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그늘 / 신경숙
우리가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사랑은 영원해도 대상은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아야 했을 때,
사랑이란 것이 하찮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영원을 향한 시선과 몸짓들이
어느 날 꿈에서 깨어난 듯이
사라져버리다니, 멀어져버리다니.
사랑을 오래 그리워하다보니
세상 일의 이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생성과 소멸이 따로따로가 아님을,
아름다움과 추함이 같은 자리에 있음을,
해와 달이, 바깥과 안이,
산과 바다가, 행복과 불행이.
그리움과 친해지다보니
이제 그리움이 사랑 같다.
흘러가게만 되어 있는 삶의 무상함 속에서
인간적인 건 그리움을 갖는 일이고,
아무 것도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을
삶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으로 받아들이며,
악인보다 더 곤란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그리움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게 됐다.
그리움이 있는 한
사람은
메마른 삶 속에서도
제 속의 깊은 물에 얼굴을 비춰본다, 고.
사랑이 와서,
우리들 삶 속으로 사랑이 와서 그리움이 되었다.
사랑이 와서 내 존재의 안쪽을 변화시켰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 신경숙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 문학동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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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디장조 2악장 - 9분 - 바이올린 힐러리 한 연주
Brahms -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77 - II. Adagio
https://youtu.be/NybHEWVhZs4
아버지의 마지막 하루 / 정호승
오늘은 면도를 더 정성껏 해드려야지
손톱도 으깨어진 발톱도 깎아드리고
내가 누구냐고 자꾸 물어보아야지
TV도 켜드리고 드라마도 재미있게 보시라고
창밖에 잠깐 봄눈이 내린다고
새들이 집을 짓기 시작한다고
귀에 대고 더 큰 소리로 말해야지
울지는 말아야지
아버지가 실눈을 떠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시면
활짝 웃어야지
어릴 때 아버지가 내 볼을 꼬집고 웃으셨듯이
아버지의 야윈 볼을
살짝 꼬집고 웃어야지
가시다가 뒤돌아보지 않으셔도 된다고
굳이 손을 흔들지 않으셔도 된다고
가시다가 중국 음식점 앞을 지나가시더라도
짜장면을 너무 드시고 싶어하지 마시라고
아니, 짜장면 한 그릇 잡수시고 가시라고
말해야지
텅 빈 아버지의 입속에 마지막으로
귤 향기가 가득 아버지의 일생을 채우도록
귤 한 조각 넣어드리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기 때문에 죽음이 아픈 것이라고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아는 사람은 다 안다고
- 정호승 시집, 여행, 창비, 2013.
https://youtu.be/fRL447oDId4
벽 너머 남자 / 김해자
가끔 공동 수돗가에서 만나면 사알짝 웃기도 했는데,
마당 끝에 있는 변소 앞에 줄 서 있기라도 하면
출근길 그 남자 미안한 듯 고개 숙이고 지나갔는데,
어느 차가운 밤 골목 입구에서, 고구마 냄새나는 따뜻한 비닐봉다리 안겨주고 도망치기도 했는데,
충청도 어디 바닷가에서 왔다던가 사출공장 다닌다던가
기침 소리, 라면 냄새 다 건너오던 닭장 집,
얇은 벽 너머 함께 살았지.
벽 하나 사이 두고 나란히 누웠던 그 남자
느닷없이 죽어, 하얀 보자기 씌워져 실려 가고서야 알았지.
세상에 벽 하나 그리 두터운 줄 벽 하나가 그리 먼 줄
말이나 해보지, 벽이나 두드려보지,
죄 없는 벽만 쥐어박다 손때 묻은 벽 앞에 제상 하나 차렸다네.
고봉밥에 무국 고사리나물 도라지나물 해서
떡 사과 배도 얹고, 밥상 걸게 바쳤다네
이왕 가는 길 힘내서 가라고,
그 겨울 내내 벽 앞에 물 한 그릇 올렸다네
추석이 낼모레, 십이야 고운 달빛 아래
마른 고사리 데쳐놓고 도라지 흰 살 쪼개며
삼십 년 되어가는 옛이야기 풀어놓는 여자
웃어나 줄 걸 따뜻하게 손이나 잡아줄 걸
그까짓 여자 남자가 뭐라고 죽고나면
썩어 문드러질 몸땡이 그까짓 게 다 뭐라고
그때 그 더벅머리 어미뻘 되어가는 여자
나잇살 차곡차곡 채워가며
산골짝 처녀귀신으로 늙어가네
- 김해자 시집. 해자네 점집, 걷는 사람, 2018
컵밥 3000 오디세이아 / 최영효
노량진 입구에 컵밥집이 도열해 있다
여기는 마이너 천국, 메이저는 떠나고
쌩기초 초짜들끼리 리그 없이 겨루는 일합
3분에 해치우는 게 컵밥의 특명이다
빠르고 싸고 맛있는 레시피를 개발하라
청춘은 맨발이라서 서서 먹는 간편 특식
합격해도 삼천 원 떨어져도 삼천 원
10급에서 11급 된 삼수생도 삼천 원
컵밥에 공짜는 없다, 절망은 팔지 않는다
유산으로 대 받을 보증수표 한 장 없어
부도날 신분을 감출 약속어음도 아예 없다
정실과 밀실은 잊어, 낙하산 청탁도 버려
껍데기 발라내고 무릎뼈로 걸어오라
흙수저 탓하지 말고, 금수저 욕하지 않는
청춘엔 깨지고 터질 실패의 자유가 있다
- 최영효 시집, 컵밥 3000 오디세이아, 작가,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