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치는 소년
김종삼 (1921~1984)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어린 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시집 『십이음계』(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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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치는 소년」에서 김종삼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에 대해 읊는다. ‘아름다움’은 그 내용과는 무관한 것이라기보다 내용에 선행하여 이미 존재하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싶다. “크리스마스카드처럼”이라고 했던가. 가난한 아이 앞으로 먼 이국에서 배달되어 온 크리스마스카드! 가난한 아이에겐 먹을 것이 더 유용할지 모르지만, 아름다움은 쓸모에 앞서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일 것이다. 쓸모와 무관하다기보다 쓸모에 선행하여 이미 존재하는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 아닐까.
“어린 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이라고 또 했던가. 어린 것들은 다 아름답다. 羊의 한자(漢字)도 아름답다. 반짝이는 것도 아름답다. 진눈깨비도 제법 아름답다. 나는 이 구절을, 아름다움은 그것에 대해 잘 모를 때에야 유지되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싶다. 자신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버리면 교태를 부리게 마련이고, 이것은 아름다움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 된다. 어린 양들의 등 위로 진눈깨비가 떨어진다. 어린 양들은 그것이 떨어져서 이내 녹아버리는 줄도 모르고 자기들끼리 지껄이고 논다. 사랑스럽다.
장이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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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치는 소년'의 남은 문제
김종삼의 이 시에 대해서는 어디에 시인 혹은 평론가의 감상이나 해설을 본 적이 없다. 쉬운 듯하면서 사실은 은근히 난해하기 때문인 것 같다. 다행히 장이지 시인이 《포지션》2014 가을호 특집에 쓴 글이 있어 반가웠다.
그런데 이 시의 전체 내용과 제목의 '북치는 소년'은 어떤 관계일까 생각해 본다. 내용과 제목은 사개가 들어맞지 않으므로 좀 엉뚱하지 않은가 싶다.
"~처럼, ~처럼, ~처럼" 무엇이 어떻다는 말인가. ~처럼 북을 친다? 혹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아름답다?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아름답다? 진눈깨비처럼 아름답다? 그게 아니라 간단히,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북치는 소년,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즐겁게 북치는 소년, 진눈깨비처럼 반짝반짝 웃으며 북치는 소년이라고 할까.
이 시의 전체적인 의미는 모호한 가운데 시의 정서는 아늑하고, 어딘지 모르게 구슬프고, 오들오들 별들이 떠는 겨울밤처럼 춥고, 아련한 미감(美感)을 풍긴다. 이 시가 그 정도 서정적인 미감을 환기하면 충분하다고 시인은 생각하였는지 모를 일. 시인은 시의 뒤에 숨어서 독자들이 자꾸 오독(誤讀)하면 할수록 손뼉을 치며 '잘한다, 잘한다' 짓궂게 좋아라 할 것 같다.
또 한 가지 의문. 제목에 제시한 소년은 과연 어디에서 북을 치고 있는가. 학교 브라스밴드에 속한 작은 북을 치는 소년일까. 아니, 서커스에서 피에로 모자를 쓰고 손님들을 끌어 모으려 북을 치는 소년일까. 그도 아니면 전장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며 북을 치는 소년병일까. 먼 나라의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처럼.
문득 평소에 음악을 하 좋아한 김종삼 시인이 끌끌 혀차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이보게, 친구. 크리스마스 캐럴 '북치는 소년'이야. 시로 써본 그 가사라고 생각해봐, 그뿐이야. 제길!"
_ 강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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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자 파람파팜팜!
정끝별
크리스마스가 또 돌아왔다. 마음은 크리스마스인데 몸은 ‘크레바스’같은 게 이번 크리스마스는 유난히 썰렁하다. 계속되는 한파와 전력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대선이라는 화려한 청사진들의 장사진도 현수막과 함께 걷히고 다시 우리에게 남은 건 위태롭고 불안한 위기의 현실이다. 이념은 맹신이 되고 계층은 계급이 되고, 지역은 장벽이고 세대는 시한폭탄 직전이다. 높아지는 물가지수, 부채지수, 실업지수, 우울지수와 비례해 우리는 하루가 가파르게 학원기계, 구직기계, 알바기계, 샐러리맨기계가 되어가고 있으니.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김종삼, ‘북치는 소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시다. 우리 모두가 절대적으로 가난했던 시절, ‘북치는 소년’은 크리스마스 때면 거리에서 가장 자주 듣는 캐럴이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카드에는 북을 치는 소년이나 진눈깨비를 맞고 있는 양떼가 그려져 있기도 했던가. 그 시절 ‘서양 나라’에서 온 크리스마스카드나 캐럴은 이국적이고 비현실적이었던 만큼 더욱 갈망하게 되는 ‘내용 없는 아름다움’과도 같았다. ‘가난한 아희’에게는 더욱! 상대적으로 가난한 오늘날에도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다. 쇼윈도를 장식한 화려한 트리와 선물꾸러미들, 한 화면 혹은 한 지면 건너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온갖 이벤트와 공연과 프로그램에 속할 수 없는 가난한 어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성탄절인데 몸은 썰렁
“노래하자 파람파팜팜”으로 시작하는 캐럴 ‘북치는 소년’은 즐거운 노래, 영광의 노래, 평화의 노래, 축복의 노래를 부르자는 내용이었다. 지치고 헐벗은 우리에게는 물론 긴 밤을 지키는 양떼에게도 미칠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부르자는 내용이었다. 그래서일까. 북소리처럼 반복되는 ‘파람파팜팜’은 마치 크리스마스의 불빛처럼 듣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천여 년 전의 오늘과 같은 추운 겨울이었을 것이다. 갈릴리 나사렛에 살던 다윗의 자손 요셉은 만삭의 정혼자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까지 꼬박 닷새를 걸어 도착했다. 로마황제가 명한 호적 등록을 위해서였다. 빵 조각으로 연명하며 걷고 또 걸었던 만삭의 마리아는 요셉의 고향 베들레헴까지는 무사히 도착했으나 밀려오는 산통에도 마땅한 출산 장소를 구하지 못해 어느 집 마구간에서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목도한 이웃이라면, 인간에 대한 예의 혹은 생명에 대한 경의를 갖춘 이 땅의 진정한 여행자라면 자신이 가진 재물을 나눠 선물과 축복을 건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비단 동방박사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하게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던 뜻이 웅숭깊은 크리스마스다. 세상 낮은 자들이 그리스도께 가까이 오게 하고 그들 모두를 구원하기 위한 뜻이었기에 창녀, 나환자, 죄인들까지도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 구원받을 수 있었다. 미혼모의 몸에 잉태되어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랐고,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들을 위해 고난의 삶을 살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 대속(代贖)과 보혈(寶血)의 의미를 헤아려본다. 예수라는 이름의 갓난아이의 탄생일을 이천년이 넘도록 이토록 전 지구적으로 기념하는 까닭일 것이다.
멀리 있어서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든, 결코 다 헤아릴 수 없어서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든, 크리스마스가 아름다운 건 사실이다. 값나가는 선물을 주고받지는 못했을지라도, 한 생명의 극빈한 탄생을 축하하고 축복하는 마음을 담았다면 평화로 충만할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세상 제일 낮은 곳에 머무셨던 그 탄생의 의미까지를 담았다면 영광으로 충만할 것이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눕혀진 한 생명을 보며 천군 천사가 찬송했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의 그 평화와 영광 말이다.
화룡점정의 한 해 되었으면
비룡승운을 기원하며 고군분투했던 용띠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누구에게는 화룡점정의 한 해였을 것이고 누구에게는 역부족의 한 해였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지혜와 재물을 상징하는 뱀띠해인 새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약속했던 당선자들의 공약들이 용두사미(龍頭蛇尾) 혹은 화사첨족(畵蛇添足)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새로운 정부에서는 이 땅의 낮은 곳에 자리한 사람들이 기뻐하는 일이 더 많아지는 평화로운 날들이 열렸으면 좋겠다. 올 한 해가 다 저물도록 반짝이지 못했던 것들과 올 한 해가 지나도록 미처 손닿지 못했던 곳들에도 새 희망이 깃들었으면 좋겠다.
노래하자 파람파팜팜! 높은 곳의 영광이 낮은 곳의 평화로부터 울려퍼지는 위정의 날들이기를, ‘가난한 아이’와 ‘어린 양(羊)들의 등성이’에도 평화가 가득한 새해이기를. 진심으로 “하루를 살아도/온 세상이 평화롭게/이틀을 살더라도/사흘을 살더라도 평화롭게//그런 날들이/그날들이/영원토록 평화롭게-”(김종삼, ‘평화롭게’).
정끝별 시인·명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