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등대지기 이야기
저자명: 헨리크 센키에비츠 외
역자명: 김은영
출판사명: 문일
어느 등대지기의 이야기
인생에 있어 큰 것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아주 작은 기쁨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책머리에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조각배에 실려 거친 삶의 바다로 보내진다. 그리고
정박할 곳을 찾아 쉴 새 없이 항해를 시작해야만 한다. 정박하지 못하면 결국
침몰하게 되므로.
맑고 잔잔하다가도 갑작스럽게 높은 파도를 일으키는 변덕스런 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폭풍우를 몰고 오는 바다.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광기어린
바다. 그 험난한 인생의 바다를 우리가 무사히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은
사랑이란 이름의 등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해를 인도하는 등대엔
언제나 홀로인 등대지기가 있다. 정작 자신은 모든 것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리움과 인내, 좌절과 싸우면서 불빛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 인간의
진정한 가치가 타인을 통해 나타나는 숭고함이 아닐까.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 두고 싶은 소중한
이야기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가끔씩 그 이야기를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진실된 언어로 들려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 실린 단편들은 이렇듯 세상을 밝은 눈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따뜻한 이야기들을 모은 것이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당신의 옆에서 지친 영혼의 소중한 얘기가
들려올지도 모른다. 그 아름다운 얘기들로 당신의 영혼이 맑아진다면 무거운
그림자를 끌며 항해하는 다른 이에게도 들려주길 바란다.
어린것들에게: 아리시마 다케오
인간의 영혼을 넓혀 주고 성장에 대한 인간의 잠재력을 일깨워 주며 한
인간이 충만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데 있어 절대적인 사랑
이상의 것은 없다.
존 포웰 S. J.
너희들이 자라서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했을 때, 그때까지 너희들의 아버지가
살아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버지가 써 놓은 것을 보게 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세월은 쉬지 않고 흘러가고, 그때 이 짤막한 글도 함께
펼쳐지겠지.
너희들의 아버지인 내가 그때 너희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쳐질지는 아직
상상할 수 없다. 아마도 내가 지금, 저 사라져가고 있는 시대를 비웃으며
가련히 여기듯, 너희들 또한 나의 이 구시대적인 심경을 비웃고 가련히
여길지도 모를 일이다.
너희들이 어떤 주저함도 없이 나를 발판으로 삼아, 높고 먼 곳으로
앞질러가지 않으면 그건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든가, 혹은 있었다는 사실은 너희들에게 영원히 필요한
것이다. 너희들이 이 글을 읽으며 나의 사상이 미숙하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며 딱하게 여기는 동안에도, 우리의 애정은 너희들을 따뜻하게 해주고
위로해 주며 삶의 가능성을 맛보고 깨닫게 해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은 지난 해에 이 세상에서 단 한 분뿐인 어머니를 잃고 말았다.
너희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생명의 가장 소중한 양분을 빼앗긴
것이다. 너희들의 삶은 그때부터 이미 어둡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어느 잡지사에서 '나의 어머니'라는 제목의 글을 청탁해왔을 때에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나의 행복은 어머니가 처음부터 한 분이며, 지금도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다."라고 써 제꼈다. 그리고 내 원고지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너희들을 떠올렸다. 나의 마음은 못된 짓을 저지른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 점에서 나는 행복하였던 것이다.
너희들은 불행하다. 돌이킬 수 없이 불행하다. 불행한 나의 아이들아!
새벽 3시경부터 산모에게 완만한 진통이 있기 시작하면서 집안에 불안이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 지금부터 7년 전의 일이로구나. 그날은, 아마
홋카이도에서도 예전에 볼 수 없었을 만큼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던
날이었다. 장터에서 떨어져 있는 강변의 외딴집은 날려갈 정도로 뒤흔들렸고,
창유리에 부딪치던 눈들은 그대로 쌓여 솜구름을 이루며 잔뜩이나 가려진
햇빛을 이중으로 차단했고, 실내는 밤 같은 어둠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전등도 켜지 않은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너희들의 어머니는 흰 천을
둘러쓰고, 사경을 헤매는 사람처럼 신음은 토해내고 있었다. 나는 서생 한
사람과 하녀의 도움을 받아가며 불도 피우고 물도 끓이면서, 그들에게
여기저기 심부름도 보냈다.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산파가 동동걸음으로 집에 왔을 때 모두들 큰 숨을
내쉬며 안도했으나, 출산의 기미는 한낮이 되고 그 한낮이 지나도록 보이지
않았고, 산파와 간호부의 얼굴에서 걱정의 빛이 서리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정신없이 허둥대기만 하였다. 서재에 들어앉아 있어도 안절부절이었다.
나는 산실로 내려가 산모의 두 손을 꼭 잡아 주는 일을 맡았다. 진통이
일어날 때마다 산파는 큰소리로 산모를 독려하며 한시라도 빨리 출산을
끝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산모는 한순간의 진통이 끝나자 곧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코까지 골며 편안하게 잠든 모습은 마치 세상의 모든 일들을 잊은
듯했다. 산파나, 나중에 달려온 의사나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한숨을 쉴
뿐이었다. 의사는 혼수 상태에 빠질때마다 뭔가 비상수단을 쓰려는 듯했다.
한낮이 지나자 거세게 몰아치던 눈보라도 차차 기세를 잃어갔고, 짙게 깔린
눈구름 사이로 새어 나오는 엷은 햇빛이 창가에 쌓인 눈을 살짝살짝
건드리기도 했다. 그러나 산실에 있는 사람들에겐 불안의 구름이 더 짙어질
뿐이었다. 의사는 의사대로, 산파는 산파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무런 위기의식도 느끼지 않는 듯해 보이는 사람은, 가장
무서운 운명의 심연에 접해 있는 산모와 태아뿐이었다. 두 생명은 깊은 잠
속에서 죽음을 향하고 있었다.
꼭 3시라고 생각되었을 무렵, 그러니까 산기가 보이면서부터 열두 시간
만에, 산모는 무서운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 두 눈을 부릅뜬 채 초점도 없이
허공을 쏘아보았다. 일그러진 표정은 괴롭다기보다는 공포로 질린 듯했다.
그러던 산모는 내 몸을 힘껏 끌어당겨 안았다. 만일 내가 산모만큼 배에 힘을
주고 있지 않았다면 내 가슴이 으스러졌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강한 팔
힘이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의사와
산파는 장소도 잊은것처럼 큰소리고 산모를 독려했다.
문득 산모의 죄는 힘이 느슨해진 것을 느낀 나는 얼굴을 들었다. 산모의
무릎 밑에 핏기 없는 아이가 누워 있었다. 산파는 공을 치듯 아기의 가슴을
세차게 두드리며 외쳤다.
"포도주! 포도주!"
간호사가 재빨리 포도주를 들고 왔다. 산파는 다급한 표정으로 그것을
대야에 부으라고 명령했다. 강한 향기와 함께 대야의 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아기가 그 속에 담겨졌다. 잠시 후, 숨막힐 듯이 긴장된 침묵을 깨뜨리며
아이의 첫울음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광활한 하늘과 땅 사이에 한 어머니와 자식이 홀연히 탄생한 것이었다. 이때
새로운 어머니는 나를 보며 힘없이 미소지었다. 그 모습을 보자 까닭없이
눈물이 솟았다. 그것을 너희들에게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구나.
나의 생명 전부가 눈물을 솟구치게 했다고 말하면 될는지. 그때부터 생활의
양상에 뚜렷한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너희들 중의 맏이가 이렇게 해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출산의 어려움에 차이는 있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주어졌던
신기한 느낌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젊은 부부는 너희들 세 아이의 부모가 되었던 것이다. 그
즈음의 나는 여러 가지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로하여 마음이 심란했었다. 어느
것 하나에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늘 즐겁지가 못했던 것이다. 무슨 일이건
혼자 되씹는 버릇을 가진 나는, 겉으로는 여느 사람들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가슴속은 불끈불끈 치솟는 울화와 불안으로 초조해했다.
어느 때는 결혼을 후회했다. 어느 때는 너희들의 출생을 증오했다. 왜
자신의 삶의 형상이 뚜렷해지기도 전에 결혼같은 것을 했나? 아내가
있음으로하여 뒷걸음질쳐야 하는 그 무거운 덩어리를 왜 하늘로부터 받은
선물인 양 생각해야 하는가? 가정을 이루는 데에 소비되는 나의 노력과
정열을 다른 데에 써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나 자신의 혼란 때문에 너희들의 어머니를 가끔 울리기도 했고
외롭게도 해주었다. 또 너희들을 비정하게 다루기도 했다. 너희들이 약간
심하게 울거나 칭얼대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무언가 잔혹한 짓을 하지 않고는
못 견뎠던 것이다.
원고지를 마주하고 있을 때에 너희들의 어머니가 자잘한 집안일을 의논해
온다든지, 너희들이 울거나 떠들면 나는 책상을 치며 일어나곤 했다. 그리고는,
나중에 스스로 견디기 힘든 후회 속에 빠지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너희들에게 혹독한 매질을 하든가 고함을 치든가 했다.
그러나 나의 몰이해와 이기적인 태도를 운명이 벌하는 때가 왔다. 너희들의
어머니는 너희들을 가정부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고 하면서, 매일 밤 세 아이를
자기 곁에 재우며 한 아이에겐 우유를 데워 먹이고, 한 아이는 오줌을 뉘어
재우고, 또 칭얼대는 아이는 달래주고 하며 제대로 잠 한숨 못자면서 애정을
쏟아붓더니 결국 41도라는 무서운 신열과 함께 덜컥 자리에 드러누운 것이다.
그때의 놀라움도 놀라움이려니와, 왕진 온 두 사람의 의사가 한결같이
결핵의 징후가 있다고 했을 때 나는 그저 새파랗게 질릴 따름이었다.
담검사 결과, 그 의사들의 말이 사실임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그해 시월
말의 쓸쓸한 가을에 너희들의 어머니는 네 살, 세 살, 두 살난 너희들을
떼어놓고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나는 일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너희들 중 하나인가
둘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내가 그 동네에 이사했을 때부터 일을 보아주던
꼼꼼한 할머니가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그 할머니는 너희들을 보자 돌아서서
눈물을 닦았다.
너희들은 어머니를 보자 달려가 안기려 했다. 아직 결핵인 것을 모르는
너희들의 어머니 또한 보물을 안아들이듯 너희들을 가슴에 안으려 했다. 모든
걸 바쳐 잘되게 하려는 사람이 주위로부터 극심한 오해를 받으면서도 그것을
변명하고자 안간힘 쓰는, 그런 느낌을 나는 몇 번이나 받았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미 화를 낼 용기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너희들을 어머니로부터 억지로 떼어놓느라 진땀을 빼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는 이미 가로등이 어렴풋이 길을 비추는 저녁이었다. 현관을 들어서자
고용인들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집안에 둘셋씩이나 있으면서 어린
아기 기저귀는 갈아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울며 보채는 아기의 사타구니는 늘
젖어 있곤 했던 것이다.
너희들은 이상하리만치 남들을 잘 따르지 않았다. 너희들을 겨우 잠재우고
나서야 나는 서재로 들어가 하던 일을 다시 계속했다. 몸은 몹시 지쳐
있었으나 머릿속은 흥분해 있기 일쑤였다.
일을 마치고 잠을 청하는 11시쯤 되면,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너희들은
꿈속에서 겁을 먹었는지 문득문득 눈을 뜨곤 했다. 새벽녘이 되면 너희들 중
하나는 젖을 달라고 울어댔다. 그 소리에 깨고 나면 이미 나는 아침까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침을 먹고 난 나는 충혈된 눈으로, 머릿속에 단단한 심지
같은 것이 돋아난 느낌으로 일터로 나가야 했다.
북쪽 지방은 겨울이 늘 허겁지겁 달려온다. 어느 날 병원을 찾아가 보니,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너희들의 어머니가 빨리
퇴원하고 싶다고 말했다. 창밖의 단풍나무를 보고 있자니 몹시 불안하다고
했다. 입원했을 때만 해도 타는 듯이 붉게 물들었던 잎새들이 어느새 남김없이
다 떨어져 있었고, 화단의 국화도 아직 시들 때가 아니건만 이른 서리에
상하여 시들어 있었다. 나는 이같이 적막한 풍경을 매일 내다보게 하는 것도
좋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진정한 생각은 그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너희들과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퇴원하기로 한 날은 싸락눈이 내리고 찬바람이 휭휭 불어대는 궂은
날씨였으므로 퇴원을 중지시키려고, 일을 끝내자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병실은 이미 비어 있었다. 다만 그 할머니가 인사로 받은 물건이며,
방석, 그릇들을 한쪽으로 느릿느릿 정리를 하고 있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어느새 너희들은 어머니 둘레에 모여 앉아 즐겁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미 우리들은 서로 떨어지지 못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어버이와 아이들
다섯 사람은, 성큼성큼 다가오는 추위앞에 몸을 잔뜩 웅크린 잡초처럼 서로
다가앉아 온기를 나누려 하였다. 그러나 북녘의 기온은 우리 다섯 사람의
체온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추웠다.
나는 병든 아내와 철없는 너희들을 달래며 기러기처럼 남쪽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첫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에, 우리는 너희들을 낳아 길러준 땅을 뒤로 하고
나그네의 길에 올랐다. 잊지 못할 몇몇 얼굴들이 어두운 플랫폼에서
우리들과의 작별을 아쉬워하였다. 음울한 쓰가루 해협도 뒤로 뒤로 물러났다.
도쿄까지 동행해 준 한 서생은 너희들 중 가장 어린 것을 어머니처럼 밤새
안아 주었다.
그런 일들을 다 쓰자면 끝도 없다. 어쨌든 우리는 이틀 동안의 우울한 여행
끝에 무사히 늦가을의 도쿄에 도착했다.
먼저 있었던 곳과는 달리 도쿄에는 많은 친척과 형제들이 살고 있어서,
우리들에게 깊은 애정과 동정을 베풀어 주었다.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어 주었는지.
어머니는 곧 K해안의 조그만 별장을 얻어 휴양하게 하였고, 우리들은
가까운 곳에 여관을 얻어 그곳에서 문병을 다니게 되었다. 한때는 병세가 무척
호전된 듯 하였다. 너희들과 어머니와 나는 바닷가 모래언덕에서 햇볕을 쬐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무슨 속셈으로 운명이 그와 같은 소강상태를 보여 주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운명은 해야 할 일을 반드시 해치우고 마는 법. 그 해가
저물어갈 무렵, 너희들의 어머니는 우연히 걸린 감기로 인하여 병은 무섭게
빠른 속도로 악화되었다. 그리고 너희들 중 하나도 원인 모를 고열로
갑작스럽게 앓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실을 차마 어머니에게 알릴 수가
없었다.
병든 아이는 잠시도 내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희들의
어머니는 내가 찾아주지 않는 것을 서운해했다. 나는 마침내 쓰러졌다. 나는
병든 아이와 베개를 나란히 하고 누운 채,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고열로
심음하며 괴로워했다. 내가 하던 일은? 내가 하던 일은 만리 밖으로 떠나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너희들을 위해 최후까지 싸우려
하는 마음의 열기가 몸의 신열보다 더 뜨겁게 타오를 뿐이었다.
정월에 갓 접어들면서 비극의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너희들의
어머니에게 병의 정체를 알려야만 할 때가 온 것이다. 그 힘든 일을 맡았던
의사가 돌아가고 난 뒤, 내가 보았던 너희들의 어머니의 얼굴 표정은 평생 내
가슴을 에이게 할 것이다.
베개를 베고 누운 어머니의 핏기 하나 없이 해맑은 얼굴에 떠오른 조용한
미소는 스스로의 냉혹한 결심을 내게 말해 주고 있었다. 거기에는 죽음에 대한
체념과 더불어 너희들에 대한 집요한 애착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처절한
비애를 견딜 수 없어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마침내 해안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기로 한 날이 왔다. 너희들의 어머니는
병이 완쾌되지 않는 한 죽는 순간까지도 너희들을 만나지 않으리라 단단히
각오하고 있던 터였다. 두 번 다시 입게 되지 않으리라 생각되는, 실제로
그렇게 되고 말았지만, 나들이 옷을 갈아 입고 일어선 어머니는 양가의
할머니들 앞에서 흑흑 흐느끼며 울었다. 늘 단아하고 성품이 강인한
여인이었던 너희들의 어머니는, 나와 단 둘이 있을 때도 눈물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어머니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때의 눈물은 너희들만의 소중한 것이다. 그 눈물은 지금은 말라
없어져 버렸다. 하늘을 지나는 구름의 한 조각이 되었는지, 산중 계곡을
흐르는 한 방울의 물이 되었는지, 대양의 한 개 물거품이 되었는지, 아니며
예기치 않은 사랑의 눈물샘 속에 괴어 있는지, 그것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뜨거운 그 눈물은 어쨌거나 너희들만의 소중한 것이다.
자동차가 집 앞에 대기하자, 열병을 치른 아이는 아직 걸을 수가 없으므로
가정부 등에 업힌 채, 또 한 아이는 아장아장 걸음으로 어머니를 전송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막내는 어머니를 가슴 아프게 할 거라는 조부님의 배려로
집에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희들은 놀라운 눈으로 커다란 자동차만 바라보고 있었다.
너희들의 어머니는 쓸쓸한 눈으로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너희들은 가정부가 일러준 대로 군인처럼 거수경례를 했다.
어머니는 웃으며 가볍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너희들은 그 순간부터 어머니가
영원히 떠나가 버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불행한 아이들아!
그 뒤 너희들의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의 1년 7개월 동안
우리들에게는 결렬한 싸움이 있었다. 어머니는 죽음 앞에 최상의 태도를
보이기 위해서, 너희들에게는 최대한의 사랑을 남겨놓기 위해서, 나를 더도
덜도 없이 가장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싸웠다.
나는 어머니를 병마로부터 구해내기 위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남자답게 어깨에 짊어지기 위해서 싸웠다. 너희들은 범상치 않은 운명으로부터
너희들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싸웠다. 그건 피투성이의 싸움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나 어머니나 너희들까지 얼마나 자주 총알을 맞고 칼에
베이며 쓰러졌다가 일어나고 또 쓰러지곤 했던 것일까?
너희들이 여섯 살, 다섯 살, 네 살이 되던 해 8월 2일에 마침내 죽음이
들이닥쳤다. 죽음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그리고 죽음이 모든 것을 구출했다.
너희들의 어머니가 남긴 유언장에서 가장 숭고한 부분은 바로 너희들에게
주어진 구절이었다. 이 글을 읽게 되거든 동시에 어머니의 유언도 읽어주기
바란다.
어머니는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죽는 날까지 너희들을 만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그것은 너희들에게 병균을 옮기게 될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또한 너희들을 보며 자신의 가슴이 터져 버릴까 두려워해서도
아니었다. 너희들의 맑은 마음에 죽음의 잔혹한 모습을 보여 너희들의 삶이
더욱 어두워지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너희들이 자라나는 영혼에 조금이라고
상처를 남기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어린아이들에게 죽음을 알리는 것은 조금도 득이 될 것이 없으며 오히려
해가 될 뿐이니, 장례식 때는 너희들을 가정부와 같이 있게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해주라고 너희들의 어머니는 써 놓았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미의 마음은 태양이 드넓은 천지를 비추는 것만큼이나
크다!"
이렇게 읊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너희들은 신슈의 산골에 있었다. 너희들에게
어머니의 임종을 보여주지 않으면 평생 원망을 듣게 될 거라고 내게 편지를
써 보낸 삼촌을 억지로 만류하여 그대로 산에 있게 했던 나는 언젠가
너희들이 가혹하다고 생각할 때가 오겠지.
지금은 열한 시 반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옆방에서 너희들은 지금 베개를
나란히하여 자고 있다. 너희들은 아직 어리다. 너희들이 내 나이가 되면 내가
한 일을, 즉 어머니가 결정한 일을 높이 평가할 때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뒤로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너희들의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나는 내가 걸어야 할 길 한복판으로 휘청거리며 나와섰다. 나는 자신을
사랑하고 수호하며 그 길을 헛딛는 일 없이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언젠가 나의 작품 속에 아내를 희생시키기로 결심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쓴 일이 있다. 사실 너희들의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희생이 되어
주었다. 나처럼 자신이 지닌 능력을 어떻게 발휘해야 하는지 몰랐던 인간도
없다. 내 주위 사람들은 나를 소심하고 우둔하며 일을 할 줄 모르는 가련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소심함과 우둔함과 무능력을 철저하게
자각시켜 주려 했던 사람은 없었다. 그것을 너희들의 어머니가 해주었다.
나는 자신의 약한 몸에서 힘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일할 수 없는 곳에서
일을 발견하였다. 대담해질 수 없는 곳에서 대담성을 찾아냈다. 예민하지 못한
곳에서 예민을 찾아냈다. 바꿔 말하면, 나는 예민하게 자신의 우둔함을
간파했고, 대담하게 자신의 소심함을 인정했으며, 애써 일하여 자신의
무능력을 체험하였다.
나는 이 힘을 가지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남은 삶을 살게 되리라 생각한다.
너희들이 언제인가 나의 지난 날을 보게 될 때에, 결코 헛되이 살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고 기꺼워 해 주리라 믿는다.
온종일 비가 내려 답답한 기분이 집안에 가득 퍼져 있을 때에 너희들 중
하나가 말없이 내 서재에 들어온다. 그리고 '아버지!'라는 한마디만 할 뿐 내
무릎에 엎드려 훌쩍훌쩍 운다. 아아, 무엇이 너희들의 철없는 가슴에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일까? 불행한 아이들아, 너희들이 말할 수 없는 슬픔에 빠져
있는 것을 보는 것보다 세상을 적막하게 하는 것은 없다. 또한 너희들이
생기발랄하게 내게 아침 인사를 하고, 어머니의 사진 앞으로 달려가 "어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하고 쾌활하게 외치는 순간보다 내 가슴 밑바닥을
도려내는 순간도 없다. 나는 그때 흠칫하며 영겁을 보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마도 나의 이 같은 술회를 어리석은 푸념으로 생각할
것이다. 왜냐 하면 아내의 죽음이란 여기저기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사건 중의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중요시할 만큼 세상 사람들은 한가하지
못하다. 틀림없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뿐만 아니라 너희들
역시 어머니의 죽음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슬프고도 억울한 것으로 여길
때가 올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관심 없다고하여 그것을 부끄럽게 여겨서는 안
된다. 흔히 있는 사건 속에서 인생의 허무에 정면으로 맞부딪 칠 수 있는
것이다. 조그만 일은 더 이상 조그만 일이 아니다. 커다란 일이 커다란 일은
아니다. 그것은 오직 마음 하나에 달려 있는 것이다.
너희들은 애처롭도록 여린 인생의 새싹이다. 너희들이 울 때나 웃을 때나
기뻐할 때나 쓸쓸할 때나 그것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가슴은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이 슬픔이 너희들과 나에게 얼마나 강한 힘이 되어 주는지 너희들은
아직 모른다. 우리들은 이 손실로 인하여 생활 속에 더욱 깊이 들어가게
되었다. 인생을 살아가며 인생에 깊이 파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재앙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슬픔에만 잠겨 있어서도 안 된다. 너희들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돈의 번뇌로부터는 자유로웠다. 쓰고 싶은 약은 무엇이든
쓸 수 있었다. 먹고 싶은 음식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었다. 우리는 우연한
사회조직의 결과로 이런 특권 아닌 특권을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너희들 중에는 희미하게나마 U씨의 집안을 기억하는 아이가 있을 것이다.
죽은 아내에게서 결핵이 전염된 U씨가 그토록 명철한 지성을 지녔음에도
천리교를 믿고 그 기도로 병을 고치려 했던 것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견딜
수가 없다. 약이 들어주는 것인지 기도가 들어주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U씨는
의사의 약을 먹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지 못했던 것이다. U씨는
날마다 하혈을 하며 관청을 나갔다. 수건을 감은 목에서는 쉰 목소리만 새어
나왔다. 일을 하면 병이 더 나빠진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U씨는 기도에 의지하며, 늙은 어머니와 두 아이의 생활을 위해
용감하게 일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는 병이 몹시 깊어지자 힘들여 마련한 돈으로 결핵 주사를 맞았다. 그러나
시골 의사의 부주의로 정맥을 벗어난 주사액은 극심한 신열을 일으켰다. 그로
인해 U씨는 아무런 유산도 없이 늙은 어머니와 어린 아이들을 남겨 놓은 채
죽어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우리 이웃에 살고 있었다. 그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너희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U씨의 경우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엄청난 도랑을 메울 방법을 연구해야만 한다. 너희들
어머니의 죽음은 너희들의 애정을 거기까지 펼치게 할 만큼 충분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참으로 인간 세상은 적막하다. 우리는 단지 그 같은 말을 하며 태연히
있어도 되는 것일까? 너희들과 나는 피맛을 본 짐승처럼 사랑을 맛보았다.
나아가자, 그리고 우리들의 주위를 적막 속에서 구하기 위해 우리 힘 닿는
데까지 일해보자. 나는 너희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영원히 사랑한다. 이것은
어버이로서 너희들에게 보답을 바라며 하는 말이 아니다. 다만 사랑이라는 걸
내게 가르쳐 준 너희들이 나의 감사하는 마음을 받아들여 줄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이 어른으로 성장했을 때에 나는 죽어 있을지도 모른다. 노쇠하여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너희가 구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다. 이미 사양길을 걷고 있는 나 같은 사람
때문에 너희들의 생기발랄한 힘이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죽은 어버이를
뜯어먹고 힘을 저장하는 사자 새끼들처럼 용기 있게 나를 떨쳐버리고 인생의
길을 헤쳐 나가길 간절히 바란다.
지금 시계는 밤이 깊어 1시 15분을 가리키고 있다. 죽은 듯이 고요한 밤의
침묵 속에서 너희들의 평화로운 숨소리만이 희미하게 이 방에 들려오고 있다.
내 앞에는 너희들의 이모님이 어머니에게 보내온 장미꽃과 사진이 놓여
있다. 내가 저 사진을 찍어 주었을 때의 일이 생각나는구나. 그때는 너희들 중
맏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을 때였다. 어머니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상한
희망과 두려움 때문에 늘 초조해 하고 있었다. 그 무렵의 어머니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희랍 어머니들의 본을 따른다고 하면서 위인들의 훌륭한 초상들을 곳곳에
걸러 놓고 있었다. 그 중에는 미네르바나 괴테, 크롬웰, 그리고 나이팅게일
여사의 초상도 있었다. 그런 소녀 같은 마음을 그때의 나는 야유하듯 가볍게
보아 넘겼으나, 지금 생각하면 결코 웃어버릴 수 없는 일이었다.
너희들의 어머니는 내가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하자 한껏 화장을 하고 가장
좋은 나들이옷을 입고는 2층의 내 서재로 들어왔다. 나는 놀라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출산은 여인에게 있어 전장으로 나가는 것과 같아요. 훌륭한 아이를
낳느냐, 죽느냐 둘 중의 하나거든요. 그래서 죽음에 임한 옷을 입은
거예요……."
그때도 나는 무심히 웃어 넘겼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것마저 웃어버릴 수가
없다.
깊은 밤의 적막이 나를 엄숙하게 하는구나. 내 앞에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너희들의 어머니가 앉아 있는 것만 같다. 이 어머니의 애정은 유서에 써 있듯
너희들을 수호하며 존재한다.
잘 자거라. 신비로운 시간에 너희들을 완전히 맡기고 잘 자거라. 그리고
내일은 어제보다 더 상장하고 영리해진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오너라. 나의 삶이 실제로 끝날지라도, 혹은 내가 어떤 유혹에 넘어가
패배할지라도, 너희들이 나의 자취에서 그 어떤 불순한 것도 찾을 수 없도록
나는 나의 일을 해낼 것이다. 반드시 하고 만다. 너희들은 내가 쓰러진
자리에서 새로 걸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걸어야
할 것인가를 나의 발자취에서 희미하게나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린것들아! 불행하고 동시에 행복한 너희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축복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인생의 여로에 오르도록 하여라. 앞길은 멀다. 그리고
어둡다. 그러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앞에 길은
열리게 되어 있다.
가거라, 용감하게! 어린것들아!
가난한 사람들: 빅토르 유고
절대적인 사랑이란 어린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가장 깊이 열망하는
것들 중 하나이다
에리히 프롬
폭풍우가 몰아치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잔느는 난로 옆에 앉아서,
낡아빠진 돛에 헌 천을 대며 깁고 있었다. 바람은 비명을 지르고, 빗줄기는
유리창을 때리고, 바닷가에서는 부서져 흩어지는 파도 소리가 천둥처럼
울어댔다. 그 요란스런 소리들은 끊임없이 잔느의 귀를 괴롭혔다. 모든 것을
집어삼킨 어둠 속의 바깥 날씨는 몸서리가 칠 정도로 춥기만 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어부의 오막살이 집 안은 따뜻하고 아늑했다. 바닥은 맨흙이 드러나긴
했으나 깨끗이 쓸려 있었고, 난로에서는 마른 장작이 빠지직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다. 찬장에는 말끔히 닦인 접시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방
한구석에는 하얀 시트를 깐 침대가 놓여 있었다. 바닥에 깔아 놓은 큼직한
이불 속에 다섯 아이들이 바깥의 폭풍우 소리엔 아랑곳없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잔느의 남편은 바다에 나가 있었다. 고기잡이를 나간 것이다. 이렇게 어둡고
춥고 음산하기까지 한 사나운 밤에 바다로 나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식구들을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잔느는 바다와 바람이 울부짖는 소리에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따금 애처롭게 울어대는 갈매기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비는 물을
퍼붓듯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 잔느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난파선의
무서운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배는 암초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고,
사람들은 물에 빠져 허우적댄다. 아, 무서운 일이다!
낡은 괘종시계는 쉰 목소리 같은 음향으로 옹골차게도 때를 알린다. 태각
태각 태각 태각……. 어린것들은 잠들어 있다.
잔느는 생각에 잠겼다. 살아간다는 것이 그들에겐 참으로 쉽지가 않았다.
남편은 자기 몸도 돌보지 않고 이 추위와 폭풍우 속에서도 바다로 나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위협과 맞서야 했다. 그녀는 아침부터 밤중까지 쉬지
않고 일에 매달려야만 했다. 그런데, 이렇게 꼬박꼬박 일하며 살아가는 것이
잘하는 짓인지 확신이 없었다.
어린 자식들은 여름 겨울 할것없이 늘상 맨발로 뛰어다닐 수밖에 없다.
밀가루 빵 같은 건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귀리죽이 입에 들어가는 것만
해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간혹 생선은 먹는다. 그나마 어린것들이 별
탈 없이 튼튼하게 자라 주는 것만 해도 정말이지 하나님의 은총이라 할
수밖에.
저 바닷바람은 어쩌면 저렇게도 무서운 소리를 낼까! 지금 그이는 어디쯤에
있는지! 하나님, 제발 도와주소서! 은혜를 내려 주소서!
아직 잠자리에 들기는 이른 시각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잔느는 두툼한
외투를 걸치고 나서 간데라에 불을 켜들고 밖으로 나섰다. 남편이 돌아오고
있는지, 바다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는지, 등대 불이 제대로 켜져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어둠이 그녀 주변을 에워쌌다. 억세게 퍼부어대던 비는 조금 가늘어져
있었지만 여전했다. 동네 어귀의 해변에는 다 낡아서 반쯤은 허물어진
오두막집이 한 채 있었다. 벽은 시커멓게 썩어 들어갔고, 너덜거리는 문짝은
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삐걱거리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바람은 마치 그
초라한 오두막을 휩쓸어 버리려는 듯 유난스레 달려들어 기승을 떨었다.
문짝은 처량한 소리를 내고, 지붕의 썩은 지푸라기들은 구원을 청하는 듯
버석거렸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잔느는 이지러진 창문을 기웃거렸다. 집
안은 바깥만큼이나 깜깜했다.
'참, 저 가엾은 병자를 돌봐 주어야 했는데, 깜빡 잊었구나! 밤이 되면
상태가 더 나빠질 거라고 그이가 일러줬었는데! 저 사람은 너무나도 외롭고
돌봐 줄 이도 없다던데!'
잠깐 생각에 잠겼던 잔느는 문을 두드리고 귀를 기울였다. 인기척이 없었다.
잔느는 다시 궁리해 보았다.
'참으로 딱하기도 하지! 일일이 어린 것들을 돌봐 주어야 할 때에 병이
났으니, 무슨 놈의 팔자가 그렇담! 둘째 애를 가지면서 과부가 되었으니, 제
몸 하나에 온 식구가 매달려야 할 때에……. 참, 기박하기도 하지!'
그녀는 여러 번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봐요, 별일 없어요?"
잔느는 큰 소리고 외쳤다.
"좋아요, 주무시는 중이라면 그냥 가야겠군요."
바람은 멈출 줄을 몰랐다. 비에 젖은 잔느는 추위로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집으로 되돌아가려고 발길을 돌리는 순간 갑자기 외투를 날려버릴
듯한 거센 돌풍이 몰아쳤다. 그녀는 휘청거리면서 문에 부딪쳤고, 삐걱거리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녀는 얼떨결에 문 안으로 들어와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간데라 불빛이
쥐죽은 듯 고요하고 어두운 집 안을 비추었다. 집 안이라고는 했으나 바깥
날씨만큼이나 추웠고, 새어 들어온 빗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오랫동안
불을 지핀 일이 없었다는 것을 이내 알 수 있었다.
천장의 여기저기서 체질하듯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한쪽 벽의 지저분한
지푸라기들이 쌓여진 곳에 과부가 누워 있었다. 머리는 뒤로 젖혀지고,
푸릇푸릇해진 얼굴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죽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고뇌와 절망이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무언가를 잡으려고 내밀었던 것
같은 새파란 손은 맥없이 지푸라기 침대 아래로 쳐져 있었다. 어미의 침대
발치에 있는 더러운 요람 속에 어린아이 둘이 잠들어 있었다.
핼쑥하게 야위기는 했어도 곱슬머리에 예쁜 뺨을 한 어린것들은 금발머리를
서로 맞댄 채 얼굴을 찡그리며 고요한 잠에 빠져 있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줄도, 폭풍우가 미친 듯이 울부짖고 있는 것도 모르고, 어미는
죽어가면서도 어린것들의 발을 커다란 누더기 조각으로 감싸 주고, 자기
옷가지를 어린것들에게 덮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 아기는 자그마한 손으로 뺨을 괴고 있었고, 또 한 아이는 형의 목에
귀여운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 아기들의 숨소리는 조용하고 고르게 들렸다.
세상의 어느 것도 그들의 잠을 깨울 수 없을 만큼 깊고 평온한 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 그러나 폭풍우는 점점 더 거세질 뿐이었다. 천장에서 새는 빗물
한 방울이 죽은 어미의 이마 위로 떨어져 뺨으로 흘러내렸다. 마치 걱정
근심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에서 흐르는 눈물처럼.
잔느는 정신없이 집으로 향해 줄달음을 쳤다. 두툼한 외투 자락 안에
무엇인가를 감춰 들고 있었다. 심장이 몹시 뛰고 있었다. 누군가 쫓아오는
것만 같아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외따로 떨어진 오두막집에서 무언가를
훔쳐 나온 것이 아닐까?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잔느는 외투 안의 물건을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내려놓고 얼른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는 침대곁에 의자를 끌어다 주저앉았다.
침대 끝에 이마를 기대며 엎드렸다.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몹시 흥분해
있었다. 어떤 양심의 가책으로 몹시 번민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이따금
말을 끊어가며 외쳤다.
"그이가 뭐라고 할까. 나는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 다섯 아이의
치다꺼리에 지쳐……. 아, 나는 바보야……. 돌아오셨는가? 아니, 아니로군…….
차라리 그이가 나를 실컷 때려 주기라도 했으면……. 나는 맞을 짓을
했어……. 아아, 그이가, 아냐, 좋아! 차라리 내가……!"
문 소리가 났다. 누가 온 것 같았다. 잔느는 몸을 부르르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도 아니었어! 하나님, 저는 어쩌다가 이런 짓을 했을까요! 이런 짓을
저지르고 어떻게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 볼 수 있을지!"
잔느는 생각에 잠긴 채 오랫동안 침대 곁에 앉아 있었다. 갖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이리저리 부대끼고 있었다.
어느새 비가 멎었다. 먼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람은 여전히
휘몰아치고 있었으며 바다도 으르렁대고 있었다.
문이 벌컥 열렸다. 축축하면서도 신선한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살갗이 검게 그을고 키가 큰 어부가 찢겨지고 물에 젖은 그물을 질질 끌며
안으로 들어섰다.
"잔느, 지금 돌아왔소."
그가 말했다.
"아, 이제야 오셨군요."
잔느는 대답을 하며 일어섰으나 고개를 들지 못했다.
"참으로 끔찍한 밤이었어. 이렇게 지독한 날씨라니."
"그래요, 무서운 날씨였어요. 잡히기는 했어요?"
"망했어, 아주 망했다니까! 고기 꽁지도 걸리지 않은걸. 그물만 찢기고
말았지, 아주 멍들었다구! 그렇게 지독한 폭풍우라니, 간밤 같은 폭풍우는 본
적이 없을 정도야. 악마같이 몸부림치면서 배를 공 놀리듯 했다니까…….
금방이라도 밧줄이 끊어져서 배와 함께 파도에 묻혀 버리는 줄 알았어. 목숨만
살아서 돌아온 것도 다행이지……. 그런데 당신은 혼자서 무얼 하며 지냈소?"
어부는 그물을 한구석에 놓아두고 난로 옆에 앉았다.
"저요?"
잔느는 다시금 새파래진 얼굴로 물었다.
"전, 앉아서, 여기 앉아서 뜨개질을 하고 있었지요……. 바람소리가 어찌나
심했는지 혼자 있는 것이 무서웠고……. 당신이 걱정되었어요……."
"그랬을 거야. 정말 엄청난 바람이었거든. 그랬겠지……."
남편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두 내외는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앉아 있었다.
마침내 잔느는 몸을 떨며 죄지은 사람처럼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여보, 시몬 아주머니가 죽었어요. 언제 죽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도 어제
저녁에 당신이 다녀온 뒤인 것 같아요. 죽을 때 몹시 괴로웠을 거예요.
어린것들을 생각하면 차마 눈도 감을 수 없었을 테니……. 아직도 젖먹이인
아이들을 둘이나 남겨놓았으니 말예요. 작은놈은 말도 할 줄 모르는 아기이고,
큰놈은 이제 겨우 기기 시작했는걸요……."
잔느는 입을 다물었다. 어부는 눈을 껌벅거렸다. 그의 선량하고 정직한
얼굴이 엄숙하고 진지해졌다.
"정말 안됐군. 딱한 일이야."
그가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쩌지? 우선 어린것들을 데려와야지! 얼른 달려가서 애들을 데려와!"
그러나 잔느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왠일이야? 싫어? 어린것들을 데려오는 게 내키지 않아? 잔느, 왜 그래?
어서!"
잔느는 천천히 일어섰다. 말없이 남편을 침대 곁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이불을 살며시 들쳤다.
거기에는 이웃집의 죽은 과부의 아이들이 평화롭고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등대지기: 헨리크 셴키에비츠
행복이란 자신에게 국한되지 않은 다른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데서 싹트는
것이다
윌리엄 조지 조던
1
파나마 근처의 애스핀월이란 항구 도시에서 등대지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일이 일어났다. 그날은 몹시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불운한 사람은 등대가 있는 작은 바위섬의 가장자리로 갔다가 거기서
폭풍우에 휩쓸렸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다음날 바위틈에 매어놓곤
했던 그의 배가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자 그 추측이 더욱 그럴 듯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등대지기의 자리는 비게 되었고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그 자리를 메워야 했다. 왜냐하면 등대가 그 지방의 길잡이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뉴욕과 파나마를 항해하는 선박들에게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
모스키토 만은 둑과 모래톱이 많아서 대낮에도 항해하기가 여간 수월치
않았다. 특히 밤에는 이런 습한 열대의 수면에 떠오르는 물안개 때문에 항해가
거의 불가능했다. 이럴때 오직 등대불만이 오가는 선박들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새 등대지기를 구하는 임무가 파나마 주재 미국 영사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그 일은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12시간 안에 후임자를 구해야
했으며 더욱이 그 사람은 매우 성실해야 했기 때문에 선발에 신중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 자리를 원하는 지원자는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등대에서의 생활은 외롭고 고되어서, 태평스럽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남쪽 지방의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매력이 없는 일이었다.
등대지기는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바위섬을 떠날 수 없는 죄수와도
같은 생활을 했다. 애스핀월에서 하루에 한 번씩 오는 배가 그에게 식량과
물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그 뱃사람마저 곧 그곳을 떠나고 나면, 손바닥만한 이
바위섬에서는 그나마 사람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등대지기는 낮에는 기압계가 가리키는 대로 여러 색깔의 깃발을 흔들어서
날씨를 알리고, 밤에는 등대에 불을 켜는 일을 했다. 사실 이 일은 그다지
힘든 것이 아니었다. 단지 400개가 넘는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가서 탑
꼭대기에 불을 켜는 일-그렇지만 이 일은 하루에 수 차례씩 반복되는 때도
있었다-그런 일만 제외한다면. 하여간 이것은 수도원생활과 같은 것이었으며
은둔을 원하는 사람에게나 어울릴 법한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작 팰콘브리지 영사가 진득하게 등대를 지킬만한 사람을 찾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랐다. 그 어려움 중에 정말 뜻밖의 지원자가
나타나자 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지원자는 일흔 살 남짓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지만 군인다운 풍채를
지니고 있었으며 등이 곧고 정정했다. 그리고 머리는 눈을 뒤집어쓴 것처럼
완전히 은빛이었고 마치 크레올 족처럼 검은 피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푸른 눈빛을 보면 그가 남쪽 지방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표정은 우울해 보였지만 정직하고 선한 인상을 주었다. 팰콘브리지
영사는 첫눈에 그가 맘에 들었다. 나은 것은 그 노인과의 면접이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노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출신지가 어디십니까?"
"폴란드입니다."
"지금까지 무슨 일을 하셨죠?"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여러 가지……."
"하지만 등대지기 일은 한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도 이제는 한 곳에서 쉬고픈 마음뿐입니다."
"노인께선 군대에서 복무한 적이라도 있습니까? 그리고 혹 정부에서
인정하는 어떤 증명서 같은 것을 가지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노인은 주머니를 여러 곳 더듬더니 가슴 쪽에 있는 주머니에서 낡고 빛바랜
비단 조각을 꺼내 펼쳐 놓으며 말했다.
"이것들은 증명서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이 십자 훈장은 제가 1830년
폴란드 봉기 때 받은 것이고, 이것은 스페인의 칼리스트 전투에서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프랑스 군 시절에 받은 것이고 마지막으로 이것은
헝가리에서 받은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미국에서 남군과 대항해 싸웠지만
그들은 제게 아무 훈장도 주지 않더군요. 자, 한번 확인해 보시죠."
팰콘브리지 영사는 그 증명서를 받아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음, 스카빈스키……. 이것이 노인장의 이름입니까?"
노인은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육탄전서 단신으로 적군의 깃발 두 기를 빼앗았다……. 음! 노인께선 아주
용감한 군인이었군요."
"등대지기 일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탑
꼭대기까지 올라갈 일이 생기기도 하구요. 다리는 튼튼합니까?"
"대평원을 걸어서 횡단한 적도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렇다면 뱃일에는 익숙합니까?"
"3년 동안 포경선에서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노인께선 꽤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하셨군요."
"제가 여지껏 해보지 않은 일이라곤 안식을 취하는 것뿐입니다."
"무슨 까닭이라도 있었습니까?"
노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제 팔자인가 봅니다."
"그렇지만 제가 보기에는…… 등대지기 일을 하시기에 노인장의 나이가 좀
많은 것 같군요."
"영사님!"
그 노인은 감정이 상한 듯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저는 몹시 지쳐 있습니다. 영사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 누구보다도 그 자리를 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늙었고 이제는 쉬고 싶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 이제 내가 쉴 곳은 이곳뿐이다! 이곳이야말로 나의 안식처이다!' 영사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 일은 당신 한 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제가 간절히
원하는 이런 자리가 제 일생 동안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파나마에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었는지…… 간청합니다. 저는
정박하지 못하면 곧 침몰하고 말 배와 같은 처지입니다. 제발, 이 늙은이를
위해서라도…… 하나님께 맹세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이젠 떠돌이 생활에
진저리가 납니다."
노인의 푸른 눈빛이 너무 간절하게 보였기 때문에 소박하고 친절한
팰콘브리지 영사는 감동을 받았다.
"좋습니다. 노인장을 채용하겠습니다. 이제부터 노인장께서는
등대지기입니다."
노인이 얼굴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기쁨으로 빛났다.
"정말 고맙습니다. 영사님."
"오늘 당장 등대로 가실 수 있겠습니까?"
"예,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한가지…… 근무 중에는 어떤 실수도
용납할 수 없으며 실수는 곧 해고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그날 저녁, 해가 서편으로 기울고 황혼도 없이 어둠이 바다를 뒤덮었을 때,
사람들은 이 섬에 새로운 등대지기가 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평소와 다름없이 등대의 한줄기 빛이 수면을 밝게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밤은 완전한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전형적인 열대의 밤이었다. 짙은 안개가 자욱이 끼어 무지개 빛으로
부드럽고 아련한 테두리를 이루었다. 바다에서는 파도가 거칠게 일어 밤새워
바위를 깎고 있었다.
스카빈스키 노인은 거대한 등대의 발코니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애썼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상황을 파악해
보려 했다. 사실 그는 너무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노인은 자신이 추적자에게 쫓기다 쫓기다 겨우 바위 동굴을 찾아내어
그곳에 몸을 숨기게 된 짐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그에게도 안식의 시간이 온 것이다. 알 수 없는 안도감이 그의
영혼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했다.
이곳 이 바위섬에서 그는 자신의 오랜 방황과 오랜 불행과 실패에 대해
비웃음을 던질 수 있었다. 사실 그는 비바람에 돛대가 부러지고 밧줄이 끊어진
배와 같았다. 구름 꼭대기에서 바다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치며 거친 파도에
부딪히고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결국 항구를 찾은 배였다.
폭풍우 속에서의 고통이 이제 막 시작되려는 평온한 미래와 대조되어 그의
머릿속에서 재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팰콘브리지 영사에게 말한 자신의 기구한 인생 역정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말로 구구절절이 엮어낼 수 없는 수많은 모험들이 있었다.
그가 지친 몸을 이끌고 쉴 곳을 찾기 위해 천막을 치고 불을 지필 때마다
모질고 사나운 바람이 몰아닥쳤다. 그 바람은 천막의 말뚝을 뽑아 버리고 불을
꺼뜨려 그를 파멸로 몰고 갔다.
그는 등대 발코니에서 밝게 빛나는 수면을 바라보며 자신이 거쳐온 일들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그는 대륙의 전투에 네 번이나 참전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여러 곳을
떠돌며 거의 모든 일을 해보았다.
그는 성실하고 정직했기 때문에 상당한 돈을 벌었고 꽤 가능성 있는 인물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아주 조심성 있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도 그는 항상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금광의 광부, 아프리카에서는 다이아몬드
채굴자, 동인도에서는 소총병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농장을 시작했을 때는 가뭄으로 실패했으며, 브라질
내륙에서 야만인들과 무역을 할 때에는 그의 배가 아마존에서 침몰하였다.
그때 그는 아무 장비도 없이 헐벗은 상태에서, 야생 열매를 따먹고 맹수들의
습격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수주일 동안이나 밀림을 헤매기도 했다.
그는 또 아칸소의 헬레나에서 대장간을 차려 보았지만 그것 역시 도시의
대화재로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는 록키 산맥을 지나다가 그곳의 인디언들에게 포로가 되기도
했고 그러다 얼마 후 어느 사냥꾼에 의해 구출되기도 했다.
그는 바이아와 보르도 사이를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배에서 선원으로 일했고,
이 이후에는 포경선의 작살잡이로 먼 바다까지 나갔었다. 그러나 그가 탄
배들은 모두 난파되었다.
그는 아바나에서 동업자와 함께 담배 공장을 차렸으나 그가 열병으로 누어
있는 사이 동업자가 사기를 치고 달아나 버렸다.
급기야 그는 애스핀월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곳이 그의 불운한 인생 역정의
종착역이 될 것이다. 이 외진 곳의 바위섬까지 어떤 불행이 그를
찾아오겠는가! 물도, 불도, 그 어느 누구도…….
사실 스카빈스키는 사람 때문에 해를 입거나 고통을 당한 적은 별로 없었다.
도리어 그의 주위에는 나쁜 사람보다는 착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세상의 그 모든 것이 그의 편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에게 운이 없었던 것이라고 위로를 하면서 모든 것을 운의 탓으로 돌렸다.
그도 얼마간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며 반미치광이가 되어 날뛰기도 했다. 어떤
거대한 그것이 계속 그를 따라다니며 그의 앞길을 막거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끔씩
'거대한 그것'이 과연 무엇일 것 같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손을 들어 북극성을
가리키며 '바로 저기에서 모든 것이 비롯된다오'하고 농담조로 대답했다. 사실
그의 역경은 끝도 없이 무시무시하게 계속되었다. 아마 그 누구라도 그런
역경에 빠지게 된다면 쉽게 좌절하고 자포자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스카빈스키 노인은 인내와 성실함으로 역경을 잘 견뎌 나갔다.
젊은 날 헝가리 전투에서 그는 여러 차례 부상을 입었는데 그것은 그가
등자를 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그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고 굳이
애쓰지 않았다. 그와 같은 일에 있어서 그는 불운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개미처럼 꾸준하게 산을 기어올랐다. 백 번을 오르다 백 번째마저
실패하면 다시 백한 번째 여정을 침착하게 시작하곤 했다.
그는 삶의 자세에 있어서 독특한 데가 있었다. 뜨겁게 달궈지고 연마되어
단단해지고 역경에 수없이 부딪혀 온 이 노인의 마음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씨를 갖고 있었다. 쿠바에 유행병이 돌 때,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상당량의 키니네(말라리아의 특효약, 해열, 진통, 강장제 등으로 쓰임-역주)를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다른 환자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정작 자신은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특별한 점이 있었는데, 그렇게도 많은 좌절 후에도 그는
항상 자신감에 넘쳐 있었고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희망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겨울이 되면 그는 더욱 생기가 돌아서 많은 일들을 예견했다. 그는 그것들을
애타게 기다렸으며, 그런 생각들이 여지껏 그를 지탱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또다시 겨울이 지나면서 머리카락만 희게 빛바랠
뿐이었다. 마침내 그는 늙었고 점점 기운도 없어졌다. 그의 인내심과 강인함은
차츰 운명 앞에 길들여져 갔다.
그는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감상적으로 변해갔다. 그래서 이 용감하고
강인한 군인은 사소한 일에도 눈물을 주르륵 흘릴 만큼 약해졌다. 또 노인은
언제나 진한 향수에 빠져 주위의 모든 상황들을 고향의 모습과 연결시켰다.
제비의 모습에서도, 참새를 닮은 잿빛 새들에게서도, 산 위에 쌓인 눈에서도,
오래 전에 들었던 어떤 노래의 가사에서도……. 결국 노인은 고향의
따사로움과 안락함을 그리면서 쉬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모든
희망과 욕망을 압도하여 삼켜 버렸다.
이 외로운 방랑자는 자신이 편안히 쉴 수 있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조용하고 구석진 곳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운명의 장난이 그의 목을 바싹 죄며 육지와 바다의 곳곳으로 그를 내몰았기
때문에, 노인은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방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노인은 소박하고 당연한 행복을 꿈꾸고 있었지만, 누구에게나 익숙한
이런 행복이 그에게는 여전히 불안하게 느껴졌다. 워낙 불행이란 것에 익숙해
있던 터라 이번에도 행복은 미꾸라지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버릴 것
같았다.
그는 뜻밖에도, 세상의 모든 직업 중에서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있는 것
같은 일자리를 발견하고 그곳에 취직했다. 그래서 그가 처음으로 등대에 불을
붙이게 되었을 때 얼떨떨해서 꿈인지 생시인지 의심을 했다. 그리고 감히
생시라고 말하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현실은 부인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증거로 남아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인은 발코니에 서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모든 것에 황홀하고 사랑스런
눈빛을 던지면서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님을 자신에게 확인시켰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바다를 보는 사람 같았다.
등대의 불빛은 노인의 눈길을 따라 칠흑같이 어둡고 신비스런 암흑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도리어 어둠이 빛을 향해 몰려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배보다 더 큰 파도가 어둠 속에서 굽이치며 등대의 불빛 아래
장밋빛으로 빛났다.
점점 밀물이 밀려와 모래사장이 거의 잠기었다. 바다는 깊은 곳에서부터
힘있고 우렁차게 솟아올랐다. 어느 때는 대포의 폭음 같기도 했고, 어느 때는
숲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으며, 또 어느 때는 먼 곳에서 여러
사람들이 몰려 서서 웅성대는 소리 같기도 했다.
바다가 잠시 숨을 죽이고 있을 때 그는 깊은 한숨 소리와 흐느낌을 들었고,
그 소리는 다시 결렬한 통곡 소리로 바뀌었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이 안개를
어지럽히고 짙은 먹구름은 달빛을 전부 삼키기도 했다.
바람이 서쪽에서부터 점점 거세게 불어오기 시작했다. 파도는 사납게
바위섬의 절벽을 철썩거리고 거품을 일으키면서 그 밑둥을 핥고 있었다.
멀리서 폭풍우가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먼 바다 어둠 속에서 배의 돛에 거는
푸른 전등이 보였다. 그 전등은 높이 올라갔다가 파도 속으로 사라지고 다시
솟아올라 좌우로 흔들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스카빈스키 노인은 자기 방으로 내려갔다. 지금 밖에서는 배에 탄 사람들이
밤과 어둠과 파도와 싸우고 있었지만, 방안에서는 평화와 고요가 노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폭풍우 소리조차도 이 두꺼운 벽을 뚫지 못했다. 노인의
머리맡에 놓인 시게의 초침 소리가 지친 노인을 깊은 잠 속으로 이끌었다.
2
많은 시간이 흐르고 많은 날들이 거듭되었다.
뱃사람들은 바다가 미친 듯이 날뛸 때 종종 바다 깊숙한 곳에서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만일 정말 바다가 말을 할 수 있고 종종
누군가를 부를 수 있다면, 아마도 늙은 사람들에게는 그 소리가 더 어둡고
신비스럽게 들렸을 것이다. 그리고 인생살이에 지친 사람일수록 이 부름을
더욱 반길 것이다.
그렇지만 이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충분한 안식이 필요하다. 마치 나이든
사람이 죽음을 예견하고 고독을 즐기는 것처럼.
등대는 스카빈스키 노인에게 무덤과도 같은 곳이었다. 등대에서의 생활만큼
단조로운 것도 없을 것이다. 만약 젊은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긴다면 얼마 안
가서 줄행랑을 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등대지기를 보면 대개가 젊은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우울하고 자의식에 사로잡힌, 나이 먹은 사람들이 많았다.
만일 등대지기가 자신의 등대를 떠나 보통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그는
아마도 혼란 속에서 오랫동안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다. 이제 막 깊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사람들 사이를 헤매고 다닐 것이다.
등대지기가 접하는 모든 것은 뚜렷한 형태를 갖고 있지도 않았고 한눈에 다
볼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것들이었다. 고독한 인간의 영혼은 끝없이 펼쳐진
하늘과 바다 그 어느 곳에서나 편하게 머물 수 있었다. 그것은 끊임없는
명상의 연속이었으며 아무것도, 심지어는 그의 일조차도 등대지기를 이
명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했다.
반복되는 하루하루는 쌍둥이처럼 똑같았으며 유일한 변화라곤 날씨의
바뀜뿐이었다. 그러나 스카빈스키 노인은 자신의 생애 중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했다.
노인은 새벽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등대의 렌즈를 공들여 닦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였다. 그 일이 끝나면 노인은 등대의 발코니에 서서 먼 바다를 바라보곤
했는데 그 눈은 자기 앞에 펼쳐진 광경에 심취한 듯했다.
거대한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에 부푼 돛을 단 배들이 그림처럼 떠 있었는데
그것들은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눈부시던지 그는
제대로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때때로 배들은 차례로 긴 줄을 그으며 지나가곤 했는데 그것은 마치
갈매기나 앨버트로스(글라이더처럼 하늘을 날며 대양에 많이 서식하는
새-역주)의 대열 같았다.
발코니에 서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크고 작은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과 항구가 보였다. 등대 위에서 보면 집들은 작은 새의 둥지 같았고 배는
딱정벌레처럼 보였으며 사람들은 하얀 석조 선창에 붙은 점들 같았다.
아침에는 가벼운 바람을 따라서 마을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기도 했다. 오후에는 낮잠을 잤다. 항구에 오가는 배들의 왕래도 끝나고
갈매기도 바위틈 속으로 숨어 버렸다. 그리고 바다도 때맞춰 소리를 죽이고
편하게 드러누웠다. 햇빛은 하늘에서 바다로 다시 모래사장으로, 절벽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쯤이면 노인은 나른함과 더할 나위 없는 달콤함에 빠져 있었다. 자신이
누리는 이 안식이 완전한 것이며 또한 이런 생활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믿는 순간에는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노인은 이 행복이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말기를 바랐다. 인간은 더 나은
운명에 쉽게 적응해 갔다. 그도 점차 믿음과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사람들도
불쌍한 사람을 위해 집을 짓고 보살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왜 당신이
창조한 불쌍한 사람을 외면하겠는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노인의 믿음은 더
확실해져 갔다.
노인은 탑과 등대와 절벽과 모래사장과 고독에 차츰 익숙해졌다. 또
바위틈에 알을 낳고 등대 지붕에 모여드는 갈매기들과도 친해졌다. 그가
가끔씩 밖으로 나가서 음식 찌꺼기들을 주었기 때문에 새들과 친해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가 새들에게 먹이를 줄 때에는 갈매기 날개의 폭풍우속에 휩싸이게 되어
마치 한때의 양들을 몰고 나선 목동처럼 보이기도 했다.
썰물이 되면 노인은 나지막한 모래톱에 나가서 대합조개와 아름다운 진주색
껍데기의 앵무조개를 줍기도 했다. 밤에는 달빛과 등대의 불빛을 이용해서
물고기가 많은 바위틈을 찾아 밤낚시를 즐겼다.
마침내 노인은 절벽과 땅딸막한 나무들만 자라는 작은 이 바위섬을
사랑하게 되었다.
공기가 점점 투명해지는 오후에는 무수한 나무들로 뒤덮인 태평양 아래의
모든 지협들을 다 볼 수 있었다. 그때 스카빈스키 노인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정원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커다란 코코넛과 바나나 송이들은
애스핀월의 집들 뒤에서 화사한 부케처럼 수풀을 일고 있었다.
애스핀월과 파나마 사이에는 광대한 숲이 있었는데 아침 저녁으로
불그스레한 물안개가 끼어 전형적인 열대의 숲임을 실감하게 했다. 숲의
바닥은 항상 물이 흥건하게 괴어 있었고 라이아나(열대산 덩굴 식물-역주)로
뒤얽혀 자칫 발을 헛딛기가 십상이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난초, 종려나무,
우유나무, 철나무, 껌나무의 웅웅거리는 물결 같았다.
나무들 뿐만 아니라 원숭이 무리와 커다란 두루미, 숲 위에 걸쳐진
무지개처럼 갑자기 하늘로 치솟는 앵무새들의 모습도 노인에게는 큰
구경거리였다. 노인에게는 이런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아마존에서 배가
난파되었을 때 그와 비슷한 하늘을 보며 수풀 사이를 여러 날 동안 헤매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온화한 미소 속에는 그때 겪었던 고통과 위험 그리고 죽음이 감추어져
있었다. 이런 숲에서 밤을 보낼 때는 짐승들의 울음소리와 근처에 도사리고
있는 퓨마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더욱 가깝고 크게 느껴졌다. 또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사람 몸통 굵기의 무시무시한 뱀을 보기도 했다. 그는 마법에
걸린 것 같은 이 숲 속의 호수들에 수많은 전기가오리와 악어들이 득실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이런 미지의 열대 숲 속 - 사람을 감싸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나뭇잎, 피를 빨아먹는 왕모기, 나무 거머리, 독을 품고 있는
수많은 독거미들로 가득 찬 - 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떠한지도 알고
있었다.
노인이 알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직접 체험하고 고통받으면서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숲 속에서의 위험을 느끼지 않는 지금, 자신이 처한
현재의 상황에서 바라보는 그 숲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어 경탄해
마지않을 수 없었다.
그 섬은 모든 악으로부터 노인을 포근하게 감싸고 보호해 주었다. 그는
일요일에나 가끔씩 교회에 가기 위해 자신의 섬을 떠나곤 했다. 그때는
은단추가 달린 등대지기의 제복을 입고 가슴에 메달을 달았다. 노인이 교회를
나설 때는 크레올 족이 자기들끼리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저 등대지기는 꽤 괜찮아 보이는군. 양키이기는 해도 이교도는 아니잖아."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노인은 어떤 자부심을 느끼며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더욱 꼿꼿이 세우고 걸었다.
그러나 노인은 예배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자신의 섬으로 돌아왔다.
노인에게는 여전히 육지에 대한 신뢰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훨씬 마음
편했다. 또 일요일에는 마을에서 사온 스페인 신문이나 팰콘브리지 영사에게서
빌어온 뉴욕 헤럴드 지를 읽었다.
그는 유럽에 대한 기사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이 불쌍한 늙은이의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지구 정반대쪽 작은 섬의 등대지기로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조국을 그리워하고 있었으니…….
하루치 식량과 물을 섬으로 가져다주는 배가 도착하면 가끔 아래로
내려와서 경비원 존과 잡담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로 노인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을 꺼려했다. 그는 마을을 방문하는 일도, 신문을 읽는 일도, 존과
잡담을 하러 내려오는 일도 그만두었다. 이렇게 노인이 누구를 만난다거나
누군가 노인을 보는 일도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이 노인이 살아 있다는 일한 증거는, 해안 기슭에 두고간 식량과 물이
없어진다는 것과 아침이면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밤이면 어김없이 등대의
불빛이 바다를 비춘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세상일에 대해 무관심해졌다. 처음에는 진한 향수 때문이었지만
나중에는 향수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체념 상태에 빠져 버렸다.
노인에게는 현실의 모든 세계가 이 섬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는 자기가 죽을
때까지 이 등대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젖어들었으며 그 외의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쉽게 잊어 갔다. 동시에 노인은 신비주의자가 되었다. 노인의
부드럽고 서글서글한 푸른 눈은 아이들의 눈처럼 변했고 항상 무언가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고립된 그의 생활과 단순하고 거대한 주위의 환경은 노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게 했다. 그는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니며 바다였고, 하늘이었고,
숲 속의 가지 많은 나무였다.
그런 신비감에 빠져 잠잠하게 가라앉는 영혼을 느끼고 있는 동안 그는
바위에 짓눌리듯 갇혀서 점차 모든 것을 잊어가고 있었다. 그는 반쯤 잠자는
의식 상태에서 이 평화로움이 너무나 가슴 벅차게 느껴졌다.
3
그러나 그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어느 날 배가 물과 식량을 두고 가는 것을 등대에서 지켜보던 노인은
천천히 길을 따라 내려왔다. 그는 그곳에서 평상시의 짐말고도 작은 꾸러미
하나가 더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소포에는 미국 소인이 찍혀 있었으며
분명 "스카빈스키 귀하"하는 글이 거친 헝겊에 씌어 있었다.
노인은 호기심에 가득 차서 꾸러미를 풀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한 권의
책이 들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책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첫장을
펼쳤다.
갑자기 노인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것처럼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떴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책은 폴란드 책이었다! 도대체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누가 그에게 이
책을 보낼 수 있었단 말인가?
처음에는 그도, 자기가 등대지기를 시작하던 초기 어느 때인가 영사에게서
빌려온 뉴욕 헤럴드 지에서 뉴욕에 있는 '폴란드 작가 협회'에 관한 기사를
읽고, 자신에게는 별로 쓸모없는 월급의 반을 즉시 그 협회에 보냈던 것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 협회에서는 노인에게 책을 보내어 답례를 한
것이었다. 그 책은 어김없이 노인의 손에 들어왔다. 그러나 노인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연관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낯선 땅 애스핀월에, 그것도 작은 이 바위섬의 등대에, 자신의 깊은 고독
속으로 던져진 이 한 권의 책은 그에게 있어 너무나도 특별한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고향에서 불어온 바람 같았고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기적이었다.
긴 그리움 속에서 거의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와서 너무나도 소중한
음성으로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그 무엇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노인은 책을 가슴에 꼭 안고 한동안 눈을 감은 채 뜰 수가 없었다. 자기가
눈을 뜨게 되면 분명 이 꿈이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러나 자신의 두 손 위에서 햇살을 받아 선명한 책
한 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노인의 심장이 온몸에서 고동쳤다.
그는 책을 펴고 재빠르게 훑어보았다. 시집이었다. 겉장에는 시집의 제목과
작가의 이름이 있었는데 그 작가는 노인에게도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그
작가는 위대한 시인이었으며 1830년 이후에 파리에서 그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후 알제리와 스페인에서 참전했을 때 동료들로부터 이 위대한
시인의 명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음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총대를
쥐고 싸움에 열중해야 했던 그에게는 거의 책을 손에 잡아볼 시간조차 없었다.
1849년 미국으로 건너가 험난한 인생을 겪고 있을 때도 노인은 폴란드 사람을
거의 만나볼 수 없었으며 책은 생각도 못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 큰
기대와 설레임으로 그 책을 마주대하고 있는 것이다.
애스핀월의 시계가 오후 다섯 시를 알리고 있었다. 구름도 찬란한 창공을
가리지 못하고 드문드문 떠다녔다. 다만 거대한 정적만이 바다를 짓누르고
있었다. 애스핀월의 하얀 집들 뒤에 서 있는 종려나무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정 공기 중에는 엄숙하고 고요하며 예사롭지 않은 그 무엇이 서려 있었다.
노인은 책의 어느 한 페이지를 펴서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크게 읽기
시작했다.
오, 리투아니라, 나의 조국이여!
그대는 건강과도 같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네
그대를 잃어본 자만이 소중함을 알 것이니
이제서야 비로소 나 또한 알았네
그대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그 영롱한 모든 것들 속에서
나는 그대를 갈구했네
스카빈스키 노인은 더 이상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다. 글자가 그의 눈
속에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고
격정의 파도가 더욱 높아갔다. 자꾸만 목이 메었다.
노인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다시 시를 읽어 나갔다.
오, 성녀여, 그대는 빛나는
첸스트호바를 지키고, 빌노에서는
오스트라 게이트에 화려한 빛을 던지네
그곳의 성실한 민중과 함께, 그대는
노보그로데크를 지키고 있네
어린 시절, 죽음 앞에 선 나를 기적처럼 소생시켜 준 그대
눈물 가득한 어머니 곁에서
나를 감싸고 어머니를 감싸고
나는 위태로운 목숨을 끌고
그대의 성전 문턱에 이르러서 기도했네
생명을 소생시켜준 하나님께
똑같은 기적으로
이제, 우리를 조국으로 돌려보내 주오.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동이 노인의 의지를 마비시켜 버렸다. 그는 울음을
터뜨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흰 머리카락이 모래사장 위로
흘러내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조국을 본 것이 40년 전이었으며, 모국어를 들은 지 얼마나
되었던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알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모국어가 홀로
그에게로 왔다.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그를 찾아내어 바다를 건너서 왔다.
너무도 아름다운 그것이! 노인의 어깨를 흔드는 것은 근심이나 슬픔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무한한 사랑,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엎드린 채로 흐느끼면서 사랑하는 조국에게 용서를 빌었다. 자신이
너무나 무기력하게 늙어버린 것에 대해, 바위섬에 너무나 많은 애착을 느끼고
있었던 것에 대해, 그리고 향수마저 사그라뜨린 것에 대해서.
오랫동안 노인은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갈매기들이 등대 위로
날면서 자신들의 늙은 친구를 걱정하듯 끼룩끼룩 울어댔다. 노인이 새들에게
먹이를 줄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높은 바위에 앉아 먹이를 기다리던 몇몇의
새들이 후두둑거리며 노인의 주위로 내려앉았다. 그러자 점점 더 많은 새들이
다가와 노인을 쪼거나 머리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기 시작했다.
새들의 부산한 날갯짓이 노인을 깨웠다. 실컷 울고 난 노인의 얼굴에는
평화로움이 빛나고 있었다.
노인은 법석을 떨고 있는 새들에게 자신의 음식을 전부 나눠 주었다. 그리고
다시 책을 집어들었다.
태양은 파나마의 원시림 뒤로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고 나무들은 긴
그림자를 비스듬히 뉘었다. 그러나 대서양은 여전히 밝았으며 아직도 글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환했기에 노인은 다시 시집을 읽기 시작했다.
아, 사랑하는 그대여
깊은 절망 속에 빠진 애수를 건져
숲이 우거진 그때의 언덕으로
푸르디 푸른 그때의 초원으로 가져다 주오
마침내 땅거미가 글자들을 지워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의 짧은 황혼이었다.
노인은 바위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눈을 감았다. 그러자 '첸스토호바를 지키는
빛나는 그대'는 노인의 영혼을 '숲이 우거진 언덕과 푸른 초원'으로 인도했다.
하늘은 여전히 금빛 실타래를 늘어뜨리며 빛나고 있었다. 노인은 그 빛을
타고 고향의 오솔길을 밟으며 걸었다. 소나무 숲이 귓가에서 술렁거리고
시냇물이 졸졸 흘러갔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고향의 그 모든 것들이 그에게 묻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잊지는 않았겠지요?"
노인은 물론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넓은 들판과
대강 다듬은 목재들, 초원과 숲과 낮은 마을들…….
밤이었다. 이즈음이면 등대가 바다를 밝히고 있어야 했지만 노인은 이미
고향을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머리를 가슴에 파묻은 채 꿈을 꾸고
있었다.
수많은 영상들이 그의 눈앞에서 재빠르게, 약간은 혼란스럽게 움직이며
지나가고 있었다. 노인은 자신의 집을 찾을 수 없었다. 이미 불타 없어졌던
것이다. 또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그분들은 그가 어렸을 때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을은 어제 떠나온 것처럼 그대로 선명했다. 창에 불을 켜둔 집들이
줄을 서 있었고 도랑이며 방앗간,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연못, 밤새워 들려
오는 개구리 울음소리며 그 모든 것들이.
그는 언젠가 마을에서 밤새워 보초를 선 일이 있었다. 멀리 보이던 선술집의
등불이 타오르는 눈동자처럼 보였고, 그곳에서 바이올린과 베이스 비올라의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들려 왔다.
"우―히요! 우―히!"
사람들이 가락에 맞춰 발을 굴렀다.
그는 말 등에 앉아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시간을 느릿느릿 흘러갔다.
이윽고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욱한 안개가 끼어 모든 것이
선명하지 못했다. 서리가 초원을 뒤덮은 모양이었다. 아마 누군가가 이것을
바다라고 우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니다. 이것은 초원이었다. 곧 어둠
속에서 뜸부기 소리가 들려 올 테고 갈대밭에서는 해오라기가 날아오를
것이다. 밤은 차갑고 고요해서 여느 폴란드의 밤과 다름없었다. 멀리서 소나무
숲이 바람도 없는데 윙윙거리고…….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곧 새벽이 창백한 빛을 동쪽에 던질 것이다. 이미 마당에서 홰를 치는
수탉의 소리가 들렸다. 홰를 치는 소리는 집집마다 이어졌다. 높은 나무의
꼭대기에서는 학이 떠들어댔다.
상쾌함이 가슴 뿌듯하게 밀려왔다. 사람들이 내일 전투에 대해 무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쪽이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도 소리를 치고 깃발을 흔들며 전쟁터로 갈 것이다.
그의 젊은 피가 나팔 소리같이 샘솟았다.
새벽이었다. 새벽이 밝아온 것이었다. 밤은 점점 희미해졌고 나무와 늘어선
집들과 방앗간과 시냇물이 다시 태어났다. 탑 위의 풍향계가 돌고 우물의
두레박이 삐걱거렸다. 장밋빛 태양 아래 이 얼마나 소중한 땅이며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가! 오, 나의 하나뿐인 땅, 나의 하나뿐인 조국이여!
"쉿!"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보초 근무를 교대하러
온 병사일 것이다.
갑자기 스카빈스키 노인의 머리 위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장, 노인장 일어나시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등대지기 노인은 부시시 고개를 들다 말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금
전까지의 환영이 현실과 싸우고 있었다. 마침내 환영은 현실 앞에서 차츰
사그라들었다. 항구 경비원인 존이 그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무슨 일이오? 어디 아프신가요?"
"아, 아니오."
"어젯밤에 등대불을 켜지 않으셨더군요. 그래서 노인장께선 등대지기의
자리에서 해고되었습니다. 세인트 제로모에서 오던 배 한 척이 근해에서
침몰했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만일 그러기라도 했더라면
노인장께서는 재판을 받아야 했을 거요. 자, 함께 배를 타시죠. 나머지는
영사님께 듣도록 하시구요."
노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푸른 눈 속에는 아직도 고향의 잔영이 남아
있는데…….
며칠 후 사람들은 애스핀월을 떠나 뉴욕으로 가는 증기선에서 스카빈스키
노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불쌍한 노인은 결국 일자리를 잃고 만
것이었다.
그의 앞에는 새로운 방랑의 길이 펼쳐졌다. 모진 바람은 이 늙은 사람을
낚아채어 다시 한번 육지와 바다 사이에서 뒤흔들어 놓을 것이다.
노인은 며칠 새 더 늙고 구부정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눈만은 여전히
햇살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의 품안에는 새로운 인생길의 동반자가 될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때때로 그것을 손으로 눌러 보며 존재를
확인하였다. 마치 그것마저도 잃어버릴까 봐 두려운 듯이, 다시는 잃지
않으려는 다짐이라도 하듯이.
행복한 왕자: 오스카 와일드
사랑이란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지만 또한 자신을 북돋아 주는 것이기도
하다
수 애츨리 에보
도시 한복판의 높고 둥그런 돌기둥 위에 행복한 왕자의 동상이 서 있었다.
왕자의 온몸에는 순금이 입혀져 있었고 두 눈에는 반짝이는 사파이어가 박혀
있었으며 그의 칼자루에는 커다란 빨간 루비가 빛나고 있었다.
왕자는 온 시민의 존경의 대상이었다.
"왕자는 풍향계의 새처럼 아름답지."
예술적인 취향의 소유자라는 평판을 듣고 싶어하는 한 시의원이 말했다.
그리고 곧장 이렇게 덧붙였다.
"다만 그리 유용하지는 못하지만."
사람들인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여길까 염려되어 한 말이었는데, 사실 그는
아주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너는 어째서 저 행복한 왕자님을 닮지 못하니?"
재치 있는 어느 엄마가 달을 따 달라고 조르는 어린 아들에게 말했다.
"행복한 왕자님은 결코 너처럼 조르며 울지 않는단다."
실의에 빠진 어떤 남자가 이 멋진 동상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 진짜로 행복한 사람이 있다는 건 기쁜 일이야."
밝은 주홍색 외투에 하얀 치마를 받쳐 입은 자선 학교 아이들이 학교에서
나오면서 말했다.
"왕자님은 천사를 닮으셨어요."
"너희들이 어떻게 아니?"
수학 선생님이 물었다.
"너희는 천사를 본 일이 한 번도 없을 텐데."
"하지만 우리 꿈속에서 봤어요."
아이들이 대답했다. 그러나 이 수학 선생님은 얼굴을 찡그리고는
심각해졌다. 수학 선생님은 아이들의 꿈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작은 제비 한 마리가 이 도시 위로 날아왔다. 친구 제비들은
이미 6주 전에 날아가 버렸지만, 이 제비는 아름다운 갈대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뒤에 쳐지고 말았다. 이 제비는 이른봄에 노란 나방을 쫓아 강을 따라
내려오다가 갈대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의 날씬한 몸매에 매료되어
나방을 쫓는 것조차 잊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갈대 아가씨,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요?"
제비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갈대 아가씨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비는 갈대 아가씨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물을
스치면서 날아 은빛 물결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것이 제비의 구애 표시였고 또
이것은 여름 내내 계속되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야."
다른 친구 제비들이 재잘거렸다.
"갈대는 돈도 없고 일가 친척도 너무 많아."
사실 강가에는 갈대가 가득했었다. 마침내 가을이 오자 다른 친구 제비들은
모두 떠나 버렸다. 친구 제비들이 다 떠나가 버리자 이 제비는 외로워졌고
또한 자신의 연인에게도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갈대 아가씨는 아무런 말대꾸도 해주지 않아. 그리고 바람둥이인가 봐,
항상 바람하고 시시덕거리는 걸 보면."
확실히 갈대 아가씨는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전에 없이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갈대 아가씨는 이곳에서만 안주하는 게 좋은가 봐. 하지만 난 여행을
좋아하니, 내 아내 될 사람도 여행을 좋아해야 하는데."
마침내 제비가 갈대 아가씨에게 물었다.
"갈대 아가씨, 나와 함께 떠나겠어요?"
그러나 갈대 아가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자기 집에 대한 애착이 너무도
강했던 것이다.
"당신은 여지껏 나를 놀린 거군요."
제비가 소리쳤다.
"난 피라미드가 있는 곳으로 떠날 거예요. 이젠 안녕!"
그리고 제비는 날아가 버렸다.
제비는 하루 종일 날아서 밤이 되어서야 이 도시에 닿았다.
"어디서 묵는담? 이 도시에 쉴 곳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때 높고 둥그런 돌기둥 위에 서 있는 동상이 제비의 눈에 들어왔다.
"저기서 묵어야지. 공기도 상쾌한 것 같고 무엇보다 장소가 맘에 들어."
그리고 제비는 행복한 왕자의 두 발 사이에 내려앉았다.
"황금 침실에서 자게 됐군."
주위를 보며 혼자말로 중얼거리고 제비는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제비가
막 머리를 날갯죽지 밑으로 넣으려는 순간 커다란 물방울 하나가 그의 몸
위로 톡 떨어졌다.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별들도 저렇게
초롱초롱한데 비가 오다니 말이야. 북유럽의 날씨는 정말 질색이야. 갈대
아가씨는 비를 좋아했었지만 따지고 보면 사실 그건 그녀의 이기심일
뿐이었어."
그러자 또 한 방울이 톡 떨어졌다.
"빗방울도 피한 수조차 없는 동상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담? 차라리
굴뚝이라도 찾아 나서야 할까 봐."
제비가 자리를 뜰 결심을 하며 말했다.
그러나 제비가 날개를 펴기도 전에 다시 물방울이 톡 떨어졌다. 제비는 눈을
들어 올려다보았다. 아, 제비는 무엇을 보았을까요?
행복한 왕자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고, 그 눈물은 왕자의 황금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달빛을 받은 왕자의 얼굴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이 작은 제비는 동경심이 솟아올랐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난 행복한 왕자란다."
"그런데 왕자님은 왜 울고 계세요?"
제비가 물었다.
"왕자님이 우는 바람에 제 몸이 젖었잖아요."
"내가 살아서 인간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을 때엔 눈물이 어떤 것인지
몰랐단다. 난 그때 상 수시궁전(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전. 또한 아무런 걱정이
없다는 뜻이기도 함. 여기선 이 두 의미로 다 쓰임-역주)안에서 살고
있었거든. 그곳에는 슬픔이란 것이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었지.
낮에는 정원에서 친구들과 놀았고 밤이면 아주 커다란 홀에서 내가 먼저
나서서 춤을 추곤 했었지. 정원 주위로는 매우 높은 담이 둘러쳐져 있었는데,
난 그 담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 내 주위의
것들이 죄다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단다. 내 신하들은 나를 행복한
왕자님이라고 했고, 난 그렇게 살다가도 그렇게 죽고 말았단다. 내가 죽자
신하들은 나를 이높은 곳에다 세워 줬단다. 내가 살던 이 도시의 온갖 추한
것과 비참한 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이는 이곳에다. 이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비록 내 심장이 납으로 되어 있다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구나."
"뭐라구요? 그럼, 왕자님 몸이 순금으로 된게 아니란 말이군요."
제비가 혼자서 중얼거렸다. 제비는 그런 말을 서슴지 않고 큰 소리로 할
만큼 예의 없지 않았다.
왕자는 낮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여기서 멀리 떨어진 좁은 골목길에 가난한 집이 한 채 있단다. 창문 하나가
열려 있고, 그 창문을 통해 한 여인이 탁자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보이는구나.
그 여인의 얼굴은 야윈 채 초췌해 보이고 손은 바늘에 찔려 거칠고 빨갛게
부어 있단다. 그녀는 재봉사거든. 그 여인은 비단 옷에 시계꽃을 수놓고 있는
중인데, 그 옷은 여왕의 시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시녀가 궁중 무도회에서
입을 옷이란다. 그 방 한쪽 구석에서는 그 여인의 어린 아들이 병으로 누워
있어. 그 아이는 오렌지를 달라고 보채고 있는데 아이 엄마에게는 강에서 떠온
물밖에 없는 모양이구나. 아이의 이마에서는 열이 나고 아이는 계속 울면서
보채고 있단다. 제비야, 제비야, 작은 제비야, 내 칼자루에 박힌 루비를
뽑아내서 그 여인에게 갖다 주지 않겠니? 내 발이 받침대에 꽉 붙어 있어서
난 움직일 수가 없단다."
"왕자님, 이집트에서 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제 친구들은 나일강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며 큰 연꽃들과 얘기하면서 노닐고 있을 거예요. 또
머지않아 친구들은 위대한 대왕님의 무덤에서 잠을 잘 거예요. 그 대왕님은
곱게 장식된 관 속에 누워 계시답니다. 대왕님은 노란 리넨 천에 싸여서 썩지
않는 향료로 보존되어 계시죠. 대왕님의 목에는 연녹색 비취 목걸이가 걸려
있고 두 손은 마치 시든 잎사귀 같답니다."
"제비야, 제비야, 작은 제비야. 하룻밤만 묵으면서 내 심부름 좀 해주지
않겠니? 그 아이가 너무나 목말라해서 엄마도 슬퍼 어쩔 줄 모르는구나."
"전 아이들이 싫어요. 지난 여름 날 제가 강가에서 머물고 있을 때,
물방앗간 주인의 두 버릇없는 녀석이 저만 보면 돌을 던져대곤 했어요. 물론
제가 그까짓 돌에 맞을 리는 없지만요. 우리 제비들은 아주 빠르게 잘
나니까요. 더욱이 전 빠르기로 유명한 가문 출신이거든요. 어쨌든간에 그런
짓은 막돼먹은 사람이나 하는 짓거리예요."
그러나 행복한 왕자의 표정이 너무나 슬퍼 보여서 작은 제비는 그만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여긴 참 춥네요. 하지만 왕자님과 하룻밤을 지내면서 왕자님의 심부름을
해드리겠어요."
"고맙구나, 작은 제비야."
그래서 제비는 왕자의 칼자루에서 커다란 루비를 뽑아내어 부리로 물고
지붕 위로 날아갔다.
제비는 하얀 대리석으로 된 천사들이 조각되어 있는 성당의 탑 옆을
지나쳤다. 제비가 궁전 위를 날을 때에는 춤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다운
아가씨가 그녀 애인과 함께 발코니에 나와 있었다.
"별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밤이군요."
애인이 그녀에게 말했다.
"또, 사랑의 힘은 얼마나 거룩한지요!"
"내 드레스가 궁중 무도회 때까지 완성되었으면 좋겠어요. 드레스에다
시계꽃을 수놓으라고 했는데, 하지만 재봉사들은 너무 게으른 것 같아요."
그녀가 대꾸했다.
제비는 강 위를 날면서 배의 돛대에 달아 놓은 등불을 보았다. 유태인
지역을 지날 때에는 나이 든 유태인들이 서로 흥정을 하며 구리 저울에다
돈을 달아 나누는 것도 보았다.
마침내 제비는 그 가난한 집에 도착해서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이는 심한
열로 침대에서 뒤척이고 있었고 엄마는 너무나 지친 나머지 그만 탁자에
엎드린 채 깊이 잠이 들어 있었다. 제비는 살짝 방안으로 들어가서 탁자 위에
있는 그녀의 골무 옆에다 커다란 루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침대
주위를 날면서 그 아이의 이마에 날개로 부채질을 해주었다.
"아이, 시원해. 이젠 병이 낫고 있나 봐."
그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선 이내 달콤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제비는 행복한 왕자에게로 다시 돌아와 자기가 하고 온 일을 말해 주었다.
"참, 신기한 일이에요. 지금 날씨가 몹시 추운데도 전 무척이나 따뜻한
느낌이 들거든요."
"그건 네가 착한 일을 했기 때문이란다."
왕자가 말했다. 작은 제비는 자기가 한 일을 생각해 보려했지만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무엇이든 생각하려고만 하면 항상 잠이 오는 것이었다.
날이 밝자 제비는 강으로 내려가 목욕을 했다.
"어라, 이것 참 이상한 일도 다 있군!"
때마침 다리 위를 지나던 조류학 교수가 탄성을 내질렀다.
"겨울철에 제비라니!"
그리고 그 교수는 지방 신문에다 이 일에 관한 긴 편지는 썼다. 모든
사람들이 그 편지의 내용을 인용했는데 거기에는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들로 꽉 차 있었다.
"오늘밤에야말로 이집트로 가야지."
제비가 잔뜩 기대감에 들떠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제비는 온갖 기념탑들을
다 둘러보았고 교회의 뾰족탑 위에서는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제비가 어디를
가든 참새들은 짹짹거리며 자기들끼리 얘기했다.
"어머, 참 기품 있는 분이시네!"
제비는 이 말을 듣고 우쭐했다.
달이 떠오르자 제비는 행복한 왕자에게로 돌아왔다.
"이집트에 무슨 부탁할 일이라도 계신가요?"
제비가 외쳤다.
"전 이제 떠날 거거든요."
"제비야, 제비야, 작은 제비야. 하룻밤만 더 묵지 않겠니?"
"왕자님, 이집트에서 친구들이 절 기다리고 있어요. 내일이면 제 친구들은
두 번째로 큰 폭포가 있는 데까지 날아갈 거예요. 거기에는 하마가 파피루스
풀숲 속에 드러누워 있고 커다란 화강암 왕좌에는 멤논신이 앉아 있지요. 멤논
신은 밤새도록 별을 보다가 새벽 별이 비칠 때면 외마디의 기쁜 탄성을
내지르고는 잠잠해지신답니다. 한낮이 되면 황금색 사자가 물을 마시러 물가로
내려오구요. 사자의 눈은 마치 푸른 에메랄드 같고 포효는 큰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보다도 더 우렁차지요."
"제비야, 제비야, 작은 제비야. 이 도시를 가로질러 저 멀리에 다락방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는 한 청년이 있단다. 그 청년은 책상 위에 엎드려 있고, 책상
위에는 원고가 사방으로 흩어져 있지. 그의 옆에 놓여 있는 큰 물컵에는 시든
제비꽃이 한 묶음 꽂혀 있구나. 그의 머리카락은 갈색이고 곱슬머리이며, 그의
입술은 석류처럼 빨갛고 그의 큼직한 두눈엔 꿈이 깃들어 보인단다. 그는 극장
감독에게 넘겨 줄 연극 대본 한 편을 쓰고 있는데 너무 추워서 더 이상 쓰지
못하고 있어. 벽난로에는 불씨가 하나도 없고 또 너무도 배가 고파서 실신해
버린거야."
"알았어요, 왕자님. 그럼 하룻밤만 더 묵을게요."
너무도 착한 마음씨를 가진 제비가 말했다.
"그 사람에게도 루비를 갖다 줄까요?"
"아아! 제비야, 이제 루비는 없단다. 내게 남은 거라곤 이 두 눈뿐이란다. 이
눈은 천년 전에 인도에서 가져온 아주 진귀한 사파이어란다. 그 중 하나를
뽑아 그 청년에게 갖다 주렴. 그러면 청년은 보석상에 그걸 팔아 음식과
땔감을 마련하고 대본도 완성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사랑하는 왕자님, 전 그럴 수 없어요."
제비가 이렇게 말하면서 훌쩍이기 시작했다.
"제비야, 제비야, 작은 제비야. 내가 시킨 대로 해주렴."
하는 수 없이 제비는 왕자의 한쪽 눈을 뽑아내어 그 청년의 다락방 쪽으로
날아갔다. 지붕에 구멍이 하나 뚫려 있어서 그 안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비는 이 구멍으로 쏙 빠져 방 안으로 들어갔다. 청년은 양 손에다
얼굴을 파묻고 있어서 제비가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얼굴을
문득 쳐들었을 때, 청년은 시든 제비꽃 옆에 아름다운 사파이어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니, 이건 사파이어가 아닌가? 드디어 내가 인정받기 시작한 거야. 이
사파이어는 누군가 내 글을 숭배하는 사람이 가져다 놓은 게 틀림없어. 그래,
이젠 됐어. 난 이 대본을 완성시킬 수 있어."
그는 아주 행복해 보였다.
다음날 제비는 항구로 내려갔다. 제비는 커다란 배의 돛대 위에 앉아서
선원들이 선창에서 밧줄로 큰 궤짝들을 끌어올리는 것을 보았다.
"어이, 어서들 끌어당겨."
선원들은 궤짝을 하나하나 끌어올릴 때마다 소리쳤다. 제비도 큰 소리로
외쳤다.
"난 이집트로 갈 거예요."
그러나 어느 누구도 제비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달이 뜨자
제비는 행복한 왕자에게로 돌아왔다.
"왕자님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왔어요."
제비가 외쳤다.
"제비야, 제비야, 작은 제비야. 하룻밤만 더 내 곁에 있어 주지 않겠니?"
"왕자님, 이젠 겨울이에요. 이곳에도 찬 눈이 내릴 거라구요. 이집트에서는
햇빛이 푸른 종려나무를 따사롭게 비추고 있을 거고, 또한 악어들은 진흙탕
속에서 뒹굴며 나른한 듯 주위를 살피죠. 제 친구들은 지금쯤 발벡신전에다
둥지를 틀고 있을 거고, 분홍빛과 흰빛의 비둘기들은 그걸 지켜보며 서로
구구거리고 있을 거예요. 사랑하는 왕자님, 전 이젠 떠나야 해요. 하지만 전
왕자님을 잊지 못할 거예요. 내년 봄에는 왕자님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신 그
보석이 박힌 자리에다 아름다운 보석 두 개를 가져다 박아 드릴 게요. 빨간
장미보다도 더 빨간 루비와 푸른 바다보다도 더 푸른 사파이어로 박아 드릴
거예요."
"저 아래 광장에 어린 성냥팔이 소녀가 서 있단다. 그 소녀는 성냥을 그만
도랑에다 빠뜨려서 죄다 못 쓰게 되어 버렸어. 만일 그 소녀가 몇 푼이나마
돈을 집에 가져가지 못하면 그 애 아빠가 매질을 할 거야. 그래서 그 소녀는
지금 울고 있단다. 더욱이 소녀는 구두도 양말도 신지 않았고 머리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구나. 제비야, 남은 내 한쪽 눈도 마저 뽑아서 그 소녀에게
갖다 주렴. 그러면 그 애 아빠도 매질을 하지 않을 테니."
"왕자님과 하룻밤 더 지내긴 하겠지만, 전 왕자님의 남은 한쪽 눈마저 뽑을
수는 없어요. 그렇게 되면 왕자님은 아주 장님이 되고 말 테니까요."
"제비야, 제비야, 작은 제비야. 내가 시킨 대로 해주렴."
하는 수 없이 제비는 왕자의 남은 한쪽 눈마저 뽑아서 쏜살같이 내려갔다.
제비는 성냥팔이 소녀 옆으로 스치듯 날아가면서 소녀의 손바닥에다 그
보석을 살짝 떨어뜨렸다.
"어머, 유리알이 예쁘기도 해라!"
그 소녀가 소리쳤다. 그리고 소녀는 기쁨에 넘쳐서 집으로 달려갔다.
제비는 다시 왕자에게로 돌아왔다.
"왕자님, 왕자님은 이제 장님이 되셨으니 아무것도 보지 못해요. 그러니
제가 언제까지나 왕자님 곁에 있겠어요."
"안돼, 작은 제비야. 이젠 넌 이집트로 가야 해."
가엾은 왕자가 말했다.
"아니예요, 왕자님, 전 언제까지나 왕자님과 함께 있을 거예요."
제비는 이렇게 말하고는 왕자의 발 밑에서 잠들었다.
다음날 제비는 하루종일 왕자의 어깨 위에 앉아서 여러 낯선 나라에서
자기가 구경한 것들의 이야기를 왕자에게 들려 주었다. 나일 강변에서 길게
줄을 지어 서서 주둥이로 금붕어를 잡아먹는 따오기의 이야기며, 사막에서
살며 도무지 모르는 것이 없고 이 세상만큼이나 나이 든 스핑크스의 이야기,
손에다 호박 염주를 걸고 자신의 낙타 옆에서 천천히 걷는 상인들의 이야기,
커다란 수정을 숭배하고 달 속의 산에 사는 흑단나무만큼이나 검은 대왕
이야기, 스무 명의 승려들이 벌꿀 과자를 먹이며 섬기는, 종려나무 속에서
잠을 잔다는 녹색 뱀의 이야기, 크고 널따란 나뭇잎을 타고 커다란 호수를
건너며 언제나 나비들과 전쟁을 벌이는 난쟁이들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사랑하는 작은 제비야, 넌 내게 많은 신기한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내게
있어서 어느 무엇보다도 가장 신기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불행이란다. 이 세상에서 불행만큼 더 위대하고 신비스런 일은 없단다. 작은
제비야, 이 도시 위를 날아다니며 네가 본 것을 내게 이야기해 주렴."
그래서 제비는 이 큰 도시 위로 날아다녔다. 제비는 아름다운 집에서
부자들이 즐겁게 지내고 있는 것을 본 반면에 거지들이 그 문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제비는 어둠침침한 골목길로 날아가서
어두운 거리를 멍하니 내다보고 있는 굶주린 아이들의 창백한 얼굴들도
보았다.
아치형의 다리 밑에는 어린 두 소년이 몸을 녹이려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아, 너무 배고파!"
소년들이 말했다.
"너희들 여기서 서성이면 안 돼."
야경꾼이 이렇게 소리를 지르자 그 소년들은 비를 맞으며 떠돌아다녀야
했다.
제비는 왕자에게 돌아와서 자기가 본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이야기해
주었다.
"작은 제비야, 내 몸은 순금으로 덮여 있단다. 그것을 한 조각씩 떼내어 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렴. 사람들은 금이라면 자기들을 얼마든지
행복하게 해준다고 언제나 믿고 있단다."
제비가 왕자의 몸에서 한 조각씩 금을 떼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행복한
왕자의 모습은 아주 볼품 없는 회색빛이 되고 말았다. 제비는 이렇게 떼어낸
금 조각을 하나씩 하나씩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창백하기만 하던 아이들이 불그스레해진 얼굴로 활짝 웃으며 거리에서 뛰어
놀았다.
"이젠, 배불리 먹을 수 있어!"
그 아이들은 소리쳤다.
이윽고 눈이 내렸다. 그리고 모든 것이 얼어붙은 추위가 닥쳤다. 거리는
마치 은으로 만든 것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수정으로 만든 칼 같은 긴
고드름이 집집마다 처마 끝에 매달려 있었다. 사람들은 털옷을 껴입고 다녔고,
어린 소년들은 주홍색 모자를 쓰고 얼음판 위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날이 점점 더 추워졌지만 작은 제비는 가엾게도 왕자 곁을 떠나려 하질
않았다. 제비는 왕자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것이다. 제비는 빵 가게 주인이
보지 않을 때 가게 문 밖에서 빵 부스러기를 쪼아 먹었고,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자꾸 날개를 퍼득거렸다.
그렇지만 제비는 자기가 결국에는 죽고 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비는
이제 왕자의 어깨 위로 겨우 한 번 더 날아 오를 수 있는 힘밖에 남지 않았다.
"안녕히 계세요, 사랑하는 왕자님!"
제비가 힘없이 말했다.
"왕자님의 손에다 입을 맞추게 해주세요."
"작은 제비야, 네가 이집트로 떠난다니 기쁘구나. 넌 여기서 너무 오래
지냈어. 자, 내 입술에다 입을 맞추어 주렴. 너를 사랑하니까 말이다."
"오, 왕자님, 제가 가려는 곳은 이집트가 아니예요. 전 죽음의 집으로 가려는
거예요. 죽음은 잠과 형제이니까요. 그렇잖아요?"
마침내 제비는 행복한 왕자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그만 왕자의 발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바로 그 순간 왕자의 몸 속에서 무언가 깨지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납으로 만들어진 왕자의 심장이 두 쪽으로 쪼개지는 소리였다. 그날은
정말이지 끔찍스러울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이 도시의 시장이 시의원들과 함께 광장을 지나고
있었다. 그들이 둥그런 돌기둥을 지날 때, 시장은 행복한 왕자의 동상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이런! 행복한 왕자의 동상이 어째서 저렇게 추해보이지?"
"정말, 추하기 이를 데가 없군요!"
시장의 말에 언제나 맞장구를 쳐대는 시의원들이 동시에 외쳤다. 그리고
그들은 왕자의 동상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위로 올라갔다.
"칼자루에 박혀 있던 루비는 떨어져 나갔고, 사파이어 눈도 없어졌고, 몸에
덮여 있던 순금마저 벗겨지고 말았네. 이거야, 원! 거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시의원들이 일제히 말했다.
"또 여기 발 밑에는 제비가 한 마리 죽어 있군."
시장이 계속 말을 이었다.
"새가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다는 포고령을 내려야겠군."
그러자 시의 서기는 이 제안을 기록했다.
결국 행복한 왕자의 동상은 사람들에 의해 끌어내려졌다.
"행복한 왕자는 이제 아름답지 않으니 더 이상 쓸모도 없어졌습니다."
대학의 미술 교수가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왕자의 동상을 용광로에 넣어 녹였고 시장은 이 녹은 금속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결정하려고 시회의를 소집했다.
"물론, 새로운 동상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시장이 말했다.
"따라서 그것으로 내 동상을 세우면 어떻겠고?"
"그건 안 돼요. 내 동상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시의원들은 저마다 우기며 티격태격해댔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
주물 공장의 감독이 말했다.
"이 쪼개진 납 심장은 용광로 속에서도 도대체가 녹질 않으니. 이건 갖다
버려야겠어."
그래서 그들은 죽은 제비가 버려진 쓰레기 더미 위에다 그걸 내던져 버렸다.
"저 도시에 내려가서 가장 소중한 것 두 가지를 가져오너라."
하나님이 한 천사에게 분부를 내리셨다. 그 천사는 하나님께 납으로 된
왕자의 심장과 죽은 제비를 갖다 바쳤다.
"그대의 선택은 옳았노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작은 제비는 내 낙원에서 영원토록 노래를 부를 것이요, 이 행복한
왕자는 내 황금의 도시에서 나를 찬양토록 하리로다."
큰 바위 얼굴: 나다니엘 호돈
참된 사랑은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상대방에게 자기 자신의 모든 애정을 쏟아 주는 것이다
프로렌스 스코벨 쉰
어느 날 오후, 해가 질 무렵에 한 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오두막집 문간에
앉아 큰 바위 얼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수 마일이나 떨어져
있었지만 그들이 눈을 들기만 하면, 햇빛을 받아 온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그런데 큰 바위 얼굴이란 무엇일까?
한 무리의 우뚝 솟은 산에 둘러싸인 아주 널따란 계곡이 있어 그곳에는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 선량한 주민들의 일부는 시꺼먼
숲에 둘러싸여 가파르고 험준한 산기슭의 통나무집에 살고 있었고, 일부
주민들은 안락한 농가에 가정을 이루고 계곡의 완만한 경사면이나 평지의
비옥한 땅을 경작하고 있었다. 또 어떤 주민들은 사람이 많이 사는 마을에
밀집하였다.
이 마을에서는 높은 산악 지대에서 발원하여 거세게 흘러 떨어지는 산간의
급류가 방적공장의 기계를 돌리는 데 이용되고 있었다. 요컨대 이 계곡의
주민은 많았고 다양한 생활 양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중 몇몇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더욱 명확하게 이 웅대한 자연 현상을 식별하는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계곡의 주민들 모두는
큰 바위 얼굴에 대해 일종의 친근감을 지니고 있었다.
큰 바위 얼굴이란 몇 개의 거대한 암석에 의해 깎아지른 듯한 산 측면에
자연의 여신이 장난기 어린 기분으로 빚어 놓은 작품이었는데, 그 몇 개의
거대한 암석들이 함께 모여있는 모양이 적당한 거리에서 떨어져서 바라보면
사람의 얼굴과 매우 흡사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엄청난 거인, 말하자면
타이탄 신과 같은 거인이 그 절벽에다 자신의 닮은 얼굴을 조각해 놓은
것같이 보였다. 높이가 100피트나 되는 널찍한 아치 모양의 이마가 있었고,
콧날이 길고 오똑한 코도 있었으며,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계곡의 끝에서
끝까지 천둥과도 같은 큰소리를 울리게 했을지도 모를 큰 입도 있었다.
물론 그걸 바라보는 사람이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그 거대한 얼굴의 윤곽은
사라지게 되고 어수선하게 겹겹이 쌓인 육중하고 거대한 암석들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뒤로 물러서면 그 신비스러운 얼굴이 다시 보이게 되고,
거기에서 더 뒤로 물러서면 물러설수록 본래의 신성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인간의 얼굴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너무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해지면, 구름이며 장려한 안개가 그 주위에 모여들어 큰 바위 얼굴은
정말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이 큰 바위 얼굴을 눈앞에 보면서 자라난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큰 바위 얼굴의 이목구비는 어느 하나 고상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표정은 장엄하면서도 다정하며, 온 인류를 그의 애정 속에 포용하고도 남을
만큼 광대하고 따뜻한 마음의 빛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하나의 교육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믿음에 따르면, 이 계곡이
비옥한 것은 끊임없이 계곡 위에서 미소를 보내고 구름을 아름답게 채색하며
그 부드러움을 햇빛 속에 불어넣는 자비로운 얼굴 덕택이라는 것이다.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한 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오두막집 문간에 앉아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어니스트였다.
"엄마."
어니스트가 말했다. 그때 타이탄 신과 같은 거대한 얼굴이 그에게 미소짓고
있었다.
"큰 바위 얼굴이 말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저렇게도 다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 목소리도 분명히 좋을 거예요. 저런 얼굴을 가진 사람을 보게 된다면
전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할 거예요."
"옛날 예언이 맞게 된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저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어떤 예언인데요, 엄마?"
어니스트는 열심히 물었다.
"어서 그 예언 얘기를 해주세요."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자신이 어린 어니스트보다 더 어렸을 때, 그녀의
어머니가 자기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아들에게 해주었다. 그 이야기는 과거의
사실에 관한 것이 아니고 미래에 다가올 일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로서, 옛날 이 계곡에 살았던 인디언들조차도 이 이야기를
그들의 조상에게서 전해 들었고, 또 그들이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에 다르면
그들의 조상들은 산골의 개울이며 나무 위에 지나가는 바람에 의해 그 얘기를
전해 들었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요지는 미래의 언젠가에 이 근처에서 한 아이가 태어나 그 아이가
장차 당대의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인물이 되며 어른이 되어서는 큰 바위
얼굴과 꼭 닮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오래된 예언을 열렬히 동경한 나머지 지금도 여전히 그것에 대한
지속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는 노인이나 젊은이가 아주 많았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지칠 때까지 지켜보며 기다렸지만 그런 얼굴을 가진 사람을 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보다 위대하거나 고귀한 사람조차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건 부질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점점 세상 물정에 밝아져 갔다. 여하튼 그 예언 속의
위인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엄마, 엄마!"
어니스트가 머리 위로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전 꼭 그런 분을 만나고 싶어요."
그의 어머니는 애정이 넘치고 사려 깊은 여성이었으므로 자신의 어린
아들의 원대한 희망을 꺾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어니스트에게 단지 이렇게 말했다.
"그래, 아마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어니스트는 어머니가 그에게 해주신 얘기를 결코 잊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그가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어니스트는 자신이 태어난 통나무집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자그마한
손과 사랑스런 마음씨로 효성스럽게 어머니를 보살펴 드렸다. 세월이 흘러
가끔 무슨 생각에 골몰하면서도 행복했던 어린아이는 온화하고 침착하며
겸손한 소년이 되었다.
그는 들판에 나가 일을 한 탓에 햇볕에 얼굴이 그을었지만, 유명 학교에서
교육받은 다른 많은 애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지성이 그의 얼굴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어니스트에게는 선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큰 바위
얼굴이 그의 선생이 되었을 뿐이었다.
하루의 일이 끝나면 그는 몇 시간이고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다가는 마침내 그 거대한 얼굴이 어니스트를 알아보고 어니스트의 눈길에
그득 담긴 존경의 빛에 답하여 그에게 따뜻한 마음씨가 깃들인 격려의 미소를
보내 준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큰 바위 얼굴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다정하게 어니스트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어니스트의 상상을 잘못이라고 단정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소년의 다정하고 신뢰하는 순진한 마음이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알아보았다는 데 그 참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향하고 있던 큰 바위 얼굴의 사랑이 특별히 어니스트의 몫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아주 오래 전에 예언된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인이 드디어
나타났다는 소문이 계곡 일대에 파다하게 퍼졌다.
소문에 의하면 여러 해 전에 한 젊은이가 이 계곡을 떠나 먼 항구도시에
정착해서 거기서 돈을 조금 모아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그것이 그의 본명인지 혹은 그의 버릇이나 입신 출세에서 나온
별명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개더골드였다. 약삭빠르고 활동적인데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운수란 형태로 나타나는 불가사의한 수완을 타고나서, 그는
대단한 무역상이 되었고 대형 선박으로 구성된 한 선단 전체의 선주가 되었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이 이 한 사람의 산더미처럼 축적된 재산을
한무더기씩 한무더기씩 더 늘려 주려는 목적을 위해 협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북극권의 어둠과 그늘속에 놓여 있는 북부의 추운 지역에서는 모피로
그에게 조공을 보냈고, 뜨거운 아프리카에서는 그를 위해 강의 사금을
채취했으며, 숲 속에서는 거대한 코끼리의 상아를 수집해 주었다.
동양에서는 그에게 값비싼 숄, 향료, 차, 눈부신 다이아몬드 그리고 맑게
빛나는 일이 굵은 진주를 가지고 왔다. 바다에서도 육지에 뒤질세라
개더골드가 기름을 팔아 그것으로 한밑천 잡을 수 있도록 거대한 고래를
바쳤다.
원래의 상품이 어떤 것이든 그것이 그의 손에 들어오면 황금으로 변했다.
신화에 나오는 마이더스왕처럼 그의 손가락이 닿으면 무엇이든지 당장에
노랗게 반짝이는 황금, 또는 그에게는 더욱 편리하게도 화폐 더미로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개더골드가 그의 재산을 계산하는 데만도 백년이 걸릴지도 모를 만큼
부자가 되었을 때, 그는 고향 계곡이 생각났으며 그곳으로 돌아가 태어난
곳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이런 목적을 마음속에다 품고 그는 자기와
같은 대부호가 살기에 적합한 대저택을 짓도록 하기 위해 숙련된 건축 기사를
파견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미 계곡에서 개더골드는 그토록 오랫동안 헛되이
기다려 온 예언 속의 위인으로 되어 있었고, 그의 얼굴은 완전히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가 살던 낡고 풍상에 찌든 농가의 자리에 들어선, 마치
마법처럼 불쑥 솟아오른 웅장한 건물을 보았을 때 그것이 사실임에
틀림없다고 확고히 믿게 되었다.
그 저택의 외벽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고 눈이 부실 만큼 희어서 마치
개더골드가 어리고 한창 놀기에 바빴던 시절, 다시 말해서 손으로 만진 것을
무엇이든 황금으로 변하게 하는 재능을 부여받기 전에 곧잘 눈으로 짓곤 했던
허름한 눈집처럼 햇빛 속에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저택에는 기둥으로 받쳐진 화려하게 장식된 현관이 있었는데, 그 밑에는
은으로 만든 손잡이가 달리고 외국에서 들여온 일종의 무늬목으로 만든
높다란 문이 있었다. 창들은 각 방의 바닥에서 천장까지 으리으리했는데, 각기
터무니없이 거대한 판유리가 끼워져 있었고 또 그것들이 너무나 깨끗하고
투명했기 때문에 공기보다 더 훌륭한 매개물이라고들 했다.
누구에게도 이 궁전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실내는 외관보다 훨씬 더 호화로워서, 다른 집에서는 쇠나 놋쇠로 되어 있는
것이 여기서는 무엇이든 금이나 은으로 되어 있을 정도라고 그럴 듯하게
전해졌다. 특히나 개더골드의 침실은 그야말로 휘황찬란했으므로 보통 사람은
아마 눈이 부셔서 이 방에서 눈을 감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반면 개더골드는 이제 너무나 금에 익숙해 있었으므로 금빛이 확실히 눈꺼풀
밑으로 스며드는 곳이 아니면 아마 눈을 감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고들 했다.
드디어 그 대저택이 완성되었다. 그러자 가구상이 어마어마한 가구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개더골드의 선발대로서 많은 백인과 흑인 하인들이 당도했다.
개더골드 자신은 해질 무렵에 위풍당당하게 도착할 예정이었다.
우리의 친구 어니스트는 위대한 사람, 고귀한 사람, 예언 속의 사람이
그토록 오랜 세월을 기다리게 한 끝에 드디어 그가 태어난 계곡에 나타난다는
사실에 깊이 감동하고 있었다. 비록 어린 나이이긴 하지만 그는 엄청난 재산을
가진 개더골드가 자비로운 천사로 그 모습을 바꾸어 큰 바위 얼굴의
미소만큼이나 넓고 인자한 제어의 힘을 인간 사회에 발휘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믿음과 희망에 가득 찬 어니스트는 사람들이 말하는 소문이 진실이며
이제서야 산의 경사면에 있는 저 불가사의한 얼굴의 살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소년이 아직도 계곡 위를 올려다보며, 항상 그랬듯이 큰 바위 얼굴이 그의
시선에 대답하여 그를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다고 상상하고 있을 때,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마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야, 온다!"
개더골드가 도착하는 것을 보려고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이 소리쳤다.
"위대한 개더골드 씨가 오신다!"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길을 돌아 힘차게 달려왔다. 마차 안에는 창
밖으로 몸을 반쯤 내민, 마치 그 자신의 마이더스와 같은 손이 변색시켜 놓은
듯 피부가 누런 노인의 얼굴이 보였다. 이마는 좁고 눈은 작고 날카로웠으며
그 둘레에는 무수한 잔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리고 가뜩이나 얇은 입술은 그가
너무 꽉 다물고 있었던 탓에 더 얇아 보였다.
"큰 바위 얼굴을 꼭 닮았군!"
사람들이 외쳤다.
"과연 옛날 예언이 맞은 거야. 드디어 여기에 그 위인이 나타나셨으니."
어니스트를 가장 당황하게 했던 것은 사람들이 정말로 그 사람이 큰 바위
얼굴과 꼭 닮았다고 믿는 것이었다. 이때 마침 길가에는 한 늙은 여자 거지와
어린 거지 둘이 있었는데, 그들은 어떤 먼 지방에서 흘러들어온 떠돌이로,
마차가 앞으로 지나가자 손을 내밀고 비통한 목소리를 높여 적선을 간청했다.
누런 손이, 그 막대한 재산을 긁어모은 바로 그 손이 마차 창 밖으로 불쑥
나와 땅바닥에 동전 몇 닢을 떨어뜨렸다. 그래서 이 위인의 이름을 개더골드라
한 것 같지만, 그에게 스캐터코퍼(동전을 뿌리는 사람)라는 별명을 붙인다
해도 어울릴 법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열렬한 함성과 전과 다름 없는 믿음으로 계속 외쳤다.
"저분은 큰 바위 얼굴 그대로군!"
그러나 어니스트는 개더골드의 주름투성이의 약삭빠른 그 더러운 얼굴에서
쓸쓸히 시선을 돌려 계곡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엔 점점 짙어가는 안개 속에
마지막 석양을 받아 그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어 감동을 주었던 그 빛나는
얼굴이 있었다. 그 표정은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 인자한 입술은
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올 거야! 걱정할 것 없어, 어니스트. 그는 꼭 올 거야!"
세월이 흘러갔고 어니스트도 이제 소년이 아니었다. 어엿한 청년이었던
것이다. 그는 계곡의 다른 주민들의 주의를 거의 끌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생활에는 주목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었다면
하루의 일이 끝나면 사람들과 떨어져서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기를 여전히 좋아한다는 것뿐이었다.
사람들은 어니스트의 그런 행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니스트가
부지런하고 친절하며 사교성이 좋고, 이 부질없는 습관을 즐기기 위해 의무를
게을리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용납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큰 바위 얼굴이 그의 스승이 되어 이 젊은이의 마음을 넓혀 주고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보다 더 넓고 깊은 동정심을 그의 마음에 가득히 채워
주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큰 바위 얼굴로부터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것보다 더 훌륭한 지혜가 나오고, 다른 사람들의 추잡한 생활에 의해
형성되는 것보다 더 훌륭한 생활이 나올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어니스트 자신도 밭이나 난롯가, 또 그가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지극히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생각과 감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마찬가지의 생각과 감정을 갖고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이 순박한 인간,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처음 옛날의 예언을 가르쳐 주었을
때와 똑같이 순박한 영혼을 갖고 있던 그는, 계곡을 내려다보며 미소짓는 저
불가사의한 얼굴을 바라보며 왜 저 모습과 꼭 닮은 사람이 나타나는 데
이토록 오랜 세월이 걸리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때는 이미 가엾은 개더골드가 죽어 무덤에 묻힌 다음이었다. 그리고 가장
기이한 일은 개더골드라는 존재의 육체이자 영혼이었던 그의 재산은 그가
죽기 전에 사라졌고, 그 이후 주름투성이의 누런 가죽으로 덮인 산송장밖에는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재산이 바닥나 버리자 마을 사람들은 이 몰락한 상인의 비루한 용모와
저 산 경사면의 위엄 어린 얼굴 사이에는 닮은 데가 전혀 없다고 대체로
인정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를 존경하지 않게
되었고 그가 죽은 다음엔 자연히 그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때로는 그가 지어 놓은 그 웅장한 대저택과 관련하여 그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 또한 사실이었지만, 이 저택은 매년 여름이면 저 유명한
대자연의 신비인 큰 바위 얼굴을 보려고 몰려오는 수많은 타지방 사람들을
숙박시키기 위한 호텔로 개조된지 오래였다. 이리하여 개더골드는 평판을 잃고
몰락하고 말았으니 예언 속의 위인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
마침 이 계곡에서 태어나 오래 전에 군에 입대하여 목숨을 건 수많은
어려운 전투를 치른 끝에 지금은 유명한 사령관이 된 인물이 있었다.
역사상에서는 그가 어떻게 불리워졌던간에 그는 군부대 내에서나 전장에서는
올드 블러드 앤드 선더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이 역전의 노병은 이제 나이가
들고 옛 상처 때문에 몸이 쇠약해지자 군대 생활의 소란과 그토록 오랫동안
그의 귓전에서 맴돌고 있던 북 소리며 나팔 소리에 싫증이 나서, 고향인
계곡으로 돌아와 평온을 다시 찾겠다는 의향을 최근에 밝혔다.
계곡의 주민들, 즉 그의 옛 이웃들과 성장한 그들 자녀들은 이 유명한
노병의 귀환을 축포와 공식 연회로 대환영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제서야
비로소 큰 바위 얼굴을 꼭 닮은 사람이 정말로 나타났다고 더욱더 열광적으로
외쳐댔다.
올드 블러드 앤드 선더의 부관이 이 계곡을 통과하며 여행을 하다가 큰
바위 얼굴과 장군의 얼굴이 꼭 닮아서 감탄했었다는 말이 있었다. 더욱이
이장군의 동창생이나 어릴적 친구들이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미 어릴 때부터
저 장엄한 얼굴을 그대로 닮았다는, 그러나 그때에는 그것을 몰랐을 뿐이라는
맹세까지 하면서 증언을 했다. 그래서 온 계곡은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몇 년 동안이나 큰 바위 얼굴을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올드 블러드 앤드 선더 장군이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그 얼굴을 쳐다보는데 시간을 들이게
되었다.
대연회 날, 어니스트는 계곡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일을 쉬고 숲 속의
연회가 준비된 장소로 갔다. 유명한 평화의 벗 올드 블러드 앤드 선더 장군과
그리고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모인 사람들 위로 축복을 기원하고 있는
목사 배틀블래스트 박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탁은 둘레에 나무가
빽빽한 숲의 공터에 마련되어 있었고, 동쪽이 탁 트여 있어서 멀리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워싱턴 가문의 유품인 장군의 의자 위에는 월계수가
많이 섞인 푸른 가지로 만든 아치가 있었고, 그 아치 위에는 장군의 전적을
기념하기 위한 국기가 놓여 있었다.
우리의 벗 어니스트는 이 유명한 귀빈을 단 한 번만이라도 보려고 발돋움을
했다. 그러나 식탁 주위에는 축배를 하며 연설을 들으려는, 그리고 장군의
답사는 말 한 마디라도 빠뜨리지 않고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경호 임무를 자원해서 맡고 있는 내객들이 군중 가운데 특히 조용히 있는
사람을 총검으로 사정없이 밀쳐냈다. 그래서 성품이 겸손한 어니스트는
뒷전으로 밀려났고, 올드 블러드 앤드 선더의 얼굴이 전쟁터에서 아직도 빛을
발하고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얼굴을 조금도 볼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달래려고 큰 바위 얼굴 쪽을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그
얼굴을 충실하고 오랜 친구와도 같이 숲이 터져 있는 사이로 그에게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장군의 얼굴과 멀리 산 경사면의 얼굴을
비교하고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엿들을 수 있었다.
"머리털 하나까지 똑같이 닮은 얼굴이군!"
한 사람이 기쁜 나머지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똑같군!"
다른 사람이 말을 받았다.
"어디 같다뿐이겠어? 마치 저 큰 바위 얼굴이 커다란 거울 속에 비친 올드
블러드 앤드 선더, 바로 그분인 것 같아!"
또 다른 사람이 외쳤다.
"당연하지! 장군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 시대, 아니 다른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가장 위대한 분이시니."
그리고 나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던 세 사람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그러자 그것이 군중들에게 전류처럼 전해져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함성을
이끌어냈고, 그것은 산과 산 사이로 몇 마일이나 메아리쳐 갔다. 그래서
마침내 큰 바위 얼굴이 그 함성에 천둥 같은 호흡을 불어넣었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였다.
이런 모든 이야기와 이런 엄청난 열광은 더욱더 어니스트의 흥미를
유발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제서야 드디어 큰 바위 얼굴과 꼭 닮은
사람을 찾아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사실 어니스트는 이 대망의 인물이 지혜를 말하고 선행을 베풀며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평화의 사람으로 나타나리라고 상상했었다. 그러나 너무도
순박했던 그는 평소의 폭넓은 견해를 취하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불가사의한
지혜로 사태를 이와 같이 정리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하시고 인류를
축복하는 당신만의 방법을 선택하셨다면, 군인의 피 묻은 칼에 의해서 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실현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군이시다! 장군이시다!"
군중들이 외치는 소리가 났다.
"자, 모두 정숙해 주시오! 올드 블러드 앤드 선더 장군께서 연설을 시작하실
거요."
식탁보가 걷히고 장군의 건강을 기원하는 축배가 갈채속에서 끝나자 장군은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일어섰다.
어니스트는 그를 보았다. 장군은 군중들의 어깨 너머로 두 개의 번쩍번쩍
빛나는 견장과 수를 놓은 칼라 위에, 월계수로 엮은 푸른 나뭇가지 아치와
그의 이마를 가릴 듯이 축 늘어진 국기 아래로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같은 시선 속에 갈라진 숲 사이로 큰 바위 얼굴도 나타났다. 그러나 과연
군중들이 얘기한 것처럼 닮은 데가 있었을까?
유감스럽게도 어니스트는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장군은 정력이 넘치고
강인한 의지를 가진 듯이 보였지만 한편으론 전투에 지치고 풍상에 시달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온화한 지혜, 깊고 넓으며 부드러운 동정심은 올드
블러드 앤드 선더의 얼굴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비록 큰 바위
얼굴이 근엄한 지휘관의 표정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보다 훨씬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이 사람도 예언 속의 사람이 아니야!"
어니스트는 군중 속에서 빠져 나오면서 혼자 한숨을 쉬었다.
"다시 더 기다려야만 한단 말인가?"
안개가 먼 산 경사면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장엄하고 위엄 있는 큰
바위 얼굴의 외경스러우면서도 자비로운 용모가 보였다. 마치 천사가 산 속에
앉아 황금빛과 자줏빛 구름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얼굴을 바라보면서 어니스트는 자애로운 미소가 여전히 밝은 빛을 띠고
온 얼굴에서 빛나고 있다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와 그가
바라보고 있는 큰 바위얼굴 사이에 길게 뻗어 있는 엷은 안개 속에 녹아드는
석양탓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의 불가사의한 친구의
얼굴은 어니스트가 희망했던 것이 결코 헛되이 된 적이 없었다는 듯이
어니스트에게 희망을 안겨 주는 것이었다.
"걱정하지 마, 어니스트."
그의 마음이 말했다. 마치 큰 바위 얼굴도 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 걱정하지 마, 어니스트. 그 사람은 반드시 올 테니까."
또 몇 년이 빨리 그리고 조용히 흘러갔다. 어니스트는 여전히 같은 고향
계곡에서 살고 있었고 이젠 중년이 되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그는 사람들
사이에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도 예전처럼 그는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하였고
언제나처럼 마음이 순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주 생각하기도 하고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의 가장 많은 시간을 인류의 행복을 위한 비세속적인
희망에 바쳤기 때문에, 그 결과 마치 그는 천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천사들의
지혜의 일부를 자기도 모르게 흡수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그의 일상
생활에서 조용하고 사려 깊은 선행 속에 잘 나타났으며, 또 그의 생활의
조용한 흐름은 그것이 지나가는 길가를 따라 널따란 푸른 가장자리를
만들었다. 비록 그는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지만 생존해 있음으로 해서 세상은
나날이 그만큼 더 좋아졌다.
그는 자신이 가는 길에서 벗어나는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언제나 그의
이웃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었다. 또 거의 부지불식간에 그는 설교자가 되어
있었다. 그의 순수하며 높고 소박한 사상은, 그 구체적인 하나의 실례인
선행의 형태로 나타나서 그의 손에서 조용히 떨어지고 또 말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고 생활의
틀을 잡아주는 진리만을 말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자기들의 이웃이며 친구이기도 한 어니스트가
보통 이상의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니스트 자신은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개울의 속삭임처럼 다른 어떤
사람의 입에서도 나온 적이 없는 사상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것이다.
시간이 좀 지나고 사람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냉정해졌을 때 그들은 올드
블러드 앤드 선더 장군의 야만적인 얼굴과 산 경사면의 인자한 얼굴이
닮았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시인했다.
그러나 또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얼굴이 어느 저명한 정치가의 넓은 어깨
위에 나타났다는 신문 보도와 기사가 나왔다. 그도 개더골드나 올드 블러드
앤드 선더와 마찬가지로 이 계곡 신출인데 어릴 적에 게곡을 떠나 법률과
정치를 공부하였던 것이다. 개더골드의 재산이나 올드 블러드 앤드 선더의 칼
대신에 그는 오직 혓바닥 하나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 이 혓바닥은 그
둘을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었다.
그는 굉장한 웅변가여서 무슨 말을 해도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은 그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틀린 것도 옳게 보이고, 옳은 것도 틀려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마음만 내키면, 단지 숨을 한번 내쉬기만 해도
화려한 안개를 만들어 그 안개로 지면의 햇빛을 어둡게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그의 혓바닥은 마법의 도구였다. 어떤 때는 그것은 천둥처럼
으르렁거렸고 또 어떤 때는 아주 달콤한 음악처럼 지저귀는 듯했다. 그것은
전쟁터의 폭음이기도 하고 평화의 노래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실제로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어떤 핵심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그는 정말 놀라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의 혓바닥이 그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성공을 가져다 주었을 때, 주
의회며 군주의 궁정에서까지 그의 혓바닥 놀리는 소리가 들려 오고 또 그것이
바로 방방곡곡으로 울려퍼지는 목소리처럼 그를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어 놓자, 급기야 그의 혓바닥은 그 스스로를 대통령의 직위에 뽑자고
국민을 설득시켰다.
이렇게 되기 전에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와 큰 바위 얼굴이 닮은 것에
너무나 감동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한 이 신사는 올드 스토니 피즈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말은 그의 정치적 앞날에 아주 유리한 전망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교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누구든 별명을
갖지 않으면 대통령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친구들이 그를 대통령이 되게 하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을 동안 세칭
올드 스토니 피즈는 태어난 고향 계곡을 방문하러 떠났다. 물론 그는 자기의
동료 주민과 악수하는 일 외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고 이 지방 순회가 선거에
미칠 수 있는 효과에 관하여 생각하거나 걱정해 본 일조차 없었다.
이 저명한 정치가를 환영하기 위하여 성대한 준비가 행해졌다. 기마 행렬이
그를 영접하러 주 경계에서 출발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일을 제쳐두고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려고 연도에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에는 어니스트도 있었다. 앞에서도 이미 본 것처럼, 여러 번
실망했지만 그는 언제나 희망과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과 선하게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기꺼이 신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다시 전처럼 들뜬 기분으로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얼굴을 보러 나갔다.
기마 행렬은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흙먼지를 자욱이 일으키면서
의기양양하게 도로를 달려왔다. 흙먼지가 너무도 높이 또 짙게 피어올라서 산
경사면의 얼굴은 어니스트의 시야에서 전혀 보이지 않게 되고 말았다.
인근의 모든 높은 분들이 말을 타고 나왔다. 제복을 입고 있는 민병대 장교,
의회 의원, 지방 판사, 신문 편집인, 그리고 많은 농부들도 나들이 옷을 입고
양순한 말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로 장관이었다. 특히 수없이 많은 깃발이 기마 행렬 위에
나부끼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는데, 몇 개의 깃발에는 형제처럼
다정하게 미소짓고 있는 유명한 정치가와 큰 바위 얼굴의 훌륭한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이 믿을 만한 것이라면 두 얼굴은 너무나도 닮았다라는
것을 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악대가 있었다는 것도 잊지 않고 말해야겠다. 그 악대는 요란한
취주로 온 산에 메아리쳐 울려퍼지게 했다. 그러자 경쾌하고 영혼을 고무하는
멜로디가 모든 고지와 골짜기에서 일어났다. 마치 이 유명한 귀빈을
환영이라도 한다는 듯 그의 고향 계곡 구석구석이 소리를 내지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가장 극적인 효과는 먼 산의 벼랑에서 이 음악이 메아리쳐
되돌아왔을 때 일어났다. 왜냐하면 이때 큰 바위 얼굴 자신도 마침내 예언
속의 인물이 나타났다는 것에 감사하여 의기양양한 합창을 더욱더 드높여
주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동안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모자를 던져 올리기도 하고 소리를
내지르기도 했다. 그리고 전염성이 강한 그 기세에 눌린 나머지 어니스트도
흥분하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자를 던져 올리며 목청껏 외쳤다.
"만세! 올드 스토니 피즈 만세!"
그러나 아직 어니스트는 그를 보지 못했다.
"이제 온다!"
어니스트 가까이에 있던 사람이 소리쳤다.
"자, 자! 올드 스토니 피즈를 보라구. 그리고 저 산의 얼굴을 봐. 그들이
쌍둥이처럼 닮았는지 알아보자구!"
이 화려한 대열의 한가운데 네 필의 흰 말이 끄는 사륜마차가 다가왔다. 그
마차 안에는 큰 머리에 모자를 쓰지 않은 대정치가 올드 스토니 피즈가 앉아
있었다.
"어떤가, 드디어 큰 바위 얼굴이 자기와 닮은 얼굴을 만나고 말았군!"
어니스트의 한 이웃이 그에게 말했다. 그런데 솔직히 털어놓고 말하는
거지만, 마차 안에서 인사를 하거나 미소짓는 얼굴을 힐끗 보는 순간,
어니스트는 정말 그 얼굴과 산경사면의 저 정든 얼굴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야무진 깊고 넓은 이마며 다른 이목구비 모두가 과연 영웅상 이상으로 타이탄
신과 경쟁이라도 하듯 참으로 대담하고 힘차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러나 산의 얼굴을 빛나게 하고 그 육중한 화강암 물질에 영혼을 불어넣는
숭고함이나 엄숙함 같은 성스런 감정의 장엄한 표정은 이 정치가에게서
아무리 ㅊ으려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떤 것이 처음부터 빠져 있었거나
아니면 나중에 없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이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정치가는
언제나 움푹 패인 눈 속에 피곤한 듯 침울한 빛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장난감에 관심이 없는 아이이거나, 아니면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찮은 목적을 가진 어른, 즉 훌륭한 업적을 올렸으면서도 그 어떤
고매한 목적도 이것에 현실성을 부여하지 않았기 대문에 그의 인생이
막막하고 공허한 어른 같았다.
여전히 어니스트의 이웃은 팔꿈치로 그를 쿡쿡 찌르면서 대답을 재촉했다.
"자, 어떤가! 어서 말해 보게. 저분이야말로 산의 얼굴과 곡 닮지 않았나?"
"아니야!"
어니스트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별로야, 아니 전혀 닮지 않았어."
"그렇다면 큰 바위 얼굴에겐 더더욱 안된 일이군!"
그의 이웃이 응수했다. 그리고 다시 그는 올드 스토니 피즈를 향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우울하고 거의 낙담하여 돌아섰다. 왜냐하면 그 예언을
실현시킬 생각만 있었다면 실현시킬 수도 있었는데 그런 의지를 갖지 않았던
사람을 목격했다는 실망이 너무나도 슬펐기 때문이었다.
한편 기마 행렬, 깃발, 악대, 사륜마차 등은 소란스러운 군중들이 뒤를
따르는 가운데 그의 옆을 지나갔다. 자욱했던 먼지는 다시 가라앉고 큰 바위
얼굴은 수세기 동안 지켜온 그 웅대한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보라. 난 여기에 있다. 어니스트."
다정한 그 입술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 너보다 더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그런데도 아직 지치지 않았다. 걱정
말아라. 그 사람은 곡 올 것이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한해 한해가 서로 앞을 다투기라도 하듯이. 그리고
이제 세월은 백발을 가져와 그것을 어니스트의 머리 위에 뿌리기 시작했다.
세월은 또 그의 이마에 존귀한 주름이 잡히게 하고 볼에는 깊은 골을 새겨
놓았다. 그는 이제 노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헛되이 나이만 먹은 것은 아니었다. 머리 위의 흰 머리카락의
수만큼이나 그의 마음속에는 현명한 생각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마의 주름살과 볼의 골은 세월이 새겨 놓은 명문이었다. 인생이라고 하는
행로가 시험을 통하여 얻은 지혜의 전설을 적어 놓은 명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어니스트는 무명의 인사가 아니었다. 추구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추구했던 명성이 그에게 찾아와서 그가
조용히 살고 있던 계곡의 경계를 넘어 넓은 세상에 그의 이름을 알려지게
하였다.
대학교수, 또 도시의 활동가들조차 어니스트와 만나 이야기를 하고자 멀리서
찾아왔다. 왜냐하면 이 순박한 농부는 보통 사람들의 사상과는 다른 사상,
책에서 얻은 것이 아니면서 책에서 얻는 것보다 더 격조 높은 사상을 지니고
있다는, 즉 그가 천사를 일상의 벗으로 삼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고요하고
친숙한 위엄을 갖춘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었다.
찾아오는 이가 현인이든 정치가든 또는 박애주의자든 어니스트는 그의 소년
시절부터의 성격이었던 성실성으로 방문객을 맞이하였고, 그의 마음이나
방문객의 마음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나 또는 가장 깊숙이 간직하고
있던 것을 무엇이든 숨김없이 터좋고 그들과 이야기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얼굴은 어느덧 밝게 빛나며 마치 부드러운 저녁 햇살처럼 방문객을 비추어
주었다. 그렇게 충만한 담화를 나누고 생각에 잠겨서 방문객들은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계곡을 올라가 다시 잠시 걸음을 멈추고 큰 바위 얼굴을
보고는 그것과 닮은 얼굴을 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어디서 보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어니스트가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는 동안 자비로운 하나님께선 새로운
시인을 이 땅에 보내셨다. 이 시인도 마찬가지로 이 계곡이 고향이었는데
일생의 대부분을 이 낭만적인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냈고 도시의
번잡과 소음 속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유년
시절에 깊은 감명을 주었던 산들은 종종 그의 시에서 맑은 대기 속에 눈 덮인
봉우리로 나타났다. 그리고 또 큰 바위 얼굴도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시인은 그의 시 속에서 큰 바위 얼굴을 찬미했고, 또 그의 시는 큰
바위 얼굴이 자신의 장엄한 입으로 노래해도 될 만큼 아주 웅대했기
때문이었다.
이 천재는 놀라운 천부의 재능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해도 될
정도였다. 그가 산에 대해서 노래하면 모든 사람들은 이전에 거기서 볼 수
있었던 것보다 더 웅대한 아름다움이 산허리에 깃들여 있거나 산곡대기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의 주제가 아름다운 호수라고 하면, 천상의 미소가 호수 위로 던져져
수면에서 영원히 빛나는 것이었다. 주제가 광대하고 오래된 바다라면, 그
바다의 깊고 넓고 무서운 심중조차 마치 그 노래의 정서에 감동이라도 받은
듯이 점점 드높아지며 넘실거리는 것 같았다.
이리하여 이 세상은 시인이 그의 행복한 시선으로 세상을 축복한 순간부터
이전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을 띠는 것 이었다. 조물주께서는 이 시인에게
당신의 세공물에 마지막으로 최선의 손길을 가할 재능을 부여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인이 보고 해석하고 완성할 때가지 만물이 완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인류 동포가 그의 시의 주제일 때에도 그 효과는 마찬가지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 흔한 생활 속의 먼지에 더렵혀져 나날의 행로를
걸어가는 남녀며 길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그는 그의 시적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찬미한 것이었다.
시인은 이러한 사람들을 천사의 친척으로 엮어주는 위대한 사슬의 황금빛
고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은 사람들이 이러한 친척을 가지기에
손색이 없게 신의 형통의 숨은 특성을 밝혀 주었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자연계의 모든 아름다움과 기품이 시인의 공상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자기들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과시하려 했다.
이런 사람들은 제멋대로 이야기하게 내버려 두자. 이들은 틀림없이 자연의
신의 경멸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즉 자연의 신이 세상의 모든 돼지를 만들고
난 다음 찌거기 재료로 반죽해서 그들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존재 이외의
것에 관해선 그 시인의 이상은 진리 중의 진리였던 것이다.
이 시인의 노래들이 어니스트에게도 찾아들었다. 어니스트는 하루의 일이
끝나면 오두막집 문 앞 벤치에 앉아 그 시를 읽었다. 거기서 실로 오랫동안
그는 큰 바위 얼굴을 쳐다보면서 그의 휴식을 명상으로 가득 채워 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영혼을 떨리게 하는 시 구절을 읽으며 어니스트는
너무도 자비롭게 그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는 큰 바위 얼굴로 눈을 들었다.
"오, 존엄한 친구여. 이 사람이야말로 당신을 닮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닌지요?"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얼굴은 미소짓고 있는 것같이 보였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 시인은 계곡에서 아주 먼 곳에 살고 있었지만 어니스트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성품에 대해서도 곰곰이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인은 고귀하고 순박한 생활과 보조를 맞추고 있는 이
사람을 직접 만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느 여름날 아침, 시인은 열차로 출발하여 오후, 해가 질 무렵 어니스트의
오두막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도착했다. 전에는 개더골드의 저택이었던
큰 호탤이 가까이 있었지만 시인은 여행 가방을 팔로 감싸 쥐고 곧바로
어니스트가 거처하고 있는 곳을 찾아가 손님으로 묵기로 결심했다.
문에 다가가자 시인은 손에 책을 들고 있는 선량한 노인 한 분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는 번갈아 가면서 책을 읽기도 하고 또 손가락을 책 페이지 사이에
끼운 채 자애롭게 큰 바위 얼굴을 쳐다보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시인이 말했다.
"오늘 하룻밤 묵어 갈 수 있을지요?"
"그러시구려."
어니스트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웃으면서 덧붙였다.
"저 큰 바위 얼굴이 오늘처럼 자상하게 나그네를 바라본 적도 없는 것
같소."
시인은 어니스트와 나란히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인은 여지껏
기지가 풍부한 사람들이며 아주 지혜로운 사람들과도 종종 교제를 나눈 적이
있지만, 어니스트와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냐하면
어니스트의 사상이며 감정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왔고, 또 그는
위대한 진리를 소박한 말로 이야기함으로써 아주 친숙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자주 언급했던 것처럼, 어니스트가 들판에서 일할 때면 천사들이 그와 함께
일하는 것 같았고, 천사들이 난롯가에서 그와 함께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친구들끼리 서로 사이 좋게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사들과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어니스트는 천사들의 숭고한 이상을 흡수하고
일상 언어의 아름답고 수수한 매력을 이것에 불어넣은 것 같았다. 시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반면 어니스트는 시인이 그의 마음속에서 쏟아낸 생생한 이미지, 즉
오두막집 문 주위의 대기를 화사하기도 하고 구슬프기도 한 미의 형상으로
가득히 채워 놓은 것 같은 이미지에 감동하며 흥분했다.
이 두 사람의 공감은 어느 한 사람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보다 심오한
감각으로 두 사람을 가르쳤다.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로 일치되었으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이 전적으로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어디가지가
자기의 것이고 또 어디가지가 다른 사람의 것인가를 분간할 수도 없는 즐거운
음악이 되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의 높은 사상의 누각, 너무도 멀고
지금까지 너무나 흐릿하여 들어갈 수 없었던, 그리고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너무나 아름다워 언제까지나 머물고 싶은 누각으로 서로를 이끌어 갔던
것이었다.
시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어니스트는 큰 바위 얼굴도 고개를 내밀고
들으려고 하는 것같이 여겨졌다. 어니스트는 열심히 시인의 빛나는 눈을
들여다보았다.
"댁은 대체 뉘시오. 비범한 재능을 지니신 손님?"
어니스트가 말했다.
시인은 어니스트가 읽고 있던 책을 가리켰다.
"이 시를 읽으셨겠지요?"
시인이 말했다.
"그러면 당신께선 저를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그 시들을 썼으니까요."
어니스트는 다시 그리고 전보다 더 열심히 시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서 큰 바위 얼굴로 눈을 옮겼다. 그러더니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손님을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머리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시는지요?"
시인이 물었다.
"실은 난 한평생 어떤 예언이 실현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오. 그런데 이
씨들을 읽으면서 난 그 예언이 댁에게서 실현될지도 모른다고 희망했었다오."
어니스트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신께선 제게서 큰 바위 얼굴의 초상을 찾아내시고 싶었던
거군요."
시인이 어렴풋이 웃며 말했다.
"그러다 실망하셨구요. 예전에 개더골드, 올드 블러드 앤드 선더, 올드
스토니 피즈에게서 실망했던 것처럼. 그렇습니다, 어니스트 씨. 아마 그것이
제게 주어진 운명이겠죠. 당신께선 제 이름을 그 유명한 세 분의 이름에다
추가하고 또 한번 기대가 어긋났다는 것을 기록하셔야 하구요. 제가 스스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정말 부끄럽고도 슬픈 일이지만, 어니스트 씨, 전 저
자비롭고 장엄한 얼굴을 닮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거요?"
어니스트가 시집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시의 사상들은 신성한 것이 아닌가요?"
"물론 그것들에는 하나님의 시 구절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시인이 대답했다.
"당신께선 제 시 속에서 아득하게 메아리치는 천국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어니스트 씨, 제 생활이 저의 사상과 일치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전 원대한 꿈을 꾸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전 빈약하고 비천한 현실 속에서 그것도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살아왔던 것입니다. 감히 이런 말씀을 해도 도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때 저는 제 자신의 작품이 자연이나 인간 생활 속에서
명확하게 밝혔다고들 하는 그 숭고함, 미, 선에 대한 믿음조차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진과 선의 순결한 탐구자인 당신께서 저 성스런 모습을
제게서 찾아내시려 하는지요?"
시인은 슬픈 듯이 말했으며 그의 눈은 눈물로 흐려졌다. 어니스트의 눈 역시
눈물로 흐려졌다.
"해질녘에 어니스트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그랬듯이 야외에서 이웃
주민들에게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어니스트와 시인은 서로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동안에도 여전히 이야기를 하면서 강연장으로 갔다. 강연장은 산간의
작은 구석진 공터였다. 뒤로는 회색의 절벽이 우뚝 솟아 있고, 그것의 험한
표면은 울퉁불퉁한 모든 바위 모서리에서 꽃줄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드러난 바위를 위해 온갖 색무늬가 수놓인 양탄자처럼 많은 담쟁이 덩굴의
상큼한 잎새가 한결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지면에서 약간 높은 곳에 풍성한 녹음에 둘러싸인 움푹 들어간 곳이 있었다.
그곳은 한 사람이 들어가서 진지한 사상이나 진실된 감정에 따르는 자연스런
몸짓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었다.
이 자연의 연단으로 올라가서 어니스트는 자애로운 시선으로 청중들을
둘러보았다. 청중들은 서 있거나 앉거나 풀위에 누워서 저마다 좋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지는 석양빛이 그들 위에 비스듬히 떨어지고 있었으며 약해진 광선을
숙연한 고목 숲 속에 섞고 있었다. 황금빛 광선은 나뭇가지 밑이나 사이를
가까스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다른 나뭇가지 밑이나 사이를 가까스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다른 쪽으로는 약한 햇살과 같은 빛, 숙연한 숲과 같은
엄숙함을 그 자비로운 표정과 함께 드러낸 큰 바위 얼굴이 보였다.
어니스트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자기가 느낀 것이며 생각한 것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어니스트의 말은 그의 사상과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힘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그가 늘 영위해 온 생활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현실감과 깊이가 있었다. 이 연설가가 한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행과 성스런 사랑의 생활이 용해된 생명의 말이었다. 순수하고
풍부한 진주가 이 귀중한 말에 용해되어 있는 것이었다.
시인은 연설을 듣고 있는 동안에 어니스트의 인격과 성품에는 그가 여지껏
써온 시보다도 더 훌륭한 시의 선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인은 눈물로
눈을 반짝이며 이 숭고한 사람을 존경스럽게 바라다보며 혼자서 되뇌었다.
얼굴 둘레에 내려 덮은 백발의 영예를 가진 이 온화하고, 아름답고, 사려 깊은
얼굴만큼 예언자나 현자에 어울리는 용모는 없다고.
어니스트의 이마를 덮은 백발처럼 지는 해의 황금빛 속에서 흰 안개에 싸인
큰 바위 얼굴이 저 멀리서 하지만 분명히 보았다. 그 얼굴의 장엄하고
자비로운 표정은 온 세상을 포용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 순간 어니스트가 막 말을 하려던 사상과 일치하여 그의 얼굴은 자애에
가득 찬 장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자 시인은 참을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혀
팔을 높이 쳐들면서 외쳤다.
"보시오! 보시오! 어니스트 이분이야말로 저 큰 바위 얼굴을 꼭 닮은
분이시오!"
모든 사람들이 어니스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통찰력 깊은 시인이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예언은 드디어 실현된 것이었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그가 하고자 한 말을 끝내자 시인의 팔을 잡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 저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지혜롭고 선량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여전히
바라면서.
20년 후: 오 헨리
거짓된 모습으로 사랑받는 것보다 참된 모습으로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낫다
앙드레 지그
담당 구역을 순찰 중인 경관이 인상적인 모습으로 거리를 걸어갔다.
주위에서 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인상적인 행동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고 습관적이 것이었다.
시간은 밤 10시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이따금 불어오는 비를 품은 차가운
바람 탓인지 거리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끊어졌다.
건장한 체격의 이 경관은 약간은 뽐내는 걸음걸이로 걸어가면서 문단속이
잘되었는지를 살펴보기도 하고, 기묘하고 멋있는 동작으로 곤봉을 휘두르기도
하며, 가끔씩 평화로운 거리를 주의깊게 바라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마치
평화의 수호자처럼 보였다.
그 일대는 일찍 문을 닫는 곳이었다. 간혹 담배 가게나 밤새워 영업을 하는
간이 식당의 불빛이 보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경관은 어느 한 구획의 거리 중간쯤에 와서 갑자기 발걸음을 늦추었다.
어두운 철물점 입구에 어떤 사나이가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
기대어 서 있었다. 경관이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황급히 말했다.
"별일 아닙니다, 경관님."
그는 안심시키려는 듯이 말했다.
"그저 친구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20년 전에 한 약속이죠. 이상하게
들리시나 보군요? 그렇담, 확실히 말씀해 드리지요. 20년 전에는 철물점이
있는 이 자리에 '빅 조'브래디라는 식당이 있었죠."
"5년 전까지만 해도 있었죠."
경관이 말을 받았다.
"그때 헐렸죠."
철물점 입구에 서 있던 사나이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불빛에 그의
창백한 얼굴, 모가 난 턱,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오른쪽 눈썹 옆의 하얀
상처가 비쳤다. 순간 경관의 눈이 반짝였다. 그의 넥타이 핀에는 큼직한
다이아몬드가 묘하게 박혀 있었다.
"20년 전 바로 오늘 밤에, 나의 제일 친한 친구이자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녀석인 지미 웰스라는 친구와 여기 '빅 조'브래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같이
했었습니다. 그와 나는 마치 형제처럼 이곳 뉴욕에서 자랐습니다. 그때 내
나이는 열여덟이었고 지미는 스물이었습니다. 그 다음날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서부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미는 절대로 뉴욕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살 곳이라고는 이곳 뉴욕밖에 없는 줄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여하튼 우리는 그날 밤, 우리의 처지가 어떻게 되거나 또
우리가 아무리 먼 곳에 살게 되더라도, 그때로부터 정확히 20년 후의 이
시간에 다시 여기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었습니다. 20년이 지난 후라면
어떻게든지 각자의 운명을 개척하고 재산도 모으게 되리라고 생각했지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경관이 말했다.
"그런데 다시 만나자고 한 기간이 조금은 긴 것 같군요. 그래, 당신이 떠난
후 그 친구 소식은 들었습니까?"
"물론이죠. 한동안 우린 서신 왕래를 했었으니까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일이 년이 지나서는 서로 소식이 끊기고 말았죠. 아시다시피 서부란
무척이나 광활한 지역이죠. 게다가 난 아주 바쁘게 돌아다녔고요. 하지만
지미가 살아 있다면 나를 만나러 여기에 올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되고 믿음직스러운 녀석이니까요. 절대로 잊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약속을 지키려고 천 마일이나 달려왔어요. 그리고 또 내 옛 친구가 여기에
나타나면 그까짓 것이야 수고랄 수도 없고요."
기다리고 있던 사나이는 뚜껑에 작은 다이아몬드가 여러개 박혀 있는 좋은
회중 시계를 꺼냈다.
"10시 3분전이군요."
그가 말했다.
"우리가 식당 문 앞에서 헤어진 때가 정각 10시였죠."
"그래, 서부에서는 일이 잘되신 모양이군요."
경관이 물었다.
"물론이죠! 지미가 내 반만큼이라도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 친구는
꾸준히 노력하는 타입이죠. 옛날처럼 착한 녀석일 겁니다. 난 돈을 벌기 위해
날고 뛰는 놈들과 경쟁을 벌여야만 했죠. 뉴욕에서 사는 사람들은 판에 박힌
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서부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칼날 위를 걷듯 아슬아슬한
모험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죠."
그 경관은 곤봉을 휘두르면서 한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난 가봐야겠습니다. 당신 친구 분이 꼭 와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꼭
정각까지만 기다리실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나이가 말했다.
"적어도 30분은 더 기다려 줘야지요. 지미가 이 세상에 살아만 있다면
그때까지는 꼭 올 겁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경관님."
"좋은 밤이 되십시오, 선생."
경관은 인사를 하고 문단속이 잘되었는지 살피며 순찰을 계속했다.
마침내 차가운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불규칙적으로 불던
바람도 이젠 일정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근처를 지나가고 있던 몇 명 안 되는 행인들도 외투 깃을 세우고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침울한 표정으로 묵묵히 발검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젊은 시절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천 마일을 마다 않고 달려온 그
사나이는 담배를 피우며 철물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 20분쯤 기다렸을 때, 옷깃을 귀까지 올려 세운 긴 외투를 입은 키가 큰
한 남자가 길 건너편에서 서둘러 건너왔다. 그는 곧장 기다리고 있던 그
사나이에게로 다가갔다.
"자네, 밥이지?"
그가 미심쩍은 듯이 물었다.
"자네가 지미 웰스인가?"
철물점 입구에 서 있던 사나이가 소리쳤다.
"이거 정말 믿지 못하겠군!"
방금 온 사람이 상대의 양손을 꼭 쥐며 말했다.
"틀림없이 밥이군. 자네가 살아만 있다면 여기서 만나게 될 줄 알았지. 그래,
정말이지 20년이란 긴 세월이야. 여기 있었던 식당도 이젠 없어졌네, 밥. 계속
남아 있었더라면 다시 저녁 식사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건 그렇고, 이
친구야, 그 동안 서부에서 어떻게 지냈나?"
"굉장했지.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건 다 이뤄졌네. 지미, 자넨 많이
변했군. 자넨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삼 인치는 더 커 보이는걸."
"아, 그래. 스무 살이 지나 좀 컸네."
"뉴욕에서는 잘 지내고 있는 건가, 지미?"
"그저 그렇지. 나는 시청에서 근무하고 있네. 이보게, 밥. 내가 잘아는
곳으로 가서 지난 얘기들을 나눠 보세나."
두 사람은 서로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서부에서 온
사나이는 자신이 성공했다는 자만심에 부풀어 자신의 지나온 내력을 대강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친구는 외투에 얼굴을 푹 파묻은 채 흥미롭다는 듯이 그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길 모퉁이에는 전등이 환히 밝혀져 있는 약국이 있었다. 두 사람이 이 불빛
속으로 들어오자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얼굴을 보려고 동시에 몸을 돌렸다.
갑자기 서부에서 온 사나이가 걸음을 멈추고 팔짱을 풀었다.
"당신은 지미 웰스가 아니야."
그가 매섭게 말했다.
"아무리 20년의 세월이 길다고 하더라도 매부리코를 들창코로 만들 만큼은
안 되지."
"하지만 20년의 세월이면 선인을 악인으로 변화시키는데 충분한 시간이지."
키가 큰 사람이 말했다.
"이보게, 멋쟁이 밥. 자넨 이미 10분 전부터 체포되어 있었던 것일세. 시카고
경찰 당국에서 자네가 이리로 왔을지도 모른다고 전문을 보냈네. 자네와
면담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더군. 조용히 가는 게 좋지 않겠나? 그게 현명한
생각일 테니. 경찰서로 가기 전에 자네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받은 쪽지가
있는데, 자, 여기 있네. 여기 창문 있는 곳에서 읽어 보게. 웰스 경관이 보내는
것이네."
서부에서 온 사나이는 작은 쪽지를 건네 받아 펼쳐 들었다. 그가 쪽지를
읽기 시작할 때에는 끄떡도 하지 않던 그의 손이 그걸 다 읽고 나서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 쪽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밥에게
난 약속 장소에 정각에 갔었네. 그러나 자네가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성냥불을 켰을 때. 시카고 경찰 당국이 지명 수배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네라는 걸 알았네. 차마 내 손으로 자넬 체포할 수 없었네. 그래서 사복
형사에게 부탁을 한 것이네.
숨바꼭질: 표도르 솔로구프
한 어린이가 당신을 아주 오래도록 사랑할 때 자기와 함께 놀아줘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할 때 그때 당신은 진실해지는 것이다.
마제리 윌슨
1
렐리치카의 방은 모든 것이 밝고 귀여웠으며, 쾌활한 렐리치카의 목소리는
그녀의 엄마를 반하게 만들었다. 이 세상에 그런 아이는 또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렐리치카의 엄마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렐리치카의 눈은 까맣고 컸으며, 뺨은 발그스름했고, 입술은 뽀뽀를 하고
웃음을 짓기 위해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엄마를 가장 기쁘게
해주는 것은 렐리치카의 이러한 매력들이 아니었다. 렐리치카는
외동딸이었으며, 렐리치카의 동작 하나하나는 그녀의 엄마를 사로잡았다.
이것이 그녀의 엄마를 반하게 하는 이유였다. 렐리치카를 무릎위에 앉혀 놓고
귀여워하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었다. 팔에 안긴 어린 계집아이는 생기 있고
명랑한 자그마한 새같이 느껴졌다.
사실, 세라 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렐리치카의 방에서만 행복감을 느꼈다.
남편에게서는 단지 차가움만을 느낄 뿐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녀의 남편
스스로가 차가움을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차가운 물을 마시고 찬
공기를 호흡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항상 건방지고 냉정했으며 차가운
미소를 띠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는 곳은 어김없이 찬기류가 공기 중에 흐르는
것 같았다.
세르게이 모데스토비치와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별다른 애정이나 생각
없이 결혼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그녀의 결혼은 한마디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35살의 젊은이였고 그녀는 25살의 처녀였다. 그
둘은 같은 계층 출신이었으며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그가 장가를 들려고 했을
때 그녀는 시집을 가려고 했다.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그녀의 장래 남편과 사랑에 빠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그녀를 행복하게 했다. 그는 잘생겼고 예절도 발랐다.
그의 지적인 잿빛 눈은 항상 위엄 있는 표정을 유지하게 했으며, 그는 흠잡을
데 없는 친절로 약혼녀에 대한 약속을 잘 지켰다.
신부 역시 얼굴이 예뻤다. 그녀는 키가 크고 가만 눈과 같은 머리칼을
지녔으며 다소 수줍어했지만 아주 재치가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얼마간의 재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 기뻤지만 지참금을
바라지 않았다. 그에게는 연줄이 있었으며, 그녀의 아내 역시 훌륭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 가운데 속해있었다. 이 점은 앞으로 그에게 유리한 기회를 제공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항상 흠잡을 데 없고 재치 있는 세르게이 모데스토비치는 남에게서 시기를
받을 만큼 빠르지도, 남을 시기할 만큼 늦지도 않게 자신의 지위에 올랐다.
모든 것이 적당한 정도로 적당한 시간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결혼 후 세르게이 모데스토비치의 태도에 행여나 그의 아내에게 못된 짓을
할 기미는 전혀 없었다. 그러다 그의 아내가 임신을 했을 때쯤, 그는 딴
곳에서 일시적인 가벼운 기분에 성 관계를 맺었다.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그런 사실을 알고서도 놀랍게도 이렇다 할 상처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모든 감정들을 없애버리는 기대감으로 그녀의 아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조그마한 계집아이가 태어났다.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아기에게
모든 걸 쏟아부었다. 처음에 그녀는 렐리치카라는 딸아이로 인해서 누리는
기쁜 점들을 열에 들떠서 세세하게 늘어놓곤 했다. 곧 그녀는 남편이 아무런
흥미도 없이 단지 정중한 습관 때문에 그녀 말을 들어주는 것뿐이라는 걸
알았다.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남편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녀는 남편에게 실망한 다른 여자들이 우연히 만난 젊은 여인에게 바치는
끊임없는 열정처럼 그 조그마한 계집아이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엄마, 플랴트키(숨박꼭질)해요."
렐리치카가 소리쳤다. 그녀는 'r'을 'l'처럼 발음해서 '프랴트키'가 '플랴트키'로
들렸다.
이렇게 매력적으로 말을 잘 못하는 것은 항상 세라피마 악렉산드로브나를
미묘한 행복감에 젖어 웃게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렐리치카는 작고
포동포동한 다리로 카펫 위를 동동 구르듯 뛰어가서는 자기 침대 근처에 있는
커튼 뒤로 숨었다.
"이제 됐어, 엄마!"
그 계집아이는 장난치듯 한 눈으로 내다보며 즐거운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아기가 어디 있지?"
엄마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마치 아이가 보이지 않는 척 말했다.
그러면 렐리치카는 커튼 뒤에서 잔물결이 이는 듯한 웃음을 터뜨리며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찾았다, 우리 아기!"
엄마가 지금 막 찾은 것처럼 아이의 어깨를 잡으며 즐겁게 소리쳤다.
렐리치카는 엄마의 다리를 껴안고 무릎에 머리를 비비며 오랫동안 까르르
웃어댔다. 엄마의 눈은 더할 수 없는 다정함으로 빛났다.
"엄마, 이젠 엄마가 숨어."
렐리치카가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엄마는 숨으러 갔다. 렐리치카는 몸을 돌려보지 않으려는 척했지만 늘 몰래
엄마가 숨는 모습을 훔쳐보았다.
"이젠 됐다, 아기야!"
엄마가 찬장 뒤에 숨어 소리쳤다.
렐리치카는 엄마가 어디 있는지 정말 알았지만 방을 돌며 엄마가 했던
것처럼 구석구석 뒤지며 찾는 시늉을 하였다.
"엄마, 어딨어? 여기도 없고……, 여기도 없네……."
렐리치카가 이 구석 저 구석 뛰어다니며 말했다.
엄마는 머리를 벽에 기대고 숨을 죽인 채 가만 서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아주 행복한 웃음이 맴돌았다.
다소 멍청한 구석이 있었지만, 마음씨가 곱고 예쁘게 생긴 유모 페도지아는
지체 높은 부인네들의 변덕에 반대할 의사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독특한 표정으로 여주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님도 꼭 조그마한 계집아이 같군. 저토록 열에 들뜨셔서……."
페도지아가 속으로 생각했다.
렐리치카는 엄마가 숨어 있는 곳으로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아이 엄마도
너무도 신이 나서 이 숨바꼭질 놀이에 빠져 들고 있었다. 이런 순간순간이
그녀의 가슴을 고동치게 했던 것이다. 렐리치카가 갑자기 엄마가 숨어 있던
곳을 쳐다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야, 엄말 찾았다!"
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아끌고 방 한가운데로 걸어나갔으며, 그들은 너무도
즐거워서 깔깔 웃어댔다. 렐리치카는 또 엄마의 다리를 껴안고 무릎에 머리를
비비며 아주 귀엽고 앙증맞은 혀 짧은 말을 계속 해댔다.
이때 세르게이 모데스토비치가 아이방을 향해 오고 있었다. 반쯤 닫힌
문사이로 웃음소리와 즐겁게 외치는 소리 그리고 장난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다정하고 냉정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아주 흠잡을
데 없이 옷을 차려입고 있었고 기운차고 꼿꼿하게 보였으므로, 그의 주위에는
항상 깔끔하고 쌀쌀한 냉기 같은 것이 감돌고 있었다.
즐겁게 놀고 있는 가운데 세르게이 모데스토비치가 불쑥 들어서자 엄마와
아이는 당황해했다. 페도지아까지도 어쩔줄을 모르고 계면쩍어했다. 예의 그
깔끔하고 쌀쌀한 냉기 때문이었다.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금방
차분해졌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 자그마한 계집아이에게도 곧 바로 전달되어서
웃음을 멈추고 조용히 열중해서 아빠를 바라보게했다.
세르게이 모데스토비치는 방을 힐끗 둘러보았다. 그는 이곳에 오는 걸
좋아했었다. 이곳은 모든 것이 아름답게 정돈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곳이
이렇게 정돈되어 있는 것은 렐리치카가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아주 예쁜
것들로만 그 아이 주위를 장식해 주고 싶어한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의
의도 때문이었다.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우아하게 옷을 입었는데 이것
역시 렐리치카에게 보여주려는 마찬가지 의도에서였다.
세르게이 모데스토비치는 그의 아내에 대해서 만족스럽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거의 끊임없이 이 아이 방에만 있는 것이다.
"역시 당신이 여기에 있었군……."
그가 냉정하고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은근히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들은 함께 아이 방을 나왔다. 세르게이 모데스토비치가 억양 없는 말투로
갑자기 무관심하게 말했다.
"가끔은 아이가 당신과 떨어져 지내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소?"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저 아이도 저만의 개성을 자각해야 된다는 말이오."
그가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저앤 아직 어려요."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가 대꾸했다.
"여하튼,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뿐이지 강요하는 게 아니오. 그건
어디까지나 당신의 영역이니까."
"생각해 볼께요."
그의 아내가 냉정하고 상냥하게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2
그날 저녁 유모 페도지아는 부엌에서 별 말이 없는 하녀 다리아와 수다쟁이
늙은 요리사 아가샤에게 그 집의 어린 아이에 대해, 그리고 아이와 엄마의
숨바꼭질 요리에 대해 입품을 팔고 있었다.
"아기씬 자기 얼굴을 숨기고는 '이제 다 됐어!'하고 외치지요."
그러면서 페도지아가 웃으며 덧붙였다.
"마님도 꼭 어린애 같아요."
늙은 요리사 아가샤는 그 이야기를 듣고 머리를 불길하게 저었다. 그녀의
얼굴은 짐짓 심각해지기까지 하였다.
"마님이 그러시는 건 좋다 이거야. 하지만 아기씨가 그러는 건 나빠."
"왜 그렇지요?"
페도지아가 호기심을 갖고 물었다. 그녀의 이 호기심 어린 표정은 마치
거칠게 색이 칠해진 우스꽝스러운 나무인형 얼굴 같았다.
"그래, 나빠. 그것도 아주 나빠!"
아가샤가 확신을 갖고 거듭 말했다.
"그러니까 왜 나쁜 거냐니까요?"
페도지아가 그 우스꽝스러운 얼굴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아기씬 숨고 또 숨고 그리고 또 숨을 거야."
아가샤가 문쪽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페도지아가 공포에 질려서 소리쳤다.
"내 말이 맞을 테니 두고 보라고!"
아가샤가 조금 전과 같은 확신을 갖고 은밀하게 말했다.
"암, 확실한 징조야!"
그 늙은 여자는 자신이 아주 갑작스럽게 이런 조짐을 감지하였다는 사실에
아주 의기양양해 하는 것 같았다.
3
렐리치카는 잠이 들었다.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자신의 방에서
쾌활하고 상냥한 렐리치카를 떠올리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렐리치카가
처음으로 사랑스럽고 자그마한 계집아이로, 그러다 사랑스럽고 큰 계집아이로,
다시 애교 있고 자그마한 계집아이로 그녀의 생각 속에서 바뀌고 있었다.
렐리치카는 끝까지 엄마의 조그마한 계집아이로 남아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고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페도지아가 다가와 그녀
앞에 서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페도지아는 근심스럽고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마님, 마님."
페도지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깜짝 놀라며 생각에서 깨어났다. 페도지아의
얼굴이 그녀를 근심스럽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지, 페도지아? 렐리치카에게 무슨 나쁜 일이라도 있나?"
그녀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아주 근심스럽게 물었다.
"아녜요, 마님. 아무 일도 없어요. 렐리치카는 지금 자고 있어요. 하느님이
아기씨와 함께 하시길!"
페도지아가 손사래를 치며 안주인을 다시 의자에 앉히면서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그저 마님께 뭘 좀 아뢰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것뿐이에요. 마님도 잘
아시겠지만 렐리치카 아기씨는 늘 어딘가에 숨어 있어요. 그건 좋지 않아요."
페도지아가 눈이 휘둥그레진 안주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왜 좋지 않다는 거지?"
뜻하지 않게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가 화가 난
어투로 물었다.
"어떻게 나쁜 건지는 솔직히 저도 모르겠어요."
이렇게 말한 페도지아의 얼굴에는 자신도 모르는 어떤 확신이 깃들여
있었다.
"제발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해 줘.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도대체가
모르겠으니, 원!"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가 냉담하게 말했다.
"마님, 그저 일종의 예감입니다. "
페도지아가 다소 멋쩍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돼먹지 않은 소리!"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가 일축했다.
그녀는 조짐이니 예감이니 하는 돼먹지도 않은 페도지아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렇지만 어떤 두려움이나 슬픔 같은 것이 은근히
그녀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물론 지체 높은 양반들이 예감 같은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마님, 이건 나쁜 징조예요. 아기씨가 숨고 또 숨고……."
페도지아가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말하다가 급기야 큰 소리로 흐느끼며
눈물을 터뜨렸다.
"아기씨는 항상 숨고 또 숨고 또 숨어요. 그러다가 그 천사 같은 작은
영혼이 축축한 무덤 속으로 숨어 버릴까 봐 겁이 나요."
페도지아가 앞치마로 눈물을 훔쳤다.
"누가 그런 얘길 했지?"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가 엄격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샤 아주머니가 말했어요.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아주머니예요."
페도지아가 대꾸했다.
"뭘 다 안다는 거야!"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화가 나서 버럭 소리쳤다. 마치 그녀는 지금과
같은 갑작스런 상황에서 어떡해서든 벗어나고파 하는 것 같았다.
"앞으로는 그 따위 돼먹지도 않은 소리를 하려거든 나한테 오지도 마. 좋아,
이제 됐으니 나가 보도록 해."
페도지아는 풀이 죽어 안주인 곁을 물러갔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마치 렐리치카가 죽기라도 할 것 같이 호들갑을
떨어대니 말이야!"
그러면서도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그녀를 엄습하고 있는 까닭 모를
한기와 공포감 때문에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어느새 렐리치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 '예감'에 자신도 모르게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머리를 강하게 가로저으며 페도지아 같은 여편네들이 믿는
'예감'을 무지의 탓으로 돌렸다. 그녀의 생각으론 아이의 지극히 평범한 놀이와
아이의 생명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그날 저녁 그녀는 다른 생각을
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그때마다 그녀의 생각은 절로 렐리치카가 숨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로 되돌아왔다.
렐리치카가 엄마와 유모를 겨우 구별하던 꽤 어렸을 때였다. 그때에도
그애는 이따금씩 유모의 팔에 안겨 있다가 갑자기 장난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며 유모의 어깨에다 머리를 숨기곤 했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수줍은 시선으로 내다보곤 하는 것이었다.
최근에, 드문 경우이지만 아이 방에 안주인이 없을 때 페도지아는
렐리치카에게 숨는 법을 다시 가르쳤다. 렐리치카의 엄마는 아이 방에
들어와서 숨어 있는 그애의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고서는 그녀도
숨바꼭질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4
다음날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렐리치카를 돌보느라고 열중해서 전날
페도지아가 한 말을 잊어버렸다.
그러다 저녁 만찬을 준비시키고 아이 방으로 막 돌아왔을 때, 그녀는 탁자
밑에서 렐리치카가 '다 됐어!'하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는 돌연 공포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녀는 즉시 이 미신적인 불안에 떠는 자신을 세차게
타일렀다. 하지만 렐리치카가 좋아하는 이 놀이를 더 이상 성심껏 할 수
없었다.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렐리치카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애썼다.
그애는 사랑스럽고 고분고분한 아이여서 엄마가 새로운 것을 원하면 항상
열심히 따랐다. 그러나 그애는 '다 됐어!'하고 외치며 자기 엄마로부터 어떤
구석으로 숨는 버릇이 붙어버렸고, 심지어 그날도 이미 여러 번 그 놀이를
했다.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렐리치카를 즐겁게 해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불안하고 위협적인 생각들이 그녀의 뇌리에서 도무지 떠나질 않았기
때문에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째서 렐리치카는 '다 됐어!'라는 말을 저토록 되뇌는 걸까? 왜 저앤 그
똑같은 짓-끝없이 눈을 감고 얼굴을 감추는 일에 싫증을 안 내는 것일까?
아마도 저앤 다른 아이들만큼 세상일에 강렬히 이끌리지 않나 보군. 그렇다면
신체 기관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혹 무의식적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싹트고 있을지도 몰라……."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나쁜 '예감' 때문에 몹시도 괴로웠다. 그녀는
페도지아가 보는 앞에서 렐리치카와의 숨바꼭질 놀이를 멈춘 사실이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그만큼 이 놀이는 그녀에게 고민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이 놀이를 무척이나 하고 싶었기 때문에, 무엇인가가 그녀를
렐리치카에게서 숨게 하고 또 숨은 아이를 찾아내게 강렬하게 이끌었기
때문에 더욱더 고민스러웠다.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
놀이를 한두 번 정도 더 했다. 그녀는 자신이 아주 의식적으로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그날은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에게 슬픈 날이었다.
5
렐리치카는 자기 침대에 누워 막 잠이 들려고 했다. 그애의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엄마는 파란 담요로 그애를 덮어주었다. 렐리치카가 담요에서
예쁘고 자그마한 손을 꺼내 엄마를 껴안으려고 했다. 엄마가 몸을 숙여
주었다. 졸린 얼굴을 한 렐리치카는 엄마에게 키스를 하고 머리를 베개에
대었다. 렐리치카가 손을 담요 속에 넣고 속삭였다.
"손이 다 숨었어!"
순간 엄마의 심장은 멈추는 것 같았다. 아주 작고 연약한 렐리치카는 거기
얌전하게 누워 있었다. 렐리치카가 눈을 감고 조용히 말했다.
"눈이 다 숨었어!"
잠시 후 훨씬 더 조용히 말했다.
"렐리치카가 다 숨었어!"
마침내 렐리치카는 얼굴을 베개에 묻고 잠이 들었다. 파란 담요를 덮고 있는
그애는 아주 작고 연약해 보였다. 엄마는 슬픈 눈으로 그애를 내려다보았다.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오랫동안 침대 주위를 서성이면서 자애롭게 또
두렵게 렐리치카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이애 엄마야! 내가 이애를 보살필 수 없다는 건 말도 안 돼!"
그녀는 렐리치카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나쁜 일들을 상상하며
중얼거렸다.
그날 밤 그녀는 오랫동안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기도가 그녀의 슬픔을
가라앉혀 주지는 못했다.
6
며칠이 지났다. 렐리치카는 감기에 걸렸다. 한밤중에 열이 그애를
엄습해왔다. 페도지아가 얼른 이 사실을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에게 알렸다.
그녀는 황급히 아이 방으로 달려갔다. 열이 너무도 높아 잠을 못 이루며
괴로워하는 렐리치카를 본 순간, 그녀는 언뜻 불길한 '예감'을 떠올리며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의사가 불려왔다. 그런 경우에 할 수 있는 조치란 조치가 신속하게
취해졌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렐리치카가 빨리 나아서 다시 웃으며 놀게 될
거라는 희망을 갖고 자신을 안심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에겐 전혀
기대할 수 없는 행복 같았다! 렐리치카는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져갔다.
모든 사람들이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를 놀라지 않게 하려고 침착한
체했지만, 그들의 그런 위장된 얼굴은 그녀를 더욱 슬프게 했다.
"아기씬 숨고 또 숨어요. 오, 우리 렐리치카!"
이렇게 흐느끼며 중얼거리는 페도지아의 말에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지금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의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그녀는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열 때문에 렐리치카는 기력이 떨어졌으며, 때로는 의식을 잃고 헛소리를
했다. 그러나 의식을 되찾았을 때, 부드럽고 상냥한 성품으로 돌아와 고통과
피로를 참아냈다. 그애는 엄마가 자신의 고통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는 듯이
힘없이 미소까지 지었다. 악몽같이 고통스럽게 사흘이 흘렀다. 렐리치카는
아주 약해졌다. 그애는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애는 희미한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고는 혀도 잘 돌지 않는 발음으로 겨우
알아들을 수 있게 끽끽거렸다.
"다 됐어, 엄마! 숨어, 엄마!"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렐리치카 침대 근처의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이 얼마나 슬픈 노릇인가!
"엄마!"
렐리치카가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불렀다.
렐리치카의 엄마는 아이 위로 몸을 구부렸다. 시력이 더욱더 희미해진
렐리치카는 엄마의 창백하고 절망적인 얼굴을 마지막으로 올려다보았다.
"창백한 엄마!"
렐리치카가 속삭였다.
엄마의 창백한 얼굴이 뿌옇게 흐려지면서 렐리치카 앞의 모든 것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애는 손으로 침대보 가장자리를 힘없이 움켜지고는 속삭였다.
"이제 다 됐어!"
아이의 목구멍에서 무언가가 꼬르륵거렸다. 렐리치카가 파르르 떨리는
창백한 입술을 벌렸다가 다시 오므렸다. 죽은 것이었다.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절망감에 빠져 렐리치카
방을 뛰쳐나왔다. 그녀는 남편에게로 갔다.
"렐리치카가 죽었어요."
그녀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세르게이 모데스토비치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다보았다.
그는 생기 있고 아름다운 그녀의 용모에 드리워져 있는 무감각한 표정에
기이하게도 압도되고 말았다.
7
렐리치카는 수의가 입혀져 작은 관 속에 뉘어 응접실로 운반되었다.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관 옆에 서서 죽은 아이를 망연자실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르게이 모데스토비치는 공허하고 무의미한 말로 그녀를
위로하며 관에서 떼어내려고 했다. 세르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미소를 지었다.
"저리 비켜요. 지금 렐리치카는 장난치고 있는 거예요. 이앤 곧 일어날
거에요."
"여보, 제발 진정하시오! 우리 모두는 운명에 순응해야만 하오."
세르게이 모데스토비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앤 곧 일어날 거라니까요!"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가 죽은 아이에게 눈을 고정시킨 채 고집을 피었다.
세르게이 모데스토비치가 얼른 주위를 조심스럽게 돌아보았다. 주위
사람들에게 꼴사납게 비웃음을 살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여보, 제발 진정하란 말이야! 죽은 애가 어떻게 살아난다는 거야. 그것은
기적을 바라는 일이라구."
이렇게 말을 내뱉은 세르게이 모데스토비치는 지금의 이 상황이
부적절하다고 여겨졌다. 그는 갑자기 초조해지고 화가 났다.
그는 조심스럽게 아내의 팔을 잡아 관에서 떼어냈다.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차분해 보였고 눈가는 말라 있었다. 그녀는 아이 방으로 가서
렐리치카가 숨곤 하던 곳들을 구석구석 들여다보았다. 이따금씩 몸을 구부려서
탁자나 침대 밑을 보며 '내 아기가 어디 있지? 나의 렐리치카가 어디 있지?'
하고 쾌활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방안을 한 바퀴 돈 그녀는 다시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페도지아는
방 한구석에서 꼼짝도 않고 앉아 공포에 질린 얼굴로 안주인을 바라보았다.
결국 페도지아는 흐느끼기 시작했고, 얼마 안 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아기씬 숨고 또 숨었어요. 오, 우리 렐리치카! 오, 우리 천사 같은 작은
영혼!"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걸음을 멈추고 당황스런 시선으로 페도지아를
바라보더니 끝내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오열을 터뜨렸다.
8
세르게이 모데스토비치는 장례식을 서둘렀다. 그는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가 갑자기 닥친 불행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는 걸 알았고,
그로 인해 그녀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되었다. 그래서 렐리치카를
빨리 무덤에 안치시키면 그녀가 곧 쉽게 마음을 바꾸고 안정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렐리치카를 위해 특별히 신경 써서
옷을 차려입었다. 그녀가 응접실로 들어갔을 때, 그녀와 렐리치카 사이에는 꽤
여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사제와 부제는 방 안을 왔다갔다했으며, 푸른 연기 구름이 공중에 떠
있었고, 향냄새가 났다.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천천히 렐리치카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머릿속은 무언가에 억눌려 터질 것만 같았다. 렐리치카는
작은 관에 조용하고 창백하게 누워서 애처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는 렐리치카의 관 가장자리에 뺨을 갖다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이젠 다 됐다, 얘야!"
아이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
주위에서 약간의 소란과 동요가 일었다. 낯선 사람들 몇몇이 몸을 굽혀 그녀를
붙잡아서 관에서 떼어내고, 렐리치카를 어디론가로 운반하려고 하였다.
세라피마 알렉산드로브나가 똑바로 서서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고 미소를
지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렐리치카!"
렐리치카는 밖으로 운구되고 있었다. 엄마는 절망적으로 흐느끼며 관 뒤를
쫓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곧 제지당했다. 그녀는 렐리치카가 지나간 문 뒤로
뛰어가 그곳에 웅크리고 앉아서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며 절규했다.
"렐리치카야, 이제 다 됐다!"
그런 다음 그녀는 문 뒤에서 머리를 밖으로 쏙 내밀며 깔깔 웃기 시작했다.
렐리치카는 엄마에게서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으며, 렐리치카를 운구하는
사람들은 걷는다기보다는 뛰는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