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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5일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제1독서 : 필리 2,5-11
복 음 : 루카 14,15-24
그때에 15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분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17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18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19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20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22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23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는 이들의 준비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다 준비되어 있더라도 그 초대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하느님 나라를 누리지 못합니다.
이 비유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맞으실 잔치를 다 준비하셨지만,
정작 초대받은 우리는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비유에서, 먼저 초대받은 사람들은 잔치에 별 관심이 없으며,
세상살이에서 중요하다는 일들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초대받았던 이들은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게 합니다.
그들이 잔치를 거절한 이유들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그 이유들은 합당하며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잔치보다 더 앞세운 일들은 비윤리적인 행위가 아닐뿐더러
오히려 그들의 삶에서 필수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정당하고 중요한 일이라 할지라도
하느님 초대를 외면하게 한다면 악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시선을 두고,
그들을 돌보도록 부름 받는 것은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는 한 형태입니다.
그 초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평소에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그 부름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마음 깊은 곳에 그들을 도우려는 선의는 있지만,
중요하고 합당한 여러 이유로 그 초대를 미루고 거부합니다.
그러나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들을 제쳐 두고 초대에 응한다면,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하느님 나라 잔치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수성가해서 큰 재산을 모은 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성공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그 성공을 만들었으니
얼마나 자랑스럽고 행복하겠냐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갔다가 암이 발견되었습니다.
몇 번의 수술을 했지만, 결국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뒤 이분의 자녀들 사이에 재산 상속 문제로 법적 분쟁이 생겼고,
이제 명절이 되어도 자녀들은 서로 만나지도 않습니다.
이 고인을 과연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분이 과연 행복한 사람일까요?
오히려 불행한 사람이라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이 세상 삶에는 성공도 실패도 없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냥 각자의 인생만 있을 뿐입니다.
재벌 회장에게 성공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이를 더 좋은 인생, 즉 행복한 인생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자기의 인생을 잘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것에 행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며 자기 삶을 사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지요.
돈이 없어도, 세상의 지위가 높지 않아도
하느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기가 선택하는 많은 삶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하느님 나라에서의 행복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밭에 가려고, 겨릿소를 부려 보려고, 장가를 들어서….’
이런 이유로 응하지 않은 사람의 자리를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들, 눈먼 이들, 다리 저는 이들’이 차지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초대는 그분의 주도권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 초대에 우리는 무조건 응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 나라의 초대에 응답했을 때만 가능했습니다.
세상 것을 위한 삶이 진정한 성공이고 행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것이 좋다면서 이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워
초대해 주신 주님께 어떤 이유나 양해 따위로 요청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앞설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곧바로 응답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는 행복의 삶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영원 안에서 자신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성공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생활이 풍요로워지면서 사람들은 먹는 것을 찾아다니는 데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TV에서도 인터넷 주요 검색 창에서도 '맛집'이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어도 '맛집'에 차려진 음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혀의 유쾌함을 넘어서는 '참된 맛집'을 찾아 나서야 할 일입니다.
그것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대체 최상의 '맛집과 음식'을 어디에서 맛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라는 '맛집'에서 먹는 '하늘나라의 음식'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곧 '구원의 천상음식'을 먹을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과 함께 초대되어,
바리사이 지도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루카 14,15)
이는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적 메시아사상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곧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강림하시면 ‘큰 잔치’를 베풀 것인데,
그 잔치에는 유대인들만이 초대받았기에 자신들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큰 잔치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잔치를 베푸시고 우리를 초대하신 분이 아버지 하느님이라면,
잔치에 사람들을 부르러 나간 '종'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종'이 잔치에 초대된 이들에게
잔치가 다 준비되었음을 전하지만, 그들은 초대를 거절합니다.
사실 그들은 이미 초대에 약속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밭이나 가축을 샀고, 막 장가를 들었다는 핑계로
초대 약속 지키기를 거절합니다.
그들은 세속의 헛된 망상에 쏠려 이 귀한 초대를 거절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미 잔치 준비가 다 되었으나 초대에 약속한 이들이, 준비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아니,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역사에서 본다면, 이들은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바리사이들이요, 유대교 회당의 지도자들일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일을 핑계로 복음 사명을 도외시하는
우리의 어리석고 나약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곧 하느님의 초대에 일방적으로 불참을 선언하고 마는
우리의 완고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잔치는 초대된 사람들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결코 지연되거나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주인은 또 다시 '종'을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보냅니다.
'고을의 한길'이 다양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라면,
'골목'은 소외된 사람들이 은밀히 다니는 길을 나타낸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도자들이 아니라 일반 평범한 사람들과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초대합니다.
그들은 비록 인간적으로 멸시를 당하고 경제적으로 아무런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밭이나 소를 사지도 장가를 가지도 못했지만,
주인의 배려와 사랑에 응답하여 잔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은 또 다시 '종'을 '큰길'과 '울타리 쪽',
곧 성 밖으로 보내어 그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들어오게 하라고 합니다.
주인의 ‘애타는 사랑’입니다.
그리하여 성 밖의 다른 민족들이 초대를 받고 잔치에 들어갑니다.
결국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의 이 존귀한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소서.
당신의 호의를 무시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몸소 따르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루카 14,17)
주님!
당신은 잔치상을 차리시고, 저희를 부르십니다.
당신은 준비가 되셨지만, 저희는 마음이 딴 데 가 있습니다.
지금 베풀어지는 당신의 사랑, 당신의 호의에 응답하게 하소서.
당신을 무시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당신의 몸과 말씀으로 차린 음식으로
제 영혼이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이리로 데려오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살아가면서 닥치는 일에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누구의 초대를 받았는데 사정이 생기면 양해를 구하고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 맞습니다.
밭을 샀으면 밭에 나가 보는 것이, 당연하고
겨릿소를 샀다면 그 소를 잘 샀는지 부려 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방금, 결혼을 했다면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은 인정해 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가야 할 잔치집이 생겼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이 마련되었습니다.
그 잔치에 초대받은 것이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그 앞에서 무슨 핑계가 필요합니까?
더 좋은 것, 지금까지 갈망하던 하느님 나라가 눈앞에 주어졌는데 왜 망설여야 합니까?
결국, 지금까지 기다리고 희망하던 것은 헛된 환상이었습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세상 것이 더 좋은데 그것을 어떻게 놓고 가라 하십니까?
그러나 “나 없이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도 나 없이 나를 구원하실 수 없으십니다.”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결코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저러한 핑계를 갖는 한, 구원의 잔치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우선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먼저 선택하면 나머지는 다 채워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사로운 정 때문에 인간적인 것을 택하면, 하느님을 만날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루카14,24).
결국, 처음 초대를 받았던 사람들은 재산과 사업상의 관계,
가정사라는 핑계로 말미암아 구원의 문에서 멀어졌습니다.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초대를 외면하였습니다.
오히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좋아했습니다.
그야말로 배가 부르면 산해진미가 귀찮고 배고프면 보리죽이 꿀맛입니다.
그런데 헛배가 불러서 스스로 배부르다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있어서 걱정입니다.
스스로 배부른 착각에 빠져 죽어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데려 오너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초대에 응답해야 할 사람입니다.
뿌려진 씨앗의 비유(마태13,1-9)를 한번 생각해 보면
씨앗이 어떤 것은, 길바닥에, 어떤 것은 돌밭에,
그리고 가시덤불에,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은 것은 당연히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밭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길바닥 같은 딱딱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는 무관심한 사람이지요,
돌밭은 흙이 얼마 없다는 것으로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시련이나 어려움이 오면 금방 신앙이 죽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가시덤불은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나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핑계를 대던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 말고 매 순간 하느님 앞에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안녕을 열망하며 그것을 너무 많이 고려하다가
그만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맙니다. 어떤 분이 그러더군요.
‘돌다리를 두드려보다가 오히려 돌을 깨뜨리고 만다고!’
잔머리를 굴려 이리저리 계산하지 말고 하느님을 꼭 잡으시길 바랍니다.
함께 모여야 할 자리를 기억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장례식장에 목사님이 오신 적이 있습니다.
묘지에서 하관 예절에도 목사님이 오신 적이 있습니다.
가톨릭 예식에 목사님이 오셔서 기도하고 싶다고 해서 좋다고 했습니다.
고인의 가족 중에 교회 다니는 분이 있어서 그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목사님이 정성껏 기도해 주니, 고인께서도 기뻐했으리라 생각합니다.
33년 사제 생활하면서 아직 법당이나, 교회의 장례 예절을 다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분의 가족 중에 교회나 법당에서 장례 예절을 지키는 분이 없었을 수 있고,
그런 분이 있었다고 해도 제게 고인을 위해서
장례 예절에 함께 하도록 부탁하신 분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드디어 제게도 교회의 장례 예절에 함께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본당 사목 위원의 형님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는데, 독실한 교회 신자였습니다.
사목 위원도 몇 년 전까지 교회에서 큰 직책을 맡아서 봉사했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성당에서 교리를 배우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제게 고인이 된 형을 위한 장례 예절에 함께 해 주기를 청하였고,
저는 기꺼이 가겠다고 했습니다.
어느 교회인지 물어보았는데 고인은 교회에서 장례 예배를 하지 않고,
장례식장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어째서 그런지 이유를 물었습니다.
형제님이 다니던 교회는 일반 신자는 교회에서 장례 예배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이나, 장로님은 교회에서 장례 예배를 드리지만,
일반 신자는 장례식장에서 추모 예배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문화와 전통의 차이가 있겠지만 장례 예절은 가톨릭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걸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걸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 찾아 주었다.”
고인께서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를 청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로 있다가 보좌 신부의 직책을 받아들이는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오랜 사목 경험이 있기에 본당 신부를 도와서 기쁘게 사목하였습니다.
교우들도 신부님과 공동체를 이루며 잘 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직책은 보좌 신부이지만 인격이 보좌 신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모두 직책과 관계없이 복음을 선포하는 사목자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직책과 직위로 인격과 인품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교구 사제들도 훨씬 풍요로운 사목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젊은 사제들에게 더 많은 사목의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자존심과 선입견을 버릴 수 있다면, 교만과 욕심을 버릴 수 있다면
상황에 반응하며 이끌리기보다는 상황을 예측하고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종의 모습을 취하시면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순종과 겸손을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지 못하는 사람을 안타까워하십니다.
현실에 안주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교만과 선입견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황에 이끌리기보다는 상황을 이해하고 이끌 수 있다면,
순종과 겸손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갈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을 수 있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의 초대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큰 잔치에 비유하신다.
여기서 하늘의 음식은 주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사랑으로 표현되고, 증거된다.
그 사랑은 실제로 하늘 음식이며 말씀이 베푸시는 잔칫상이다.
사랑은 모든 맛 좋은 양념과 함께 하늘에서 땅으로 한결같이 내려오고 있다.
모든 법과 말씀이 사랑에 달려있다(마태 22,40).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면(마르 12,30-31) 하늘에 마련된 잔칫상을 받을 것이다.
이 거룩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이들의 기쁨과 평화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먹으면 몸 밖으로 나오고 마는 그런 음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음식이다.
누가 여기 앉을 수 있을까?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15절)
그 사람은 누구일까?
잔치를 차리고 우리를 초대하는 분은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사람들을 부르러 간 사람은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아드님은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17절) 하고 손님들을 부르신다.
이 잔치는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마련하신 선물이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를 용서하셨고
영광스러운 자녀가 되어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게 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했다.”(18절)
그들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 때문에 핑계를 댔다.
사람의 일 때문에 하느님의 일은 보지 못하고 있다.
집주인은 건방진 부자들에게서 다른 민족들에게로 돌아선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이 초대를 가볍게 여겨 거절하였고,
그 초대는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겨서 갔고,
이어서 다른 민족들이 초대를 받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어떤가?
은혜로운 초대에 기쁘게 응답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살펴보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하나의 사이클이 거듭 반복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하느님 측의 열렬한 초대,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측의 거부,
하느님의 진노, 이스라엘의 회개,
그러나 또 다른 배신과 타락, 그리고 우상 숭배,
그러나 하느님의 크신 자비, 또 다시 이어지는 하느님의 초대,
그러나 은혜로운 초대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의 길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하느님 나라의 큰 잔치를 베풀고 그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또 다시 그 중요한 초대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몇 평 되지도 않는 밭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땅이 하늘보다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영원한 생명을 몇 푼 안 되는 부동산과 바꿔버린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도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최근에 산 겨릿소 다섯 쌍을 부려 봐야 된답니다. 보아하니 일중독에 빠진 사람입니다.
일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존재나 영혼의 양식, 영원한 생명마저도 뒷전입니다.
과도한 일이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막 결혼한 새신랑이었습니다.
그의 온 정신과 마음은 오로지 인간적 사랑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본능의 노예가 되어 영혼의 사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제1차로 선택받은 민족,
민족들의 으뜸이자 장자였던 이스라엘의 운명은 끝장나버렸습니다.
하느님 초대에 대한 거듭된 거절의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리는 이민족들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잘 차려진 잔치의 좌석에 앉은 사람들의 면면은
우리 인간들의 상상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100퍼센트 거기 앉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대사제들, 율법의 전문가들, 바리사이들은 단 한 명도 앉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는 가장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가장 밑바닥 인생들로 채워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정통 신앙인으로 자처했던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이신 포도나무의 원줄기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포도나무에는 이교 민족의 가지가 접목되어
기대하지도 않았던 포도 열매가 왕성히 열리게 된 것입니다.
먼저 불림 받은 사람들,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 정말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월감 갖지 말고, 내가 1등이라는 의식도 갖지 말고
늘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노력할 일입니다.
비움의 여정
"온갖 어려움을 비움의 계기로 삼읍시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내 영혼은 밤에도 당신을 사모하오며
아침에도 당신을 그리나이다."(이사26,9ㄱ)
우리 말의 섬세하고 깊고 아름다움에 감동합니다.
비움, 섬김, 배움이 제가 참 좋아하는 그런 말입니다.
비우다, 배우다, 섬기다, 영성생활에 꼭 필요한 말마디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비움의 여정, 일상에서 겪는 온갖 어려움을 비움의 계기로 삼읍시다”입니다.
비움 대신 배움을, 섬김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수도원 게시판에 붙은 “한국교회 축성생활의 해, 2024,11,21-2025.10.28.”
팜플렛의 “평화를 향한 길 위에 있는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말마디가 좋습니다.
비움의 여정을 따르는 이들은 “평화의 길 위에 있는 희망의 순례자들”이기도 합니다.
참 아름답고 거룩한 이들이 평화의 여정, 비움의 여정 중에 있는 희망의 순례자들입니다.
제가 10년 전 2014년 산티아고 순례 시 최고의 수확은 삶의 여정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30일 전후로 끝나는 산티아고 순례 여정은 우리의 전 삶의 여정을 압축하고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순례여정 중 참 많이 강조 해온 목적지, 이정표, 도반, 기도의 네 요소로
전 삶의 여정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이어 강조하는 것이 내 삶의 여정을 일일 일생 하루로, 일년 사계로 압축했을 때
어느 시점(時點)에 위치해 있겠느냐의 확인입니다.
10여 년 동안 강론에서나 강의에서 참 많이 강조해 온 내용들은
제 남은 생애 동안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런 시점(時點)에 대한 확인이 깨어 거품이나 환상 없이
본질적 깊이의 참삶의 선물 인생을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피정 오는 대부분 사람들이 인생 오후 3-4시,
인생 가을에 걸쳐 있는 이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비움이란, 비움의 여정이란 말마디도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비움의 겸손, 비움의 믿음, 비움의 사랑, 비움의 순종, 비움의 침묵 등 비움 예찬에는 끝이 없습니다.
비움의 여정은 겸손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일상에서 겪는 온갖 어려움을 그대로 놓아두면 짐이 되고 상처가 되겠지만
비움이나 겸손을 통한 치유와 더불어 영적 성장의 계기로 삼는다면
참 지혜롭고 풍요롭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비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의 대가와 달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라 평생 비움의 여정에, 겸손의 여정에 충실할 때
주님을 닮아 성인다운 참나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며,
바로 이것이 영성생활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입니다.
이런 주님의 비움과 겸손, 순종을 집약한
오늘 제1독서 필리피서 그리스도 찬가, 비움(kenosis;케노시스) 찬가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 수도자들은 물론 신자들은 매주 토요일 저녁 성무일도 때마다
이 비움 찬가(필리2,6-11)를 바칩니다.
참 하느님이자 참사람인 예수님의 정체를 잘 보여주는,
우리 영성생활의 핵심을 담고 있는 아마 신약에서 가장 아름다운 찬가에 속할 것입니다.
얼마나 고귀한 품위의 우리 인간인지 깨닫게 하는 참 고마운 복음입니다.
인간의 신비는 바로 하느님의 신비임을 깨닫게 됩니다.
누구보다 비움의 대가이자 달인인 그리스도 예수님께 정통해 있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주님을 닮아 비움의 여정에 시종여일 한결같았던 비움의 대가요 달인임을 깨닫습니다.
어제의 성화의 여정 강론 주제도 오늘의 비움의 여정과 그대로 통합니다.
그러니 비움의 여정은 성화의 여정이자 부단히 자기에서 벗어나
주님을 닮아감으로 참나가 되어가는 자아 초월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2,5)
권고에 이어지는 전반부 말씀이 예수님의 생애는 물론
우리가 따를 비움의 여정에 대한 참 귀한 가르침입니다.
이런 주님의 파스카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비움의 여정이 있기에
파스카의 영광스런 부활과 더불어 영적 승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찬가 전반부입니다.
겸손과 비움, 순종의 사랑을 통해 참사람이자 참 하느님이 된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참사람의 원형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오늘 복음의 초대를 사양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은
그대로 세상 탐욕에 가득한 무지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하늘나라 큰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신을 비울 절호의 기회를 잃었습니다.
그대로 오늘날 비워야 할 비움의 여정 대신 채움에 중독된 채움의 여정을 사는 현대인들을 닮았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빈자리는 여전히 남아있고
결국은 텅 빈 충만이 아닌 텅 빈 허무의 인생이 될 사람들입니다.
세상사에 채움에 중독된 사람들의 치유와 구원에는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비움의 여정에 항구 하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면에서 하늘나라 잔치의 예표인 날마다의 미사잔치 초대에의 참여는
비움의 여정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 지요!
삶의 우선순위가 자신을 비우고 천상 미사 잔치에 참여하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눈먼 이들, 다리 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참으로 내면이 비워져 있을 이런 불우한 이들을 하늘나라 잔치에 입장시키라는 것이며,
어떻게 해서라도 빈자리를 채우고 싶어 하는 하느님의 갈망에서
그분의 한량없는 구원의 사랑을 배웁니다.
복음의 마지막 말씀 역시 욕심에 중독되어 초대를 사양한 현대인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냉담을 풀고 미사 잔치의 초대에 응하라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루카14,24)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세상 탐욕을 비우고 주님의 초대에 응답해
비움의 여정에 항구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을 길이길이 의지하라.
주 하느님은 영원하신 바위이시다."(이사26,4). 아멘.
초대 명단에 새겨진 내 이름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과 연결 지어 생각해보자.
우선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실로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때가 되자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세상에 파견하여 초대받은 사람들의 응답을 묻게 하신다.
여기서 응답은 즉각 이루어져야 한다. 잔치가 임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제각기 핑계를 대며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여기서의 핑계란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초대 명단에 없는 자들을 마구 초대한다.
이렇게 하여 초대받은 사람들은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사랑을 실천한 義人들이다.
오늘 복음으로 생각을 집중시켜 보자.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지 쉽게 깨달을 수 있는 예화이다.
주인이 잔치를 준비하고 종들을 시켜 세 번씩이나 사람들을 초대한다.
첫 번째 초대는 애당초 초대 명단에 들어있던 사람들을 향한 것이다.(17-20절)
두 번째 초대는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모두 거절한 결과로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를 향한 것이다.(21절)
세 번째 초대는 그래도 넉넉한 자리를 채우기 위해
강제와 무작위로 선발된 사람들을 향한 것이다.(22절)
예화의 결말은 잔칫상에 처음 초대명단에 들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과 한 식탁에서 음식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보상 아닌 보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렇다고 이 선물을 필히 마지막에 가서 받는 선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사는 주변에 깔린 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
특히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매일같이 수많은 선물에 초대된다.
그중에서 잔치에의 초대 선물은 매일미사이며, 가장 큰 초대 선물은 주일미사이다.
미사는 곧 어린양의 잔치로서 미구에 하느님 나라에서 벌어지는 천상 예루살렘 잔치의 先取이다.
이 잔치의 초대장에 우리 각자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일 일, 저 일 등을 핑계로 초대를 거부할 것인가?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