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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3:22
<나>를 기대하는 제자들 앞에서 요한은 <내가> 쇠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왜? 왜 나를 향한 기대를 땅에 묻으라 할까? 요한, 그는 절망의 사람인가. 희망이나 기쁨 따위는 다 땅에 묻고 절망과 비통으로만 살려하는가. 그게 아니라면 그는 왜 쇠하려고 제 무덤을 파는가. 공주야! 요한은 쇠하고 예수님은 흥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요한도 살고 예수님도 영광을 받으시낟.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잘 알고 그대로 살았다.
In front of the disciples who expect "I", John says that "I" should decline. Why? Why should we ask the earth to bury the expectations for me? John, is he a man of despair? Do you bury all hope and joy in the ground and live only through despair and heartbreak? Otherwise, why is he digging my grave to decline? Princess! John is said to decline and Jesus should rise. Only then will John live and Jesus be honored. John lived as he knew his mission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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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요한 자신보다 예수의 세례를 받으러 가는 자들이 많다는 소식에 일어나야 할일이 일어났다고 기뻐한다. 주님의 흥함이 그의 존재 목적이었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때 자신에게도 영광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인으로서 그것을 다스리시는 분이고,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는 분이다. 그것이 그분이 흥하고 또 영광을 받으셔야 마땅한 이유다. 그러니 땅에 속한 세상은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고, 성령의 역사로만 믿을 수 있다.
So he rejoices that what had to happen happened at the news that there are more people going to be baptized by Jesus than John himself. Because he believed that the Lord's rise was his purpose of existence and that it would be an honor for him when he made Christ a movie. Jesus is the master of all things, the one who rules it and gives the Holy Spirit in abundance. That is why he deserves to be raised and honored. Therefore, the world that belongs to the earth cannot understand his words and can only be trusted with the history of the Holy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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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참되신 분으로 인정하는 사람이다. 참된 축복은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께 참되다는 인침을 받는 것이다.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계가 결정한다.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 믿음은 곧 순종이다. 온 세상을 다스릴 전권을 위임받은 왕 예수의 통치 앞에 복종 한다는 뜻이다. 그것을 거부한다면, 이미 진노 아래 있는 삶이다.
Anyone who accepts Jesus' testimony is someone who recognizes God as being patient. True blessing is to know Jesus through the Holy Spirit, to know God through Him, and to be accepted by God. Eternal life is determined by the relationship with God's son. There is eternal life for those who believe in the son, and eternal life for those who obey the son. Faith is obedience. It means submitting to the rule of Jesus, the king who has been entrusted with the full power to rule the whole world. If you reject it, it is a life already under wr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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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예공! 성경신학을 하다보면 중간에 교통정리를 하고 가야할 주제가 생긴다. 눈치를 챘겠지만 <성령>이란 주제는 성경의 완전 핵심 주제이니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엔 성령을 바람(프뉴마)으로 표현하던데, 설마 내 얼굴을 꽁꽁 얼게 만드는 그런 바람(wind)은 아니겠지. 으~ 추워, 그럼 지금부터 성령이 무엇인지 그 알쏭달쏭한 비밀탐험을 시작해 보자. 밤손님 니고데모가 용기를 내서 빛으로 나왔다. 그는 유대교의 최고봉 이었다.
Princess! When you study Bible theology, you will find a topic to clean up your traffic in the middle. As you may have noticed, the theme of "The Holy Spirit" is a completely core theme of the Bible, so you should pay attention. In the Gospel of John, the Holy Spirit is expressed as the wind (Pnyuma), but it's not the wind that makes my face freeze. Oh, it's cold, so let's start a secret exploration of what the Holy Spirit is from now on. Night guest Nigodemo gathered his courage and came out to the light. He was the peak of Juda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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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빛을 쏘이기 전 까지는 하나님 나라를 가질 수 없는 자였다는 거 다들 아시나요?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 동문서답하는 니고데모에게 주님께서 성령으로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다.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라는 뜻과 '다시 '라는 뜻으로 성령으로만 가능한 실존양식이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고, 식당 개 오년이면 라면을 끓인다고 하질 않는가. 내가 암만 봐도 성령으로 난다는 말은 중생한다는 말이며, 위로부터 다시 난다는 새 창조의 개념이 틀림없으렸다.
But did you all know that he was a man who could not have the kingdom of God until he was shot at by light? "Can you enter and fly?" To Nigodemo, who replied, "The Lord said that only the Holy Spirit can achieve eternal life." To be reborn means 'from above' and 'again' is a form of existence that can only be achieved by the Holy Spirit. Isn't it said that in three years, each person recites the wind moon, and in five years, the restaurant dog cooks ramen? To say that I am born as the Holy Spirit just by looking at cancer means to be living, and it must be the concept of a new creation that comes from ab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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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프뉴마’라고 했는데 영어식으로 말하면 spirit 이고 반드시 soul(프시케)과 구별해서 써야 한다. 왜냐하면 영과 혼은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영'은 위에 속한 것을 말할 때 쓰는 단어이고 '혼'은 아래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저자는 헬라인 독자들을 위해 여기서도 헬라의 이원론을 패러디 하고 있다. 아래에 속한 것으로는 결코 구원에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위로부터 내려온 로고스가 그의 초월적인 권능으로 다시 일으키시는 사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Wind is called 'Pneuma', but in English it is spirit and must be used to distinguish it from soul. This is because spirit and soul are different. 'Young' is a word used to say what belongs to the above, and 'hon' means what belongs to the below. The author of John the Gospel is also parodying Hella's dualism here for the readers of Hella. Since belonging to below can never achieve salvation, it is necessary to have an event in which Logos from above rekindles with his transcendent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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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 일을 위해 우리 주님께서 아래로 내려오셨다가 다시 위로 오르신 것이다. 거듭난다는 말은 바로 이 일에 연합되는 것이며, 실제로 부활의 삶을 이 땅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종합하면 새 성전, 거듭남, 중생, 위에 속한 자, 부활, 성령으로 난 자 모두 같은 의미의 다른 말이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성령 충만" 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얘기가 성령세례인데 성경은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명령하고 있지도, 구원의 필수조건처럼 요구하고 있지도 않아
As we know, our Lord has come down and risen again for this. To be reborn means to be united in this very work, and to actually live the life of resurrection on this earth. In sum, the new temple, rebirth, sentient beings, those who belong to above, resurrection, and the Holy Spirit are all other words with the same meaning. One thing to note is that the first thing that comes out when it comes to "fulfill the Holy Spirit" is the Holy Spirit baptism, and the Bible does not command to receive the Holy Spirit baptism, nor does it demand it as a prerequisite for sal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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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성도는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성령이 함께 거하시기 때문이야.(고전12:13 롬8:9) 말하자면 "성령 충만" 이란 성령의 열매로생기는 것이지, 결코 제2의 체험이나 특정인 에게만 은사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는 것을 못 박아 버리 거라! 쾅! 쾅! 다만, 성령 충만의 표시를 살펴볼 적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씀하고(3:16-22)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할 것 이야.
This is because the Holy Spirit lives with him from the moment he believes in Jesus (Kon. 12:13 Rom. 8:9), so to speak, "full of the Holy Spirit" is the fruit of the Holy Spirit, but it will nail down that it is never given as a gift to a second experience or to a specific person! Boom! Boom! However, when you look at the signs of the fullness of the Holy Spirit, you will have to remember that it appears as "the word of Christ is abundant in us" (3: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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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한 것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둘 다 같은 결과를 낳기 때문에 "성령 충만"한 성도는 말씀 안에 거하게 하는 사람이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성도로 주가 말씀하신 모든 것에 순종하고자 애쓰는 사람이지.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한다. "는 의미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성령 충만" 에 대해 <은사/생명의 샘,1994>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Since "full of the Holy Spirit" and Christ's "living in us" both produce the same results, the "full of the Holy Spirit" is the one who lets the Holy Spirit live in the Word. A "full of the Holy Spirit" is a Christ conscious saint who strives to obey everything the Lord has said. This means, "Let the Word of Christ dwell in you in abundance." Rev. John MacArthur summarizes "full of the Holy Spirit" as follows in his book, The Fountain of Life,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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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은 1.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일에 전적으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매달리는 것. 2. 성령 충만은 매 순간 예수그리스도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사는 것. 3. 성령 충만은 주님을 의식하는 것을 연습하는 것. 자, 그럼 어떻게 하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목사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의식하고 그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처럼 똑같이 적용할 것을 요구한다. 마치 Q.T하는 것처럼 매일아침 주님! 안녕하세요? 로 시작해서 오늘도 당신의 것입니다.
The Holy Spirit Filling is 1. Hanging on to getting to know Jesus Christ by all means. 2. The Holy Spirit Filling is living as if standing in front of Jesus Christ at every moment. 3. The Holy Spirit Filling is practicing being conscious of the Lord. So, how can we do this? The pastor demands that we be conscious of a person and apply the same as if we are having a conversation with that person. It starts with "How are you, Lord, every morning as if you are Q.T." and is still yours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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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제 옆에 계시다는 것을 제가 잊지 않도록 하루 종일 생각나게 해주세요? 라고 말이야. 물론 유혹을 받을 때도, 어떤 결정을 할 때에도 꼭 주도권을 예수님께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은 주님과 죄를 생각하는 것으로 동시에 채울 수 없기 때문에 전자 아니면 후자가 반드시 밀려나게 되어있는 거 다들 아시잖아? 나는 주님이 흥하는 것을 기뻐하며 기꺼이 망하고 있는가? 무엇에 쇠하고 무엇에 흥하려 하는가?
Make me think all day long so that I don't forget that you are next to me. Of course, you must give Jesus the initiative when you are tempted and when you make any decision. You all know that the former or the latter is bound to be pushed out because our hearts cannot be filled with the thinking of the Lord and the sin at the same time, right? Am I happy with the Lord's rise and am I willing to go down? What are you losing and what are you trying to thrive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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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요한의 세례(22-24)
a.예수의 세례:22
b.요한의 세례:23-24
요한과 제자들의 대화(25-30)
a.제자들의 질문:25-26
b.요한의 대답:27-30
저자의 신학적 첨언(31-3)
a.예수의 기원:31
b.예수의 증거:32-35
c.예수에 대한 두 반응: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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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에(22a)
예수께서 제자들과(22b)
유대 땅으로 가서(22c)
거기 함께 유하시며(22d)
세례를 주시더라(2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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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도(23a)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23b)
세례를 주니(23c)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23d)
사람들이 와서(23e)
세례를 받더라(23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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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24a)
아직 옥에 갇히지(24b)
아니하였더라(2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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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25a)
요한의 제자 중에서(25b)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25c)
결례에 대하여(25d)
변론이 되었더니(25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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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요한에게 와서(26a)
가로되 랍비여(26b)
선생님과 함께(26c)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26d)
곧 선생님이(26e)
증거 하시던 자가(26f)
세례를 주매(26g)
사람이 다(26h)
그에게로 가더이다(26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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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27a)
대답하여 가로되(27b)
만일 하늘에서(27c)
주신바 아니면(27d)
사람이 아무 것도(27e)
받을 수 없느니라(27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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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한바(28a)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28b)
그의 앞에(28c)
보내심을 받은(28d)
자라고 한 것을(28e)
증거 할 자는(28f)
너희니라(28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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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를 취하는 자는(29a)
신랑이나(29b)
서서(29c)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29d)
크게 기뻐하나니(29e)
나는 이러한 기쁨이(29f)
충만하였노라(29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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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30a)
흥하여야 하겠고(30b)
나는(30c)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0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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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31a)
오시는 이는(31b)
만물 위에 계시고(31c)
땅에서 난 이는(31d)
땅에 속하여(31e)
땅에 속한 것을(31f)
말하느니라(31g)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31h)
만물 위에 계시나니(31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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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32a)
그 보고 들은 것을(32b)
증거 하되(32c)
그의 증거를(32d)
받는 이가 없도다(3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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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증거를(33a)
받는 이는(33b)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33c)
인 쳤느니라(3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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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보내신 이는(34a)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34b)
이는(34c)
하나님이 성령을(34d)
한량없이 주심이니라(3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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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35a)
아들을 사랑하사(35b)
만물을 다(35c)
그 손에 주셨으니(35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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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믿는 자는(36a)
영생이 있고(36b)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36c)
영생을 보지 못하고(36d)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36e)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6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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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가 아닌<나>여서_It's me, not Christ._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듣고_When I heard the groom coming,_
위에서 오시는 이를 맞으며_I was greeted by a person coming from ab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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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때문에 미래를 현존하게 하신 것을 찬양합니다. 내가 위로부터 오신 자와 연합하였으니 그분을 증거 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내 모든 영역에서 주님이 흥하시기 위하여 내가 기꺼이 망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낡고 빛바랠 아랫것들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주와 함께 부활의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나를 성령 충만케 하옵소서. 새롭게 하옵소서.
I praise you for making the future exist because of you. I am united with the one who came from above, and I want to live a life of proof of him. For you to prosper in all my realm, help me willingly collapse. I will no longer cling to the old and faded underneath and live a life of resurrection with the Lord. Make m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Make new.
2026.2.8.sun.Clay
신학 비평//
1) 왜 요한은 ‘나’에 대한 기대를 묻으라고 말하는가?
요한복음 3장 30절의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흔히 겸손의 미덕으로 소비되지만, 요한복음 맥락에서 이것은 윤리 명제가 아니라존재론적 선언에 가깝습니다. 요한은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겸손해져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건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요한의 쇠함은 자기부정이 아니라 자기 오해의 종말입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요한은 *자아 소멸*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자아의 위치 조정(ontological relocation)을 말합니다.
2) 요한은 절망의 인간인가?
쇠함은 허무가 아니라, 목적의 완성이기에 당신의 질문이 정확히 핵심을 찌릅니다. “요한은 절망의 사람인가?” 아닙니다. 요한은 실존주의적 허무와 정반대 지점에 서 있습니다. 사르트르식 인간은 “나는 내가 나를 만든다”고 말하지만,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이 말은 패배 선언이 아니라 자유의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존재를 성과와 비교에서 해방시키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기쁨은 “내가 성공했는가?”가 아니라 신랑의 음성을 들었는가?”에서 완성됩니다. 요한은 자기 성취의 철학이 아니라 증언자의 철학을 살고 있습니다.
3)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말의 신학적 급진성
이것은 윤리가 아니라 종말론입니다. 요한의 말은 도덕적 권면이 아닙니다. “겸손하자”, “자기를 낮추자”가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구조 안에서 이것은 시대 교체 선언입니다.( a.세례 요한: 마지막 선지자, 땅에 속한 질서의 최고봉 b.예수: 위로부터 오신 로고스, 새로운 창조의 시작) 그러므로 요한의 쇠함은 실패가 아니라 구속사적 임무 종료입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요한은 “의미 없는 존재”가 된 게 아니라 의미가 완료된 존재가 된 것입니다.
4) 성령: 체험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양식의 문제
'프뉴마’는 감각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당신이 성령을 제2의 체험-특정 은사-감정적 고양으로 환원하지 않고, 존재 양식(mode of being)으로 읽어낸 점이 아주 좋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성령은 “느껴지는 무엇”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생명 논리"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실패합니다. 그는 능력 있는 종교인이었지만, 아직 아래에서 위를 이해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도덕 개선이 아니라 존재 좌표의 변경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말한 이 문장은 신학적으로 정확합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다시 난다는 새 창조” 이건 종교적 은유가 아니라 실재론적 선언입니다.
5) 요한복음의 이원론은 헬라 철학의 패러디다
당신이 짚은 대로, 요한은 헬라적 이원론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전복적으로 사용합니다. a.혼(psychē): 아래의 생명, 자기보존의 논리 b.영(pneuma): 위의 생명, 자기증여의 논리로 구원은 혼의 정화가 아니라 영에 의해 혼이 다시 조직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은 무언가를 더 받는 게 아니라, 누가 통치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말씀이 풍성히 거함” = “성령 충만”은 통제권 이전의 문제입니다.
6) 키에르케고르: ‘자기 자신이 되기를 포기하는 순간, 참된 자기가 시작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문장을 실존의 언어로 번역하면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나의 근거로 삼지 않겠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인간의 절망은 단순한 낙담이 아니라 그에게 절망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상태이며, 더 정확히는 “자기 자신이 되려고 자기 자신만으로 서려는 상태” "자기 근거화"가 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절망의 인간이 아닙니다. "내 영향력이 줄어든다” “사람들이 나를 떠난다” “나는 실패했다” 하지만 요한은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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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체념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기를 포기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자기는 자신이 자신이 되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세운 자 앞에 자신이 되고자 할 때 건강하다.” 요한은 바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아닌 나’로 자신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절망하지 않아요. 요한의 쇠함은 절망이 아니라 절망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7)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 키에르케고르적 신앙의 핵심 문장
키에르케고르에게 신앙은 교리 동의가 아니고-윤리적 모범도 아니며-공동체 소속도 아닙니다. "신앙은 절대자 앞에서 단독자로 서는 것”이기에 요한의 말은 바로 이 단독자의 언어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 고백은 겸손 코스프레가 아니라 자기 신격화의 포기입니다.내가 의미의 중심이 되려는 욕망-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려는 충동-내가 구원의 조건이 되고 싶은 은밀한 유혹, 요한은 이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 거절 합니다. 그래서 그는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키에르케고르에게 기쁨은 "자기를 자기 아닌 것에 근거짓는 용기”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8) 하이데거: ‘쇠함’은 몰락이 아니라, 비본래성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이제 하이데거로 가보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부릅니다. 현존재의 가장 큰 문제는 죄가 아니라 비본래성입니다. 비본래성의 정체는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이 문장은 신학적으로도, 하이데거적으로도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Das Man(그들)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이 말하니까...다 그렇게 하니까...안 그러면 이상하니까) 요한의 제자들은 이미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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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쇠함 = 본래성으로의 결단입니다. 또한 하이데거에게 본래성은 “나만의 재능을 발휘하는 삶”이 아닌, 자기 존재의 근거가 자기 자신이 아님을 인식하는 순간에서 시작됩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이 말은 존재론적 선언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존재를 수량·성과·평판에서 회수합니다. 그래서 그의 쇠함은 몰락(Verfallen)이 아니라 비본래성으로부터의 탈주입니다.
9) 하이데거의 ‘죽음’과 요한의 ‘쇠함’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생물학적 종말이 아니라 죽음은 “더 이상 아무도 나를 대신해 줄 수 없는 가능성”입니다. 요한의 쇠함은 바로 이것입니다. 더 이상 제자들이 나를 대신해 증명해 주지 않는다-더 이상 군중이 나의 의미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더 이상 비교가 나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결국 요한은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선취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롭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증언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10) 성령 = 실존의 새로운 시간성
당신이 성령을 체험이 아니라 존재 양식으로 읽은 건, 하이데거적 시간 이해와 정확히 맞닿아 있어요. 하이데거에게 본래적 삶은 현재에 갇히지 않습니다(미래가 현재를 규정한다). 요한복음의 언어로 바꾸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가 만물 위에 계신다.” 성령은 감정이 아니라 미래(종말)가 현재를 침투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이 문장은 결정적입니다. “주님 때문에 미래를 현존하게 하신 것을 찬양합니다.” 이건 완벽한 실존 신학의 문장입니다.
11) 나는 누구의 이야기 속에서 살고 있는가?
키에르케고르라면 이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너는 그리스도 앞에서 단독자로 서 있는가, 아니면 신앙이라는 집단 속에 숨어 있는가? 하이데거라면 이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너는 ‘사람들이 말하더라’의 언어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너의 죽음을 선취한 언어로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 말은 패배가 아닙니다. 이건 자유 선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