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313) 남의 시에서 얻은 종자 - ① 백석에게 얻은 〈적막강산〉/ 시인 이형기
남의 시에서 얻은 종자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valnecia/ 적막강산 - 백석
① 백석에게 얻은 〈적막강산〉
루이스가 말한 시의 종자, 즉 시의 동기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일반적인 경우를 말한다면 우리의 생활 체험이 시의 동기를 가장 많이 제공해주는 영역이지만
그 밖에 다른 분야에서도 시의 동기는 적지 않게 발견될 수 있다.
이를테면 명상 또는 공상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작품을 읽고 나서도 시의 종자를 떠올릴 수 있다.
특히 처음 시를 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시를 읽고 감동을 받아서
자기도 시 한 편 써보자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나 역시 여러 번 경험한 적이 있는 그러한 발심은 다른 사람의 시에서 받은 감동이나
충격이 자기 시의 종자가 된 경우이다.
초심자가 아닌 기성 시인도 다른 사람의 시를 읽다 자기 시의 동기를 발견하는 일이 결코 적지 않다.
다른 사람의 시의 운자(韻字)를 그대로 달고 앞뒤의 차례도 원작대로 따서 지은
차운시(次韻詩) 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차운은 원래 한시(漢詩)가 이용한 시작법의 하나이지만
우리나라의 현대시에도 같은 방법으로 쓴 작품을 볼 수 있다.
김소월의 〈차안서선생 삼수갑산운(次岸曙先生 三水甲山韻)〉은 제목이 가리키는 바
그대로 소월이 자기의 스승인 안서 김억(金億)의 시 〈삼수갑산〉을 차운한 작품이다.
이러한 차운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원작에서 그 종자를 얻고 있다.
차운시는 아니지만 나에게도 다른 사람의 시를 감동 깊게 읽고 거기서 동기를 발견하여 쓴 작품이 몇 편 있다.
그 중 하나가 다음에 소개하는 졸작 〈비〉이다.
적막강산에 비 내린다
늙은 바람기
먼 산 창가에 머물 때
저버린 일상(日常)
으슥한 평면에
가늘고 차운 것이 비처럼 내린다.
나직한 구름자리
타지 않는 일모(日暮)……
텅 빈 내 꿈의 뒤란에
시든 잡초 적시며 비는 내린다.
지금은 누구나
가진 것 하나하나 내놓아야 할 때
풍경은 정좌(正座)하고
산은 멀리 물러앉아 우는데
나를 에워싼 적막강산
그저 이렇게 빗속에 머문다.
살고 싶어라.
사람 그리운 정에 못 이겨
차라리 사람 없는 곳에 살아서
청명(淸明)과 불안
기대(期待)와 허무
천지에 자욱한 가랑비 내리니
아아 이 적막강산에 살고 싶어라.
―이형기, 〈비〉 전문
이것은 내가 20대 초반인 1954년에 쓴 작품이다.
그리고 이 졸작에 종자를 제공한 다른 사람의 시는 1947년 가을 《신천지(新天地)》란 잡지에 발표된
백석(白石)의 〈적막강산(寂寞江山)〉이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서점에서 백석의 시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아니 이 말은 정확하지 않다. 사실대로 말하면 그 시의 제목이자 본문에 한 번 등장하는
‘적막강산’이란 시어가 나의 가슴을 강하게 울렸던 것이다.
내가 그동안 적막강산이란 말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러나 그날은 난생처음으로 그 말을 들어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러면서 그 말은 또 나에게 전혀 낯설지 않았다.
처음 발견한 말이기는 하되 사실은 오래전부터 찾고 있던 맘에 꼭 드는 말을
이제야 만났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졸작 〈비〉의 종자가 된 것은 백석의 시 〈적막강산〉 전체가 아니라 바로
그 제목이 된 ‘적막강산’이란 단어였다고 말할 수 있다. 참고로 그 시를 소개하겠다.
오이밭에 벌배채 통이 지는 때는
산에 오면 산 소리
벌로 오면 벌 소리
산에 오면
큰솔밭에 뻐꾸기 소리
잔솔밭에 덜거기 소리
벌로 오면
논두렁에 물닭의 소리
갈밭에 갈새 소리
산으로 오면 산이 들썩 산 소리 속에 나 홀로
벌로 오면 벌이 들썩 벌 소리 속에 나 홀로
정주(定州) 동림(東林) 구십여 리 긴긴 하루 길에
산에 오면 산 소리 벌에 오면 벌 소리
적막강산에 나는 있노라
―백석, 〈적막강산〉 전문
백석의 시에서는 자기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 지방의 사투리를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위의 시에서도 ‘벌배채’나 ‘덜거기’나 ‘물닭’ 같은 말이 그런 예를 보여준다.
전문가의 해석에 의하면 벌배채는 들배추, 덜거기는 늙은 장끼, 물닭은 비오리를 뜻하는 말이지만,
타 지방 사람이 그냥 들어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평안도 사투리를 한마디도 들어본 것이 없는
경상도내기 소년이었기 때문에 백석의 사투리 시어들이 더욱 어려웠다.
그러니까 오히려 시의 전체적인 내용도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적막강산’이란 시어만은 앞에서 말한 대로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던 것이다.
나의 마음속엔 적막강산이란 그 말 한마디를 잘 살릴 수 있는 시를 한 편 써보자는 생각이 절로 솟아났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정작 그런 작품을 써낼 만한 능력이 못 되었다.
몇 번인가 시도를 해보기는 했지만 결과는 번번이 실패했다.
시를 씀에 있어서 말 한마디를 제대로 살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그때 나는 처음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재주가 없어서야 앞으로 어떻게 시를 쓸 것인가 하는
불안감을 느끼면서 나는 작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시일이 흐르는 동안에 적막강산이란 말 자체도 의식의 표면에서 망각의 저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자그마치 7년의 세월이 흘렀다.
때는 1949년,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는 어느 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나의 의식 속에 느닷없이 오래전에 잊어버린 그 말 ‘적막강산’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 말은 곧 비와 결부되어 ‘적막강산에 비 내린다’는 한 줄의 시구를 이루었다.
7년 전에 내가 백석한테서 얻은 시의 종자 ‘적막강산’이 그동안 아주 소멸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무의식 세계의 어느 구석진 자리에 나도 모르게 간직되었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7년 만의 소생은 뜻밖이요,
또 대견한 일이었기에 나는 약간의 흥분을 느끼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게 쓸 수 있었던 것은 첫 줄이었을 뿐 도무지 뒤가 이어지지 않았다.
그날 하루 종일 생각을 짜내고 또 밤새 자취방에서 끙끙대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내 작업의 진척을 방해한 가장 큰 요인은 종자를 비록 백석에게서 얻어왔다 하더라도
시가 백석의 모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자경심(自警心)이었다. 그
렇게 스스로 경계하는 생각을 앞세우다 보니 그것이 도리어 심리적 압박이로
작용하여 표현이 잘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거의 한 달이 지난 뒤에야 나는 졸작 〈비〉를 간신히 마무리 지었다.
집필 기간은 한 달이지만 백석의 시를 읽고 ‘적막강산’이란 말 한마디의 종자를 얻은 것은 7년 전이다.
그러니까 〈비〉는 수태에서 출산까지의 기간이 7년이나 된다.
그러나 발표한 뒤에 다시 읽어보니 마음에 들지 않는 구절이 눈에 많이 뛰었다.
그래서 또 손질을 했는데 앞에 소개한 것은 물론 손질을 한 작품이다.
그리고 그렇게 손질을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미흡하다는 느낌이 아직 남아 있다.
1962년에 낸 나의 처녀 시집은 표제가 《적막강산(寂寞江山)》이다.
시집의 표제를 그렇게 정할 때 나는 역시 백석을 의식했다.
그의 시 〈적막강산〉의 문제에서 그 ‘적막강산’이란 말 한마디가 내게 준 충경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그러나 졸작 〈비〉를 읽고 백석의 〈적막강산〉을 연상했다는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다.
종자는 백석에게서 얻었으되 그의 모방작이 되지는 않았다는 증거려니 하고 나는 스스로 위로하고 있다.
실제로 이 시에서 백석의 그것과는 내포가 좀 다른 적막감을 표현해보려고 애썼다.
그것은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그 때문에 도리어 사람을 멀리하는 적막감,
그러니까 모순된 이중성을 갖는 감정 상태이다.
‘사람 그리운 정에 못이겨/ 차라리 사람 없는 곳에 살아서/ 청명과 불안/ 기대와 허무’라는 구절은
그런 의도를 표현한다고 해본 대목이다.
청명한 마음에는 불안감이 없고 기대가 있는 곳엔 허무감이 없다.
그러나 나의 적막강산에는 서로 상반되는 그 두 가지 감정이 비를 매개체로 해서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고
나는 생각한 것이다.
사람을 간절히 그리워하면서도 사람을 멀리하고 혼자 있고 싶은 마음,
그리고 뭔가를 기대하면서도 기대하는 것이 이루어져 봤자 별것 아니라는
허무감을 동시에 저버릴 수 없는 모순된 감정 상태를 당신은 경험해본 적이 없는가?
< ‘누구나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이형기 시인의 시쓰기 강의(이형기, 문학사상, 2020)’에서 옮겨 적음. (2022. 4.13.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313) 남의 시에서 얻은 종자 - ① 백석에게 얻은 〈적막강산〉/ 시인 이형기|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