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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이름(name)”(솀)은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구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처음에 강의 이름을 말하며 사용되었고(창 2:11~14), 아담이 살아 있는 영혼에 이름을 부른 것에도 사용되었습니다(창 2:19). 아담은 짐승과 날개로 나는 새와 생물에게 이름을 불렀습니다(창 2: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불렀습니다(창 3:20).
“하와(Eve)”(하우와)는 “살다”라는 뜻의 “하야”에서 나왔으며, “하야”에서 “살아 있는”이라는 뜻의 형용사 “하이”가 나왔습니다. 그녀는 “살아 있는 모두의 어머니”가 된 까닭에, “하와”라고 불렸습니다.
“하와”를 70인역은 “생명”(조에)으로 번역합니다. “하와”는 “삶”, “생명”을 의미합니다.
아담은 “여자의 씨”를 통하여 “생명”이 주어지리라는 것을 믿었으므로 아담은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불렀습니다.
1.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창세기 4장 26절에 “그때 야훼의 이름을 부르기에 시작하였노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부르다”(call on)라는 말은 기도와 예배 중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뜻합니다. 야훼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야훼의 이름으로 기도와 찬양을 드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긴밀한 관계를 뜻합니다.
카인의 자손들은 야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였습니다(창 4:16-24). 셋이 아들을 낳자 사람들은 야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창 4:26).
카인의 자손들은 이 세상일에 몰두하고 이 세상 문명을 발달시켰는데, 카인의 자손들 같이 전문분야에 종사하고 일을 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그들에게 문제점은 그들이 그런 일들에 종사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며 살았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카인의 자손들 모습은 오늘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열심히 일하여 자기 분야에 나름대로 최고의 전문가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들이 자기 직업으로 사회에 공헌하고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며 살았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카인의 후손들은 문명을 발달시키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목축업자가 되고 뛰어난 음악가가 되고 또 뛰어난 기술자가 되었으나, 하나님의 이름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자기 일만 열심히 하고 살았습니다.
카인의 자손들은 세상의 일에 빠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나, 셋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창 4:16~24).
셋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인류가 타락하기 전에 예배와 문화 활동이 분리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에덴의 정원과 세상이 나누어지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정원에 있을 때는 일과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가 구분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일이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에덴에 있을 때 경작하고 과일나무를 손질하고 동물들 이름도 짓고, 그 일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 자기 일과 그 일을 통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따로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죄를 범하고 타락해서 에덴 정원에서 쫓겨났을 때, 그때로부터는 자기 일과 하나님의 일이 분리되어서 카인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영원히 떠나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자기 일에만 몰두해서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이 바로 그런 삶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유명한 의사가 되어서 존중받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삶을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카인의 자손들 관심은 땅에 집중되는 문명 개발에 있었습니다. 반면에 셋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셋의 후손들은 예배가 우선이었고 삶에서 예배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뱀의 씨가 있고 여자의 씨가 있는 것이며, 카인의 씨가 있고 셋의 씨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두 가지 부류로 나뉩니다.
카인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떠나 문명사회를 만드는 일을 하며 살았고, 셋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르며 예배를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악인들은 하나님을 떠나 악한 일들을 행하며 살고 있는데, 우리는 그들과 달리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먹고사는 일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갑시다!
아브라함은 베델에 동쪽으로부터 산에 이동하고 그 천막을 고정하고, 그가 거기 야훼께 제단을 지었으며 야훼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 12:8).
야훼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예배를 가리키는 전문적 용어입니다. 하나님을 불렀다는 이 의도적인 언급은 기도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며, 이것은 그가 정식으로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창 4:26).
야훼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야훼 하나님을 예배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의 천막을 고정한 곳에다 하나님께 예배의 제단을 지었습니다.
창세기 13장 3~4절에 “그가 그의 여행들에 남방으로부터와 베델까지 베델과 아이 사이에 그 시작 안에 그의 천막이 거기 있은 장소까지 가니. 그가 만든 제단의 장소였고 그가 야훼의 이름 안에 부른지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창세기 21장 33절에 “영원의 신(神) 야훼의 이름 안에 불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영원의 신(神) 하나님의 이름 안에 불렀습니다(창 21:33).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고 하나님의 이름 안에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그 장소에서 야훼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거기에 제단을 지었고 야훼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가 거기에 그의 천막을 쳤고 그 종들이 우물을 파냈습니다(창 26:25).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은 그 당시에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색이었고, 이삭도 하나님이 나타나신 곳에 제단을 세우고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로 이어진 것입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허무에 들먹거리면 안 됩니다.
출애굽기 20장 7절에 “야훼의 이름을 허무에 들먹거려서는 안 되나니 이는 야훼는 자신의 이름을 허무에(in vain) 들먹거리는 자를 무죄로 하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들어 올린다(lift up)”라는 히브리어(나사)는 영어 성경들에 “취하다”(take)나 “오용하다”(misuse)로 번역되었습니다. “오용(誤用)하다”라는 한자어는 “그릇 쓰다”를 뜻하며, 의역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in vain) 쓰지(employ) 말라는 명령입니다.
“허무(vain)”라는 단어(샤우)는 “헛됨”, “공허”, “거짓”을 의미하며 전치사와 함께 쓰여서 “헛되게”, “공허하게”, “허무하게”, “거짓으로”를 의미합니다.
“허무(虛無)”라는 한자어에 “빌 허(虛)”와 “없을 무(無)”가 쓰였습니다. “텅 비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허무”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중요하지 아니하게” 사용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공허한 목적에 쓰는 것이 허무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고 무익하게 들먹거리면 결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경솔(輕率)하게 함부로 남용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볍게 함부로 사용하는 자에게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무죄로 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결코 허무하게 들어 올려서는 안 됩니다. 경솔하게 들먹거리면 안 됩니다. 가볍게 언급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무겁게 취급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존경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야훼의 발음을 안 하는 것으로 잘못 적용하였으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것을 그의 말씀으로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이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허무하게 들먹거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위반을 통하여 하나님을 모독할 수도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그 불신자들 안에 모독받는 것입니다(롬 2:23-24).
하나님을 예배한다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금송아지를 예배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허무하게 들먹거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행위로 나타내지 아니한다면 이것도 그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허무하게 들먹거리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말하고 행동하지는 않는 언행 불일치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입술에 존경하나 마음에 멀리하는 위선자가 됩니다(마 15:7~9).
그의 이름에 맹세하는 것도 그의 이름을 허무에 들먹거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안에 거짓말에 맹세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레 19:12).
신명기 5장 11절에 “야훼의 이름을 허무에 들먹거리지 아니할 것이니 이는 야훼께서 그의 이름을 허무에(in vain) 들먹거리는 자를 무죄로 하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짓을 숨기기 위해 사용하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반대되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擧論)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응답받지 못할 기도를 하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마음에 죄악을 품은 상태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마음에 우상을 품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사람이 그의 불의한 일에 하나님을 연루시키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써서 하나님을 조종하려 하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사람이 기계를 조종할 수 있죠. 운전할 때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차가 오른쪽으로 하고 왼쪽으로 돌리면 왼쪽으로 갑니다. 사람이 기계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으나 하나님을 움직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일종의 부적이나 주문으로써 사용하고자 시도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의 정신인 까닭에 제3계명을 위반하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공허하게 들어 올리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무가치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악용하면 안 됩니다.
대한민국의 뉴라이트(New Right)는 ‘신흥 우파’를 표방하는 이념이며 1990년대를 기점으로 주체사상파에서 우익으로 전향한 분파입니다. “New Right”를 직역하면, “신 우측”, “새로운 우파” 정도가 될 것입니다. 전광훈(1956년~)은 이런 뉴라이트 성향을 보입니다.
전광훈은 집회에서 자유 뒤에 민주주의가 붙는 자유 민주를 거론하며, “하나님 꼼작 마,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는 발언을 했습니다.
그는 악령에 사로잡혀 이러한 신성모독의 죄까지 범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지난 2019년 8월,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 대신 총회는 전광훈 목사를 교단 헌법 권징 제1장 제3조로서 본 교단에서 면직 및 제명했습니다. 전광훈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할 위험을 잘 예시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욕먹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셋의 자손들처럼, 아브라함처럼, 이삭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는 예배의 삶을 사는 복된 구원영생교회 성도들이 다 됩시다!
1) Kenneth Mathews, 『NAC 창세기 1』, NAC 성경주석, 권대영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8), 357.
2) Bruce K. Waltke, 『창세기 주석』, 김경열 옮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8), 172.
3) Gordon J. Wenham, 『창세기 1-15』, WBC 성경주석 1, 박영호 옮김 (서울: 솔로몬, 2006), 227.
4) 박종칠, 『바이블 제네시스』 (서울: 아르카, 2021), 155.
5) 박종칠, 『바이블 제네시스』, 155.
6) 박종칠, 『바이블 제네시스』, 156.
7) Victor P. Hamilton, 『NICOT 창세기 Ⅰ』, 임요한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6), 426.
8) Wenham, 『창세기 1-15』, WBC 성경주석, 497.
9) John I. Durham, 『출애굽기』, WBC 성경주석 3, 손석태·채천석 옮김 (서울: 솔로몬, 2011), 462.
10) 김회권, 『신명기』, 한국장로교총회 창립 100주년 기념 표준주석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7), 134.
11) Eugene H. Merrill, 『NAC 신명기』, NAC 성경주석, 신윤수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20), 170.
12) Merrill, 『NAC 신명기』, 171.
14) 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A%B4%91%ED%9B%88
15) 위 사이트.
첫댓글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잠 15: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