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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한 金起漢(1883 ~ 미상)】 "1919년 대한독립단 사한장으로 지단 설치"
1883년 평안남도 덕천군(德川郡) 성양면(城陽面) 연당리(蓮塘里)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직재(直齋)이고, 이명은 김기택(金杞澤)이다. 일제에 붙잡혔을 때 처음에는 평남 안주군(安州郡) 동면(東面) 신흥리(新興里)가 본적지라고 진술하였으나 이후 신문조서부터는 자신의 본적 및 출생지를 덕천군이라 하였다.
1904년 의암(義菴) 유인석(柳麟錫) 의병장이 평안도·황해도·함경도 등의 유생들과 애국지사들을 일으켜 의병 활동의 재기를 도모했을 때 백삼규(白三奎)·조병준(趙秉準)·전덕원(全德元)·박치익(朴治翼) 등과 각 군·읍을 연결하는 활동을 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 후 황해도 평산에서 거의한 박기섭(朴箕燮) 의진에서는 군모(軍謀) 직책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박기섭 의진은 황해도 백천읍에 주둔한 일제의 경무분견소 및 우편국을 습격해 크게 승리하였고, 연안읍에서 고노(河野)가 이끄는 일본군 소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만주로 건너갔다. 1913년경 유인석을 따라 만주 랴오닝성(遼寧省) 싱징현(興京縣) 난천자(暖泉子)에 머무르며 항일활동을 펼쳤다. 그해 6월에는 유인석의 명을 받고 베이징(北京)으로 가 중국 혁명가들에게 한국 독립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원세개(袁世凱)의 사촌동생인 원세훈(袁世勳)을 만나 도움을 청하기도 하였다. 또 베이징에 머무는 동안 중국 혁명가들을 설득하려고 유인석의 저술인 『우주문답(宇宙問答)』 800권을 인쇄하여 원세개 등에게 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책을 전달하지 못하고 중국 경찰에 압수당하고 말았다.
1919년 4월 15일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이 설립되자 사한장(司翰長)에 임명되었다. 대한독립단은 국내에서 의병 활동을 벌였던 인사들이 서간도에 조직한 독립군단이다. 조직을 이끌어갈 간부는 도총재(都總裁) 박장호(朴長浩), 부총재 백삼규(白三奎), 참모장 윤덕배(尹德培), 총참모 조병준(趙秉準), 총단장 조맹선(趙孟善), 총무부장 김평식(金平植), 재무부장 전덕원(全德元), 사법부장 이웅해(李雄海), 교통부장 양기하(梁基瑕), 선전부장 변창근(邊昌根) 등이었다. 대한독립단은 경술국치 이전 국내에서 의병 활동을 통해 실전을 경험한 인물들이 주축을 이루었기에 성립 직후부터 항일 무장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만주에서는 항일 활동을 방해하는 친일파와 친일조직을 처단하고 파괴하는 데 주력했고, 압록강 넘어 국내로는 유격대를 진입시켜 일제의 침략기관인 경찰서·면사무소·헌병대 등을 공격하였다. 또한 만주와 국내에 지단을 조직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여 1919년 12월경까지 100여 개의 지단(支團)과 지부(支部)가 설립되었다.
사한장을 맡아 지단 설립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919년 11월 황해도 전권위원에 임명되어 해주(海州)로 들어왔다. 그곳에서 정순경(鄭順敬)이라는 인물을 섭외해 지단을 설치하고 도통신(都通信)에 임명하였다. 정순경은 이후 최봉직(崔奉稷)·김구영(金九榮) 등을 지단원으로 가입시켰다. 그리고 이들과 힘을 합해 신천군(信川郡)·연백군(延白郡) 등으로 황해도 지단을 확대시켜 나갔다.
일제 측 기록에 나타난 김기한(1920.10.14) [판형3] |
류허현의 본부로 돌아와 결과를 보고한 뒤 같은 달 다시 평남 숙천군(肅川郡)으로 가 지단을 설치하고 안창일(安昌一)을 지단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어 김윤기(金潤起)·차은조(車殷祚) 등의 인물을 섭외해 계속해서 평남의 군에서 면까지 지단 조직을 확대해나갔다. 평안북도의 경우는 태천군(泰川郡)에 지단을 설치했는데, 지단장은 백낙기(白樂基)였으며, 부지단장과 총무감, 서기 등을 임명해 활동토록 하였다. 또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에 지단을 설치해 강면하(姜冕夏)가 책임을 맡아 이끌도록 하였다.
북부지방의 지단이 순조롭게 설치되자 본부로 돌아가 조직 상황을 도총재부에 보고하고 향후 국내 활동 방향을 협의한 후, 1920년 8월 서울로 들어왔다. 서울에 온 이유는 충청·전라·경상도 등 남부지방 지단 설치와 국내 지단을 총괄 관리할 중앙기관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 시기 서울에는 대한독립단 경기도 도시찰 전권위원인 강지형(姜芝馨)이 활동하고 있었다. 강지형과 힘을 합해 송내호(宋乃浩)·김홍식(金弘植)·계현주(桂鉉柱)·임순엽(林順葉)·정순영(鄭舜永)·최승환(崔承煥)·홍영전(洪永傳)·이섬(李暹) 등을 대한독립단원으로 가입시키고, 이들이 서울에서 활동할 수 있는 중앙기관을 설치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어 남부지방 지단 조직을 위해 배포할 전단지를 만들기 위해 90원을 주고 인쇄기 2대와 활자를 샀다. 자금은 정주(定州)에 거주하는 통신원 노태희(盧泰熙)가 모금해 건네 준 군자금이었다. 경기도 고양군의 정무순(鄭武淳)과 안영기(安永基)·최학산(崔鶴山) 등의 집을 옮겨가며 인쇄기를 설치하고 작업하였다. 그때 만든 인쇄물은 ‘사령서 통지서’, ‘선고장’, ‘경고 국내 경향 각 부호’, ‘경고 국내 동포 중 왜인(倭人) 관리자’, ‘임명서’, ‘격고 국내 진신사림(縉紳士林)’, ‘대한독립단 내지분치기관 임시통칙’, ‘군자금 영수증’, ‘밀고 국내 황실종친 및 귀족 문무공경대부 사림’ 등이었다. 이들 문서는 충청·전라·경상도에 보내 지단 조직, 단원 모집, 군자금 모금 등에 쓰이거나 친일파 및 고관대작에게 보낼 경고문 등이었다. 문서는 배포될 대상에 따라 각각 적게는 100여 매에서 수천 매가 인쇄되었다.
이들 문서는 전라도의 경우는 단원 송내호가 파견되어 운반하고 배포하였다. 다른 지역은 운반하고 배포한 인물에 관한 자료는 찾을 수 없으나 충청도 출신의 조종하(趙宗夏)와 고양군 숭인면(崇仁面) 거주의 김영규(金永圭),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星松面) 거주의 김정환(金淀煥) 등의 집에서 인쇄된 문서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따라서 이들이 지역을 담당해 배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 충청도에 거주하는 박우동(朴雨東)은 대한독립단 충청도 경무국장 임명장을 받기도 해, 상당량의 통지서·선고장·임명장·경고장 등이 남부지방에 배포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재판받는 김기한의 사진 보도(『매일신보』 1921.9.21) [판형2] |
그러나 이같이 체계적이고 방대하게 추진하던 대한독립단 지단 조직 활동은 1920년 2월 항일운동에 협조적이던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이강(李堈)의 집을 방문했다가 위기를 맞았다. 이강은 국내 항일 단체인 대동단(大同團)과 연결해 1919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탈출하려다 중국의 안둥현(安東縣, 현 단둥시(丹東市))에서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국내로 강제송환된 바 있다. 따라서 일제의 주요감시 대상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도 대한독립단의 중앙총기관을 설치하려면 그의 지원이 필요했기에 관훈동의 집을 방문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검사의 신문 중에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이일을 진행했음을 당당히 밝혔고, 1921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삼군의 장수는 빼앗을지언정 필부의 뜻은 빼앗지 못 한다’라고 꾸짖었다. 1921년 9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년(미결구류일수 180일 본형산입)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같은해 12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922년 1월 19일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제반 자료에는 옥중 순국 또는 병사로 나와 있고 별세 연도가 정확히 나오는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35년 11월 창당된 한국국민당의 기관지인 『한민(韓民)』 제8호(1936. 10. 15)에 보면 출옥한 김기한이 평남 대동군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온다. 그에 따르면 경상남도 출생으로 기록되어 있어 의심이 가는 점도 있다. 하지만 대한독립단원으로 국내에서 활동하다 8년의 옥고를 겪은 인물이라 하고 있으므로 동일인물로 추정되기도 한다. 기사의 내용은 출옥 후 평남 대동군(大同郡)으로 가 표면상으로는 한문학을 부활한다고 세상에 공표한 뒤, 변체교(變體敎)라는 것을 만들어 중앙에는 공자학원, 각도에는 중학원, 각군에는 소학원을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 영변군에 중앙총부를 설립하고 약 1,200명의 동지를 만들어 이들에게 수시로 애국사상을 심어줄 교육을 시키고,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군자금은 만주에서 사망한 백삼규(白三圭)의 유해를 본국으로 모셔오기 위한 자금이었다. 그러나 자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일제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이 기사의 인물이 직재 김기한이 맞는다면 1936년까지는 생존해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883년 평안남도 덕천군(德川郡) 성양면(城陽面) 연당리(蓮塘里)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직재(直齋)이고, 이명은 김기택(金杞澤)이다. 일제에 붙잡혔을 때 처음에는 평남 안주군(安州郡) 동면(東面) 신흥리(新興里)가 본적지라고 진술하였으나 이후 신문조서부터는 자신의 본적 및 출생지를 덕천군이라 하였다.
1904년 의암(義菴) 유인석(柳麟錫) 의병장이 평안도·황해도·함경도 등의 유생들과 애국지사들을 일으켜 의병 활동의 재기를 도모했을 때 백삼규(白三奎)·조병준(趙秉準)·전덕원(全德元)·박치익(朴治翼) 등과 각 군·읍을 연결하는 활동을 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 후 황해도 평산에서 거의한 박기섭(朴箕燮) 의진에서는 군모(軍謀) 직책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박기섭 의진은 황해도 백천읍에 주둔한 일제의 경무분견소 및 우편국을 습격해 크게 승리하였고, 연안읍에서 고노(河野)가 이끄는 일본군 소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만주로 건너갔다. 1913년경 유인석을 따라 만주 랴오닝성(遼寧省) 싱징현(興京縣) 난천자(暖泉子)에 머무르며 항일활동을 펼쳤다. 그해 6월에는 유인석의 명을 받고 베이징(北京)으로 가 중국 혁명가들에게 한국 독립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원세개(袁世凱)의 사촌동생인 원세훈(袁世勳)을 만나 도움을 청하기도 하였다. 또 베이징에 머무는 동안 중국 혁명가들을 설득하려고 유인석의 저술인 『우주문답(宇宙問答)』 800권을 인쇄하여 원세개 등에게 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책을 전달하지 못하고 중국 경찰에 압수당하고 말았다.
1919년 4월 15일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이 설립되자 사한장(司翰長)에 임명되었다. 대한독립단은 국내에서 의병 활동을 벌였던 인사들이 서간도에 조직한 독립군단이다. 조직을 이끌어갈 간부는 도총재(都總裁) 박장호(朴長浩), 부총재 백삼규(白三奎), 참모장 윤덕배(尹德培), 총참모 조병준(趙秉準), 총단장 조맹선(趙孟善), 총무부장 김평식(金平植), 재무부장 전덕원(全德元), 사법부장 이웅해(李雄海), 교통부장 양기하(梁基瑕), 선전부장 변창근(邊昌根) 등이었다. 대한독립단은 경술국치 이전 국내에서 의병 활동을 통해 실전을 경험한 인물들이 주축을 이루었기에 성립 직후부터 항일 무장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만주에서는 항일 활동을 방해하는 친일파와 친일조직을 처단하고 파괴하는 데 주력했고, 압록강 넘어 국내로는 유격대를 진입시켜 일제의 침략기관인 경찰서·면사무소·헌병대 등을 공격하였다. 또한 만주와 국내에 지단을 조직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여 1919년 12월경까지 100여 개의 지단(支團)과 지부(支部)가 설립되었다.
사한장을 맡아 지단 설립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919년 11월 황해도 전권위원에 임명되어 해주(海州)로 들어왔다. 그곳에서 정순경(鄭順敬)이라는 인물을 섭외해 지단을 설치하고 도통신(都通信)에 임명하였다. 정순경은 이후 최봉직(崔奉稷)·김구영(金九榮) 등을 지단원으로 가입시켰다. 그리고 이들과 힘을 합해 신천군(信川郡)·연백군(延白郡) 등으로 황해도 지단을 확대시켜 나갔다.
일제 측 기록에 나타난 김기한(1920.10.14) [판형3] |
류허현의 본부로 돌아와 결과를 보고한 뒤 같은 달 다시 평남 숙천군(肅川郡)으로 가 지단을 설치하고 안창일(安昌一)을 지단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어 김윤기(金潤起)·차은조(車殷祚) 등의 인물을 섭외해 계속해서 평남의 군에서 면까지 지단 조직을 확대해나갔다. 평안북도의 경우는 태천군(泰川郡)에 지단을 설치했는데, 지단장은 백낙기(白樂基)였으며, 부지단장과 총무감, 서기 등을 임명해 활동토록 하였다. 또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에 지단을 설치해 강면하(姜冕夏)가 책임을 맡아 이끌도록 하였다.
북부지방의 지단이 순조롭게 설치되자 본부로 돌아가 조직 상황을 도총재부에 보고하고 향후 국내 활동 방향을 협의한 후, 1920년 8월 서울로 들어왔다. 서울에 온 이유는 충청·전라·경상도 등 남부지방 지단 설치와 국내 지단을 총괄 관리할 중앙기관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 시기 서울에는 대한독립단 경기도 도시찰 전권위원인 강지형(姜芝馨)이 활동하고 있었다. 강지형과 힘을 합해 송내호(宋乃浩)·김홍식(金弘植)·계현주(桂鉉柱)·임순엽(林順葉)·정순영(鄭舜永)·최승환(崔承煥)·홍영전(洪永傳)·이섬(李暹) 등을 대한독립단원으로 가입시키고, 이들이 서울에서 활동할 수 있는 중앙기관을 설치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어 남부지방 지단 조직을 위해 배포할 전단지를 만들기 위해 90원을 주고 인쇄기 2대와 활자를 샀다. 자금은 정주(定州)에 거주하는 통신원 노태희(盧泰熙)가 모금해 건네 준 군자금이었다. 경기도 고양군의 정무순(鄭武淳)과 안영기(安永基)·최학산(崔鶴山) 등의 집을 옮겨가며 인쇄기를 설치하고 작업하였다. 그때 만든 인쇄물은 ‘사령서 통지서’, ‘선고장’, ‘경고 국내 경향 각 부호’, ‘경고 국내 동포 중 왜인(倭人) 관리자’, ‘임명서’, ‘격고 국내 진신사림(縉紳士林)’, ‘대한독립단 내지분치기관 임시통칙’, ‘군자금 영수증’, ‘밀고 국내 황실종친 및 귀족 문무공경대부 사림’ 등이었다. 이들 문서는 충청·전라·경상도에 보내 지단 조직, 단원 모집, 군자금 모금 등에 쓰이거나 친일파 및 고관대작에게 보낼 경고문 등이었다. 문서는 배포될 대상에 따라 각각 적게는 100여 매에서 수천 매가 인쇄되었다.
이들 문서는 전라도의 경우는 단원 송내호가 파견되어 운반하고 배포하였다. 다른 지역은 운반하고 배포한 인물에 관한 자료는 찾을 수 없으나 충청도 출신의 조종하(趙宗夏)와 고양군 숭인면(崇仁面) 거주의 김영규(金永圭),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星松面) 거주의 김정환(金淀煥) 등의 집에서 인쇄된 문서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따라서 이들이 지역을 담당해 배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 충청도에 거주하는 박우동(朴雨東)은 대한독립단 충청도 경무국장 임명장을 받기도 해, 상당량의 통지서·선고장·임명장·경고장 등이 남부지방에 배포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재판받는 김기한의 사진 보도(『매일신보』 1921.9.21) [판형2] |
그러나 이같이 체계적이고 방대하게 추진하던 대한독립단 지단 조직 활동은 1920년 2월 항일운동에 협조적이던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이강(李堈)의 집을 방문했다가 위기를 맞았다. 이강은 국내 항일 단체인 대동단(大同團)과 연결해 1919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탈출하려다 중국의 안둥현(安東縣, 현 단둥시(丹東市))에서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국내로 강제송환된 바 있다. 따라서 일제의 주요감시 대상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도 대한독립단의 중앙총기관을 설치하려면 그의 지원이 필요했기에 관훈동의 집을 방문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검사의 신문 중에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이일을 진행했음을 당당히 밝혔고, 1921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삼군의 장수는 빼앗을지언정 필부의 뜻은 빼앗지 못 한다’라고 꾸짖었다. 1921년 9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년(미결구류일수 180일 본형산입)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같은해 12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922년 1월 19일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제반 자료에는 옥중 순국 또는 병사로 나와 있고 별세 연도가 정확히 나오는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35년 11월 창당된 한국국민당의 기관지인 『한민(韓民)』 제8호(1936. 10. 15)에 보면 출옥한 김기한이 평남 대동군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온다. 그에 따르면 경상남도 출생으로 기록되어 있어 의심이 가는 점도 있다. 하지만 대한독립단원으로 국내에서 활동하다 8년의 옥고를 겪은 인물이라 하고 있으므로 동일인물로 추정되기도 한다. 기사의 내용은 출옥 후 평남 대동군(大同郡)으로 가 표면상으로는 한문학을 부활한다고 세상에 공표한 뒤, 변체교(變體敎)라는 것을 만들어 중앙에는 공자학원, 각도에는 중학원, 각군에는 소학원을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 영변군에 중앙총부를 설립하고 약 1,200명의 동지를 만들어 이들에게 수시로 애국사상을 심어줄 교육을 시키고,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군자금은 만주에서 사망한 백삼규(白三圭)의 유해를 본국으로 모셔오기 위한 자금이었다. 그러나 자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일제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이 기사의 인물이 직재 김기한이 맞는다면 1936년까지는 생존해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