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와 맺은 화평은 실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건국이래 확장과 확장을 거듭하며 오로지 성장과 발전만을 거듭한, 혹은 그렇게 믿었던 대다수의 백성들은, 이번 패배 소식에 큰 충격과 공포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유로파에서 맹주 중 맹주라는 영길리도 아닌 노서아따위한테 질줄은 대다수의 국제정세의 현실을 모르는 백성들은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 아편전쟁의 승전보가 드넓은 청나라 전역에 퍼지는데 대략 한달이 걸렸었다면, 이번 패배 소식은 겨우 한주도 채 되지 못해 모든 청나라 백성들은 다 알게 되었을 정도로 파장이 컸다. 물론 이렇게 파급이 컸던 배경에는 반동주의자들의 책동도 있음을 알아야한다. 자유주의자들의 주도하에 노서아와 비밀화평을 맺은것을 그들이 알았을때는 이미 노서아군이 철군을 하고 있었을 때였을 정도로 그들은 정보 입수에 한발 느렸다. 노서아군이 철군을 하고 있었을때, 수도 북경에서 결전을 다짐하고 요새 건설을 주도하고 있었던 그들이니, 이런 굴욕적인 화평 소식에 얼마나 분할지 짐작이 가리라 본다. 이렇게 강경했던 그들이라 그런가, 자유주의자들의 비밀회담의 배경에는 플레이어가 있었음을 깨달은 반동주의자들은 청 왕조에 대한 실망과 충격을 넘어 분노를 자아냈다. 이렇게 쉽게나 청나라의 근간을 보호한다는 반동주의자들이 청 왕조를 상대로 적대적인 입장까지 표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슬프게도 문명화의 역할이 컸음을 이해해야한다. 수 십년동안의 문명화 과정을 거치면서 변화한것은 자유주의자들이란 새로운 세력의 탄생 뿐만이 아니라 반동주의자 구성원들의 세대교체도 있었다. 이 젊은 세대들은 기존의 세대와는 달리 문명화에 대한 영향을 좋든 싫든 받아오면서, 그들의 믿음과 충성이 점차적으로 청 왕실에서 개인의 각자의 이익으로 변화해나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변화만 놓고 본다면 그들은 영락없는 자유주의자들이라고 봐도 틀리지는 않았다고 본다. 어찌되었든, 당시의 반동주의자들은 비록 화평 체결을 막는데는 실패했지만, 체결 이후의 일인 책임 전가의 역할에는 매우 충실했다. 패배 소식을 접한 그들은 별도의 비밀회담을 가지고, 구성원들 각자가 중국 전역에다 "자유주의자들이 책략을 꾀해 청나라를 팔았다"는 소식을 전파해나가고 있었다.
이들의 계획은 단기적으로는 성공을 불러왔다. 이들이 만들어낸 소문은 청나라 전역으로 퍼져서 대다수가 이들이 조작한 내용으로 패배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자유주의자 개갯기들") 이렇게 성공적이었던 배경에는 역시나 아이러니하게도 문명화 과정에서 이뤄진 대대적인 대중 교육에 기인했다. 비록 국가적 차원에서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으나, 4억이나 되는 인구, 아니 아직은 유교적 정책이 남아있던 관계로 여성들을 제외한 약 2억명 가량의 성인과 어린 남성들을 읽고 쓸줄 아는 식자층으로 만든다는것의 발전은 여전히 미미했고, 당시 청나라의 식자층은 전체 성인 남성 1억명 중 1할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은 글보다는 말로 쉽게 선동되었고, 말로써 대중을 현혹시키는것은 글을 주 매체로 서로 소통하는 자유주의자들보다 보수, 또는 반동주의자들의 특기였다.
한편, 일부 반동주의자들은 이것에 그치지 않고, 별도로 청나라 내 각 지역별 장성진들과 접촉을 취하기 시작한다. 앞전 편에서도 언급했지만, 청나라가 문명화를 거치면서 불만을 산 것은 기존의 기득권층이었던 귀족들과 고위교육을 받고서 자라난 장교들이었다. 하지만 이 둘은 문명화에 대한 불만은 같아도 그 접근은 달랐는데, 이는 문명화 초기에 발생한 아편전쟁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전자인 귀족층의 경우, 오히려 아편의 주요 소비계층으로, 영길리의 무역상들이 인도란 곳을 통해서 공급하는 아편을 그들의 특권이자 권력을 과시할 수 있는 상품으로서 구입하면 했지, 거절하지는 않았기에, 청나라가 영길리를 상대로 승리했을때 그들은 불만이 가득했다. 물론 표출할 수 없었지만--그랬으면 아편 하나 때문에 자신의 목이 날아갈 수 있었으니. 그에 반해 장교들의 경우, 그들 스스로가 군인이었기 때문에 아편전쟁 승리의 주역이었고, 따라서 전쟁을 기점으로 그들 중 대다수는 청나라의 정책에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나머지 일부는, 비록 소수에 불과하긴 했지만--하지만 중화 스케일에서 소수란건 다른 나라에 비교할때는 여전히 다수이다(..)--청 왕조의 정책에 불만을 갖고 있었고, 오히려 문명화를 통해서 발전해 나갈수록 그들의 불만은 쌓여가면서 급기야는 청 왕조를 적대시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들의 불만을 분석해보자면 놀랍게도 문명화의 여파가 컸다고 볼 수 있는게, 대부분은 민족주의라는, 서구에서 들여온 새로운 철학의 영향을 받아 발생한것이었다. 즉, 자신들만의 고유의 민족을 대변할 수 있는 민족국가가 수립되어야 한다는 사상이 당시 청나라에서 소수민족으로 취급받고 있던 이들에게서 급속도로 퍼져가고 있었다. 여기에 특히나 영향을 받았던 것은 각 소수 민족들이 살고 있던 지역들의 장성들이었는데, 이들은 앞서 언급한 반동주의자들과 모종의 협약을 맺고 그들만의 지역 군부를 형성하는데 이른다. 그리고 청나라의 패배 소식 한달 후, 청나라 각 지역의 군부들은 반동주의자들을 통해 청 조정에 다음과 같은 요구서를 제출하기에 이른다:
근래 발생한 노서아와의 전쟁에서 청 조정 내 일부 환관들이 보인 행각은 실로 통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번에 그들이 보인 나약하고 비겁한 행동은 광활한 청나라를 다스리기에는 부족하다는것이 각 지역 군부들의 판단이며, 이에 따라 우리는 각자가 맡고 있는 지역에 대한 최소한의 자치를 비롯해, 향후 국가 기술 발전 방향을 현재의 경제와 산업 위주 학파로부터 군산복합체 위주로 변경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본 요구서에 서명을 할때부터, 그 어떠한 결과로부터 맞서싸울 준비가 되어있으나, 그런 상황으로까지 이어지지 않길 희망하는 바이다.
사실상 각 지역별 군부들로부터 온 최후통첩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요구안은 청 조정에게 있어 굴욕적이지만 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수용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고, 이에 따라 각 지역들의 군부들의 자치가 청나라란 틀 안에서 이뤄지게 된다. (코어 생성 ㅡ,.ㅡ)
한편, 노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소식은 청나라내 지식인계층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 중 조정내 자유주의자들과 연락을 취하는 이들은 이번 패배를 직감하고 있었고, 따라서 반동주의자나 일반 백성들에 비하면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문명국이 된 청나라가 패배를 했다는것에 대해서는 충격과 공포를 느끼는건 다르지 않았다. "문명국이 됐음에도 불구하고"란 데에 초점이 맞춰진것이 차이였을 뿐. 그러다보니, 이들 사이에서도 향후 방향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대로 계속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문명화를 꾀해가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가하면, 반대로 중화만의 길을 스스로 모색하자는 주장을 펼치는 이들도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주의 보급과 청나라가 문명국으로 진입하기 전, 1872년 1월 29일에 발생한 사회주의자들의 봉기에서 비롯된 입헌군주정 영국의 붕괴와 민주정 영국의 탄생이란 거대한 사건을 접하면서 청나라도 과학, 군사, 경제만 개혁할것이 아니라 사회, 정치쪽도 개혁해야한다고 역설하는 이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심지어는 무정부 자유주의자들이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투표를 통한 대중의 점진적인 정치 참여, 노예제 폐지, 아동노동의 제한 및 근절, 표현, 집회의 자유등을 주장했다.
당시 영국에서 발생한 사회주의 봉기의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영원할것만 같았던 빅토리아 여제는 시민들에 의해 강제로 왕위를 포기해야했고, 이로서 영국은 계급이나 지위를 막론하고 모두가 평등하게 한 표씩 행사하는 보통 선거와 모든 노조 결성 및 활동의 허가, 집회와 언론의 자유등의 도입으로 민주주의를 이룩했다. 수 십년 전만해도 바로 남쪽의 이웃국가에서 출발한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의 혁명을 막아보겠다고 애쓴 나라가 이렇게 똑같은 혁명을 맞이하게 될줄은 그 누구도 상상 못한, 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볼 수 있다.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움직임은 특히나 조정이 군부들에 굴복하여 그들에게 자치를 허용하면서 촉진제가 되었는데, 군부들은 자신들만의 영역 세우기를 원했다면, 이들은 청나라 전체에 걸친 자치, 즉 대중의 정치 참여를 요구했다. 물론 이들의 요구는 각 지역 군부의 이익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고, 이들간의 논쟁에서 나오는 흔한 떡밥(..)으로는 다름아닌 현 청나라의 주요 민족에 대한 논란이었다. 알다시피, 청나라는 만주족에 의해 세워진 왕조로, 만주족만이 청나라에서 유일하게 인정받고 있는 주요민족이었다. 하지만, 만주족만으로는 새로운 청나라를 끌어안기는 턱없이 부족했고, 이점은 청 조정 역시 인지하고 있었던 사안이었다. 따라서 실제로 청 조정은 문명화 과정 중에서 태평천국의 난 진압 후, 화북민들을 수용민족으로 추가하는 결정을 취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여전히 4억명의 백성들을 담당할 수 없었고, 이것이 군부들이 내세우는 자치의 논리이자 배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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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냐 이번작은 어쩌다가 플레이 도중 찍은 스샷이 있어서 이렇게 꼽사리로 넣게 되었네요 =_=ㅋ 실제 플레이하면서 발생한 이벤트나 디시젼, 행동들을 역사 풀어쓰듯이 각색하여 써봤습니다. ㅎㅎ 여기서 나오는 내용들 중 일부는 사실이지만, 다른것들은 그냥 지금 쓰면서 구상해본 스토리로, 실제 게임에서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정치플레이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각색한거졈 넵.
음.. 확실히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외몽골을 내준것은 일부러 한것인데(..), 인구수좀 줄여서 식자율 높여가지고 기술 발전을 먼저 꾀한 다음에 되찾으려고 한것이거늘, 어째 패배한것으로 평화를 맺고나니, 본문에서 서술한것처럼 군부들이란게 나타나서 코어를 만들어내지 않나, 갑자기 플레이어가 자본주의와 산업 타이쿤을 기술개발 모델로 삼았던것을 바꾸라고 하지 않나 ㅡ,.ㅡ 그 다음에는 민주화 바람이 일기 시작하는데, 참 씁슬하더군요(..) 다 중국을 위해서 하는건데(..)
첫댓글 외몽골 인구 얼마 되지도 않고(진짜 적습니다) 인구수 적다고 식자율 빨리 오르는 것도 아니고... 반란크리 생각해보면 그냥 물리치시는게 나으셨을듯...
제 전공서적보다 한줄에 들어가는 글자수가 너무 많군요...
한줄에 30자 내외로 줄이면 가독성이 좋아지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제가 빅토리아는 안해봐서 잘 모르지만 상당히 공을 들이고 계신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