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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9일 토요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제1독서 : 에제 47,1-2.8-9.12
복 음 : 요한 2,13-22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으뜸인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에
우리는 성전의 의미를 묵상하게 됩니다.
성전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머무시고 있음을 드러내는 표지이며,
주님을 만나 기도하는 장소이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게 하는 곳입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께서 머무시는 성전이기에(1코린 6,19; 2코린 6,16 참조),
우리도 이러한 성전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 몸은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주님께서 머무시도록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정화해야 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속의 정신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몸은 주님과 만나는 장소입니다.
자주 내면 깊숙이 들어가 그곳에 머무시는 주님과 만나야 합니다.
우리 내면은 주님과 만나는 장소입니다.
우리 몸은 성전이기에 언제 어디서나 내면 깊은 곳에 들어가 주님을 만나 대화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몸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야 합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처럼 큰 성당은 보이지 않는 크고 위대하신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냅니다.
주님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들도 장엄한 건축물,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식들,
웅장한 조각상들을 보면서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과 거룩함을 느낍니다.
이처럼 우리도 삶에서 주님의 사랑과 거룩함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렸을 때, 이름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제 이름의 발음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명연’인데, 늘 ‘조명현’으로 부릅니다.
(아직도 동창 신부 중에서는 ‘조명현’으로 부르는 신부가 있습니다).
이름에 받침이 들어가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르기 쉬운 이름으로 부모님께서 지어 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밝을 명(明)자와 뻗을 연(衍)자를 씁니다. 밝게 앞으로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또는 밝음을 지향하며 살라는 의미도 될 것입니다.
부모님께서 이런 생각으로 제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제대로 부르지 않는다는 이유만 불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이름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 이름대로 사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이름을 얻게 됩니다.
저의 경우, 호적에 등록되어 있는 ‘조명연’ 외에도 별명인 빠다킹,
제 신분을 나타내는 ‘신부’, 책 냈다고 ‘작가’, 강의한다고 ‘강사’ 등….
제가 하는 일에 따라 이름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름이 붙일지는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만약 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가면 ‘죄수’가 될 것이고,
사기를 치면 ‘사기꾼’, 살인을 하면 ‘살인범’….
어떤 이름을 바로 세울지는 본인에게 달려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또 환경이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값을 남이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바로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좋은 이름을 갖도록 내가 노력해야 합니다.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성전을 정화하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늘 사랑만을 이야기하셨고, 사랑을 직접 보여 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사랑과는 반대편에 있는 것 같은 ‘폭력’을 사용하십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십니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십니다.
성전은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기도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는 곳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는 곳이어야 했습니다.
단순히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우리 각자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성전이라고 불릴 수 있는 우리 각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 주신다는 표징으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면서
당신의 부활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성전이라 할 수 있는 우리 각자에게 과연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주님의 성전에 걸맞은 이름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일찍이 다윗은 주님의 현존인 '궤약의 궤'를 모실 집을 짓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유다의 멸망과 더불어 파괴되었고,
백성들은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기원전 515년에 제2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 역시 그리스 시대와 로마 시대에
종교적, 정치적 이유로 두 차례에 걸쳐(기원전 167년과 63년) 다시 유린당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 이후, 기원후 70년에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로마군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원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밀라노 칙령'이 반포되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끝나고 난 후,
324년에 황제는 자신의 별궁을 성전으로 세우고 봉헌하였습니다.
오늘은 바로 이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곧 오늘은 로마의 주교좌 성당인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타락한 성전을 정화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면서,
진정한 성전이신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제시하십니다.
곧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성전으로 내어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목숨을 거두실 때에는 성전의 장막이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됩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새가 나무에 둥지를 틀 듯이,
우리 안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신비한 동굴을 파고들어 와 앉아 계십니다.
당신의 사랑에 응답을 요청하시면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이끄시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는 존재요, 그분의 소유요, 그분의 것이 됩니다.
주인은 집을 어찌할 수 있으되, 결코 집이 주인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주인이 집을 소유한 것이지, 결코 집이 주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대성전의 봉헌을 기념하면서,
동시에 그분의 거룩한 성전으로 살아가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주님!
성령의 채찍을 휘두르소서.
아버지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삼키게 하소서.
당신이 세우신 성전의 뜰이 장사치와 도둑들의 소굴이 아닌
사랑의 열매를 나누는 나눔 터가 되게 하소서.
저의 영혼이 당신의 사랑을 경배하는 예배와 기도의 집이 되게 하소서.
제 안에 계시는 당신을 경배하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
반영억 라파엘 신부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 대성전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웠습니다.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교구장인 교황좌가 있는 대성당입니다.
대성전의 공식이름은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복음사가 대성전”입니다.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전 세계 모든 지역교회의 유대관계 안에서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불리 웁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표현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
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써 이날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몸은 성전이요, 움직이는 감실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의미를 알아들었습니다.
성전이란 특정 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 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하느님과 만나는 곳, 함께하는 곳이니 거룩한 곳입니다.
성전에서의 모든 만남이 거룩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거룩함으로 속됨을 정화해야 하고 우리의 거룩함이 세상의 속됨을 이겨가야 합니다.
그 힘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시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제대로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마지막에
하느님의 성읍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노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선민과 구원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의미는
환전상들과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에 가려져 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상점은 올리브산 언덕에 있는 산헤드린의 상점과 경쟁하기 위해
대제관 가야파가 연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네 이익과 특권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돈이 되니까 장사를 하였습니다.
성전에 예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을 잘 도와줘야 하는 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거룩한 마음이 모아져야 할 성전에서
정성껏 준비한 제물은 무시되고 부정과 부패, 착취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장사꾼들을 꾸짖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단호하게 꾸짖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심판 날에
‘손과 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질 것’이 분명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전에 하느님의 거룩한 영 대신‘돈’과 물질이 들어가서 주인행세를 하니
그 결과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예루살렘 성전도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썩으면 산천이 썩고 사람이 무너져서
종교도 무너지고 모두가 망그러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악한 행실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에 흠을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이라도
그곳에 거룩함을 지닌 백성이 없다면 이미 성전의 품위는 없습니다.
그저 잘 지어진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이 더 소중합니다.
어느 성당 기공식에서 하신 주교님의 말씀이 생생합니다.
“성전을 건축한다고 더 큰 성전인
마음의 성전이 무너지고 상처 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성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물질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있잖습니까?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며 이웃을 돌려놓기도 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며 시기 질투하고 ‘너 어디 잘되나 보자’ 하고 괘씸하게 생각도 하고…..
남의 허물에는 ‘너 정말 그럴 수 있나?’ 하면서,
자기의 허물에 대해선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고 합리화합니다.
이런 마음이 장사꾼의 소굴이죠. 주님께서는 이런 속마음을 아시고 엎어 버리시는 겁니다.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성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허물을 벗고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답게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제대로 모시고 거룩함을 간직한다면
대성전이든 마당이든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다면 어디에서든 거룩함으로 빛나야 하겠습니다.
외적인 건물의 화려함보다도 마음의 성전을 빛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기도의 찬미, 말씀 선포의 성전이 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성모님의 발현 장소로 강복하시길 청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006년 캐나다 토론토에 살 때입니다.
한국에서 온 형제님이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신부님! 이제 영어 많이 느셨겠네요?
‘원님 덕분에 나팔 분다.’라는 말을 영어로 어떻게 하나요?”
저는 그때 당황했습니다. 한참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Because of Jesus, I can live well in Toronto.”
형제님은 저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요즘 비슷한 일이 생겼습니다.
5년 동안 본당 신부로 있었던 전임 신부님이 달라스를 방문했습니다.
저하고는 동창 신부입니다. 교우들이 신부님을 따뜻하게 맞이했습니다.
신부님을 초대하는 자리에 저도 함께 초대했습니다.
덕분에 저도 즐겁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꿩 대신 닭’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신부님을 초대했는데, 신부님이 사정이 생겨서 못 왔습니다.
이왕 약속을 잡았으니, 제가 대신 자리에 함께했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된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잔치를 마련한 주인은 자리가 남으니,
길가에 있는 사람이라도 초대하라고 종에게 말했습니다.
멀리서 벗이 왔으니, 참 좋은 일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기뻐하면 기뻐할 일이 생깁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3년 후면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지금의 자리에 성당을 세울 때까지 2번의 이동이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 성당은 시내에 있는 성당이었다고 합니다.
독일계 이민자들이 세운 성당을 얻었다고 합니다.
교우들은 당시의 성당을 다운타운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공동체가 커지면서 새로운 성당을 찾았고, 임시로 성당을 얻었는데
창고처럼 생겼다고 해서 교우들은 ‘창고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교우들은 지금의 성당 터를 매입했고,
40주년이 되던 2017년에 아름다운 성전을 완공했습니다.
넓은 주차장이 있고, 성당에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있고,
공동체가 함께 머물 수 있는 친교실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운동할 수 있는 농구장이 있습니다.
지난 10월에 피정 강의를 왔던 수녀님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성당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드는 것은 성당이라는 건물은 아니었습니다.
신부님, 수녀님 집무실 앞에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사제들이 환하게 웃으면서 형제처럼 함께 찍은 사진,
수도자와 성직자가 환하게 웃으면서 함께 찍은 사진이 무척 아름답게 보였답니다.”
그렇습니다. 성당이 아름다운 건 건물 때문이 아닙니다.
성당이 아름다운 건, 그곳에서 공동체를 이루는 교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교황님들께서 지내시던 성전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오랜 박해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려 주는 성전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음을 알려 주는 성전입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성전은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와서 위로를 얻는 곳입니다.
성전은 생명의 빵을 나누는 성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성전은 성전만으로 남으면 단순히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그곳에서 신앙생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몸이 바로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몸에서 ‘가난, 순결, 순명’의 물이 흘러나오면
세상에는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몸에서 ‘믿음, 희망, 사랑’의 물이 흘러나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들레헴 성당 문에 있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여러분이 관광객으로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순례자로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주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릇은 그 안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서 가치가 더욱 드러납니다.
탐욕, 거짓, 분노, 교만을 담으면 겉은 화려해도 속에서는 악취가 날 것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을 담는다면 비록 질그릇과 같을지라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질 것입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두고 성전이라 하셨다.
조욱현 토마 신부
라떼란 대성전 봉헌 축일
라떼란 대성당 봉헌 축일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 라떼라노에 세운 대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날이다.
라떼란 대성당은 로마의 주교좌 성당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사도좌 성당이다.
라떼란 성당을 들어가다 보면 라틴어로
“Omnium Ecclesiarum Urbis et Orbis Mater et Caput,
로마와 전 세계의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며 머리”라는 글귀가 있다.
이 성당은 성 베드로 좌의 권위를 상징할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대성당의 모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성당의 봉헌 일을 기념하는 것은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시는 베드로 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이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과월절이 되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더럽히는 모든 행위를 금하시고 정화하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성전의 본 의미는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께 참된 예배를 드리며 그분의 선물을 받는 곳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형식으로 변하고, 성전이 이익집단이 모여
이권 전쟁을 하는 곳으로 변해버린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대로(大怒)하셨다.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성대한 축제이다.
이 축제를 지내기 위해서 온 세상에 흩어져있는 유다인들은
이때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며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그때 예루살렘에 모인 순례객들이 200만 명이 되었고,
제물로 바치는 양의 숫자도 30만 마리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 성전에서 제물로 바치는 가축들을 성전에서 준비한 것만 바치게 하였고
성전세도 성전에서 만든 돈으로만 바치게 하여 이런 횡포가 있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현존보다는 자신의 이익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그 모습을 보시고 노하셔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고 꾸짖으신다.
예수님의 이 행위는 유다인들에게 반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행위였다.
그래서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8-19절).
이 말씀은 당신의 몸을 두고 성전이라고 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성전을 볼 수 있다.
하나는 46년에 걸쳐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 당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성전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언제나 체험할 수 있으므로 그분이 성전이시며,
아버지와 성령께서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에 그 몸은 거룩한 성전이시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이제 어떤 의미에서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 자녀들인 우리 자신은 성령을 모시는 성전이다.
성령을 모시는 또 다른 성전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몸을,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맞는 성전으로 항상 가꾸고 보존하여야 한다.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성전이 거룩한 것처럼,
그 안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장, 성전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 자신이 성전임을 알았다면,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복음이다.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이 성전이 거룩할 때
우리 교회 공동체가 모두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으로 변화된다.
우리는 이 성전에 생명을 심을 수도 있고, 멸망을 심을 수도 있다.
그것은 언제나 나의 삶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달려있다.
항상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는 삶을 노력하여야 하겠다.
성전정화
“건물성전, 공동체성전, 개인성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하느님은 우리의 피신처, 우리의 힘.
어려울 때마다 늘 도와주셨네.”(시편46,2)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며,
12세기부터 오늘 11월 9일에 지내게 됩니다.
로마 교구의 주교좌 성당이며 로마교구 교구장은 교황입니다.
로마에 있는 성당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당이자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성당 중앙입구에는 라틴어로
“전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이자 머리인 지극히 거룩한 라테라노 성당’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현재의 베드로 대 성전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거의 천 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습니다.
각 지역교회가 로마의 모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고자
교회는 오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공동체 삶의 중심을 상징하는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사랑합니다.
바로 다음 시편 84장 고백 그대로입니다.
“만군의 주님이여,
계시는 곳 그 얼마나 사랑하오신고
그 안이 그리워,
내 영혼 애태우다 지치나이다.
이 마음 이 살이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뛰노나이다.
주여 당신의 집에 사는 이는 복되오니
길이길이 당신을 찬미하리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성전 사랑 역시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세상을 성화해야 할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성전이
속화되는 현실에 열화와 같이 분노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분노는 하느님 사랑에서 발단된 의노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가차 없이 성전을 정화하시던 주님은 비둘기를 파는 가난한 자들에게는 다소 부드럽게 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을 이해했으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행위에 이의를 제기했고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성전은 바로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았다 합니다.
건물 성전이 아닌 당신의 몸인 공동체가 진정한 성전임을 천명하신 주님입니다.
문득 매월 첫 주일 미사중 성수예식이 생각납니다.
성수예식 후 주례 사제가 성수를 성전 안 미사에 참석한 신자들이 있는 곳곳에 뿌릴 때
부르는 성가67장이 바로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에 근거합니다.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보았노라.
알렐루야, 그 물이 가는 곳마다
모든 사람이 구원되어 노래하리라, 알렐루야.”
바로 성전 정화가 3차원에 걸쳐 이뤄짐을 보여 주는 참 은혜로운 성수 예식 장면입니다.
성수 은총으로 성전 건물이, 공동체 성전이, 개인 성전이 동시에 정화됨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 3차원의 성전이 하나로 이뤄주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참으로 공동체가 성전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 비로소 온전한 성전의 실현이라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3차원에 걸쳐 동시적으로 이뤄지는 성전 정화에 성전 성화의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 다음 말씀은 그대로 세상을 살리는
풍요로운 은총의 강, 생명의 강 같은 주님의 미사 은총을 상징합니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참 아름다운 예언이 그대로 주님의 성전미사 은총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무엇보다 공동체 성전의 정화와 성화와 더불어
그 지체들인 개인의 정화와 성화도 참 은혜롭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우리를 고무하고,
참으로 거룩하게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새로이 하게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1코린3,16-17)
만남 중의 만남이 미사 전례를 통한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성전 건물은 물론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성전을 정화하고,
주님의 지체인 우리 하나하나의 성전을 정화하여
우리 모두 주님의 은총의 성전이 되어 살게 합니다.
"실로 당신의 궐내라면,
천날보다 더 나은 하루,
악인들의 장막 안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집 문간에 있기 소원이니이다."(시편84,11). 아멘.
기도 없는 성전은 건물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전세계 가톨릭교회는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기념한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324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274-337) 황제가 세워고,
실베스터 1세 교황이 축성하여 로마의 주교인 교황의 주교좌 성당으로 삼았다.
대성전에 인접한 라테라노 궁전에 4세기부터 14세기까지 역대 교황들이 거주하였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그 후 “전 세계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머리”라는 명칭으로
베드로좌에 대한 전세계 교회의 존경과 일치의 표징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2세기부터는 세례자 요한의 대성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후 수세기를 걸쳐 화재, 지진, 약탈로 말미암아 훼손된 부분을 복구하였고,
1726년 베네딕토 13세 교황이 대대적으로 증축하여
“가장 거룩한 구세주 예수”께 성전을 봉헌하고, 11월 9일을 봉헌축일로 확정하였다.
오늘날 교황은 성 목요일 주님 만찬미사를 이곳 대성전에서 집전한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예루살렘 대성전에 뒤지지 않을 만큼 웅장한 성전이다.
그리고 오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낸다고 해서
대성전의 건축물을 놓고 기념하거나 축하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은 로마의 주교인 교황의 주교좌 성당을 중심으로
전세계 가톨릭 교회의 믿음과 사랑의 일치를 기원하고 기념하는 축일이다.
오늘은 곧 하느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 신비체요,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의 축일인 셈이다.
이 축일에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성전에 관한 복음을 듣게 된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전 정화는 네 복음서 모두가 전하고 있는 사건이다.
그런데 공관복음서들이 이를 예수님의 공생활 말기에 있었던 사건으로 전하고 있는 데 비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에 두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이 정확히 어느 시점에서 발생했던간에 그 내용은 같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활 서두에 둠으로써
성전 정화의 의미가 공생활 시작과 큰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義怒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다.
그 안에 궤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야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選民과 구원을 상징하였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상징은 장사꾼들의 지나친 商魂에 가려져 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으리라.
이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한 使役의 시작에서 예수님은 빗자루를 손에 들었다.
이는 유다교를 말끔히 청소하기 위함이다.
舊約을 폐기하고 新約을 세우시기 위함이다.
무슨 권한으로 정화 행위를 하느냐(18절)는 유다인들의 비난에 맞서,
예수님 스스로가 “새로운 성전”임을 암시한다.
에수께서는 이 성전을 세우시기 위하여 이제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것이다.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 스스로가 새로운 성전이 되신다는 것은
유다인들은 물론이고, 제자들까지도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된다.
신약의 참된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어 바치는 건물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몸이다.
신약의 성전이 또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우리 자신들의 몸이다.
물론 신앙의 공동체가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며
성체성사를 거행하기 위하여 함께 모이는 성당 또한 하느님의 성전이다.
성전은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체험하고,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곳이다.
성전은 무엇보다 기도하는 곳이다.
기도가 없는 성당은 성전이기보다 하나의 건물이 되고 만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