해 주시고,
신앙의 빛은 그들에게 참 지혜를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저도 요즘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운영하는 피정 센터가 가장 환대하고 극진히 모셔야 할
첫 번째 VIP 손님들은 과연 어떤 분들이어야 하나?
성화의 여정
“주님 중심의 이타적 사랑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이제부터 영원까지.”(시편131,3)
노벨문학상 작가 한강에 대한 간소한 삶에 대한 소개에서 성숙한 일면의 모습을 만납니다.
“그는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술도 안마시고, 커피도 끊었고, 여행도 거의 않는다.
좋아하는 이들과 대화하고, 동네를 산책하고, 차를 마신다.
그의 삶이 더 좋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의 삶이 흥미롭고, 행복하고, 가치있다고 말하고 싶다.
무엇에도 견주지 않고, 존재 증명을 위해 애쓰지 않는 삶, 과잉의 시대에 갇힌 우리는
간소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택하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저항이 되지 않을까?”
삶은, 행복은 선택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성화의 여정을 택하여
하루하루 본질적 깊이의 단순한 삶을 사는 것도 지혜이자 행복입니다.
옛 어른의 지혜입니다. 마음공부는 성인공부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마음공부란 본성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본성의 방향을 나은 쪽으로 돌리려는 노력이다.”<다산>
이래서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마음공부입니다.
“욕심이 적다면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지 못하더라도 잃는 것이 적고,
욕심이 많다면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더라도 보존됨이 적다.”<맹자>
무욕의 지혜입니다. 욕심은 부단히 진리 추구의 청정욕으로 전환시킴이 지혜입니다.
오늘은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입니다.
성인은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평신도 시절 22세 교황청의 강력한 신임을 받았으며
교황이 된 비오 4세 삼촌은 그를 밀라노 대교구장으로 임명합니다.
교황 비오 4세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지닌 그는,
강력한 교황 후보직을 내려놓고 밀라노의 대주교로서
주교문장의 "겸손(humilitas)"이란 말마디 그대로 겸손히 그의 책무에 충실했습니다.
그는 교회차원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제도적 지원책을 마련했으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진정한 종교개혁과 쇄신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주교좌 성당 안에 있던 화려한 무덤들과 부유한 장식품들, 깃발 등을
사치로 규정하여 철폐함으로 성당 내부를 간소화했으며,
당시 교회가 무질서하고 세속화된 이유가 성직자들의 무지와 무능에 기인함을 깨달아
훌륭한 성직자들의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설립합니다.
주술과 이단과의 싸움에 온 힘을 다하면서 교회를 수호했고,
말년에는 밀라노에 흑사병이 창궐하자 귀족들이 흑사병을 피해 모두 도망쳤을 때도
끝까지 밀라노에 남아 병자들을 보호하고 치유하는데 온 힘을 다했고 밀라노도 평온을 되찾습니다.
그러나 보로메오는 오랜 극기와 과로로 소진되어 1584년 11월3일 밀라노에서 46세로 선종합니다.
“주님, 저는 여기 대령했나이다.”
주교님이 선종하기 전 마지막 남긴 임종어입니다.
평생을 주님 앞에서의 삶이었음을 봅니다.
제 요즘 애송하는 단풍 물든 장엄한 불암산을 보며 쓴,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 짧은 고백시도 생각납니다.
언제 어디서든 사랑의 주님 앞에서의 행복한 삶이면 참 좋겠습니다.
보로메오는 얼마 지나지 않아 1610년 11월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성됨으로
그의 성덕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입증됩니다.
오늘 복음이나 독서 말씀도
주님 중심의 이타적 삶을 추구하는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서로 주고받는 유유상종의 세속화된 이기적 삶이 아닌
온전히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아낌없이 나누는 이타적 아가페 삶을 살라 하십니다.
보로메오 성인도 이런 사랑으로 사목했음을 봅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 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말 그대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발적 이타적 아가페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도 마음에 깊이 와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누며,
같은 마음, 같은 사랑을 지니고, 서로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는 사랑의 삶을 살라는 촉구입니다.
오늘, 이 거룩한 미사 중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다음 말씀입니다.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권고입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필리2,3-4).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