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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8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제1독서 : 필리 3,17―4,1
복 음 : 루카 16,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2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3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4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5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6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7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약은 집사의 비유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집사의 행위는 그 목적과 과정과 결과 모두 부당해 보이고,
이 부당한 행위에 대한 부자 주인의 칭찬에 우리는 당황스럽습니다.
그러나 재산 사용에 관한 가르침으로 다가가 본다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집사는 우리를 뜻합니다.
집사가 부자의 재산을 관리하듯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재산을 관리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산과 능력은 우리 것이 아니라,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잘 관리하고 적절하게 써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산을 아무 계획 없이 그대로 두거나 자신만을 위하여 쓰는 것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재산은 그분의 영광과 세상을 위하여 쓰여야 합니다.
집사는 처음에는 예수님의 재산을 가지고
자신을 위하여 쓰다가 쫓겨날 위기를 맞았지만,
나중에는 이웃을 위하여 쓰면서 칭찬을 받고 그 자리에 계속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은 집사에게서 주님의 재산을 잘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곧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섬겨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재산이 그렇게 쓰이기를 바라십니다.
집사에게 빚을 탕감받은 사람은 당장에는 집사에게 고마워하겠지만,
결국 그 재산의 원주인인 부자에게 더 고마워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은혜를 받은 이들은 은혜를 베푼 이에게 먼저 고마워하겠지만,
결국 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그분께 찬미를 드릴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선행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수많은 나라를 전쟁으로 정복했고
여러 번의 공격에서 살아남아 권력을 굳건히 했습니다.
그 뒤에 그가 한 것은 무엇일까요? 불로장생의 영약을 찾았습니다.
비슷한 영약이 있다는 희미한 소문만 들려도 특사를 파견했습니다.
문제는 불로초를 찾지 못하고 돌아오면 처형당했으므로,
그 특사들은 소식을 끊고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불로초를 찾지 못한 그가 선택한 것은 진시황릉입니다.
황제는 무려 70만 명을 동원해 시안에 도시 하나 크기의 무덤을 건설합니다.
무덤에서는 흙으로 만들어 구운 병사와 말 모형이 7천 점이나 발견되었습니다.
황제로 다시 태어날 때까지 호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죽지 않으려 했고, 또 죽음을 대비했던 그 역시
기원전 210년, 49세의 나이로 죽고 맙니다.
역설적인 것은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먹은 온갖 독성 물질 때문에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꾸준히 복용했던 것이 ‘수은’이라고 하지요.
이 수은에 장기간 노출되면 우울증, 의욕 상실, 졸음 등 정신장애를 동반하고,
심할 경우 환각, 정신착란, 기억상실 등으로 이어집니다.
진시황제가 말년에 보였던 모습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해서 피하는 것이 옳을까요?
아닙니다. 죽음 역시 하나의 피할 수 없는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피하지 않은 이유는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을 잘 사는 것입니다.
지금을 의미 있게 살아갈 때, 죽음 이후의 미래도 의미 있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을 소홀히 하면, 죽음 이후의 미래는 없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직하지 못한 집사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재산을 낭비하였을 뿐 아니라, 주인에게 쫓겨나게 되자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려고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몰래 깎아 주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가 영리하게 대처했다고 칭찬합니다.
바로 현재를 늘 미래와 연결해서 생각하고 판단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을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이 될까요?
미래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만 신경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미래의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자기 욕심 채우는 것만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음 너머의 세상을 위해 지금을 잘 사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사람만이 주님으로부터 영리하게 대처했다고 칭찬받을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하늘나라의 가치와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 중의 하나는 우선 ‘돈’이라는 재물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권을 사들고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하고, 돈을 쫓다가 살인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돈이 주는 순기능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의 역기능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인간을 파괴시키기도 합니다.
사실 재물은 우리에게 선물임과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약은 집사의 비유'는 재물과 맺는 관계가
하느님과 이웃들과의 관계 맺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주인의 재물을 맡아 관리하던 집사는 관리인으로서의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고
관리를 맡긴 분의 뜻을 거역하고, 맡겨진 재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쓰고 낭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집사 일을 그만두게 하자,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와 ‘지금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자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질문하고 답합니다.
“어떻게 하지? ~ 옳지, 이렇게 하자.
~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3-4)
그는 비록 불의한 관리인이었지만, 지혜로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려 마지막 한몫을 더 챙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재물을 나누었습니다.
쌓아놓은 재물을 나누고, 움켜쥐었던 것을 내주었습니다.
횡령하고 착복했던 것을 아낌없이 퍼주었습니다.
주인처럼, 아버지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어줍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떤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라는 질문을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이어지는 부분에서, 이 비유를 해설하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어주겠느냐?”(루카 16,12)
그러니 이 비유는 결코 약삭빠른 청지기의 처신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자녀들도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건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곧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지 않는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자신에게 맡겨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고,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는 신앙의 진실성을 드러내 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이 지금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와 우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사이에 압박과 침해와 불목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어떻게 하지? ~ 옳지, 이렇게 하자.”(루카 16,3-4)
주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재물과 소유를 횡령했습니다.
제 자신을 마치 저의 것인 양 횡령했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제 자신을 주인인 양 섬겼습니다.
진정 당신이 맡기신 이 몸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저의 주님입니다.
하오나, 주님!
저를 옭아매는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영리한 선택
반영억 라파엘 신부
앞날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현명합니다.
재물에 투자하는 것보다 사람에게 배려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성공하려면 인재를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온갖 정성을 쏟는 것보다 하늘의 영광을 헤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되 약속된 미래, 영생, 천상 행복을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그가 정직하지 못해‘해고 통지’를 했습니다.
해고 통지를 받은 집사는, 고민 끝에
자신의 장래를 보장받기 위한 부정을 또 저질렀습니다.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빚을 탕감해 주고
훗날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리라는 생각하였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것을 보고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세속적인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려 애쓰는 모습은 칭찬할 만합니다.
한편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의 혜택이 돌아갔으니 다행스럽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었으니 결국 세속적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 그 권력에 기대어 잇속을 챙기는 사람들은
하늘 앞에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영리함을 발휘해야 합니다.
세상의 자녀는 세상의 것에만 영리하면 됩니다.
현세적인 이득이나,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
자녀 교육이나 재산의 축적과 같은 일을 위해서는 위장전입이나 탈법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오히려 잘나가는 사람으로 생각하니 말입니다.
고위 공직자들의 자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병역면제를 받은 것을 보면 참 약삭빠릅니다.
유전 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듯이 재물은
사람을 부리고 그래서 거기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죽는 줄 모르고 죽습니다.
세상의 권력이 몇 년이나 갈까요? 하늘과는 멀어집니다.
세상일에도 온갖 정성을 쏟거늘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더 해야 하겠습니까?
세속의 자녀도 막다른 골목에서 돈을 팔아 사람을 사거늘
마지막 날 주님의 대전에서 서게 됨을 알고 있다면
그 준비를 미리 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합니다(루카12,43).
그리고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카12,4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덕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이며,
마땅히 피할 바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한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다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따라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잘 이용하여
주님 마음에 들게 미래를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은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길 기다리는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제 삶을 일구는 능동의 삶입니다.
사실 “많은 일을 해도 해야 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해도 해야 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그러니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성 요한보스코).
세속 일도 중요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한 일,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일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의 가치는 이 세상 안에서 실천해야 할 삶의 원리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만큼 큰 수고와 정성으로 복된 날 만드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현대인들과 고대인들은 ‘역사(歷史)’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에게 역사는 사건(Fact)에 대한 기록입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역사를 배울 때, 연도와 사건을 주로 배웠습니다.
조선의 건국, 한글 창제, 임진왜란, 국권피탈과 같은 사건을 연도와 함께 외웠습니다.
그 뒤로는 숫자를 먼저 외우곤 했습니다.
삼일절 만세, 팔일오 광복, 사삼 제주 항쟁, 육이오 전쟁, 사일구 혁명,
오일륙 군사 쿠데타, 오일팔 민주화 운동, 육십 시민 항쟁,
육이구 선언과 같은 사건과 날짜를 외우곤 했습니다.
이처럼 현대인들에게 역사는 사실에 대한 기록입니다.
교회의 전례도 사실에 근거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12월 25)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춘분 이후 첫 보름달 다음 일요일)을
축으로 전례가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전에 4주 동안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대림시기를 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할 전에 40일 동안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며 회개하는 사순시기를 지냅니다.
고대인들에게 어떤 사건에 대한 역사적 사실(fact)보다
그 사건에 포함된 진실(truth)이 중요했습니다.
여기에서 사실이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하였는가“의
육하원칙에 따라서 정확하게 진술하거나 기록하는 것을 말하며,
진실이란 사건의 의미와 그 파급 효과를 말합니다.
고대인들에게 역사 기록은 정치나 종교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이어야 했고,
따라서 과거에 대한 편견 없는 공정한 평가란 그들의 역사에서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의 역사 기록은 성경의 다른 기록들처럼
저자의 신학 사상과 메시지를 선포하고 전달하는데 이용됩니다.
구약성서의 역사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깁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기 위해 이민족들의 손에 넘깁니다.
어느 정도 벌이 충족되거나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백성은 다시 평화를 찾습니다.
지도자가 죽으면 백성은 또다시 우상 숭배에 빠져들어 똑같은 역사를 반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우리 신앙인들은 현실의 짧은 삶이 아니라, 천상에서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주 작은 것들을 충실하게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이 있을까요?
첫째, 기도입니다.
아침기도, 저녁기도, 묵주기도를 자주 하면
기도의 힘으로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차를 타면 간단하게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도 안전 운전에 큰 도움이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둘째, 선행입니다.
‘선행을 베푸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시오.’라고 하셨습니다.
보답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하는 선행도 좋지만,
보답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하는 선행을 하느님께서는 더 좋아하십니다.
셋째, 성사 생활입니다.
자주 미사에 참례하고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은
말씀의 양식과 성체를 함께 받게 됩니다.
혼인성사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하느님의 커다란 축복입니다.
내 마음에 쌓인 죄와 분노, 미움과 시기들은 고백성사를 통해서 버려야 합니다.
기도와 선행 그리고 성사 생활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나 못 하므로
하느님께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 속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만큼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나의 신앙도 키워나가도록 해야겠습니다.
약은 집사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교활한 사람이다.
집사는 자기가 맡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횡령을 하였다.
주인은 자기의 부정을 알아차리고 이제 자기를 해고하겠다고 통고한다.
그런데 집사는 기발한 생각을 해낸다.
그는 장부를 조작하여 빚진 자들에게
실제로 빚진 액수보다 훨씬 적은 액수로 고쳐 쓰게 했다.
그렇게 해두면 자신에게 해고라는 최악의 불운이 닥치더라도
빚진 자들에게서 자기가 또 받아낼 수 있는 좀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는다.
이러한 처사에 주인은 충격을 받았지만,
약은 집사의 교활한 처사에 감탄하며 집사를 칭찬하고 있다.
그들이 세속적인 삶을 위해서 교묘한 수단 방법을 짜내고 있다.
약은 집사의 비유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는 이 집사와 같이,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면서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는 종말론적 가르침이 담긴 말씀이다.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 이처럼 갖은 재주, 갖은 꾀를 다 동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그렇게 노력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집사가 횡령하고 사기를 쳐가면서 준비한
그래서 그토록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삶도 언젠가 끝나고 말 삶이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우리도 언젠가는 하느님 앞에 우리가 책임을 갖고 관리하던
우리 자신의 집사 일에 대한 셈을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셈을 바치는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날에 대비하여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
항상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주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항상 지금 여기에서부터 구원을 체험하고
그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우리도 그만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여야 우리가 맡은 집사 일을 잘하는 것이다.
언제나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맡겨진 양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초기 교회 이방인들의 사도요 최고 목자였던 바오로 사도의 삶과 신앙이
얼마나 열정적이고 충실했으며,
모범적이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특별히 첫 번째 독서 필리피서는
그런 바오로 사도의 위대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회심 이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그는
매사에 다른 제자들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내걸며 복음 선포에 매진했지만,
자신의 의식주는 스스로 일을 해서 해결했습니다.
천막 짜는 일로 생계를 꾸려가면서 동시에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목자로서 교우들에게 조금도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그의 섬세한 배려심과 당당함이 돋보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설교가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었던 이유는
그가 선포하는 말씀과 그의 구체적인 삶의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생활은 조금도 따르지 않으면서 말만 번지르르했다면,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콧방귀를 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철저하게도 언행일치 되는 그의 강론에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의 서한 한 구절구절에는 당당함이 잘 묻어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필리 3,17)
사실 바오로 사도의 말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라는 구절을 묵상해 봅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는 구체적인 삶이 그랬기 때문에, 그리도 당당히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디 당당함 뿐인가요? 바오로 사도가 초세기 이방 교회의 지도자로서
얼마나 교우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배려했는지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교우들을 대하는 사목자로서의 자세가
세상에 둘도 없이 자상한 친 아버지 그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필리 4,1)
보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존재 자신의 기쁨이요 화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표현을 들은 초세기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진심과 사랑이 가득 담긴 그런 표현들은
힘겨웠던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오늘 나는 내게 맡겨진 양들을 어떤 마음,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 보는 하루가 되길 청합니다.
귀가(歸家)의 여정
“빛의 자녀답게, 슬기롭게, 아름답게, 기쁘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시편122,1)
오늘 화답송 후렴 시편 성구는 제가 10년 전 2014년 산티아고 순례 여정 시
가장 많이 바쳤던 기도문이었습니다.
800km 2000리!
주님의 집, 산티아고 대성전에 이를수록
더욱더 힘차고 빠르게, 나는 듯 걸었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만추의 밤 하늘의 별들이 참 맑고 밝게 빛납니다.
우리 모두 별처럼 깨어 빛의 자녀답게, 슬기롭게, 아름답게, 기쁘게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여전히 계속되는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 11월 위령성월입니다.
저절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죽어야 하나?
묻게 됩니다.
허무로 끝나는 죽음의 여정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 중인 우리들입니다.
11월 위령성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성 베네딕도의 가르침대로 산다면
하루하루 선물 인생,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잘 추스르라는 옛 어른의 지혜로운 말씀도 새롭습니다.
“인간에게 쓸모없는 감정은 없다. 단지 다스리지 못하는 감정이 있을 뿐이다.”<다산>
“어진 이는 근심하지 않고, 지혜로운 이는 미혹되지 않고, 용감한 이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논어>
참으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을 진지하게 맞이한다면,
어질고 지혜롭고 용감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읽은 수녀들에게 주신 교황님 말씀이 참 신선했습니다.
흡사 교황님 자신을 두고 하는 말씀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슬픈 성인은 또 하나의 슬픈 성인일 뿐이다.
‘거룩함은 언제나 기쁘다(Holiness is always joyfull)’.
마음으로부터 솟아나는 미소를 지녀라. 거짓이 아닌 진실하고 충만한 미소를.”
어떻게 하면 빛의 자녀답게, 슬기롭고 아름답게, 기쁘게 살아갈 수 있겠는지요?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오늘 복음은 너무나 유명한 ‘약은 집사의 비유’입니다.
실직할 위기에 처한 불의한 집사의 나쁜 행실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미래를 대비한 민첩하고 슬기로운 대처방식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급기야 불의한 집사는 기름 백 항아리 빚진 이에게는 쉰으로,
밀 백 섬 빚진 이에게는 여든으로 탕감해 줌으로 미래를 대비합니다.
뜻밖에 부자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합니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입니다.
자비하신 아버지를 상징하는 너그러운 주인은 뜻밖에 불의한 집사의 행위를 묵인해 줍니다.
아마도 그는 속으로 스스로 알아서 살길을 찾아낸 불의한 집사가 고마웠을지도 모릅니다.
부자 주인에게 그만한 손실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새삼 자비롭고 너그러운 하느님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부자 주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결론이 화두처럼 우리에게 좋은 깨달음이 됩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세상 자녀들의 악한 행실이 아닌 그의 위기 시 대처방식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빛의 자녀들인 우리들은 세상 자녀들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회개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선행과 자선에 민첩하고 슬기로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유일한 바램일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 회개요 하늘에 보물을 쌓는 선행과 자선이지 죽으면 다 끝입니다.
어떻게 더 구체적으로 빛의 자녀답게, 슬기롭게, 아름답게,
기쁘게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을 살아갈 수 있겠는지요?
고맙게도 제1독서 필리비 서간의 바오로 사도가 그 답을 줍니다.
우선 속화된 세상 사람들처럼
그렇게 생각 없이, 영혼 없이, 의식 없이 육적 욕망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완전히 구제 불능의 가치 전도의 삶입니다.
이렇게 살 것이 아니라 다음 이어지는 말씀같이, 주님을 고대하며
하늘의 시민답게, 가을 밤하늘의 별처럼 빛의 자녀답게,
슬기롭게, 아름답게, 기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제 말씀으로 전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주님 안에서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새삼 지상의 우리가 향하는 곳은 본향의 하늘나라임을 깨닫습니다.
말 그대로 본향 집을 향한 ‘귀가의 여정’ 중인 우리들이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를 날로 정화, 성화시켜 주시어
우리의 비천한 몸도 서서히, 점차적으로 주님의 영광스런 몸으로 변모됨을 깨닫습니다.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시편16,11).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