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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7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제1독서 : 필리 3,3-8ㄱ
복 음 : 루카 15,1-10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광야에 놓아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으러 가는 목자는
그리 좋은 목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한 마리의 양을 위하여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놓아둔
무책임한 목자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속성’을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선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구원하시고자 하며,
단 한 마리의 양도 버리시거나 포기하실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백 마리를 돌볼 때 한 마리쯤 잃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어쩌면 아주 작은 기회비용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버림과 포기라는 말이 없으며,
그분께 한 마리를 잃는다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과 같습니다.
한 마리 때문에 아흔아홉 마리를 놓아두시는 분이 아니라,
단 한 마리도 포기하시지 않고 모두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곧 이 비유는 버림받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 이야기가 아니라,
길 잃은 한 마리의 양 이야기입니다.
어쩌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 가운데 또 다른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면
주님께서는 곧바로 그 양을 찾아 나서실 것입니다.
이는 아흔아홉 명의 구원을 배제한 채 특정한 한 명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주님의 구원 의지에서 멀어질 수 없음을 뜻합니다.
우리도 길 잃은 영혼 하나를 찾으러 나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한 영혼을 포기하고 배제하면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는 공동체보다,
불편하고 고생스럽더라도 한 사람의 회개를 이끌고
그것에 기뻐하는 공동체를 바라십니다.
그런 공동체가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과 닮았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갑곶성지에 있을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부활 시기였는데, 한 순례객이 물어볼 것이 있다면서 제게 오셨습니다.
“성지까지 왔으니 십자가의 길을 하자고 일행에게 말하니,
한 분이 부활 시기에는 예수님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시기라서
십자가의 길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세요.
전에도 부활 시기에 와서 십자가의 길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잘못한 것인가요?”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전례 주년은 신자들의 신앙을 위한 것으로,
한 해를 보내며 구원의 사건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도록 돕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 삶은 과거의 일을 기억하며
지금 열심히 살아서 다가올 종말을 향해 신앙의 여정이기에,
부활 시기에도 주님 고통과 죽음을 묵상하고,
사순 시기에도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자매님이야 제게 물어봐서 해결되었지만,
많은 분이 모두 사순 시기에만 십자가의 길을 해야 한다는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앎이란 정말로 중요합니다.
자기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된 지식을 전달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반대편에 있었던 사람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바로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은 전혀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자기들의 관습만이 옳다면서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게 됩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인데,
그들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음식을 먹는다면서 죄인 취급을 합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과 은전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 말씀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과 되찾은 뒤에 이루어지는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크게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의 기준으로만 생각하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으니
심지어 하느님을 단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앎은 과연 어떤가요?
하느님의 사랑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 사랑에 반대되는 말만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잔치를 벌인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겸손의 마음으로 사랑에 집중하면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우리가 들은 비유는 죄인을 끝까지 찾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회개한 죄인 하나를 두고 즐거워하시는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비유 속에서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낼 때까지' 뒤쫓아 다닙니다.
여인 역시 ‘잃은 은전’을 '찾아낼 때까지' 샅샅이 뒤집니다.
이는 잃은 것을 찾으시는 구원의 주체가 하느님이심과
또한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는 ‘신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잃은 것을 되찾은 후에,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8)라고 말씀하심은
이 비유의 정점이 잃은 것을 되찾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를 되찾은 후에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에 있음을 말해 줍니다.
사실 이 기쁨은 너무도 커서 도저히 나누지 않고는 못 배기는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아픔이 마치 백 마리의 양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아팠고,
은전 한 닢을 잃어버린 슬픔이 마치 열 닢을 전부 잃어버린 것처럼 슬펐기에,
양 한 마리를 되찾은 기쁨은 마치 백 마리의 양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고,
은전 한 닢을 되찾은 기쁨이 마치 열 닢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양들을 맡기신 아버지께 대한 ‘충실함’이요,
은전을 결혼의 징표로 주신 신랑이신 예수님께 대한 ‘신의’입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하나 안에서의 전부인 사랑’, ‘전부 안에서의 하나인 사랑’,
바로 이 사랑이 십자가에 매달린 한 마리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전 인류를 구원하신 전부인 사랑입니다.
바로 이 크신 사랑을 만나면 그 누구도 기쁘지 않을 수가 없고,
나누지 않을 수가 없고,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 '회개'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당신과의 만남의 결과요, 당신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하느님과의 만남의 기쁨이요, 재회의 기쁨이요,
나를 찾아오신 하느님의 크나큰 사랑에 대한 기쁨입니다.
바로 이 기쁨이야말로 요한복음 사가가 말한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기쁨'(요한 16,22)입니다.
사실 이 비유는 “이 사람은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요한 15,2)하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가 9,10)는
당신 자신의 소명과 행위를 옹호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찾고 계시는 음성, 곧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창세 3,6) 하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 목숨까지 바치신 당신의 외아들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잃었던 양을 되찾기 위해 광야를 쫓아다니며,
잃었던 은전을 되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샅샅이 뒤지는
목자의 사명도 깊이 새겨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는 ‘이미’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기쁨’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우리도 사랑하되 ‘먼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며,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하고 소중히 사랑하며,
주님께서 주신 이 큰 기쁨을 형제와 더불어 나누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
주님!
저를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것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고,
먼저 사랑하되 끝까지 신실하게 사랑하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것없는 죄인 하나이지만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니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최상의 기쁨입니다. 아멘.
주님의 자비를 믿으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의지의 약함을 깨닫게 됩니다. 같은 고백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뉘우치고 결심했다면,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성찰해 보면 여전히 약점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래서 늘 고해 신부님 앞에 얼굴을 붉힙니다.
때로는 전혀 모르는 신부님께 고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넘어짐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돌아보게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가15,10). 하시며
죄인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의인 아흔아홉도 소중하지만 죄인 하나도 결코 그 소중함이 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인이 회개하면 기쁨이 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비를 입는 죄인 하나가 바로 나라면 그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요?
의인 아흔아홉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함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양옆의 두 강도 중 하나는 구원되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회개하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이었지만 옆에 계신 예수님께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23,42). 하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23,43)라는 대답을 얻어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의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하고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시리아의 성 이사악).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언제나 반기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죄인의 모습과 하느님께 드러나는 죄인의 모습은 분명히 다릅니다.
투덜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3,9).
이사야는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이사55,7).고 말합니다.
요엘 예언자도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요엘2,12-13). 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이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2)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부끄럼 없이 살면 좋지만 혹 부끄러운 모습이 있더라도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허물을 안고 있음에도 우리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으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십시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성녀 소화데레사).
넘어지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넘어져도 일어설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단 한 번도 용서하시는 일에 소홀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도 용서를 구하는 일에 결코 소홀하면 안 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확인하는 날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되는 것이 있습니다.
변화에 적응하는 사람이나 기업은 성장하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기업은 힘들게 됩니다.
40년 전에 논문 쓸 때입니다.
당시는 원고지에 손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고, 수동 타자기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저는 기업체에서 근무하는 청년의 도움으로 전동 타자기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글씨체도 예뻤고, 깔끔했습니다.
5년 후에 석사 논문을 쓸 때입니다. 대부분이 전동 타자기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저는 기업체에 다니는 주일학교 교사의 도움으로 삼보컴퓨터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편집과 교정이 간편했습니다. 컴퓨터의 도움이 없었으면 논문 완성이 어려웠을 겁니다.
지금은 손으로 논문 쓰는 사람, 타자기로 논문 쓰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컴퓨터를 이용해서 자료를 검색하고, 논문을 작성합니다.
전화기의 발전은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제가 어릴 때는 집에 전화기가 없는 가정이 많았습니다.
전화기를 설치하려면 예치금도 많이 냈습니다. 처음 전화기가 집에 들어왔을 때가 생각납니다.
5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전화번호가 기억납니다.
이동통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손전화를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30년 전입니다. 인터넷과 연결된 스마트폰은 말 그대로 똑똑합니다.
전화기로 예약하고, 전화기로 은행 업무 보고, 전화기로 문자 보내고, 전화기로 검색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고, 함께 가야 합니다.
‘ChatGPT 4o’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생성형 인공지능입니다.
구글, 네이버, 다음이 검색엔진이라면 챗지피티는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대화를 통해서 질문에 응답합니다. 대화를 통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마치 개인비서처럼 저를 도와줍니다.
강론 준비할 때,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 문제의 해결 방안을 찾을 때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2025년 생성형 인공지능의 흐름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기존의 대화를 통한 인공지능도 계속 발전할 거라고 합니다.
대화는 물론, 시청각을 통한 인공지능이 시작될 거라고 합니다.
행동하는 인공지능도 시작될 거라고 합니다.
인공지능은 기업과 개인의 자문을 해 줄 거라고 합니다.
창의적인 작업, 예술, 콘텐츠 제작 분야에서 활용이 증가할 거라고 합니다.
AI 기술의 발전과 함께 AI 윤리 문제에 대한 논의도 심화할 거라고 합니다.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특정 업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맞춤형 AI 해결책이 더욱 많이 개발될 거라고 합니다.
데이터 처리가 클라우드에 의존하지 않고,
기기 자체에서 실시간으로 처리되는 엣지 AI의 사용이 증가할 거라고 합니다.
이러한 흐름은 AI 기술의 성숙도와 함께 점차 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AI가 사회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합니다.
이런 흐름 역시 피할 수 없다면 배워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에 자신의 모든 걸 바쳤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걸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바오로 사도는 육적인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 재물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영적인 것들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 복음, 부활, 영원한 생명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런 체험을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에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복자 최일광(안드레아)는 종교를 배반하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에게는 두 개의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있는 하느님 나라요, 다른 하나는 저 하늘에 있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임금을 섬기며 살고, 저 하늘에서는 영원히 하느님을 섬길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백정이었던, 천민이었던 최일광을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복자 최일광 안드레아에게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부르는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그렇습니다.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죄인을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마음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목자는 크나큰 인내를 보인다.
길 잃고 헤매는 양을 찾아 나서 결국 찾아내고야 마는 목자의 인내이다.
참을성이 없으면 양 한 마리쯤 쉽게 포기했겠지만, 목자는 참고 견디며 끝까지 찾아다녔다.
그러고는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다. 그분의 양 어깨는 십자가의 두 팔이다.
거기에 우리는 우리의 죄를 얹어 놓았다.
길 잃고 헤매지 않는 이들을 남겨 두고, 착한 목자는 우리를 찾아 나서신다.
우리가 마음을 고치고 돌아오면 그분은 등을 돌리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친절하게 우리를 자기 어깨에 태우고는 잃었던 양을 찾았다며 기뻐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10절)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에서 그 은전은 우리 자신을 의미한다.
그 은전은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진 것이기에 그렇게 소중하다.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입은 존재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타락하여 길을 잃은 우리가 다시 그리스도께 발견되어 그분의 모습을 되찾았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은전이다. 그러니 그 값을 잃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녀들이다. 그러니 언제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잃은 것을 찾기 위해 부인은 등불을 밝혔다.
길 잃은 자들이 그 불빛 덕분에 구원을 받게 되자 하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그렇게 기뻐한다면,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된다면
하늘의 천사들이 얼마나 크게 기뻐하겠는가?
우리는 하늘의 천사들에게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을 항상 하느님의 뜻으로 되돌아가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15,10)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는 속담을 잘 아실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저는 엄마의 깊은 속내를 잘 몰랐고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 형만 있고 나는 없다.」
(김향이: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 실린 글)라는 책의 내용처럼
저 역시도 엄마가 형만을 더 좋아하고 더 사랑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야속한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 속담대로,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은 물론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열 손가락 중에 유독 늘 상 아픈 손가락이 하나 있으면
그 손가락에 마음이 더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열 손가락 중에도 유독 예뻐 보이는 손가락도 있고,
언제 봐도 안쓰러워 보이는 손가락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똑같이 깨물어도 원래 상처가 나는 손가락은 더 아프게 마련일 것입니다.
예전 제가 어렸을 때부터, 세상에서 가장 싫고 힘든 단어가 바로 편애입니다.
이 속담이 말하고자 하는 뜻인 편애는 없다, 고 주장한다면,
오히려 저는 이 속담을 부정하고 싶습니다.
편애는 없다, 는 측면을 강조하기보다
‘열 명의 자식 중에서 유독 몸이 약해 늘 상 병치레하는 자식이
어떤 자식이든 엄마는 똑같이 가슴 아프다, 는 의미를 더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이 죽고 난 뒤 엄마의 애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늘 엄마는 다른 자식들보다 작은형만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제 생각이 짧았으며 틀렸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는 표현은
엄마의 마음이었으며, 하느님의 마음 곧 자비심이라고 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잃어버린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와
잃은 은전을 되찾고 기뻐하는 부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구원과 자비에서 제외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혹 사람의 눈에는 양 백 마리중에서 겨우 양 한 마리를 잃고서
야단법석을 떨며 호들갑을 떤다고 하거나,
은전 한 닢이 뭐 대수인가,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느님 눈에는 참으로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듯이
양 한 마리도, 은전 한 닢도 너무도 소중하고 잃어서는 아니 되는 귀한 존재와 같은 영혼입니다.
그러기에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헤매시다 기어이 찾으시고 나서 기뻐하는 목자의 마음이나,
은전 한 닢을 잃고 등불을 켜고 집안을 온통 쓸고 샅샅이 뒤져서
기어이 찾아내어 기뻐하는 여인의 마음을 보면서
우리는 참으로 우리를 향한 아빠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아흔아홉 마리와 함께 있지만,
언젠가 우리도 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처지나 입장이 될 수 있으며,
잃어버린 은전 한 닢과 같은 상황에 놓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가 양 우리 안에 있지 못하고 양 우리 밖에서 헤매고 있다고 해도,
세상 어디에서 방황하고 있다, 해도 주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찾아오실 것이며
기어이 찾고야 마실 것이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분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실 것이고,
찾고서는 우리의 잘못과 죄를 탓하지 않으시고 다만 다시 찾았다는 기쁨에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15, 6.9)하며 잔치를 베푼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아빠 하느님의 자비하신 마음을 기억하고 감사합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인간의 판단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설령 인간이 죄를 지었다, 해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제한될 수 없음을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여기서 다시금 강조하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이미지는 단지 거룩하신 분으로 고정되어 있었지만,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은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는 점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자비는 곧 慈는 남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요,
悲는 남의 슬픔을 함께하는 슬픔, 이라고 이해됩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슬픔이나 고통 앞에서 하느님은 중립을 취하지 않고 조금은 편애를 보입니다.
그러기에 전 이제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는 말의 뜻을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느낍니다.
“주님, 우리는 뒤늦게야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듯이
당신의 자비나 사랑도 그렇듯이 늦게야 알아차리고 사랑하나 봅니다.
이런 저희를 잘 아시기에 기다려 주셨고 참아주셨음에 감사합니다.
주님,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아멘.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여정
“깨달음의 사랑과 지혜, 그리고 자유”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거룩하신 그 이름을 자랑하고,
주를 찾는 마음은 즐거워하라.
주님 생각하라, 그 권능을 생각하라,
언제나 그 얼굴을 그리워하라.”(시편105,3-4)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교황님의 읽은 글귀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희망은 모든 신자의 선물이자 의무이다.”
모든 신자가 희망의 선물을 지니고 희망의 순례자로 살아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여정이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여정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길을 통해 하느님께 이릅니다.
“기도할 때, 성령은 우리의 도움이 되기위해 오신다.”
기도와 성령은 함께 갑니다. 기도의 사람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모두가 평범한 말마디이지만 마음에 새롭게 와 닿으며, 우리의 깨달음의 여정에 일조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마음에 와닿습니다.
“나 자신만큼은 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해쳐서는 안 된다.”<다산>
“스스로 해치는 자와는 더불어 말할 수 없고, 스스로 포기한 자와는 함께 일할 수 없다.”<맹자>
새삼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의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임을 실감합니다.
스스로 포기한 자포자기 절망의 사람이 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이 제일입니다.
평범하나 지극히 지혜롭고 용기있는 파스카의 삶입니다.
이 또한 깨달음의 여정에 도움이 되는 말마디들입니다.
어제의 느낌을 잊지 못합니다.
은은한 향기로 남아있는 사람이, 만남이나 글이 있는가 하면
상처나 기분 언짢은 느낌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만남이나 글도 있습니다.
어제 읽은 글이 그러했습니다.
글은 사람이라 했는데 왠지 교만하고 건방지다 싶었고 느낌도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얼마 전 독료한 책은 친지들에게
품격 있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향기로운 책이라 적극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역시 글은, 말은 사람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문자향 서권기(文子香 書卷氣)”라는 말마디에 적극 공감합니다.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이라는 뜻으로,
학문적 수양의 결과로 나타나는 고결한 품격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쓴 글에서는 문자의 향기가 느껴지고 마주 대하면 책의 기운이 풍깁니다.
정말 이런 책이 깨달음을 주는, 길이 보관하고 싶은 책입니다.
이런 고전(古典)의 책 같은 사람이라면 늘 만나도 새롭게 느껴질 것입니다.
문자향 서권기의 정점에 있는 책이 바로 성서입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를 읽으며 묵상하는 순간
“아, 예수님과 바오로 사도는 진정 깨달음의 사람, 각자(覺者)구나!”하는 깨달음이 마음을 쳤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어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고 자유롭게 합니다.
깨달음의 사랑과 지혜요, 깨달음의 자유입니다.
“아, 그렇구나!” 깨달음의 지혜가 참으로 우리를 날로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니 이런 깨달음을 주는 사람이나 글이, 말이,
좋은 사람이자 글이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숱한 눈이 없는 지식들보다는 보는 눈을 주는 깨달음의 지혜가 백배 낫습니다.
그러니 깨달음의 여정은 개안의 여정이 됩니다.
깨달음의 사람을 각자(覺者)라 부르는데 깨달을 “각覺”자 안에는
볼 “견(見)” 자가 들어 있어 깨달음과 보는 눈이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실로 영적성장은 깨달음의 여정, 개안의 여정을 통해
날로 깊어지는 사랑과 지혜, 자유의 삶에 있음을 봅니다.
제가 참 많이 나눈 무지의 병의 치유에도 깨달음의 사랑과 지혜가 답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부단히 추구할 바 깨달음의 은총이요 깨달음의 여정을 통해
무지로부터 벗어나 날로 내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무지의 사람들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깨달음의 예수님과는 참으로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투덜거리는 자기중심적 율법주의적 폐쇄적 사고로
꽉 막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참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신학 지식은 많았을지 몰라도 무지에 눈먼,
참으로 자유롭지 못하고 지혜와 사랑이 결핍되어 있음을 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주님의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를 통해
빛나는 예수님의 깨달음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예수님의 깨달음이 진정 복음입니다.
두 예화의 결론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하느님의 기쁨을 전하는
예수님의 깨달음의 사랑과 지혜가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기쁨을 줍니다.
깨달음에서 나오는 다음과 같은 확신의 고백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아무리 공부 많이 하여 지식이 많다하여 이런 깨달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말 그대로 깨달음의 지혜와 사랑의 은총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한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답은 깨달음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자유뿐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무리 지식이 차고 넘쳐도 깨달음의 눈이 없으면
모두가 무거운 짐의 쓰레기 더미에 불과할 뿐이겠습니다.
바로 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좋은 반면교사가 됩니다.
오늘 필립비서의 주인공 바오로 사도야말로 예수님에 버금가는 각자임을 봅니다.
참으로 깨달음의 지혜와 사랑, 깨달음의 기쁨과 자유로 충만한 바오로의 고백이
덩달아 우리를 기쁘게, 자유롭게 하고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진리이신 주님께 대한 깨달음이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함을 봅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하느님의 영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며
육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중심에 진리자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계십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깨달음의 경지를 누리지 못하고
무지의 어둠 속에서, 온갖 잡다한 쓰레기 더미 속에서 무거운 짐에 눌려 힘겹게 살아가는지요!
말 그대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참으로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 중 주님께 청해야 할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깨달음의 사랑과 지혜, 자유의 은총입니다.
오늘따라 마음에 새롭게 와닿는 주님의 초대 말씀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아멘.
초대 명단에 새겨진 내 이름
박상대 마르코 신부
우리가 알다시피 교회 전례력상
대림시기, 성탄시기, 연중시기(1), 사순시기, 부활시기, 연중시기(2)를 통틀어
평일 미사의 복음은 매년 같은 복음이다.
그중에서 연중시기를 살펴보면,
연중 제1주간 월요일부터 제9주간 토요일까지는 마르코복음(1,14-12,44)을,
연중 제10주간 월요일부터 제21주간 토요일까지 마태오복음(5,1-25,30)을,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교회전례력의 마지막 날인 34주간 토요일까지
루카복음(4,16-21,36)을 매일미사의 복음으로 듣게 된다.
우리는 지난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계속해서 루카복음을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봉독하고 묵상하여왔다.
그중에서 연중 제26주간 월요일까지의 복음(4,16-9,50)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에 관한 보도였고,
그 후부터는(9,5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시는 도중의 활동에 관한 보도였다.
후자의 보도에서 우리가 받은 느낌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상당 부분 대단히 무겁다는 것이었다.(9,51-14,35)
갈릴래아 주변 도시들에 대한 불행선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불행선언,
반대자들의 모함, 바리사이들의 누룩에 대한 경고,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
재물에 대한 경고, 준비와 기다림, 회개와 속죄, 예루살렘에 대한 저주와 불행선언,
엄한 예수 추종의 조건 등이 바로 그랬다.
오늘부터 봉독 되는 루카 복음 15장은 새로운 주제들로 전개된다.
루카 복음사가의 고유한 하느님 자비와 사랑에 관한 것이다.
우선 예수님 말씀의 聽者로 세리와 죄인들이 거론된다.(1절)
예수님의 말씀을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듣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바리사이와 율사들에게 있어서 모욕적인 일이었고, 예수에게 대한 비난의 빌미가 된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다.
잃은 양(4-7절), 잃은 은전(8-10절), 잃은 아들(11-32절)에 관한 비유가 그것이다.
하느님은 잃은 것을 찾아 나서시는 분이며, 죄인들을 회개로 초대하시는 분이시다.
바리사이와 율사들에게는 스캔들이 될지는 몰라도
하늘에서는 죄인의 회개와 잃은 것의 되 찾음이 큰 잔치의 이유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잔칫상이 꽉 차기를 바라신다.(14,23)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남아있다.
100마리의 양 중에 99마리가 왔다 해도, 은전 10개 중 1개가 모자란다 해도
그 잃어버린 것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찾을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를 통해
예수님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 것으로 주장하실 뿐만 아니라,
이참에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그릇된 하느님 상을 고치자는 것이다.
이 세상에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우리 자신 스스로가 잃은 양 한 마리이며, 잃은 은전 하나에 속한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그렇게 잃은 것에 속한다고 주저할 것이 아니라,
잃은 것을 향하여 다가오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를
외면하지 않고 회개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100 중에 1개인 나 자신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 하나쯤은 관찮겠지 하는 생각을 버리고, 바로 나 하나 때문에 찾아 나서시고,
찾을 때까지 하늘나라의 잔치를 미루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나 하나의 회개를
하느님과 하늘의 천사들이 그렇게 기뻐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나 하나가 곧 전부이기 때문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