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명 ; 7월 108순례
일자 ; 2019, 7, 28
장소 무량사, 관촉사, 쌍계사
첫번째 순례지 부여 만수산 무량사에 도착하니 장마비가 우리를 맞이합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로서 여러 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쳤으나
자세한 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신라 말기의 고승 무염(無染)이 일시 머물렀고, 고려시대에 크게 중창하였으며, 김시습(金時習)이 이 절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입적하였고, 조선 중기의 고승 진묵(震默)이 아미타불을 점안하고 나무 열매로 술을 빚어서 마시면서 도도한 시심(詩心)을 펼쳤던 사찰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무량사극락전(極樂殿)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요사채 등이 있다.
보물 제356호로 지정된 극락전에는 동양최대의 불좌상이라 하는 아미타여래삼존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산신각에는 김시습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33호로 지정된 무량사석등과 보물 제185호로 지정된 무량사오층석탑,
절 문 앞에 있는 거대한 당간지주(幢竿支柱), 김시습의 부도 등이 있다.
또한, 김시습이 1493년(성종 24) 이곳에서 죽자 승려들이 그의 영각(影閣)을 절 곁에 짓고 초상을 봉안하였다.
무량사소조아미타삼존불상
1633년 작. 높이 본존불상 540cm, 협시보살상 480cm. 중앙의 아미타불은 나발로 표현된 머리
위에 반타원형의 중앙계주와 원통형의 정상계주로 각각 장식되어 있다. 얼굴은 네모난 편으로 눈·코·입 등이 조그맣게 표현되었고 좁은 어깨는 움츠리고 있어 전체적으로 위축된 듯한 느낌을 준다.
통견의 법의는 U자형의 옷주름이 좌우대칭으로 힘없이 늘어져 도식화되어 있으며 가슴 위로는
군의를 묶은 띠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어깨 위로 들고 왼손은 다리에 올려놓았는데 각각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협시보살인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상은 각기 머리에 화불과 정병이 새겨진 보관을 쓰고 가슴에는
3줄로 늘어진 목걸이 장식을 하고 있다. 본존불과 마찬가지로 통견의 법의에 아미타구품인의 손
모양을 취하고 있다. 이 삼존불상은 본존인 아미타불의 복장품에서 나온 발원문에 의해 1633년
(인조 11)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세부표현에서도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 ; 다음 백과사전
[무량사 5층 석탑(보물 제185호)]
부여 무량사 오층 석탑은 극락전 앞에 있는 고려 전기의 석탑이다.
탑을 받치는 기단은 신라 양식의 탑이 2층인 것과 달리 단층이다.
탑신은 지붕돌과 몸돌을 한 층으로 하여 5층을 이루고 있다.
지붕돌의 처마 끝이 살짝 올라가 있는데, 이는 백제의 양식과 비슷하다.
이처럼 이 탑은 백제와 통일 신라의 석탑 양식이 조화를 이루도록 만든
고려 전기의 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1971년 해체 수리를 할 때 탑신에서 고려 시대 금동 아미타 삼존불상과
사리 장치, 금동 관음보살 좌상 등이 나왔다.(안내판 참조)
출처: https://cho-a47.tistory.com/1600 [草阿(초아)의 삶과 문화산책]
김시습 영정
우천 관계로 일주문을 돌아 나오면서 촬영
장소 ; 논산 반야산 관촉사
관촉사에 도착하니 장대비가 내립니다
빗속에 사진을 찍다보니 습기로 몇장의 사진을 못쓰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내용>
고려 제4대 광종 19년(968). 지금의 충남 논산군 은진면 반야산 기슭 사제촌에 사는 두 여인의 산에 올라 고사리를 꺾고 있었다.
『아니 고사리가 어쩜 이렇게도 연하면서 살이 올랐을까요?』
『정말 먹음직스럽군요. 한나절만 꺾으면 바구니가 넘치겠어요. 호호….』
두 여인은 정담을 나누며 고사리 꺾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때였다. 어디선가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 산중에 웬 아기 울음소리일까요?』
『글세 말이에요, 어디 한번 가볼까요?』
『그러지요.』
두 아낙은 어린아이 울음 소리를 따라가 보았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어린아이는 보이지 않고 갑자기 땅이 진동하면서 눈앞에 거대한 바위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에그머니나, 이게 무슨 조화람.』
『큰일났어요. 빨리 마을에 내려가 관가에 알립시다.』
신비롭고 괴이한 풍경에 놀란 두 아낙은 황급히 마을로 돌아와 관가로 가서 고을 원님께 이 사실을 고했다.
『거참, 괴이한 일이로구나.』
이야기를 다 들은 원님은 나졸들을 보내어 사실을 확인했다. 이 소문은 곧 임금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됐다.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임금은 조정 대신들을 불러 이 일을 논의했다.
『상감마마,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이는 필시 하늘이 내려주신 바위일 것이니 불상을 조성하여 예배토록 함이 옳을 듯하옵니다.』
『그러하심이 옳을 듯하옵니다.』
조정 대신들의 의견이 한결같자 임금은 명을 내렸다.
『금강산 혜명대사를 모셔다 그 바위로 불상을 조성토록 해라.』
혜명대사는 1백 명의 석수를 이끌고 바위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바위를 본 순간 스님은 잠시 뭔가 골똘히 생각했다.
「음, 예사 바위가 아니로구나. 후세불인 미륵불을 대형으로 조성하여 세세생생 이 민족의 기도처가 되도록 해야지.」
마음을 굳힌 스님은 작업을 지시, 대역사를 시작했다.
석공들은 솟아오른 큰 바위로 부처님 전신을 조성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스님은 그 바위에 부처님 전신을 조성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스님은 그 바위에 부처님 하반신을 조각토록 했다.
『스님, 이 바위도 큰데 얼마나 큰 부처님을 조성하실 건가요?』
석수들이 의아한 듯 연방 물어오나 스님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부처님 하반신이 조성되자 혜명 스님은 그곳에서 약 30리쯤 떨어진 이웃마을 연산면 우두굴에서 큰 돌을 옮겨와 다시 머리와 가슴 부분을 조성했다. 이때 동원도니 역군은 무려 1천 여 명. 정으로 쪼고 갈고 깎아 부처님 조성하기 여러 해가 바뀌면서 웅장한 미륵불상이 완성됐으나 세 부분으로 나눠진 부처님 몸체를 맞추는 일 또한 예삿일이 아니었다. 웬만한 무게라야 들어올릴 텐데, 신통한 묘안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궁리에 골몰하던 혜명 스님이 사제촌 냇가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몰려오더니 흙으로 삼등불상을 만들어 세우는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심코 바라보던 혜명 스님은 자신도 모르게 「옳지」하는 탄성을 발했다.
아이들은 먼저 평지에 미륵불상을 세운 다음 그 주위를 모래로 경사지게 쌓아놓고 가슴 부분을 굴려 올려서 맞추어 세우고 있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혜명 스님은 곧장 작업장으로 달려가 공사를 지시하고 다시 시냇가로 왔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마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재미있게 떠들며 놀던 아이들은 간 곳이 없었다.
이는 혜명 스님 정성에 감탄한 문수보살이 스님에게 불상 세우는 법을 알려주려고 현신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삼등불상을 무난히 세워 미륵불이 완성된 때는 고려 제7대 목종 9년(1006). 무려 37년만에 높이 18.12.m, 둘레 11m, 귀의 길이가 3.33m나 되는 동양 최대의 석조불 은진미륵을 봉안케 도니 것이다. 그로부터 21일 동안 1.8m나 되는 미간의 백호 수정에서 찬란한 빛이 발하여 중국 송나라에 이르니 그곳 지안대사가 빛을 따라 찾아와 배례한 뒤 그 광명이 촛불 빛과 같다 하여 절 이름을 관촉사라 했다 한다.
또 은진미륵이 완성된 지 얼마 후 북쪽 오랑캐가 쳐내려왔다. 파죽지세로 내려오던 오랑캐들이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어디선가 가사를 입고 삿갓을 쓴 한 스님이 나타나 태연히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길을 찾던 오랑캐들이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어디선가 가사를 입고 삿갓을 쓴 한 스님이 나타나 태연히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길을 찾던 오랑캐들은 『옳지, 저 스님을 따라가면 되겠군』 하면서 스님 뒤를 따라 강물로 뛰어들었으나 물 위를 걸을 수 없는 오랑캐들은 그만 모두 압록강에 빠져 죽고 말았다.
부하를 잃은 오랑캐 장수는 화가 치밀어 다시 강을 건너온 스님을 칼로 내리쳤다. 그러나 장수의 칼은 스님의 삿갓 한쪽 끝을 스쳤을 뿐 스님은 어디 한 곳 다치지 않아 명장의 칼을 무색케 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스님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현신한 은진미륵이라 한다. 마치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금도 관촉사 은진미륵은 3.94m의 큰 관의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꿰맨 자국을 볼 수 있다.
은진미륵은 보물 제218호. 불자가 아닌 일반인들도 관촉사는 몰라도 은진미륵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경내에는 미륵불 외에 보물이 또 한 점 있다. 우리낙라 석등의 기본형인 8각형과 달리 4각형 화사석에 불을 켜도록 만든 큰 기름단지 석등(보물 재232호)이 그것이다. 이 석등 앞에 5층 석탑이 있고 그 옆에 8엽연화 3개가 연가지에 달린 듯 실감나게 조각된 화강암 배례석이 있다. 이 배례석은 은진미륵 앞에 제물을 차리는 데 쓰인다
참고 ; 카페 챙운산
2019, 7, 28
상원 변광수 (기자단장)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