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순번이 왔고 나의 이름을 부르며 진료실로 들어오라는 멘트가 있자 곧장 진료실로 들어갔다. 50대의 담당의의 다정스러운 음성의 인사를 받고 나도 이내 답례와 함께 담당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담당의는 지금까지 내가 받은 검사 자료를 컴퓨터 화면을 내가 보일 수 있도록 방향을 돌려 보여 주면서 나의 상태를 낮은 목소리로 염려스러운 표정과 함께 어쩔 수 없이 말하는 심정으로 몇 가지 설명과 함께 나의 병을 말하였는데 췌장암 말기라는 조직 검사에서 나온 결과를 알려 주었다. 그 말은 내게 마치 법정에서 재판장이 죄인에게 사형선고하는 것처럼 들려 왔다. 나의 몸은 긴장과 함께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후에 담당의의 덧붙인 말들이 있었지만 나는 특별히 기억나지 않았고, 굳이 생각해 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제 나 홀로 몰(歿)의 길에 서 있는, 잎이 전혀 없는 앙상한 가지에 황량한 광야에서 차디찬 쌩쌩거리는 바람에 앙상한 몸통을 움츠리며 서 있는 말라서 죽은 나무 같음을 느꼈다.
대부분 환자가 아내 또는 남편, 또는 자녀 그리고 형제나 부모인 보호자와 함께 내원한 경우인데 나만 예외적인 것처럼 혼자서 검사 결과를 보려고 진료실에 있다는 것에 세상에 혼자 내버려진 것 같았다.
정확히 나의 부모에 대해서도, 가족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보육원에 내가 왜 있게 되었는지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때가 되자 그곳을 나와서 그냥 나의 생계를 위해 일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다르지 않게 살아왔을 뿐이다.
가족이 없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외롭다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가정을 이루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었고, 누굴 사랑하거나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도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날그날 생명이 있으니 살아왔다고 할까, 다만 후회스러운 것은 나의 소중한 몸을 관리를 잘하지 못한 심판을 받고 있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동안 살아온 세월에서 나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 지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저 살아가기만 하였다.
이제 내게 있는 지극히 유한하고 결정된 시간을 위해서 나의 인생을 위해서 최대한 시간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난생처음으로 교회라는 곳과 절에도 가 보았고, 목사나 신부, 스님의 얘기를 들어 보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경건하게 기도하면 자신이 원하는 바가 성취될 것이라는 간절함이 있는 것 같았다. 전 세계에서 수십억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런 바람으로 기도하지만 그런 기적이 일어난 사례를 나는 알지 못했다.
신자들의 바람은 대부분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이지만 종교의 주목표는 사후의 천당이나 극락이 가서 사자가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기도하는 것이지만, 신자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자기 생명의 끝, 죽음이 자기 삶의 종결이라고 받아 드리는 것보다 죽음 이후의 저세상의 피안의 삶이 있기를 관념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관념은 현실이 아니고 인간이 사는 세상은 관념을 체화하한 관습과 전통이 자리 잡고 있으며. 관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도 없고 증명된 적도 없지만, 세상은 관념이 오랜 세월 동안 사실처럼 사람을 지배해 왔다.
일단 종교 서적을 파는 서점을 찾아서 성경책을 한 권 구했다. 그리고 이내 나의 아파트로 돌아와서 읽었다. 경건한 마음도 없이 글자의 무미건조한 그대로 읽었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였다는 말로 시작하여 이 지구라는 땅에 생명이 존재 하기 전에 환경이 간단히 설명되었고 생물들이 존재하게 된 순서가 열거되었다. 마지막 여섯째 날에 사람이 창조되었고, 그 사람에게 에덴동산 중앙의 한 나무의 실과를 두고 먹으면 죽게 되는 것을 인간이 선택하도록 했다.
인간 첫 여자는 뱀의 제안을 받고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고 남편인 남자에게도 일부분을 주자 첫 남자도 먹었다. 이내 하느님이 그 부부를 심판하였다. 마치 내게 담당의가 췌장암 말기 판정을 한 것처럼 그들에게 죽음이 선고되었다. 그 선고의 말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첫 사람 남녀에게 죽음의 선고 이후,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얼마를 살다가 죽었다는 내용은 있어도 그들이 죽어서 어떤 고통을 받는 다거나 천사처럼 하늘에 가는 지위 상승을 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많아지자 악은 땅에 가득했으며, 하느님은 땅에 사람을 멸할 것이라고 노아에게 알려주며,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고 방주가 완성되자 홍수로서 인간 사회를 멸한다. 그때 심판을 받아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그들의 죽음 이후의 삶에는 아무런 말이 없다.
곧바로 인간 역사는 홍수 후에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해 민족과 종족과 언어별로 흩어져 세계 여러 나라가 존재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이집트의 속박에서 탈출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기술되며, 이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전히 악한 일들을 행하여 하느님의 진노를 싸게 되고 일세기에 들어와서는 로마의 속지가 되어서 로마에 저항 하다가 결국은 살아남은 사람은 로마제국의 여러 지역으로 노예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내가 찾으려 하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어떤 말도 없었다. 죽은 자의 상태는 매우 현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인생에게 주셨도다.”라고 한 말은 인간이 삶을 영위 하는 곳이 이 땅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증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같은 구절에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 리로다.”는 기록은 죽은 후에 인간은 의식적인 어떤 삶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죽은 자는 무의식이고 존재가 아니라는 이런 구절도 있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이라.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그렇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록은 죽음이 어떤 것인지 명확히 알려 준다. 흙은 무생명이고 무존재다.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지기 전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인간이 흙으로 창조되었다면, 인간의 본질은 물질인 것이며, 물질인 인간에게 땅을 주었다는 합리적이고 당연한 사실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인간 존재의 죽음 후에 어떤 의식적인 삶이 없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으로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는 인간의 호흡이 끊어지면 생명력은 없어진다는 극히 현실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바로 이 현실적 사실을 거부할만한 근거를 누가 주장할 수 있겠는가?
다만 죽은 자에게 있는 희망이 예수와 마르다라는 여자와 대화 기록에 나와 있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렇지만 이 희망은 마지막 날이라는 특정한 때를 말하고 있다. 그 마지막 날 부활이 언제를 가리키는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또 바울이라는 1세기의 한 유대인 그리스도인은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서 자신에 대하여 변호할 때 부활의 희망을 말하였는데,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 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 부활의 희망,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희망은 특정인에게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의인과 악인에게까지 공평하게 열려 있다. 다만 의인이 먼저 나오기 때문에 좀 더 나은 위치에 있을 수 있다. 누가 하느님이 보기에 의인인가? 그것은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결정하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나는 혹시나 악인의 부활이라도 죽음 후의 희망을 생각해 보았지만 죽음 후가 아니라 현실이 내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제 나의 생명이 남아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 치료에 매달려 병원에 입원하여 생활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자연적 치유 방법으로 자연에 널려 있는 약초들로 치료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자연인으로 사는 방법이 아니라 내가 다닐 수 있는 곳을 여행하면서 자연 치료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내가 가진 것을 다 현금화하여서 그것을 여행 자금으로 쓰기로 했다. 그러면 나의 생명의 끝날 때까지 여행 자금은 충분하지는 못하더라도 되지 않겠는가?
톨스토이가 마지막 구도의 여행 중에 생을 마감하였듯이 나와 세계와의 만남과 교제로 생을 마감하리다.
현실을 떠난 저세상의 삶에 대한 관념에 대해서는 완전한 절교를 위해서 내가 현실로 맞닥뜨리는 세계와의 만남과 교제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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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