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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0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제1독서 : 1열왕 17,10-16
제2독서 : 히브 9,24-28
복 음 : 마르 12,38-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정성을 눈여겨보십니다.
부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서 얼마씩을 넣었지만, 과부는 생활비를 모두 봉헌하였습니다.
만일 교회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 봅니다.
평신도는 성직자가 아닌 모든 신자를 뜻하고,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들이,
봉헌은 제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봉헌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얼마씩만 봉헌하는 부자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봉헌이 과부의 봉헌과 같게 되려면
교회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평신도들도 자신을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예전에는 성직자나 수도자처럼 봉헌을 서약한 이들만 주님께 봉헌할 수 있었고,
교회에 주어진 사명에 대한 책임도 그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의 사명은 평신도를 포함한 온 교회의 책임이며,
온 교회 구성원이 헌신하고 봉헌하여 함께 이 사명에 참여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물론 새로운 교황님 한 분이 일으키시는 변화가,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바꿀 만큼 영향력이 매우 큽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신앙인이 그 변화에 함께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바뀌지 않습니다.
새로 부임한 한 사제가 본당 공동체의 변화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당 신자들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바뀌지 않습니다.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모든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자신을 봉헌하고
교회의 선교 사명에 책임을 다하여 참여하는 주님의 일꾼이 되기를 주님께 청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벤저민 프랭클린을 아십니까?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고, 미국 화폐 100달러에 새겨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많은 발명품을 만들었습니다.
피뢰침, 다초점 렌즈, 민간형 비행기, 뇌파 측정기, 홀리 그램 기술 등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발명품에 전혀 특허를 내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발명품을 통해 큰 혜택을 누리고 있듯이
자신의 발명품으로 타인을 도울 기회가 있음에 감사해야 하며
이러한 봉사를 거리낌 없고 아낌없이 행해야 한다.”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재산은 실제로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정당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인생철학은 ‘선(善)은 나누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시대의 큰 어른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미국 100달러에 새겨진 것이며, 지금도 많은 이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성직자로 사는 저도 금전적 문제에 자유롭지 못했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사실 본당 부채가 많아서 신자들에게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늘 ‘돈’을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러면서 주님께서 칭찬한 사람은 여유 있는 가운데 봉헌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생활비 전부를 봉헌했던 과부였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성전세와 십일조세를 받아들이기 위한 성전 금고가 마련되어 있고,
이 금고에는 열세 개의 헌금함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자진해서 내는 헌금함으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적이었습니다.
당연히 부자는 많이 넣고 가난한 이는 조금밖에 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돈을 많이 넣고 그 대가를 얻습니다.
즉, 많이 헌금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바치기보다 자기에게 바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두 렙톤을 넣었습니다.
렙톤은 그리스 화폐 중 가장 작은 단위로,
성인 노동자 하루 일당의 64분의 1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올해 최저임금이 9,860원이고, 하루 8시간 일한다고 하면 78,880원입니다.
이의 64분의 1이면 1,233원이 나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남들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이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도 생활비 모두를 다 넣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헌금을 받을 때 돈의 액수를 따지지 않고
그 바치는 마음을 헤아리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먼저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쓰고 남은 것을 드리는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선(善)을 나누어야 합니다.
나눌 수 없는 이유보다 나눌 수 있는 이유를 봐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나눔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주님께서 나머지를 채워주십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가을의 끝자락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이 가을엔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이 가을에는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내 욕심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소리 없이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맑고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집착과 구속이라는 돌덩이로
우리들 여린 가슴을 짓눌러
별처럼 많은 시간들을 힘들어 하며
고통과 번민속에 지내지 않도록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풋풋한 그리움 하나 품게 하소서.
우리들 매 순간 살아감이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
누군가의 어깨가 절실히 필요할 때
보이지 않는 따스함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안아 줄 수 있는
풋풋한 그리움 하나 품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말 없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사랑'이라는 말이 범람하지 않아도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간절한 사랑을 알아주고 보듬어주며
부족함조차도 메꾸어 줄 수 있는
겸손하고도 말 없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정녕 넉넉하게 비워지고
따뜻해지는 작은 가슴 하나 가득
환한 미소로 이름 없는 사랑이 되어서라도
그대를 사랑하게 하소서.
평신도 주일인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봉헌’의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엘리야는 이방인 시돈 여인 이세벨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우상숭배를 전념시켰던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에게 예고한 3년간의 가뭄이 진행될 때,
시돈 지방의 사렙다의 한 과부집에 들어가 물 한 모금과 먹을 것을 청합니다.
과부는 자신과 아들이 마지막으로 먹을 수 있는 한 끼니 분량의 밀가루와 기름밖에 없었는데도,
음식을 청한 엘리야의 요청을 따랐으며,
엘리야의 말대로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복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렙톤 두 닢을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높이 칭송하십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그러니 '렙톤 두 닢'은 비록 액수로는 작지만,
‘자신의 전부를 담은 사랑의 크기’인 ‘내면적 헌신의 외적인 표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제1독서의 사렙다의 과부가 마지막 음식마저 내어주었던 것처럼,
자신이 가진 ‘생활비 모두’를 내어놓았습니다.
단지 다른 점은, 제1독서의 사렙다의 과부는 엘리야의 요청에 따르는 믿음을 보여주었고,
복음의 가난한 과부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전부를 내놓았습니다.
어쩌면, 제1독서의 사렙다 과부는 타인을 위하여 내놓았다면,
복음의 과부는 자신을 위한 감사헌금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사렙다 과부’에게는 나눔의 의미가,
‘가난한 과부’는 속죄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 둘 다 모두, 마치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통째로 내어놓으셨듯이, 자신의 전부를 봉헌했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많이 하여야 한다’는
돈 모금을 위해 제시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참된 봉헌’이란 무엇일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봉헌의 참뜻’을 일깨워주십니다.
곧 '참된 봉헌'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봉헌예물의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향의 순수함’에 걸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곧 이 가난한 과부들의 마음은 헌금의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과 ‘그 진실성(순수성)’에 있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는 마음의 진실성’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몸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칠 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사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의 몸도, 재물도, 마음도,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 전부를 봉헌 제물로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오늘 하루도 '산 제물로 드리는 진정한 예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2독서는 더 나아가서, '산 제물'의 신학적 깊은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대사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대사제의 직무로서 당신 자신을 다른 이들을 위한 사랑의 속죄 제물,
곧 다른 이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제물로 봉헌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단 한 번’으로 온전하고 완성된 속죄 예식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바로 이러한 '산 제물'로 바치는 진정한 예배,
‘살아있는 진정한 사랑의 예배’가 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주님!
제 마음의 지향을 깨끗하게 하소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게 하소서.
전부를 내어놓은 가난한 과부처럼, 목숨을 내어놓은 당신처럼,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오직 당신이 저의 전부이오니, 전부를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계산법을 달리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늘 불안하고 또 부족합니다.
이 시간 하느님께서 사랑의 마음을 키워주시고
더 많이 헌신할 수 있는 은총을 내려주시길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을 기쁨으로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회는 하느님을 섬기는 곳이지 돈을 벌기 위한 장소는 아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 하느님을 섬기기보다 돈의 노예가 된 사람이 있다.
성직자들이 돈에 얽매인 것을 보면 매우 슬프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물질에 대해서 좀 더 초연할 수 있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셨는데
마침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았습니다.
부자들은 여럿이 와서 큰돈을 넣었는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렙톤 두 닢은 오늘날 200원 정도 되는 아주 적은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큰돈을 넣은 부자들을 제쳐두고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마르12,44).
부자들은 가진 것의 ‘일부’를 내었고, 가난한 과부는 있는 것‘전부’를 바쳤습니다.
‘일부’는 그 액수가 얼마든 ‘전부’보다 결코 많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가졌다 해도 소유물이 그것을 소유한 사람보다 크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과 함께 자기 자신을 바친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바친 것입니다.”
우리는 헌금을 할 때 ‘각자 자기 분수대로 하면 되지’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분수나 여분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하느님께 바쳐져야 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써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것을 잠시 관리할 뿐입니다. 관리자이지 소유자가 아닙니다.
계산법을 달리하면 값이 달라집니다.
어떤 기업인이, 대통령이 자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재단을 설립했는데
그 재단의 돈을 자기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사용하며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도록 해놨습니다.
겉모양은 환원이지만 속을 보면 재산축적입니다.
세계 부자 워렌버핏은 재산(440억달러)의99%를 기부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자기 부인이 운영하는 자선재단에 기금을 기부하지 않고
세계 부자 2위인 빌게이츠재단에 거금을 기부했습니다.
자기가 운영하는 재단, 부인의 재단보다
가슴이 따뜻하고 더 잘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부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합니다.
과부의 헌금에 대한 말씀은 가족의 생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재산을 다 팔아 성당이나 교회에 바치는 것이 최고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재산이나 시간, 근심 걱정, 내면의 상처,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까지도 봉헌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헌신을 뜻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 삶의 첫 자리를 차지하셔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사렙다 마을의 과부는 극심한 가뭄으로 고생하다가
마지막 남은 음식으로 아들과 함께 그 음식을 먹고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렵고 고통스러운 처지에서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그러고는 생명과도 같은 마지막 음식을 자기들이 먹지 않고 그에게 바칩니다.
그는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대접했는데 그로 인해
그 집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습니다”(1열왕7,16).
그는 그야말로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천사를 대접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넘치는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 과부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하느님을 믿지 않고 음식만을 의지했다면
아마도 한 끼의 음식을 먹고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렙다 마을의 과부는 배고픔과 굶주림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 예언자에게 사랑을 베풀어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사렙다의 과부는 자기 자신을 다 바침으로써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반드시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붓지 않나 보아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말라기3장10).
반드시 갚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행함을 통해서 약속을 지키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함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은혜가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사도행전에는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사도2,44- 4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것을 내놓음으로써 하느님을 찬양하고
구원받을 사람이 늘어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이 세상에서 잠시 관리할 뿐입니다.
생각해 보면, 하느님께서는 알몸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다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몫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십일조라는 것은 물질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하루 24시간 중에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시간, 말씀을 실천하는 시간을 말입니다.
또한 공간도 살펴보십시오.
우리 집이 넓은데 주님과의 만남을 위한 공간을 특별히 배려하고 있는지요?
그저 십자고상을 걸어두고 성모님을 모셔놓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시간과 공간, 물질, 하느님께서 주신 탈랜트를 봉헌하는데
결코, 인색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도 하느님께서 흔들어 넘치도록 주신다는
약속을 믿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수학 시간에 ‘공약수와 교집합’을 배웠습니다.
공약수는 두 수 사이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수를 의미합니다.
교집합은 두 개 이상의 집합에서 공통으로 포함된 원소들로 이루어진 집합을 의미합니다.
즉, 두 집합에 모두 속한 원소들의 모임이 교집합입니다.
사람들은 문화나 역사가 다르더라도 인간으로서 공통된 가치를 지닙니다.
예를 들어, 사랑, 정의, 평등과 같은 가치들은 인류의 공약수와 같습니다.
여러 사회와 문화가 다르게 작동하지만, 그 안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가치가 바로 공약수입니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다문화 사회입니다.
각기 다른 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생기는 ‘교집합’은 새로운 통찰과 발전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에서 배울 수 있고, 공통의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서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공동체 형성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교집합을 통해 사회가 더욱 풍요롭게 발전합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공약수와 교집합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도 공약수와 교집합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서로의 가슴에 총을 겨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가슴에 장미를 달아 줄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교회에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인 하느님께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사랑을 주십니다.
성부인 하느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성자인 하느님은 몸소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성령인 하느님은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효경, 굳셈, 의견, 지혜, 지식, 통달, 두려움의 은사를 주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최대공약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합니다.
성직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성사를 집전합니다.
병자를 위해 기도하고, 마귀를 쫓아냅니다. 예언의 직무, 성사의 직무, 봉사의 직무가 있습니다.
수도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사람입니다. 수도자는 복음 삼덕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정결, 순종, 청빈의 삶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평신도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평신도를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믿음이 강했던 백인대장을 칭찬하셨습니다.
회개하고, 가진 걸 나누었던 자캐오를 칭찬하셨습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는 모두 같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최대공약수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동반자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는 두 명의 과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과부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미망인입니다.
남편이 없기에 가정도 돌봐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합니다.
특별한 직업이 없다면 과부들의 생활은 궁핍하고 힘들기 마련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과부들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보여준 과부의 용기와 사랑의 실천은
그 뒤에 과부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습니다.
어떤 것일까요.
첫째는 올바른 가치 기준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나의 개인적인 욕망을 따를 것인가 또는 나의 욕망을 희생하고 타인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요구를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 순간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이며
이러한 문제에 직면할 때 우리 안에 어떤 가치 기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선택하기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수양이 필요합니다.
비록 올바른 가치 기준을 내 안에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충동적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평소 나의 기준에 따라서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이 충동에 의지하게 되는 경우를 만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만지고 싶은 욕구를 자제하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셋째로 기도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이기려고 노력하고 남을 위해서 우리의 재능을 제공하려는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는 많은 내면적인 어려움을 만나게 되고 결국 실패하고 말리라는 두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기도로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올바른 가치 기준을 확립하고 끊임없이 자기 수양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께 꾸준히 기도 한다면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고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쩌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더욱 아름다운 겁니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모든 것을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과부의 헌금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전례의 주인공들은 가난한 두 과부이다.
두 과부는 하느님 앞에 믿는 이들의 상징적 표상이다.
하느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부(富)는
많든지 적든지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마음의 부(富)이다.
즉, 자비로움이 부이며, 어떤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항상 불행이요 가난이다.
우리는 사렙타 과부에게서 두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보다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고자 하는 자비로운 마음,
즉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물을 끊어버리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우리에게 남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까지도 요구하실 수 있는 하느님의 사자로서 그 예언자를 믿는 마음이다.
이것으로 그녀는 애덕을 실천하였으며 그것으로 몇 배의 보상을 받는다.
모든 것을 주는 사람은 모든 것을 받는다고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말했다.
“나는 이 집 저 집 문전걸식을 하며 어떤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찬란한 빛의 황금마차가 나타났다.
나는 왕 중의 왕이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기쁨으로 가득 찼다.
나는 희망에 벅차 있었고 ‘불행한 날들은 다 지나갔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분의 자선을 기대하면서 먼지 속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는 동전을 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차가 내가 있는 곳에 와서 멈춰 섰다.
그분의 시선이 나에게 와 멈추면서 미소를 지으면서 그분은 마차에서 내렸다.
나는 내 인생의 행운이 왔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분은 즉시 나에게 오른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내게 무엇을 줄 수 있겠느냐?’ 거지에게 왕이 동냥하다니 될 말인가?
나는 어리둥절하여 얼떨결에 내 식량 자루에서 조그만 곡식 한 톨을 꺼내 그분에게 드렸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나는 내 자루에 든 얼마 안 되는 곡식 중에서
금으로 된 작은 곡식 한 톨을 발견하고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나는 비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나는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릴 용기를 갖지 못했었을까?’”(R. 타골).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부의 동전에 관한 이야기가
율법학자들에 대한 가혹한 표현과 직접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겉꾸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대우받기를 원하면서도 뒤로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는다.”(40절).
이렇게 위선에 가득 찬 율법 학자들과 단순하고도 충만한 과부의 믿음을 비교하고 있다.
과부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까지도 바쳤다.
두 번째로 과부의 봉헌은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의 행위였기에
아무런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사심 없는 봉헌이었다.
가난하였지만 가진 것 모두를 하느님께 바쳤다.
헌금 궤 앞에 계신 예수께서는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다.
거기에 나오는 부자들의 행위는
하느님께 제물을 봉헌한다기보다는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는 자세였다.
반면에 과부는 겨우 동전 한 닢 값어치인 렙톤 두 개를 바쳤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녀를 칭찬하신다.
생계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을 다 바쳤기 때문이라고 하신다(44절).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삶과 진실성을 요구하신다.
과부는 자기의 삶과 마음을 봉헌했고,
부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서 모아들인 것일지도 모르는 것의
부스러기를 바쳤을 따름이다.
히브리서에서 역시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새로움에 대하여 발전시키고 있다.
구약의 사제들은 매년 소나 양을 제물로 바쳤지만(히브 9,25),
예수께서는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봉헌하시어
죄를 이기신 후 천상의 성소로 들어가셨다(히브 9,26).
그리스도께서는 오늘의 두 과부와 같이
모든 것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드릴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당신을 사랑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어
죄에 대한 승리를 드러내시는 분이 될 것이다.
두 과부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신, 그리고 말없이 완전히 봉헌하신
예수님 공생활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E. Schweizer, Il Vangelo secondo Marco, Brescia 1971, p.274).
오늘 두 여인의 모습에서 자비로운 마음과 믿는 마음을
즉 신앙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것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당신의 모든 것을
즉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삶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오늘의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비로운 마음과 신앙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청하여야 하겠다.
중시, 경시, 무시가운데 나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오늘 연중 제32주일의 첫째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은 가난한 과부의 봉헌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와 비교되는 부자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부자가 주인공이 아니라면 오늘 연중 제32주일의 주인공은 과부란 말인가요?
부자보다는 과부가 주인공인 것은 맞습니다.
세상에서는 부자나 한다하는 사람이 주인공이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고 주님에게는 부자보다 과부가 주인공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부자보다 과부가 주인공인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헌금 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시는 주님은 누가 더 많이 내나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내는 사람을 반기고 사랑하고 중시하는 눈으로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누가 더 겸손하게 그리고 사랑과 정성으로 봉헌하는지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최고 주인공은 보고 계시는 주님이시고,
과부를 중시하시고,
과부의 얼마 안 되지만 전부를 봉헌하는 그 봉헌을 높이 치하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런 치하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녀야 할 시각을 가르쳐 주시는데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여전히 비 복음적인 시각 곧 세속적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주님의 공동체라고 하는 데에서도 주류와 비주류가 있고,
주류에 속한 사람과 비주류에 속한 사람이 있으며,
주류에 의해 비주류는 경시나 무시를 당하는 일이 빈번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속적인 시각은 주류가 비주류를 경시하거나 무시합니다.
경시와 무시는 하지 않더라도 연민의 눈으로 보곤 합니다.
제가 저를 봐도 일생 관구장이나 원장을 많이 하였으니
주류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는데 의도하지 않았어도
주류적인 시각으로 비주류를 보고 판단하였으며
경시와 무시는 하지 않았더라도 연민의 눈으로 보곤 했지요.
그런데 연민의 눈은 경시와 무시보다는 낫지만
미천하고 비천한 이를 중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미천한 이들이 늘 가운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가운데에 세우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가운데에 세우셨으며,
그들 가운데 계셨고 늘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미천한 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그들 가운데 계셨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미천한 이들을 늘 중시하고 높이 올리셨습니다.
이런 주님을 찬미하는 대표적인 분이 마리아십니다.
마리아 찬가는 이렇게 노래하지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고 내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고 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 불리셨습니다.”
미천한 이를 연민의 눈으로 굽어보실 뿐 아니라
들어 높이시는 주님임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부에게서도 배우고 주님께도 배워야 합니다.
과부에게서는 미소할지라도 온 사랑과 정성으로 봉헌하는 것을 배우고,
주님께는 미천한 이를 경시나 무시하지 않고 중시하는 것을 오늘 배워야겠습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오늘 복음은 유대교의 律士와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을 대조해 보입니다.
율사는 거짓 신앙인의 標本이고, 과부는 참 신앙인의 龜鑑으로 나타납니다.
율사는 사람들과 다른 服裝을 하고, 그들로부터 인사 받기를 좋아하며,
모임에서 윗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들은 과부, 곧 약자들의 家産을 등쳐 먹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 길게 기도합니다.
율사는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로부터 대우받으며,
많은 수입을 올려 재물을 늘리는 그 사회의 기득권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주목하신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
곧 그 시대 통용되던 화폐의 최소 단위인 동전 두 닢을 헌금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시대 과부는 노동력을 지닌 남편이 없어서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입니다.
그런 과부가 하느님을 생각하며 가진 것을 모두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그가 믿는 하느님은 관대하신 분, 그래서 자기도 관대하게 행동하였습니다.
율사는 유대교 안에서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던 사람이지만,
실제로 오늘 복음이 이야기하는 율사는 자기 자신을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사람들로부터 대우받아야 하고, 자기가 재물도 많이 가져야 합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기 위해 처신합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말하지만, 그 마음은 인간의 욕심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오늘의 과부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신분도 아니고, 가진 재물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경지를 넘어섰습니다.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은혜롭고 관대하신 분이라, 자기도 은혜롭게 또 관대하게 처신하려 합니다.
하느님은 계시고, 우리의 생애가 끝나면,
그분 앞에서 우리의 삶을 精算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라면,
하느님은 현재 우리의 삶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그 하느님은 우리가 죽어서나 만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재도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현재 보이지 않는 분을 보고 있는 듯이”(11,27) 사는
그리스도 신앙인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삶의 원천으로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하시는 일을 배워 실천하며 그분의 자녀 되어 삽니다.
그분은 자비롭고 사랑하시는 분이시기에, 그 자비와 사랑을 실천할 때,
그분은 우리 생명의 원천, 우리의 아버지로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가진 것을 모두 헌금함에 넣은 오늘 과부의 이야기를
교회에 헌금 많이 바치라는 뜻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會堂의 헌금수입에 관심을 전혀 갖지 않은 분이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유대교 당국이 성전이나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헌금을 강요하는 것을 비판하셨습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재물을 모아서 이 세상에서 삽니다.
현대인은 그것을 위해 저축도 하고 보험에도 가입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칭찬하신 것은 가진 돈으로 자기 未來를 보장하려 들지 않고,
하느님을 생각하며 자기의 손안에 있는 것마저 선뜻 내어놓는 관대한 그 여인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그 관대함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맡기고,
자기의 생계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로 사도는 서간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제 할 일을 하는 것 그리고 제 손으로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시오.”(1데살 4,10-11)
“누구든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시오.”(2데살 3,10)
하느님을 믿는다고 인간으로 자기가 할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에 대한 경고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생활인으로 자기가 할 일을 당연히 합니다.
신앙인은 자기가 처한 여건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또 자기와 이웃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만 생각하고 인간으로 자기 할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더 나은 세상과 더 나은 생활 여건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셨다.”(1,27)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창의력을 살려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의 그런 노력은 인류와 이웃을 위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망에만 집착하면,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小人이 됩니다.
大義를 살려 일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게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비난하시는 율사는 자기만 생각하는 소인입니다.
그는 하느님과 인류를 보지 못하고 자기가 누리는 것에만 골몰합니다.
돈과 명예가 나빠서가 아닙니다.
그런 것에 대한 집착은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곧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기의 이웃을 위해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재물과 명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유를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서」 8장에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율법의 이름으로 그 여인을 돌로 치려는 유대인들의 무자비한 손아귀에서
그 여인을 구출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2)
이웃을 살리고 돕는 마음에 진리가 있고,
그런 마음이 참으로 자유로운 하느님 자녀의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을 자기 삶의 原泉으로 삼고,
그분의 진리를 배우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자비롭고 사랑하십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비와 사랑을 사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면서,
예수님은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 실천 때문에, 그분은 그 시대 유대교 기득권자들로부터
죄인으로 판단 받고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그 여인의 작은 실천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읽었습니다.
그 여인은 베푸시는 하느님을 따라 그분의 관대하심을 실천하였습니다.
하느님이 관대하셔서 예수님도 관대하게 행동하셨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로부터 대우받고, 致富하며 사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가르친다면서 인간이 행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小人輩들이 꿈꾸는 신앙입니다.
하느님을 찾고, 배우는 사람은 그런 소인배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자유로운 마음 안에 그 자유의 원천으로 살아계십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