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남산에서 가장 덩치가 큰 불교 유적, 7개의 석불로
이루어진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 마애불상군 - 국보 3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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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에는 옛 신라 사람들이 심어놓은 불교 유적이 지나치게 많이 서려있다. 절터만 무려
100곳이 넘으며 불상도 80개가 넘는다고 하니 천하에 이만한 불교 유적의 성지(聖地)는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산 전체가 사적 311호로 지정되었겠는가.
남산에 깃든 불교 유적 중에서 가장 큰 것은 해발 360m 고지에 자리한 칠불암 마애불상군이다.
그는 부처골(불곡) 석불좌상(☞
관련글 보기), 보리사(菩提寺, 미륵골) 석불좌상(☞
관련글
보기),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과 더불어 남산의 간판격 존재로
존재
감도 그 덩치만큼이나 커서 답사객과 산꾼의 왕래가 빈번하다.
이곳 마애불상군은 2개의 바위에 7기의 마애불(磨崖佛)을 나눠서 새긴 독특한 모습으로
동쪽
을
바라보며 병풍처럼 자리한 커다란 바위에 3존불이 깃들여져 있는데, 그
바위를 '병풍바위'
라고 부른다. 불상이 깃든 동쪽 면이 90도로 다듬어져 있고, 그 앞에 동쪽과
북쪽으로 높이 4
m
정도의 석축을 쌓아 공간을 다진 다음, 4면불을 새긴 바위를 봉안했다.
보통은 바위 하나를
이용해 불상을 새기지만 이곳은 이렇게 바위 2개를 건드려 마애불상군을 구성했으며, 이들은
약
1.74m의 간격을 두고 서로를 지켜주고 있다. |
▲ 남쪽에서 바라본 병풍바위 3존불과 4방불 |
마애불 주변은 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하여 그 밑에서 그들을 바라봐
야 된다. 그러다 보니 3존불은 정면에서 온전히 마주 보기가 어려우며, (앞에 4방불이 시야를
좀 가림) 4방불 같은 경우 3존불을 바라보고 있는 서쪽 불상은 만나기가 어렵다. 허나 어찌하
랴? 국보(國寶)의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지체 높은 존재들이고 그들의 건강도 신경을 써야
되니 말이다. 그래도 보일 것은 거의 보이며, 그들을 세세히 보고 싶다면 칠불암에 협조를 구
해보기 바란다.
병풍바위에 돋음새김으로 진하게 깃들여진 3존불은 양감이 매우 풍부해 바위에서 방금 튀어나
온 듯한 모습이다. 가운데 본존불(本尊佛)은 높이 2.7m로 하늘을 향해 꽃잎을 세운 연꽃<앙련
(仰蓮)>과 밑으로 꽃잎을 내린 복련<(伏蓮)>이 새겨진 연화대좌에 위엄 있게 앉아있다. 석굴
암(石窟庵) 본존불과도 비슷한 모습으로 그 뒤쪽에는 광배(光背)가 본존불을 반짝 빛내주고
있으며, 머리는 소발(素髮)로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거의 네모진 모습으로 볼살이 많으며,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나 자비로운 표정을 자아
내고 있다. 목에는 그 흔한 삼도가 없으며, 어깨는 넓고 당당하여 가는 허리와 함께
위엄 돋
는 모습을 보여준다.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 끝이 땅을 향하게 하
고
왼손은 배에 대고 있으며,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은 옷으로
가린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옷주름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본존불 오른쪽에 자리하여 본존불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는 협시보살(夾侍菩薩)은 연꽃이 새
겨진 연화대(蓮花臺) 위에 다소곳이 서 있다. 덩치는 본존불의 1/3 크기로 키는 약 2.1m인데,
아래로 내린 오른손에는 감로병(甘露柄)이 들어 있어 아마도 관세음보살인 모양이다.
왼손은
어깨 높이로 들고 있으며, 잘록한 허리선이 인상적으로 구슬목걸이를 두르고 있다.
본존불의 왼쪽 협시보살 역시 연화대 위에 서 있다. 오른손에 연꽃을 들고 왼손은 옷자락을
살며시 잡고 있는데, 오른쪽 협시보살과 비슷한 덩치로 코가 좀 할켜나간 것을 빼면 완전한
모습이다. 그는 아마도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여겨진다. |
▲ 북쪽에서 바라본 병풍바위 3존불과 4방불(동쪽과 북쪽 상) |
3존불 앞에 놓인 바위에는 4방불이 깃들여져 있다. 3존불이 주연이라면 4방불은 그들을 수식
하는 조연으로 큰 것은 높이 1.2m, 작은 것은
0.7~0.8m
정도로 3존불에 비해 규모도 작고 조
각
솜씨도 다소 떨어진다.
4방불 모두 보주형 두광(頭光)을 갖추며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있는데, 동쪽 상은 3존불
본존불과 비슷한 모습으로 통견의(通絹衣)를 걸치고 있으며 신체 윤곽이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왼손에 약합을 쥐어들며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 약사여래(藥師如來)로 여겨진다. 남쪽 상은
동
쪽 상과 거의 비슷하나 가슴에 표현된 띠매듭이 새로운 형식에 속하며 무릎 위 옷주름과 짧은
대좌를 덮고 있는 상현좌의 옷주름이 도식화(圖式化)되어 있다.
서쪽 불상은 동/남쪽 불상과 비슷하며 북쪽 불상은 앞서 불상과 달리 얼굴이 작다. 그들의 정
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동쪽은 약사여래, 서쪽은 아미타여래로 파악되고 있다. |
▲ 4방불의 동쪽 상 (약사여래상으로 여겨짐)
▲ 4방불의 남쪽 상 (정체가 무엇일까?) |
풍만한 얼굴과 양감이 풍부한 신체 표현, 협시보살들의 유연한 자세는 남산 삼릉골 석불좌상
과
석굴암 본존불, 굴불사(掘佛寺)터 석불과 비슷하여 8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참 올라가야 되는 깊숙한 산골에 이렇게 큰 마애불을 짓기가 참 어려웠을 것인데, 불교 앓
이와 남산
앓이가 유독 심했던 신라 서라벌 사람들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신라
의 아름다운 마애불을 편하게 느껴볼 수가 있다.
그리고 마애불이 깃든 병풍바위의 모습도 그리 예사롭지는 않아 보여 석불이 깃들기 이전에는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쓰였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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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불암 뜨락에 수습된 주춧돌들 (석등 대좌도 보임) |
칠불암 뜨락에는 주춧돌과 석등 대좌(臺座), 석탑 석재들, 연꽃이 새겨진 배례석(拜禮石) 등
이
놓여져 있다. 그리고
마애불 남쪽에는 엉성하게 복원된 석탑과 옥개석으로 보이는 커다란
돌이
박혀있어 이를 통해 마애불을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절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마애불의 자리를 먼저 다진 다음 건물을 씌워 그들을 봉안한 것으로 여겨지며, 그 건물이 법
당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절의 정체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다
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머물면서 대안(大安)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어 7세기
중/
후반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며, 8세기에 마애불을 구축하면서 전성기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절터는
'봉화곡 제1사지(寺址)'란 임시 이름을 지니고 있다. (봉화골에 있는 1번째 절터
란 뜻)
비록 절집과 돌로 지어진 모든 것이 무심한 세월과 대자연에 의해 분해되고 그 일부만
아련히 남은 상태지만 마애불만은 거의 온전히 살아남아 그들이 가고 없는 빈 자리를 지킨다. |
▲ 장대한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칠불암 석탑 |
마애불과 칠불암 법당 사이에는 석탑의 옥개석으로 여겨지는 주름진 커다란 돌덩어리가 화석
처럼 박혀있다. 그 위에는 키 작은 석탑이 성치 못한 모습으로 서 있는데, 신라 후기에 지어
진 것으로 여겨진다.
절이 사라진 이후, 세월의 거친 흐름을 극복하지 못하고 산산히 흩어진 것을 발견된 부재(部
材)를 되는대로 엮어서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하여 다소 엉성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도
큰 돌덩어리를 기단으로 삼아 그 위에 3층 탑신을 적당히 맞춰 올려 그런데로 3층석탑의 폼은
갖추었다. |
▲ 칠불암 인법당(因法堂) |
마애불 곁에 자리한 칠불암은 1930년대에 지어진 조그만 암자이다. 칠불암이란 이름은 3존불
과
4방불 등 7기의 석불을 간직하고 있어 칠불암이라 한 것인데, 옛 봉화곡 제1사지의 빈 자
리를
덮어주며 마애불상군을 지키고 있다.
칠불암은 법당(法堂)인 인법당과 1칸짜리 삼성각, 해우소가 전부로 인법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자리가 협소하여 법당이 요사(寮舍)와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의
역할까지 모두
담당하고 있는데, 내가 갔을 당시에는 서양에서 건너온 20대 비구니 양녀(洋女
)와
그를 도와주는 50대 보살(菩薩) 아줌마가 절을 지키고 있었다.
마애불을 둘러보고 법당 툇마루에 걸터앉으니 보살 아줌마가 구경 잘했냐며 매실차 1잔을 권
한다. 그런 것을 마다할 내가 아니라서 흔쾌히 1잔을 청했는데, 마침 날씨도
덥고 목구멍에서
도 갈증으로 불이 날 지경이라 달콤한 매실차로 더위와 갈증을 싹 진화했다. 거기에 산바람도
솔솔 불어와 더위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주니 이런 것이 진정 극락(極樂)이 아닐까 싶다.
그 보살은 보통 오전에 올라와 양녀 비구니를 도우며 절을 지키거나 여러 먹거리를 만들어 준
다. 내가 갔던 날은 식혜를 만들어 절 냉장고를 채워주었다. 그렇게 절 볼일이 끝나면 오후에
속세로 내려간다. 그 외에
많은 시간은 양녀 비구니 혼자서 절을 지킨다.
그 양녀는 미국 아메리카 출신으로 이 땅에
들어온 지 이제 1~2개월 밖에 안된 초보 승려이다.
하필이면
첩첩한 산골인 이곳에 먼저 배치되어 시작부터 고적한 산사(山寺)의 삶을 익히느라
고생을 한다. 게다가 우리 말도 꽤 서툴러 꼬부랑 영어를 섞어주어야 겨우 알아듣는다. 왜 그
를 칠불암에 배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산에 양이(洋夷)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지라 그들을
상대하고자
고독한 산사살이도 미리 익히게 할 겸, 배치한 모양이다.
절에 머무는 승려는 그 혼자 뿐이라 그가 이 절의 임시 주지나 다름이 없었다. 절과 마애불을
지키고 청소하고, 기도하고, 수행하고, 우리 말 공부하고, 불교 공부하고, 빨래하고, (음식은
보살 아줌마가 거의 해줌) 양이
관광객들에게 마애불 설명도 해주고, 하는 일이 많은데,
아직
은 부족한 것이 많아 보살 아줌마와 스승 승려의 지도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그 스승은 매일
전화를 하여 영어로 이리저리 코치를 해주었다. 하지만 언어 소통에 거의 문제가 없을 정도로
우리 말을 익히게 한 다음 이곳으로 보내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싶다.
절과 마애불을 찾은 사람들에게 꼭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 인사성도 밝은데, 마침 미국에
서온 것으로 여겨지는 양이 2명이 그에게 칠불암 마애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제대로
설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시로 감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마애불에 대해 크게
찬양을 벌인 모양이다.
그는 6개월 정도 이곳에서 정진을 하다가 다른 절로 옮긴다고 하며, 아무쪼록 열심히 수행하
여
큰 비구니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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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배지붕을 지닌 1칸짜리
삼성각(三聖閣) |
▲ 삼성각에 봉안된 독성탱, 칠성탱,
산신탱 |
▲ 칠불암에서 바라본 봉화골 남쪽 능선
▲ 봉화골 정상부(신선암 뒤쪽)에서 바라본 봉화골 남쪽 능선과
배반평야, 토함산(吐含山)
▲ 봉화골 정상부(신선암 뒤쪽)에서 바라본 남산동과 배반평야, 낭산(狼山) |
칠불암에서 보살 아줌마, 양녀 비구니와 이야기꽃 좀 피우다가 잠시 잊었던 신선암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곳은 칠불암 바로 뒤쪽 절벽으로 아무리 지척간이라고 해도 홍길동이 아닌 이상
은
각박한 산길을 7~8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그렇게 해발 400m대인 봉화골 정상부에 이르면
남산
정상과 고위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펼쳐지고, 조망의 질 또한 크게 상승되어 경주 동
남부와
배반평야, 토함산 등이 흔쾌히 두 망막에 들어온다.
능선길로 접어들면 신선암 마애불을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하는데, 그의 안내를 받아 가파
른
길을 내려가면 그 길의 끝에 벼랑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신선암 마애불이 나타난다.
이후 내용(신선암, 고위봉, 열반골)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
서 흔쾌히 마무리 짓는다.
* 칠불암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36-4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