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기 99년 11월 22일 토요법회, 김제원 교무님 설법
[선진열전-삼산 김기천 선진님]
[대종경 인과품 21장]
한 걸인이 김 기천에게 복을 지으라 하매, 기천이 묻기를 [내가 복을 지으면 그대가 나에게 복을 줄 능력이 있느냐.] 하니, 그 걸인이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기천이 말하기를 [어리석은 사람들은 흔히 제 개인이 살기 위하여 남에게 복을 지으라 하니, 그것이 도리어 죄를 짓는 말이 되리로다.] 하였더니 대종사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기천의 말이 법설이로다. 세상 사람들이 복을 받기는 좋아하나 복을 짓는 사람은 드물고 죄를 받기는 싫어하나 죄를 짓는 사람은 많으니, 그러므로 이 세상에 고 받는 사람은 많고 낙 받는 사람은 적나니라.]
한 걸인이 김기천에게 복을 지으라고 했다고 했는데 앞 뒤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익산에 그 당시의 불법연구회 회관이 있는데 어떤 사람, 걸인이 들어온 거에요. 먼저 사무실에 들어와서 복을 지으라고 하니까 사무실 직원이 돈을 조금 줬어요. 그러면 갈 줄 알았는데 다시 밖에서 인부들 감독을 하고 있는 삼산님한테 가서 또 복을 지으라고 똑같은 말을 했던 겁니다. 삼산종사님께서 듣다가 내가 복을 지으면 그대가 나한테 복을 질 능력이 있느냐고 되물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할 말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사셨다고 그래요. 그분이. 그래 놓고 보고를 한 거죠. 가고 나서 삼산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어리석은 사람은 흔히 제 개인이 살기 위해서 남에게 복을 지으라고 그렇게 한다. 오히려 복을 지으라는 그 말이 죄를 짓는 말이다 하였더니 대종사께서 기천의 말이 법설이다. 무슨 법설이냐? 인과에 대한 법문이라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법을 받기는 좋아하지만 복을 짓는 사람이 드물고 라고 하셨습니다. 복 받기 싫어하는 사람 있나요? 손들어 보세요! 그런데 복 받기는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복을 받으려면 복을 지어야 하는데 잘 짓나요? 누구나 복 받기를 원하니까 복을 잘 지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받기는 좋아하는데 짓기는 싫어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죄는 받기는 싫어하나 죄를 짓는 사람은 많다라고 하셨습니다. 죄는 누구나 받기 싫어한다. 그런데 받기 싫으니까 죄를 안 지어야 하는데 죄를 짓는 사람은 많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싫어하는 고 받는 사람은 많아 버리고 좋아하는 낙 받는 사람은 많은 게 아니라 적다. 이것은 무슨 말이에요?
제가 지난번에 말씀 드렸을 텐데 범부와 성자의 큰 차이를 몇 가지 말씀 드리자면 범부는 유아로 살아요. 나를 위해 살죠. 내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성자는 무아로 생각해요. 성자들은 무아가 나다라고 생각하죠. 경제적으로 말씀 드릴게요. 범부들은 경제원칙으로 삽니다. 경제학으로 말한 최소의 노동으로 최소의 투입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둔다. 이것이 범부입니다. 경제원칙, 최소 노동으로 최대를 거두겠다. 일반 사회에서 경제적 원칙은 이 말이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진리 원칙으로 보면 최소를 들였으니까 최소로 받는다 이겁니다. 물론 원리를 알고 방법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그러나 어떻게 최소로 한 사람이 최대로 받겠습니까? 이것을 범부는 몰라요. 최소로 했으니까 최소밖에 못 받죠. 불보살은 지은대로 받는다. 바로 인과인 겁니다. 범부들은 인과에 대해서 불량한 생각을 가집니다. 조금해서 최대한 효과를 보려고 합니다. 또 범부와 목표가 다릅니다. 범부들의 목표는 유아가 목표에요. 내 소아만, 자기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범부입니다. 그러니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로 거두려고 하는 거죠. 불량 심보입니다. 근데 성자들은 지은대로 받는 것을 알기 때문에 최대로 짓습니다. 나를 키울수록 세상에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아는 대아잖아요. 유아로 살 것이냐, 무아로 살 것이냐. 그럼 이 갈림길이 있는데 하나는 인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인과를 믿는 사람 또는 성리 공부를 해서 견성해서 인과를 터득한 사람, 인과를 활용하는 사람 달라요. 인과를 믿지 않는 사람은 요행술을 많이 좋아하죠. 사행성이 강해요. 게임, 경마, 잡기, 주식, 다단계 이런 걸해요. 다 범부들이 하는 짓입니다. 복권! 적은 돈으로 많이 받겠다. 불량한 생각이죠. 그런데 불보살들은 절대 그런 것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하면 말리죠. 여러분 복권 당첨되는 망하는 길이에요. 그 많은 사람들이 당첨되겠다는 원력이 뭉친 돈을 내가 다 받았으니 얼마나 업, 액을 많이 받겠습니까? 망하려고 작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과의 이치입니다. 실제로 복권 당첨되어서 잘 사는 사람이 없어요. 그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어요. 첫째는 액을 받아 버렸기 때문에, 즉 내가 짓지 않고 받아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은 인과적으로 재앙을 받아버린 것이다. 두 번째는 삶의 태도가 바뀌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삶의 개선이 나오겠어요. 목표도 달라요. 목표가 재, 색, 명리입니다. 어떻게 돈을 많이 벌까? 어떻게 예쁜 여자를 얻을까? 토끼 같은 아이들을 낳고, 어떻게 남들보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명예를 얻어서 군림하고 내 뜻대로 여행 다니고, 돈 써보고, 놀아볼까? 이것이 범부들의 생각이에요. 이런 사람들은 육도를 윤회해요. 대종사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셨어요. 옛날 우물이 있습니다. 우물에 도르래를 달아 놓았습니다. 옛날에 대종사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저것이 딱 중생들이 육도하는 것과 비슷하구나 하셨습니다. 도르래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남들이 보면, 경찰이 옆에 있으면 누가 지켜보면 그때 조금 착한 일을 합니다. 하지만 누가 없고, 누가 안보면 불량한 짓을 합니다. 중생들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계속 쳇바퀴 돈다 그러셨어요. 불보살들은 육도생을 넘어서서 대자유세계라는 거죠. 범부들은 행복을 쫓아가는데 기다리는 것은 죄고이고, 성자들은 기다리는 것이 복락인 겁니다. 오지 마라 해도 복락이 옵니다. 범부들은 재색명리를 쫓아갈수록 도망가 버리죠. 성자들은 자기 할 일만 하는데 재색명리가 알아서 오는데 오히려 귀찮아. 성자들의 방식은 오토매틱의 방식이에요. 왜냐하면 인과가 있기 때문에 정당한 일을 하고 나면 알아서 다 오는 겁니다. 시험도 합격하고, 명예도 오고. 그러나 범부들은 최소한 노력으로 최대 효과를 얻으려고 하니 오히려 쫓아갈수록 도망가 버리죠.
고혜경 교우가 출가해서 간사 시작할 때 적어준 말이 있어요.
아사법생(我死法生), 법생아생(法生我生)
아사법생해라. 너를 죽여라. 그리고 법을 살려라. 그러면 법도 살고 너도 산다.그러나 만약에 너의 습관과 욕심, 너의 감정을 죽이지 못하고 나라는 것이 나와서 그것을 죽이지 못한다면 너는 결국 어렵다. 어떤 사람이 성직자를 바라볼 때 이익 챙기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유아주의로 산 사람을 지도자로 따르겠습니다. 간사라는 것이 딱 중간선이에요.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사냐, 부모, 국가, 사회, 주위 인연으로부터 전부 돈만 받고 삽니다. 밥 먹고 설거지 안하고, 돈을 벌지 않고 돈을 쓰고. 여러분은 엄청난 타력을 받고 살죠. 범부들은 자기 코만 석자입니다. 자기밖에 몰라요. 근데 그 생각이 완전히 180도 바뀌어야 합니다. 나부터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공부터, 대중부터, 타인부터, 전체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사법생입니다. 쉽게 말해서 출가했다는 것은 범부세계가 아니라 성자세계를 가겠다는 것이에요. 작은 나를 놓아버리고 욕심의 나, 습관의 나, 감정의 나, 업력의 나 이것을 던져버리고 빈 마음으로 전체의 나로, 큰 나로, 밝은 나로, 이타적인 나로 전환해라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 제일 어려운 것이 이것입니다. 이것에 비해 다른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나를 이기는 것, 극기라고 하죠. 극기복례라고 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뉴스 많이 보잖아요. 뇌물 받는 공무원, 교수들. 그것은 욕심의 자기, 자기를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그만큼 이기기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까 복을 다 받기는 좋아하고 죄를 받기를 싫어하는데 왜 복을 지을 때는 도망가나요? 지난주에 김장을 했어요. 난 우리 청년, 학사생들이 다 올 줄 알았는데 다 갑자기 학교 수업이 많아지고 몸도 아프고 일도 많아지고. 내가 한가하면 복 짓는 것이 아니에요. 시간이 있고 가진 게 많아서 봉사하고 희사하는 게 아니에요. 마음이죠. 마음만 있으면, 시간 쪼갤 수 있고요. 마음만 있으면 돈 절약해서 잘 쓸 수 있어요. 친구 중에 죽은 사람이 있는데, 그 친구는 학창시절에 나이키 신고 그랬어요. 그런데 탁구치고 빵집가면 내가 돈을 다 내요. 그 친구는 안내요. 자기 쓰는 데는 고급으로 쓰고 같이 쓰는 데는 일체 안 쓰는 거예요. 그러면 나중에 사람들이 그 친구를 서서히 안 부르죠. 그럼 그 친구는 세상 사람들은 다 못된 사람이구나, 사회를 원망하고 사람들을 그렇다고 판단하게 되죠. 내가 나에게 어떤 존경과 환호를 받거나 혹은 원망과 무시를 받는 것은 먼저 나를 봐야 합니다. 나를 봐야 해요. 어떤 사람이 밥 먹고 누구 무시하고 살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이 밥 먹고 할 일없이 누구 칭찬만 하고 싶겠어요. 그 사람이 하는 것을 그대로 비추는 것뿐이에요. 물론 오해할 수 있겠죠. 그러나 대체적으로 맞습니다. 그때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거죠. 여러분 받을 때 싫은 사람 있어요? 선물 받고 나도 좋더만. 그러나 받는 것을 싫어할 필요는 없어요. 그렇다고 너무 좋아할 필요도 없어요. 받는 것을 너무 좋아하면 내생에도 그게 박힙니다. 어릴 시절의 아이들 보세요. 어떤 애기는 누구한테 잘 갖다 줘요. 어떤 애기는 움켜지고 절대로 안주는 애기가 있어요. 다 전생에 하는 일인 겁니다. 전생의 일이 뭐냐, 바로 여러분이 하는 행동입니다. 나는 임원 안 해, 나 그것 못해요. 다 그것이 그대로 저장되는 것입니다. 본인이 노력해서 착한 사람과 노력할 것도 없이 착한 것이 베여있는 사람 누가 더 수월할까요? 잘 안 웃는 사람이 학원에서 웃는 것을 배웠어요. 웃었어요. 안 웃는 것보다 좋지만 안 웃다가 웃으면 모두 어색하죠. 복도 안 짓다가 갑자기 착한 일을 하려고 하면 나도 어색하고 그 사람도 어색해요. 그런데 자연스럽게 그게 되도록, 기질 변화가 되셔야 합니다. 이 중에도 어떤 사람은 용을 써야 복을 짓는 사람이 있고 그냥 네 하고 복을 짓는 사람이 있어요. 눈 다 감아보세요. 나는 어떤 사람인가 누가 나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때 일단 도와주고 싶은 마음인가 내 것부터 생각하기 바쁜가. 일차적으로 누구나 내 것부터 생각하는 게 맞아요.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에요. 내 것부터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해하는 것이 있어요. 다 그러리라 생각해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손들라고 할 때 일단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사람이 더 많았어요. 법회에 찾아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도와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요.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오히려 그런 사람을 바보로 알죠. 세상에서는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바보에요. 우리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속지 않고 남 안 도와주고 내 것부터 챙기는 사람이 영리한 사람이고 똑똑한 사람이다라고 교육시키는 부모님도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에는 본래 그 안에 텅 비어 있습니다. 공입니다. 그 텅 빈 주변에는 선과 악 중에 선이 훨씬 많습니다. 하지만 이 사회에는 선이 훨씬 적을까요? 그것이 우리 의식세계, 표층세계, 표면의식은 색의 세계에요. 그리고 욕의 세계입니다. 욕계, 색계의 세계는 선심이 적습니다. 그러나 무색계에만 들어가도 선심이 많아집니다. 여러분들이 본래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거기까지 가는 수양력이 없는 겁니다. 거기까지 가는 것을 접하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거기까지 간 사람들을 가까이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욕계, 색계가 너무 많은 사람들은 수양력이 많은 사람들을 바보같이 보입니다. 서로 비웃기도 합니다. 마음내부 깊숙이 편할 때는 그 사람들을 가까이 하고 싶어요. 대종사 말씀이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욕심이 많을 때는 대종사 말씀이 왜 그렇게 부담되는지요. 나와 전혀 다른 말 같은지요. 그것은 대종사 말씀이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에 욕계, 색계가 자리를 잡게 되면 그 안에 깊이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 안에는 원래 텅 비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텅 빈 주변에 선심이 훨씬 많아요. 그 바깥으로 올수록 악심, 욕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죄업이 강하면, 자아가 강하면 그 층을 뚫지 못해요. 이것을 뚫는데 오래 걸립니다. 나부터 생각하는 사람은 자력이 중요해. 자력 생각밖에 안 해요. 타력이 자력인지를 몰라요. 자력이 자력인지만 알아요. 오히려 진짜 자력은 타력이 자력인 사람이 진짜 자력인 겁니다.
여러분이 죄와 복을 짓는데 첫째는 자기 마음으로 죄와 복을 짓습니다. 두 번째는 나는 잘하려고 하는데 주변인연에 의해서 죄와 복을 짓습니다. 예를 들어, 주변 인연에 따라 땅을 샀는데 땅 값이 뛰거나 땅 값이 내리면 내 죄복과 상관없이 또 타력에 의해서 죄복을 받기도 하는 겁니다. 여러분 인연복이 좋아야 합니다. 사실 그 인연도 더 들어가면 내가 짓는 겁니다. 이생만이 아니라 전생도.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여러분 나이가 들어서 휴대폰에 전화번호가 1000명 이하다라는 것은 그 사람 절대 큰 일할 사람 아닙니다. 1000명도 안 되는 인연으로 무엇을 할 겁니까. 30, 40세쯤 되면 1000명은 넘어야 합니다. 너무 많아도 좋지 않죠. 그래서 두 번째 죄복은 타력, 인연에 의해서 죄복을 짓고 받는다는 겁니다. 그 다음 세 번째는 내가 지은 바가 없는데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잘 모르죠. 갑자기 잘 풀리거나 갑자기 잘 안 풀리는 것. 이게 진리에 의한 죄복, 사은님에 의한 죄복입니다. 여러분은 어떻다고 생각해요? 본인이 복이 많다고 생각하세요? 적다고 생각하세요? 이중에도 천차만별입니다. 복도 여러 가지입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 인연 복 있는 사람, 건강한 몸, 인물이 좋은 복 등 여러 가지 있습니다. 지혜도 모두 각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에 지혜가 있는 사람, 언어가 발달한 사람 등 다양합니다. 그것도 더 들어가면 전생에 자신이 해온 것은 쉽습니다. 그것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요, 법신불 사은님에 의한 갑작스러운 죄복, 갑자기 죄복을 받는 것이 있어요. 또는 나는 별로 노력을 안 했는데 인연이 자신을 도와줘서 갑자기 부자가 될 수도 있고. 결국은 첫 번째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인연도 내가 관리한 것에 의한 것이고, 사은님에 의해 받는 것도 내가 모를 뿐이지 우연한 것은 없습니다. 숨어있다 나온 것일 뿐입니다. 잘 살고 못하는 것은 세세생생 불공 잘하고 못함에 있다고 대종사님께서 표현하셨습니다. 불공도 어떤 불공이냐, 어떤 사람은 내가 할 일을 잘하면 그것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대종사님께서는 대사회불공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복과 혜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행복은 지혜를 함유한 것을 말해요. 최종은 복이에요. 대종사님께서는 개인의 행불행을 넘어서서 가장 영원한 혜복이요, 진정한 혜복의 길을 내놓으셨어요. 그것이 바로 삼학팔조 사은사요입니다. 삼학팔조는 자기의 혜복을 말하는 겁니다. 자력으로. 사은사요는 대타관계의 혜복입니다. 아까 누가 땅 좀 사라고 한 것이 대타관계입니다. 대타관계에서 내가 과거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받는 죄복이 있어요. 그것이 다 대타관계입니다. 그것이 사회적으로도 있어요. 그 사회적으로 한 것이 사요입니다. 사요의 첫째가 자력양성, 지자본위. 자력양성과 지자본위는 내 자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신문을 봤는데 어떤 미국사람이 박사 논문을 썼는데 한국 조폭 문화에 대한 연구였어요. 조폭 문화에 대해서 박사학위를 땄어요. 미국사람이 논물을 쓰기 위해 낮에는 경찰, 검사를 만나고 밤에는 건달을 만나고 그렇게 한 거예요. 이 사람이 양 쪽에서 그렇게 논문을 작성했어요. 서울은 22개 조폭 명단과 인원 수, 제주도는 3개, 대구는 8개인가 300명 정도 있어요. 조폭들도 두목 회의를 한다고 합니다. 그 조폭 문화에서도 두목이 있고 두목 모임할 때 실무 부두목들도 회의를 한다고 합니다. 철저히 지자본위하는 것입니다. 즉 실력 없는 조폭은 절대 두목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중간에 다 떨어져 나간다고 합니다. 사은사요가 다 평등사회를 만들자는 것이고, 가장 행복한 낙원세계를 만들자고 하는 것인데 평등을 하려면 이 중에 차별이 있어야 합니다. 즉 지자와 우자를 차별 두는 것이 가장 행복이라는 것이에요. 평등 세계에도 선평등과 악평등이 있어요.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것을 강제로 뺏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주자라는 것이 평등을 주장했지만 악평등인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당신이 부를 축척한 것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에 의해서 했으니 같이 한번 잘 살아 봅시다 라는 기부 문화로 갔어야 하는데 세금으로, 부동산으로 강제로 뺏는 것이 사요를 공부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내 자력을 기르려면 자력양성과 지자본위를 해야 한다. 지자본위라는 것은 나보다 강자에게 반드시 스승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구하는 것에 따라 지자를 삼아야 합니다. 제가 한화 이글스의 김성근 감독을 좋아합니다. 그 분께서는 진리를 아시는 것 같아요. 진리는 어디에 있냐? 현장에 있다. 이 현실 세계에 있다는 것을 아시는 분 같습니다. 그 분이 맡은 모든 팀이 다 성장하고 철저하게 지자본위 합니다. 바로 그것이 평등이기 때문입니다. 어중간하게 평등을 주장하면 안 됩니다. 내가 정말 복을 많이 받으려거든 먼저 자력을 양성하고 그 자력이 있는 지자에게 가까이 해라, 사회에서는 멘토, 원불교에서는 스승이라고 합니다. 지자본위는 벌이 꿀을 모으듯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벌은 이 꽃, 저 꽃 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꿀을 만들면 됩니다. 배우는 자는 이것저것 가리지 말고 구하는 데 따라 스승 삼아 배워라. 그러면 내 자력이 커진다. 또한 내 복이 증진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다음 타자녀 교육, 공도자 숭배입니다. 이것은 대타관계입니다. 자력을 길러서 타인에게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 복이 향상 된다는 것입니다. 그 첫째가 타자녀 교육입니다. 내 자식만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자식들도 교육시키자는 것입니다. 우리 학사가 그런 일환입니다. 교육기관이 그런 곳이죠. 그 다음이 공도자를 숭배하라는 것입니다. 공도자를 비난하면 안 됩니다. 헌담하고 시비하면 안 됩니다. 원불교의 신앙자는 타자녀를 교육하고 공도자를 숭배하는 것이 신앙의 의무이에요. 여러분이 영원히 잘살고 싶으시거든 삼학 공부를 해서 이 삼학이 취사로 나타날 때 이렇게 대사회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야 인연의 타력을 입고 사은님의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 첫째가 바로 자력양성과 공도자 숭배입니다. 자력양성과 공도자 숭배는 복이 되는 것입니다. 또 내가 지혜가 있어야 하는데 지혜는 지자본위와 타자녀 교육을 해야 합니다. 내가 지혜를 개발하고 밖에 지혜 있는 사람과 인연을 맺어서 지혜를 배워라 이 말씀입니다. 내가 자력을 양성해서 복을 만들어내고 또 밖으로 복을 짓고 있는 그 공도자를 가까이 해서 배우고 신법을 체 받아라 그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그 스스로도 자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주위의 인연에 의해서도 엄청나게 복을 받는 것입니다. 지자를 멀리하고 공도자를 비난하고 여러분, 어떤 단체든 망하는 단체는 바로 이런 단체입니다. 우자가 큰소리 치고 지자는 숨어버리고, 공도자는 서로 안 하려고 하고 도망가고 공도자를 비난하고. 이런 집단은 망하는 집단입니다. 원불교가 소속된 집단은 그러면 안 됩니다. 서로 회장을 하려고 하고 서로 회장을 박수 쳐주고. 내가 단장이 아니지만 단장이라는 마음으로 살고, 회장이 아니지만 내가 회장이라는 마음으로 사신다면 그 사람이 주인일 겁니다. 회장이 아니라서 나는 편하다. 이건 아닙니다. 어떤 조직이든가 지자본위 해야 합니다. 조폭뿐만 아니라 안암교당도 마찬가지고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자가 본위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문화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지자가 되려면 자력을 양성해야죠. 지자를 본위해야 하고, 공도자를 숭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타자녀 교육을 해야죠. 함께 집단 지성이 커나가야 합니다. 그 사람은 진짜 복이 있다 말할 수 있습니다.
자, 삼산종사에 대해 조금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삼산님은 원기 13년에 최초의 견성인가를 받으신 분입니다. 대종사님보다 한 살 많으세요. 46세에 장티푸스로 열반하셨습니다. 이 분이 지은 글, 끼친 공덕은 엄청 납니다. 교단 초창기에 정산종사로 인해 많은 사람이 공부심이 증장되었고 주산종사로 인해서 공부심이 증장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이 삼산종사에 의해 공부심이 증장되었습니다. 삼산종사는 17세부터 훈장을 하신 분이에요. 인물도 좋습니다. 이 분은 정말로 구도심이 있었어요. 항상 연마하셨어요. 그래서 아까 문답을 하실 때 끝까지 패스한 사람이 이 삼산종사였습니다. 그래서 교단에도 견성을 하려면 성리 공부없이 수양 공부없이 견성은 못한다고 보면 됩니다. 한 때 재수로, 한 때 역량으로 박수는 받을 수 있으나 안 됩니다. 견성은 정으로 주고받는 것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것은 다 정으로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명예도 권리도 교화도 정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으로 못하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견성입니다. 견성은 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정이 없으면 또 안 되는 거죠. 견성이 스승간의 정이 없으면 견성이 되지 않을뿐더러 정만으로도 견성이 되지 않습니다. 정이 법으로 승화시켜 내서 견성을 하고 견성을 하고 나면 그 견성은 다시 정으로 꽃을 피우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구조입니다. 삼산종사의 외손자가 세 사람이 다 출가했습니다. 삼산종사님이 깨달으면서 쓰신 교리송, 심월송 등이 있습니다. 깨달음은 얻으면 시가 그렇게 솟아오르나 봅니다. 지금 현재 부산 지역 사람들은 삼산종사의 인연, 은혜를 입었다고 보면 맞습니다. 왜냐하면 부산교화의 시초는 삼산종사님입니다. 처음 전라도 종교가 경상도가서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삼산종사님께서 워낙 도력이 깊으셔서 나중에 대환영을 받습니다. 교당이 많이 생기고 출가자도 배출되고 이것은 삼산종사님의 공덕입니다. 깨달은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삼산종사님은 출가위시죠. 아까 질문한 것 들어보셨죠? 어떻게 하면 견성하는지. 여러분들이 돈 받을 일이 있습니다. 많은 돈을 빌려줬습니다. 어떻게 돈을 받을까하고 돈을 받기 위해 날마다 연마합니다. 견성과 나와의 관계 이것을 알면 의두를 하게 되어 있고 스승에 신맥을 대게 되어있고 정성들이게 되어 있죠. 그런데 나와의 관계를 몰라. 밥 먹으면 사는 것을 알기에 잘 먹습니다. 그런데 참나를 깨쳐서 참나로 살겠다 하는 것에 대한 확실한 나와의 관계를 모르면 좌선도 안하고 의두도 없고 지갑에 돈만 가지고 다니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몸한테 져서 자신의 본능에 충실히 살죠. 그것은 자기와의 관계를 몰라서 그런 겁니다. 정말 구도심이 있고 참나를 깨쳐서 죄복을 자유롭게 할 것 같으면 때로는 참아야 하고 강한 인내력이 있어야 합니다. 경계에 다 무너지면 언제 내가 힘을 얻을 것입니까? 내가 진짜 복 있게 살려고 하시거든 나 혼자 잘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 아니라 자타력간에 잘 살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고 그것이 혜만 있어도 안 되고 복만 있어도 안 됩니다. 복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가 조물주가 되어서 주위 인연도 내가 만들어가고 사은이 우연히 주는 복까지도 받을 수 있는 그런 큰 복혜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문답]
[문-이호원 교우]
대부분의 사람의 경우에 자기가 짓지 않았다는 불합리한 차별에 의해서 받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고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에게 결국에 이것은 당신 인과 때문이다라는 것을 믿게 해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답-김제원 교무님]
인과를 공부하지 않고 어떻게 인과를 믿고, 인과를 신앙하고, 인과를 받아들일까요? 그러니까 대종사님께서 이 세상에 제일 급한 것이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이치를 믿고 깨닫게 해주는 것이 제일 급선무라고 하셨습니다. 아까 강연에서 약자를 도와주고, 학교를 지어주고 하는 것 좋습니다. 그것이 결국 낙원세계를 위한 것인데, 낙원세계는 바로 훈련으로 이루어집니다. 훈련을 통해서 인과를 신앙하고 영생의 참자기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바로 불생불멸을 알려주기 위해 삼학공부를 하는 것이고 인과를 알려주기 위해서 사은사요를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안에 모든 것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결국 모두가 함께 하는 일입니다. 아까 질문에서 시스템에 의해 불합리한 차별이 있지 않느냐고 하셨죠? 맞습니다. 그러나 그 시스템이 생기게 된 것도 크게 놓고 보면 유아가 있고 무아가 있고 또 나를 국한 지은 나가 있고 함께 문화 속에서의 나가 있어요. 또 업을 지을 때도 스스로 짓는 업이 있고 함께 지은 업, 공업도 있습니다. 우리 한국사회에 살면서 우리도 함께 업을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방금 그 질문은 작은 나로 볼 때의 질문인 것입니다. 나는 작은 나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한 질문은 작은 나로써의 질문입니다.
[문-심도원 교우]
대산종사법어를 공부하다가 육근이 육진을 왕래할 때 물들지 아닌 다는 문구가 있었는데 어떻게 표준인지 공부해야 할지 여쭤봅니다.
[답-김제원 교무님]
안 이 비 설 신 의 - 육근
색 성 향 미 촉 법 - 경계
육근이 안이비설신의입니다. 이것이 경계를 만납니다. 안은 색을 만납니다. 눈으로 색깔을 보죠. 귀는 소리를 듣습니다. 내가 갑자기 누구를 지적해서 너는 왜 그렇게 예쁘냐고 했을 때 그 들은 사람은 식을 일으킵니다. 코는 마취를 담당합니다. 독일에서 사람을 잡을 때 가스를 넣어서 코로 잡았습니다. 코를 잡으면 마취가 돼서 뇌의 활동에 문제를 일으키는 겁니다. 이 귀는 감성을 담당해요. 목소리 좋은 남자를 만나면 여자분들 좋아하죠? 목소리 좋은 남자 노래 들으면 너무 좋죠? 배드민턴 이용대 아시죠? 아주머니들 이용대 너무 좋아합니다. 이용대의 색이 너무 멋있어, 그러니까 너무 멋있다는 식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 다음 설은 귀하고 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안에 신경이 뚫려있어서 연결되어 있는 것이죠. 여러분이 제일 기분 좋고 제일 빈정 상하는 게 무엇인가요? 이 두 개가 연결되었을 때 제일 기분 좋거나 빈정 상하는 거예요. 설은 맛만 보는 것이 아닌 입 구까지 같이 들어갑니다. 또 먹는 것. 미식가인 친구가 있어요. 참 잘 먹어요. 귀도 똑같아요.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은 트랜지스터 음악을 들어요.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은 진공관으로 듣습니다. 진공관으로 듣는 사람은 트랜지스터로 못 듣습니다. 귀가 그래요. 신은 감촉이나 촉감입니다. 몸으로 촉감을 느끼죠? 이용대와 살짝 닿았습니다. 이용대의 촉감이 살짝 느껴졌는데 이용대가 전생의 인연인가보다 합니다. 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는 안이비설신 5가지를 하나로 묶어서 색이라고 하고 의를 나눠서 수상행식이라고 표현합니다. 또 반야심경에는 조견오온개공 그러죠. 이것이 핵심입니다. 오온, 수상행식이 개공이다. 아까 육근이 육진을 출입할 때 육근(안이비설신의), 육진(색성향미촉법)입니다. 그럼 이 경계를 피해야 합니까? 식을 멈춰서 이 6가지 경계를 어떻게 대하냐 따라서 다른 겁니다. 결국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판단하고 사는데 이것이 우리를 좌지우지 하는데 이 때 뚝 띄어놓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서양철학을 묶어 보면 수는 감정의 세계에요. 여자들은 수가 강합니다. 수(감정)가 어떤 감정을 느끼느냐입니다. 상(생각)은 생각이 많은 사색형이 많죠. 행(행동)은 행동이 앞선 사람들입니다. 아니다. 그것은 결국 식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의를 구체적으로 나눈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이 들어서 이 수상행식을 일으키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식의 세계에 들어갔더니 선은 선대로 뭉쳐있고 악은 악끼리 뭉쳐있습니다. 여러분 보면 착한 사람들끼리 놀고 합니다. 그 양이 많나 적냐는 것은 사람 따라 다른 것입니다. 더 들어가면 공이더라 그것입니다. 공이 주인이 되어서 이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느냐 아니면 경계가 주인이 되어버린 것이면 물들고 오염된 것입니다. 아까 감정이 상하면 항상 감정이 앞서서 바라보죠. 평상심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원망생활입니다. 상도 마찬가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물들고 오염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물들고 오염된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참회를 통해서 깨끗이 하고 잘하겠다는 목표를 잡아서 잘하겠다는 다짐하는 기도를 계속해서 신념체계를 강화시켜 나가고 수양을 통해서 자꾸 때를 벗겨나가고, 연구를 통해서 때의 진실을 알아가고, 취사를 통해서 때로는 벗겨내고 공부가 그런 과정입니다. 보통 범부들은 색으로 삽니다. 색의 세계가 강합니다. 그래서 색에 물들어 버리기 쉬워요. 에고가 강해지면 내 안에 참자아는 숨어버립니다. 10년 지나면 에고 때문에 여기서 원불교 다니는 사람들 몇 퍼센트 안 남습니다. 감정의 노예로 생각의 노예로 색의 세계로 향해 갈 겁니다. 감정을 초월하고 시비를 초월하게 이해를 초월하게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의 세계이고 기도의 세계입니다. 그것이 원력의 세계이고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다 한때 장난입니다. 결국 자기 스스로 자기 감정에 주체하지 못해서 발로 차고 나가버립니다.
[문-김은화 교우]
받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냥 복을 지어야 된다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런데 인과로 따지면 좋게 보면 또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의도성을 가지고 복을 짓는 것이 왜 죄가 되나요?
[답-김제원 교무님]
상에 대한 문제인데요. 상을 내면 왜 복이 안 되느냐. 당연하죠. 제가 예를 들어 은화를 도와줬어요. 근데 은화가 나를 배신했어요. 그러면 내 마음이 어떻겠어요? 서운하겠죠. 지금 가까운 인연관계에서 바로 이것 때문에 인연들이 무너지는 거예요. 유아로 복을 짓는 거예요.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내가 옛날에 많은 것을 해줬는데? 준 사람은 몇 월 며칠 뭐 얼마짜리 사준 것도 기억해요. 하지만 받은 사람은 잘 몰라요. 그렇게 상으로써 내가 준다는 마음으로 줘버리면 그 나는 온전한 나도 아닐뿐더러 오히려 업력이 커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가까운 인연이 더 큰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나한테 서운하게 했으면 이상하네하고 말아버립니다. 하지만 잘해준 사람이 나에게 서운하게 하면 더욱 밉습니다. 제일 미운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제일 친했던 사람입니다. 제일 친했던 사람이 가장 미워집니다. 자기가 받은 것은 생각 안하고 자기가 피해 받은 것만 생각해요. 내가 준 것만 생각해요. 서로 간에 일을 하다 보면 시비에 걸리게 됩니다. 또 서로 아직 공부하고 있는 사람으로 서로 아직 미숙한 것인데 왜 나는 실수해도 되고 상대방은 실수하면 절대 안 되나요? 대종사님께서는 경계를 대하면 무엇으로 표준으로 삼으오리까 하는 법문이 대종경에 나옵니다. 딱 간단히 3가지로 설명합니다. 가까운 예를 들어 보자면, 내가 교당을 나오다가 나오기 싫습니다. 이 인연을 저버리고 싶다면 대종사님께서는 그럴 때 3가지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첫째는 내 원력이 뭐냐, 나는 뭐 하러 여기 왔냐. 나는 무엇을 원하는 사람이냐. 둘째는 스승의 본의가 무엇이냐, 스승의 가르치시는 본의가 무엇이냐. 셋째는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라.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현재의 상황으로 이해하려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그 사람에게 받은 은혜를 생각해라는 것입니다. 내가 낮에 김장 김치를 먹으면서 다시 새롭게 느꼈어요. 그 김장 김치 한 조각이 내 입으로 들어갈 때 얼마나 사은님 전체가 똘똘 뭉쳤는지 몰라요. 하늘의 공기, 햇빛부터, 씨앗을 판 사람, 씨앗을 심은 사람, 땅의 은혜, 농부의 땀, 옮겨다 주는 사람, 소매로 파는 사람, 양념 만든 사람, 양념해서 비비는 사람, 잘라서 상에 올린 사람 등 얼마나 은혜 속에서 그 한 입이 들어가는 줄 몰라요. 여러분 각자 각자는 국가, 사회 이 세상 사은의 은혜 속에서 사는 줄 모릅니다. 여러분이 부모 은혜 10분의 1만 알아도 효자가 됩니다. 여러분께서 국가, 사회의 은혜를 몇 퍼센트 아시겠어요? 여러분께서 스승의 은혜를 몇 퍼센트나 아시겠어요? 그래서 사람이 항상 모자란 듯, 내가 할 것 한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도 해도 모자란다는 생각을 가지고 배우는 것부터 누구를 대할 때 항상 그런 마음이셔야 합니다. 그래야 환영을 받고 내가 쑥쑥 크게 됩니다. 내가 이정도 했으면 됐지 하는 생각은 매우 교만한 생각입니다.
첫댓글 오오오!! 임도운 교우님~ 첫 타이핑 축하(?)드리고 감사합니다 +_+
우앙ㅋㅋㅋ첫 타이핑 힘들었을텐데 수고하셨어요^^ 인과에 대한 설법 참 좋았습니다~
첫 타이핑 축하드려요!! 고생하셨습니다 >_<///
깔끔한 타이핑 감사합니다^^
첫 타이핑 축하드려요ㅎㅎㅎ 감사합니다^^
우와 ㅎㅎ 감사합니다 도운교우님 ^^
우와 도운교우님 감사합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