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은 2
보경 박재우
고향 마을의 행정 지명은 구산동이다.
옛날, 귀산(龜山)동 라고도 하였다.
마을 뒤에는 거북이 모양의 산이 있다.
거북의 입에서 꼬리 끝까지 20 호 가량이 길게 늘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작은 마을이었다.
고향을 떠난 이도 있고 연세가 많아 돌아가셨어, 지금은 10 호 가량이 마을을 지키며 살고 있다.
마을에서 우 방향은 의성읍에서 강물이 흐르며,
좌 방향은 금성면으로 가는 구지미 고갯마루에서 강물이 흘러 서로 만나 여울목에서 잠시 쉬었다가 흐르는 낙동강 상류다.
거북이가 강의 여울목을 바라보면서 살며시 앉아 있는 형상이다.
거북이가 큰 강을 건너기 위해 준비하는 모양새이기도 하다.
준비 출발 발전을 의미한다.
거북이는 유유자적의 근성이 엿 보인다.
거북이가 강을 외면하며 산으로 올라가는 경우가 있으나, 용기 있는 거북이는 강을 건너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이다.
어떤 분이 우리 마을에 이사 와서 거북이 입 부근에 터를 마련하여 막걸리 주막집을 운영하였다.
막걸리 통은 나무로 만들어 사용했다.
플라스틱 통은 상상을 못했다.
옛날 말로 색시 주막집이다.
색시를 따로 두는 것이 아니고 안주인이 그 역할을 했다.
지금은 도로 위의 휴게소 라 하면 적당한 표현이다.
당시 교통수단은 유일한 자전거이었다.
모두 가난하였으며, 형편이 조금 여유가 있는 분의 전유물이 자전거였다.
그렇지 않은 분은 걸어서 오일 장 나들이를 하면서 잠시 쉬어가는 쉼터로 제공하기도 했었다.
외상 문화가 은근히 고개 들은 장소이다.
마을 사람들은 현금이 없어 소지할 수 없었다.
지금은 현찰 대신 카드 문화가 발달되었으나, 카드란 말은 우주의 별나라에서 생각할 수 있는 꿈이었다.
막걸리를 외상 먹고 보리쌀 등 곡물로 갚고 했다.
방아도 찧지 않고 엄마나 마누라가 장에 간 틈을 이용하여 두지간에서 몰래 퍼서 지게에 짊어지고 헐값으로 외상을 갚고 했다.
금액은 주막집 주인이 정한 대로다.
주인에게 소문 내지 않는 것을 다짐하면서 막걸리 한 사발을 대접하고 했다.
외상 값 갚으면 막걸리 한 사발 얻어먹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니 반대 현상을 자아냈다.
외상값 갚는 날 바로 뒤돌아 또 외상을 먹고 한다.
목마름에 막걸리도 먹고 싶기도 하지만, 주막집 아주머니의 상냥하고 친절함에 은근히 주막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었다.
주막집 아주머니는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
시골의 고고한 안주인의 이미지와 판이한 가면을 쓰고 주정뱅이 남정네들을 유혹하였다.
동네 어르신은 거북이 입이 잘려나가 큰일 났다면서 늘 걱정을 했다.
땅의 소유자는 모른다.
누구라도 살기 위해 허름한 집을 짓고 살면 간섭받지 않았다.
지금은 군청에서 철거 명령을 내리며 호탕하였을 것이다.
땅 소유자도 땅을 떠가지는 않을 것이겠지 하면서 지켜 보고 있었다.
마을에서도 살자고 하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격려를 하는 것이다.
그런 세상에 지금이라도 다시 한번 살고 싶다.
도로 확장 공사를 하면서 거북이 입과 귀 부위에 손상을 입었다.
문명이 지구의 지도를 변경하고 파괴한 것이다.
딱한 사정이다.
나는 고향에서 자라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큰 꿈을 키웠다.
그 강물과 친구 되어 멱(물놀이)을 하며 자연을 벗삼아 살았다.
풍수학을 적용하면 거북이 목 부분이 좋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느끼고 체험하며 살았다.
목 부분에서 자란 가정의 자식들은 많이 번창 하였으며 마을에서도 목 부분으로 이사를 가려고 하였다.
이웃 마을에서 목 부분으로 이사 오신 분도 있다.
나는 목 근처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나는 죽을 때 고향의 뒤동산 거북이 모양의 목 부분에 잠들고 싶다.
첫댓글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은 충남 천안시 수신면 백자리 한신이라는 산골로
하늘만이 빠끔이 바라보이는 촌구석이지요.
지금은 타인들이 많이 들어와 새 집 짓고 살고, 예전의 그 아름드리 느티나무도
플라타나스 나무도 사라져 썰렁하기만 합니다.
내가 태어나 국민핵교 5학년 때(그 이후 객지로 나와 떠돔)까지 살던 초가집도 사라진지 오래구요.
구龜. 제가 어렵게 생각하는 이 글자를 쓰는 동네가 또 있군요.
자신의 고향에대한 추억과, 유래와 회귀를 원하는 마음까지..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보도본부님의 고향 구산동, 산자수명하고 상서로운 곳이로군요.
설날 아침에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을 만난 듯한 느낌으로 잘 읽었습니다.
구산리라해서 반갑게 글 읽었습니다.
예전 짐바리라는 자전거에 막걸리통 십여개 싣고 주막에 배달하던 분을 보면서 감탄하곤 했습니다.
참~
내가 살고있는 동내가 구산리 입니다.
고향이 수몰되고 받은 보상금으로 집 지었다며
초대한 친구의 동네에도 구산동이라 했었는데요
충북 중평이었어요.
서울에도 구산동이 있구요...
고향마을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목 근처에 사셨다는 얘기에 덩달아
재물이 들어오는 기운을 느낍니다.
보도본부님의 글을 찾아 읽는 재미 또한
감칠납니다~
고맙습니다~
당시 막걸리는 지금 막걸리와는 비교도 아니 된 진짜
곡물로만 발효된 술이겠지요 얼마나 맛있던지
어른들이 먹고 남은 단지 밑바닥 걸죽한 것에 사카린을 타서
식혜처럼 마시고 종일 불콰해진 얼굴로 돌아 다녔지요
우리집에서 담근 것은 아닌 장복순 엄마가 담근 막걸리
여름에 시어 빠진 막걸리도 그렇게 다 먹어 없앴지요
쉬어 터진 보리밥도 싹 씻어 폭폭 끓여
사카린 넣고 먹다 보면 얼큰해지고 ㅎㅎ
참 지난한 시절이지만 그래도 아직 그 시절에서
헤어 나질 못합니다
주막이 사라지고 점방시대에서 자랐던 저입니다
주점도 가고
점방도 가고
편의점 오고
세상 모든건
가고 또 오고
그런가 봅니다
어린시절에 아버지 심부름으로
주전자 들고
막걸리를 사오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텃논길을 지나서
막걸리 할머니 집이 있었습니다.
텃논에서 참새들이 날아다니고,
논고랑에 송사리들이 몰려다니고,
어느 날은
텃논의 논두렁에
게가 기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농약을 많이하니까
미꾸라지 송사리도 거의 귀하고,
게가 논두렁을
기어다니는 풍경을 볼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저수지 물길에서는 물고기,
조개를 잡았는데
지금도 팔촌 오빠는
이렇게 자랑한다고 합니다.
" 내가 우리 동네에서
조개, 물고기를 제일 잘 잡았다"
그래서 여동생이
오빠는
우리 동네에서 공부도 제일 잘했어요"
나는 삐비 뽑기를 가장 좋아하고
우렁이 잡기,
쑥, 달래, 냉이,
나물캐기는 가장 잘했음~
명절이 되니
더욱 지난날을 추억하게 되고
그리워지네요
막걸리에 물타고
사카리타서 먹은 기억은 있어요
거북 입 거북 목
어떤자리냐에 운이 달라진다니
풍수도 거역할수 없는것인가요
낙동강 상류의 아주 정겹고 경치좋은 마을의
풍경이 그려집니다
영월에 살때 봉화와 영주일대를 가끔 갔었는데
아주 살기좋은 곳으로 보였습니다
몇년전 여름 안동 하회마을도 여행하고
돌아온적도 있습니다.
아주 멋진 곳을 고향으로 두신것 같습니다 ^^
어머나 저희 시골집 동네랑 가깝네요
의성읍에서 금성면 사이라면...
저희 고향마을은
오래 전 아버님 어릴때에 저희집과 땅이 있는곳을 효도문 이라 불렀다는데
도로변 효자마을이라 하며 도효골 이라고 저 초등때 들었고
어느 효자가 죽은뒤 작은 돌비석을 만들어 세워서 그 비석도 있는데
세상에나 도효골이 발음이 힘들어 도직골 하고 불렀는데
몇해전 시골와보니 마을입구에 도적골 이라는 이름표가 있어서 봄되면 제가 민원을 넣어 도효골이라고 바꾸도록 할 계획인데 어떤경위를 거쳐야 하는지는 알아봐야 겠네요
공무원들 너무 성의없지요
연세드신 어른께 몇마디 물어나 볼것이지
막걸리 이야기가 나오니 옛추억이 생각 나네요 초딩시절 울동네 친구집에서 친구 엄마가 술지개미를 끓여줘서 맛있게 먹고 4명의 친구가 취해서 잠이 들었었네요 친구 엄마는 장사하러 나가시고 우리 네친구는 자느라 저녁때도 모르고 각집 엄마들은 딸내미 찾느라 야단이 났었나보네요 한 8시나 되서 친구 엄마가 들어 오셔서 깨워서 집으로 돌아가게 됐는데 한친구는 바지에 오줌도 싸고 그랬네요 달달한 술지개미 맛이 있었구요 그 따스한 구들막 생각도 나는 그런 설날 밤 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