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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차의 오글오글한 이야기 97
일설에는 샤 자한이 타지마할과 마주 보는 곳에 검은 타지마할을 지어 황제의 영묘로 사용할려고 했기에, 아우랑제브 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란의 변명을 하기 위해 지어낸 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샤 자한은 병이 들긴 했으나 다시 그런 엄청난 공사를 일 으킬 여력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 니다. 또 사랑하는 아내의 곁에 누울 것 인데 다시 영묘를 지을 까닭이 없었습니 다. 모든 반란엔 명분이 필요했고 그 명분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샤 자한 은 또 다른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건축 왕이란 이름입니다. 전쟁을 하지않고 거대하고 놀라운 건축물을 동시다발적으로 짓기로 아주 유명했습니다. 타지마할을 지을 수 있었던 것도 수많은 건축물을 지어 본 경험과 노하우가 밑바 탕에 깔려있는 덕분이지요. 대강만 흩 어보아도,아그라의 진주 모스크. 라호르의 라호르성과 모스크. 델리의 붉은 성, 델리의 자마모스크. 타타의 모스크. 또 그 유명한 저주의 공작좌가 있습니다.
지금에야 타지마할을 비롯한 이런 눈부신 건축물이 인도를 먹여 살리는 관광객들을 끌어 당기는 보물이지만, 재위 기간동안 백성들의 곤욕과 고통의 눈물이 야무나 강을 채우고도 남았을 겁니다.
자신의 사비로 영묘를 지었다지만 나랏돈이 내 돈, 아니었겠습니까?
타지마할은 결정적으로 무굴 제국을 비탈을 향해 구르게 만들었습니다.
아우랑제브가 아버지를 성에 유폐했을 때 백성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실제 아우랑제브는 놀 랍도록 백성을 위하는 왕이었고, 검소한 왕이었습니다, 재위 기간 50년 중에 이십여년은 무굴의 황금기가 돌아올 정 도였습니다. 아우랑제브의 이야기는 잠시 뒤로. 아그라 성의 무삼만버즈탑 에 유폐된 샤 자한의 유일한 위안은 타지마할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딸이 수발해주는 고독한 시간을 오로지 영묘를 바라보는 것으로 채우며 샤 자한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제 이 사랑의 이야기는 끝에 이르렀 습니다. 모든 것은 끝이 있기 마련이고 그 끝을 말할 때는 항상 마음이 아릿합 니다. 이 이야기는 인류사에 다시 없을 치명적인 러브스토리 였으니까요.
아버지를 탑에 유폐시킨 아우랑제브는 샤 자한이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고독과 실의에 빠진 샤 자한을 끝까지 돌본 사람은 첫 째 딸인 쟈하나라였고 그녀는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고 지지한 딸이었습니다.
딸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영묘를 바라보고 아내의 곁으로 갈 날을 기다리며, 샤 자한은 명상과 기도로 시간을 보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나쁜 끝은 아니었지 요. 1666년 1월 22일 샤 자한은 코란 을 암송하면서 눈을 감았고,그의 영혼은 뭄타즈 마할의 품으로 날아 갔습니다.
쟈하나라 공주는 성대하게 국장을 치르고 싶어했으나 아우랑제브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백단향 관에 몸을 누인 샤 자한은 강을 따라 운구되어 타지마할에 도착했고, 아내의 옆에 누워 드디어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차가 일으킨 전쟁이야기를 하다가 타지마할에 이르렀는데 이쯤에서 정신을 차리고 원래의 이야기를 찾아가야할 듯합니다. 아우랑제브의 이야기는 다시 할 시간이 있을 겁니다. 대식민제국이 된 영국의 이야기를 하다가 무굴제국의 이야기가 나왔지요. 왜냐하면 식민제 국을 만든 것에 무굴 제국이 일조했으니 까요. 19세기의 영국은 유럽의 주변 국가들에 비해 선구적이라고 할수 있었 습니다. 산업혁명으로 자국의 산업 발 전을 일으켰고, 식민지 전쟁에서도 계속 승리해서 19세기 중엽 이후엔 나름의 사회적인 안정을 이루었습니다.
격동기의 유럽에서 가장 순항을 한 국가가 되었고, 그 힘은 아직도 영국이라는 나라를 유지하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7년 전쟁의 가장 큰 수혜자도 영국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영국과 일본 은 닮은 점이 많은데, 자국의 이익 보전 에 관해서는 타국에 대한 악행이나 부조리함에 눈을 감는 일은 정말 닮았습 니다.
이야기는 돌고 돌아서 다시 이 글의 핵심인 보스턴 차 사건으로 연결됩니다.
무굴제국의 이야기나 타지마할은, 이야기를 하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이야기라고 할수 있습니다. 7년 전쟁 의 설명도 했었고 이제 본론에 집중할 시간입니다. 보스턴 차 사건을 아주 간 단하게 알고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국이 식민지에 보내는 홍차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서 일어난 사건이라고요.
그러나 사건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여러 이야기들이 이어졌습니다. 홍차에 부과한 세금이 무거운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면의 무서 운 진실은 따로 있었습니다. 영국은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지만 새로운 홍차 법 제정으로 홍차 값은 오히려 떨어졌고 홍차의 질은 월등하게 좋아졌습니다. 이해가 안 되지요? 여기엔 놀라운 반전 이 숨어 있습니다. 홍차법 제정으로 중간 유통 마진이 싹 사라지고 세금으로 들어왔기에, 시민들이 구매하는 홍차의 값은 원래의 반 값 정도면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얼마나 속고 살았는지를 알게 된 겁니다. 중간에서 질이 낮은 홍차를 밀매해서 높은 마진을 붙여 판매해서, 어마무시한 이득을 보던 밀수업자들이 난리가 날 수 밖에요. 그렇습니다. 홍차를 가지고 장난질을 치면서 일단의 무리들이 어마어마한 이득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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