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제가 월남에 있을 때였습니다.
한국군의 식사는 단위가 큰 부대에서는 국내보다도 더 화려한 식단으로 식사를 하였습니다.
미국으로부터, 한국으로부터 또 월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열대과일도 맛보는 싱싱한 식사였습니다.
그러나 말단에 있는 부대는 먼 오지에 있어서 수송이 어렵기 때문에 먹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제가 있던 부대(기갑연대 2중대)는 한국군 중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안케패스에 연해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헬기가 아니면 수송이 어렵고, 꼭 있다면 하루에 한번씩 공급해 주는 식수차가 유일한 곳입니다.
월맹군이 남하하는 통로가 미군에 의해 발각되어 수 없이 공격을 당하자
라오스와 캄보디아 내륙을거쳐 월남중부로 나오는 통로를 이용하였는데
우리가 이 통로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시로 적과 부딪쳐야 했습니다.
쌀은 월남에서 제공하는 안남미를 먹었으나 우리 입맛에 맞지 않는 쌀이었습니다.
국은 미군의 C레이션에서 나오는 고기종류와 한국에서 보내준 김치통조림으로 국을 끓여먹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체질에 나물과 채소를 먹을 수 없으니, 식사에서는 그것이 제일 욕구불만이었습니다.
그리고 좀처럼 바뀔줄 모르는 메뉴가 병사들을 짜증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레이션 국보다는 라면이라도 틈틈이 끓여먹기를 원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라면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라면이 왜 주월한국군이 그렇게 바라는 라면이 없느냐?" 고
불만들이었고, 어디서고 라면 끓는 냄새만 나면 몰려들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차에 적 월맹 정규군 3사단 12연대 본부가 있다고 확신하는 지역으로 작전출동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공격부대였기에 낮에는 적을 찿아 수색작전을 하였고
밤이면 방어가 용이한 산 정상으로 이동하여 둥굴게 진을 편성하여 쉬곤하였습니다.
그러나 적이 있다고 확신을 했는데도 적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새벽....
적이 노출을 꺼려 새벽에 밥을 짓는 연기가 안개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우리소대원이 보고는 알려왔습니다.
밥을 짓는 연기는 상당히 여러곳에서 나오는데, 한곳당 30명씩만 잡아도 몇 백명은 될 것 같습니다.
나는 곧 중대장에게 보고하여, 우리가 내려갈 필요도 없이 여기서 포탄을 유도하여 격멸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대장은, 지금은 밥짓는 당번들만 나와서 밥을 짓고 나머지는 숨겨진 동굴에서 잠을 자고 있을테니
포탄을 사용하면 큰 효과도 없이 오히려 적을 피신하게 만들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모르는것처럼 놔두고 날이 새면 다른 중대까지 합세하여 일시에 진격하자고 하였습니다.
이윽고 아침이 왔습니다.
지난밤의 상황은 사단까지 보고가 되어 다른 중대까지 대병력이 밥짓던 지역으로 투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 위치를 가장 잘 알기때문에 우리가 제일먼저 도착하였습니다.
밥짓던 곳도 발견하였습니다. 아직도 재는 따뜻한 온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밥을 먹었을 적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흩어져 수색을 하였습니다.
그때 나무 위에 덩그러니 총 한자루가 걸렸는데, 멋도 모르는 우리 소대원이 그 총을 잡아채려고
하였습니다. 나는 소리를 질러 그를 제지시키고 자세이 살펴보니, 그 총을 낚아채기만 하면 폭발물이
터지도록 장치(부비트랩)를 해 놓았습니다.
아뿔사~ 그렇다면 적은 우리가 올 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며 지금은 여기 없다는 것이네....
그럼 우리가 이들의 술책에 속아 함정에 빠졌다는 것인가?
전투란 이렇게 총만 잘 쏜다고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정황으로 적의 심리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빨리 이 상황을 중대장에게 보고하고, 어서 이자리를 피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중대장도 그러자고 하였습니다.
그때 주변수색을 하던 한 분대에서 동굴을 발견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가서보니, 보통 동굴은 수평으로 뚫였는데, 이 동굴은 평지에서 곧장 수직으로 파여져 있었습니다.
그 깊이가 약 2~3m 정도로 내려갔다가 다시 수평으로 뚫려져 있었습니다.

수색 후 피곤에 찌든 상태입니다. 우측에서 4번째가 본인입니다.
곧 철수해야 할 것이어서 나는 동굴 속으로 수류탄을 두어발 까 넣어 폭발시키고는 내가 들어가 보려고
군장을 벗자, 분대장이 "아닙니다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하며 날쌔게 동굴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동굴의 입구가 아주 작아서 군장을 갖추고는 들어 갈 수 없고, 탄띠와 총만 들고 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분대장에게 "동굴 깊이 들어가지 말고 입구에서 동정만 살펴보아라".... 하였습니다.
그랬는데 분대장이 조금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고는 이내 동굴안으로 사라졌습니다.
나는 불안하였습니다. 그래서 분대장을 소리쳐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습니다.
몹시 초조함을 나타내자 우리 무전병이 "제가 가서 분대장을 불러내 오겠습니다." 하며 훌쩍 동굴로
뛰어들어 갔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불러만 보아라".... 하였습니다.
무전병은 그자리에서 몇번을 부르더니, 응답이 있다면서 가서 데리고 오겠다고 또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동굴만 들어가면 사라지다니....
나는 큰소리로 그냥 수색중단하고 나오라고 소리쳤지만 대답이 없습니다.
내가 뛰어들려고 하자 눈치만 살피던 우리 전령이 뒤에서 나를 껴안으며, "소대장님은 여기 남아계셔야
합니다. 제가 가서 전부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하며 또 훌쩍 동굴안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너는 절대로 내 눈에서 벗어나면 안된다. 그 자리에서 소리쳐 모두 나오라고 하여라." 하였습니다.
전령이 동굴속으로 소리쳐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동굴 안에 분대장과 무전병이 모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모든 동작 그만하고 철수해야 하니 지금 즉시 밖으로 나오라고 해라." 하였습니다.
전령은 전령답게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그러더니 "분대장과 무전병이 무얼 갖고 나오는데, 도와 달라" 고 합니다. 하면서 훌쩍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아니~ 또 동굴안으로 사라졌단 말인가?
나는 화도 나고 불안도 하여 소리쳤습니다. "세명 모두 당장 밖으로 나와라"
그러자 전령의 얼굴이 나타나면서 "소대장님! 이것좀 받아주십시요." 하면서 밑에서 무언가가 훌쩍 올라 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얼결에 받아보니 빨간봉지의 국산 삼양라면이었습니다. 그것도 군용마크가 선명한....
순간, 아니~ 왜 우리가 먹어야 할 군용라면이 이 깊은 산중의 적 동굴에 있나? 하는 생각에 부아가 났습니다.
누군가가 예하대로 보급해 주지 않고 시중에 내다 팔은 것이겠지요.
그러니 말단에 있는 우리는 향수를 달랠 라면 하나 먹어보려고 해도 무척 힘들게 먹어야 했으니.....
계속 밑에서 올라 오는 라면이 제법 많아지자, 병력 집중을 꺼려하여 분산시켰던 소대원 몇명을 불러 일부는
동굴에서 올라오는 라면을 받고, 일부는 정리하도록 하였습니다.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소대원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벌써부터 입맛을 다시고 있습니다.
라면뿐만 아니라 잡다한 종류의 여러 통조림도 얼마간 갖고 나왔습니다.
이 동굴은 적들의 식량창고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답사한 분대장의 말을 듣고는 어마어마하게 많이 쌓여 있다는 식량을 어떻게 하면 적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거부를 하고 와야 하나? 하는 생각에 소대원들에게 좋은 생각들을 내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장기를 둘 때 훈수가 나오듯 여러가지 안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일부는 동굴안에서 폭파를 시켜 라면과 같은 물품과 통조림을 훼손시켰지만
쌀은 훼손정도가 미미하여 적이 또 사용 할 것 같았습니다. 할 수 없이 철모로 퍼나르기는 했지만 곧 철수
해야 하기 때문에 이 방법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던차에 옆을 보니 약 20~30여m 정도에 물이 흐르는 작은 도랑이 있어, 이 물을 동굴안으로 흐르도록
유도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전 소대원에게 이 일의 목적을 알리고는, 물을 유도하기 위한 도랑 파는
작업을 개시하였습니다. 이윽고 물이 우리가 판 도랑을 통해 동굴안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중대장은 왜 빨리 안 오느냐고 재촉이 몇번 있었지만 이 작업을 끝내고서야 철수하였습니다.
소대원들도 어찌나 땅을 잘 파는지 마치 공병들이 온것 같이 작업을 잘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물이 얼마나 동굴안으로 흘러들어가 적에게 피해를 주었는지는 알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회수한 라면이 의외로 양이 많아서 소대원 모두에게 갖고 갈 수 있는 한도로 가져가라고 하였습니다.
이 라면은 원래 우리의 것이고 우리가 먹어야 할 몫이기에 회수 할 수 있는 만큼 회수해 온 것입니다.
소대원들은 무척 좋아라 하며 배낭에 들어 갈 수 있는만큼 최대로 챙겨 갖고 왔습니다.
오는 중에는 적의 양돈장과 양계장도 있어 모두 울타리를 제거해 방사를 시켰습니다.
드디어 저녁이 되자 C레이션 중에서 가장 큰 깡통을 용기로 하여 진중에서 라면을 각자 끓여먹는
진중파티가 벌어졌습니다.
적에게서 뺏은 것이어서 더 통쾌합니다. 우리의 것을 되찿아서 속도 시원합니다.
그렇게 먹고 싶던 라면을 황량한 전투지역에서 먹게 되니, 그 맛이 바로 꿀맛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라면 냄새가 인접소대에까지 미치자, 인접소대에서 환장들을 하며 다가와 좀 나눠 먹자고 합니다.
어찌 같은 전우인데 우리만 먹고 안 나눠줄 수 있겠습니까? 좀 나눠주며 기쁨도 같이 나누었습니다.
나는 이때 먹은 라면이 일생 최대로 맛이 있었고 통쾌하게 먹은 라면이라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적 정규군인 월맹군 3사단 12연대의 기습공격으로 우리의 안케패스가 처참하게 된 상태
그러나 그 다음 해에 여기에 있다던 적 월맹 정규군 12연대 병력이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안케패스 통로를
기습점령 함으로 안케패스 작전의 혈투가 벌어졌는데, 이는 주월군 전투중에서 가장 크고 치열한 전투였습
니다. 전투 후 적의 시체를 수집해 보니 몇백구가 되는지 헤아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우리중대도 소대장 1명(김제)을 포함하여 10여명 이상이 전사를 하였고 중대장(대구)도 중상을 입고 후송을
하는 등의 악전고투 였습니다. 우리는 전우를 잃은 상실감과 분함에 땅을치며 통곡을 하였습니다.
다음 달은 현충일이 있는 달입니다.
이제는 전사자들의 가족이나 친척들도 찿아오지 않는 쓸쓸한 묘비가 거의입니다.
나만이라도 그들을 찿아가 위로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말뿐인 국가는 설령 잊는다 해도 우리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전우이니까요......
첫댓글 이제는 전설이 된 월남전을 그려 보며 실감나게 읽었습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셨군요!
오래오래 건강 하세요!
이런 악몽과도 같았던 시기가 4월말에서 5월초였습니다.
이때가 되니 자연히 옛 생각이 나서 생각나는대로 글을 써 보았습니다.
불운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이제 그들을 찿는 사람이 없다면 그들은 얼마나 섭섭해 할까? 하는 생각도 미쳤습니다.
최소한 함께 했던 전우들이라도 잊지 않고 기억해주며 그들을 찾으려고 합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들샘님,주말에 영화 한 편
본 듯..실감나게 읽었습니다.
저희 친정 아버지께서도
월남전에 참전 하시려다
어머니의 만류로 그만 두셨답니다.
사진 속의 들샘님 멋지시고,
늠름하십니다.
다가오는 6월 호국 보훈의 달..
나라를 위해 희생·공헌하신
분들을 기리며 감사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저는 중학교 다닐적에
매일매일 생라면으로
먹었던 라면 맛을
잊을수가 없습니다.ㅎ
들샘님,글 잘 읽었습니다.
휴일 내내 평안하시길 빕니다.^^
안케패스 작전은 71년 4월 11일에 발발하여 4월말에 끝났으나 5월까지 전장정리가 있었습니다.
저는 모든 정리를 끝내고 6월에 귀국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4월말에 그들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오늘에서야 글을 썼는데
묘하게도 호국보훈의 달을 딱 한달 앞두고 있네요. 좋게 평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전쟁의 지나간 상처보다는
긴장감 나는 전쟁터에서
생애 최고의 맛을 써셨으니
그 시절이 생생한
다큐드라마 같아요.
젊고 패기있는 모습이
감동스럽습니다.
타국땅에서 전쟁을 경험한 분에게는
미안한 맘도 들고
전사하신 분에게는
고개숙여 명복을 빌뿐입니다.
군인으로서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어떻게 쓰다보니 양이 많아져 지루감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자분들은 별로 좋아 하시지 않을 전쟁이야기여서 조금은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맺혀 있는 것을 푸는 계기가 되어 제 가슴이 후련합니다.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들샘 님의 이야기는 여성이라서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하고는 달라요.
그 시절 젊은이들의 시대상이고
생애 최고의 맛을 전쟁중 맛보았다는 이야기인 걸요.
저도 여학교 때, 부산 부두에서 태극기 들고
맹호부대 용사들아~ 하고
친구들과 합창했던 기억이 납니다.
국가적인 일인걸요.
젊은 피를 담보로
국가가 부강하게 된
밑거름을 잊어서는 안되죠.
@콩꽃 우리가 부산을 출항 할 때, 알지 못하는 부산의 학생들이 나와서 태극기 흔들며 환송해주던 장면이 생생합니다.
당시에도 무척 고마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내 한명의 일을 우리들의 일로 보아주시다니 참 반가운 일입니다.
콩꽃 같은 분을 만나서 힘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배위에서 찍은 부산에서의 장면입니다.
파월장병들을 위해 나와 주신 모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제가 안케전투의 주인공은 아닙니다. 수 많은 전우들이 참가를 했고 더 용감히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신 분들도 많습니다.
다만 월남참전을 비굴하게 보는 견해들은 참기 어려운 분노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석촌님께서는 우호적으로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감사합니다.
저희 아버님은 육군대위로 제대하시여 육이오 참전 얘기로 군대얘기는 낫설지않아요 .
월남 파병 하면 생각나는건 군가 맹호들은간다 를 지금도 잊어먹지않고 부를수있다는 거지요
전장에서의 있었던글 감명있게 잘읽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6.25 참전을 하셨군요. 참 고생 많으시고 보람된 일을 하셨습니다.
저도 맹호부대원으로서 군가 '맹호들은 간다' 라는 노래가 나오면 분연한 생색이 나기도 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한 나날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잊혀져 갈 뻔하는 '주월 파병사의 전사(戰史)'의 한 편을 감명 깊게 읽어보았습니다
주월 파병하시여 일선소대장으로 역활이 쟁쟁하게 와 닿습니다.
채명신 장군님의 자서전을 조금 읽어 보았습니다. 다 읽어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조국 근대화의 발판을 더 앞으로 당긴 '주월 파병' 우리나라의 위상을 더 한층 올려놓은거 같습니다
물론 고귀한 생명들이 전사한 분들도 계시지만 .....
그때 어려운 시절에 월남으로 파병 되시어 이렇게 훌륭한 전사의 한편이 ...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생생한 삶의 자극제가 됩니다.
그 흔한 라면이 이렇게 소중하다는 말씀은 어디서 찾아 보겠습니까?
저 국군묘지에 잠들고 계시는 영령들님의 영혼에 깊은 감사를 드리고 ...
채명신 장군님의 일선 사병들의 묘역에서 잠들어 계시는 그분들이 더 생각이 나는 계절입니다.
들샘님도 글에서 보면은 아주 훌륭한 인품이 여기 까지 풍겨나옵니다.
살아오신 인생사 ,좋은 글로 이어지시기를 바람니다 감사합니다
내 개인의 회상에 이렇게 같이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우리는 할 일을 했으면서도 간혹 욕을 먹고 있는 이 즈음에 전폭 이해해 주시고 지지해주시다니....
만장봉 같은 분들이 계셔서 위안을 받아 노병들의 가슴이 후련해지는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에 고마움을 느끼며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들샘님 월남 파병 장병으로 근무하셨군요
환경도 다르고 음식도 다른 타지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파병 근무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포스코 특수강 시절
베트남에 특수강 공장을 건설할때 산업 연수를 다녀오면서
들샘님이 이야기하는 땅굴 체험을 해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 그 좁은 땅굴에서 모든걸 해결했더군요.
들샘님 같은 분이 계셨기에 대한민국 경제가 발전햇습니다.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실 한국군의 파병으로 한국의 경제 부흥에 일조했다고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도 60대 이후의 사람들은 모두 다 잘 알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먼 훗날 여러면모를 생각도 해 보지 않고 한쪽면으로만 바라본 비 정상적 견해들만을 강조하는데는 정말 말이 안 나올 지경입니다.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생하셨고 수고하셧읍니다.
그런전쟁통속에서 우리군장병들에게
지급되어야할 라면이 베트콩들의 식량으로 둔갑해 버렸네요.
어찌 설명이 되어야할지요.
집안에 한분이 월남에서 전사하셨지요.
현충원에 계신데..
제가 이민생활을 하여서 찿아뵌지가 꽤 오래 도었지만
잊지않고 항상 가슴에 묻어두고 삽니다.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보급되어야 할 라면이 적의 수중에 있다는 것에 놀라움과 분개가 치솟았습니다.
보급계통의 어느 누가 그런 짓을 한 것이겠지요. 이적행의로 총살감입니다.
그 라면도 무료가 아닌 돈을 주고 사먹는 것인데도 그렇게 구하기가 어렸으니.....
그리고 지금은 과거 전사자들의 묘지에 찿아오는 사람들이 아주 적다고 합니다.
부모님들이 찿아오셨지만, 이미 모두 다 돌아가셨거나 연로하셔서 못 오시고...
형제들도 긴세월에 지루감을 갖고 안 올테고....
대부분 결혼도 안 했으니 자식도 없고....
그래서 살아 있는 전우들이 당연히 찿아보아야 합니다. 이번 현충일에도 갔다 오려구요.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보리고개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제대로 먹고 살게 된 것에 고마움을 갖고 있지요.
그러나 그런 것도 모르고 부유함 속에 살아온 자들이 과거 월남전쟁은 어쩌고 저쩌고 합니다. 참 불쌍한 면도 있습니다.
어째 부모세대의 고생을 그렇게 이해 못하고 매멸찬 말들만을 하는지.... 그러나 우리는 열심히 싸워 임무수행을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생생한 참전 실화 잘 읽었습니다. 우리 오빠도 청룡부태로 파월하셨는데 귀국하는 날 가져 온 시레이션 박스의
여러가지 통조림과 간식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귀국시에는 보통 시-레이션을 갖고 오죠.
그러나 그 시-레이션도 쉽게 획득하지 못해 어렵게 구해야 합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생미사를 참 많이 넣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중대에 장교 6명중 전사 1명 중상 2명 경상 1명 이었으나, 나는 덕분에 무사히 귀국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잘 읽으셨다니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들샘님은 가장 치열했다던 안케전투의 참전용사십니다.
실전을 경험하지 않았던 저도 군생활 회고해보면 마음이 짠~한데..
생사를 넘나들었던.. 가장 치열했던 전장의 참전용사야 그마음 오죽하겠습니까...
세계에서 2번째로 못살던 민생고의 나라..
그런 나라가 이만큼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게된데에는
지난 세월의 피눈물이 그 바탕입니다.
그동안 선배님들과 우리는 너무 열심히 일했지요...
그 일 열심히 하는 과정에서..하지만 우리는 아이들에게
나쁜물이 스며들고 있음을 간과했습니다.
배은 망덕한 세력들이 득세하는 세상...
6월이 다가오는군요..
이글을 기억하며 현충원을 찾아 보렵니다.
동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6월 6일에는 현충원을 갈 것인데, 제일 먼저는 동료 소대장 이었던 고 임동춘 대위를 찾아보고
나머지 17명의 명단을 들고는 한사람씩 찾아 볼 것입니다. 18명을 다 찿아보려면 시간도 꽤 걸립니다.
그리고 유가족들과의 대화가 중요한데, 여기서 시간이 많이 갑니다.
거의 묻는 말이 '어떻게 하다 죽었는가?' 의 질문인데, 아는대로 답변을 해 주었지요.
그러나 그분들도 많이 돌아가시고 연로하셔서 오시지 못하고 있으니 빈 묘소라도 내가 찿아가야만 합니다. 감사합니다.
월남전 휴전 직전 나트랑 주월한국군 야전사령부 경비근무를 했습니다
사령부 정문 벙커에서 야간 근무를 할 때 한달에 하루는 부대장병들에게 배급될 시레이션 박스를
정문 바로 옆에 있던 어느 파견대 장교와 운전병이 짚차로 밤새 실어나르던 광경이 생각나지요
그 시레이션 박스를 월남 시장에 전부 내다 팔아 착복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라면도 그런 것이었겠지요 다 지난 옛 일입니다
참 한심한 일을 목격하셨군요.
정상적인 일이라면 밤에 실어 나를 일이 아니지요.
이렇게 우리가 보지는 못했어도 받아야 할 곳에선 받지 못해 불편한 생활을 하고
착복한 소수는 주머니를 채우겠지요. 이런 일은 이적행위로 총살을 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공공연하게 아는 비밀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냈다는 것은 참 무서운 일입니다.
긴 내용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집안에 파월장병이 계셨군요. 그러나 그 분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일을 하셨을까? 애석합니다.
나도 30대 후반부터 이상하게 몸에 이상이 와서 많은 고생을 하였었죠.
알고보니 고엽제 후유중이라고 합니다. 나름대로 나는 대응을 하여 어느정도 건강을 유지하고 있으나
대부분들은 생각지도 못한 고엽제에 고생들을 많이 하며 지내고들 있습니다.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