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사랑에도 여러 방식이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사랑하신 것 같은 방식, 어머니의 방식, 중학교 1학년때 물상선생님 같은 방식, 그리고 하나님의 방식. 같은 사랑이지만 마음에 남겨진 기억들은 저마다 다릅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했다고 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되 이처럼 사랑했다고 기록함으로서 우리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겨주었습니다. 이처럼이 뭘까? 무슨 의미일까? 묵상은 이렇게 궁금해하면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이처럼을 무척으로, 공동번역은 극진히로 해석함으로서 방식이 아닌 사랑의 정도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오늘 저는 이처럼(this like)로 하나님의 사랑을 해석하고 전하고자 합니다. 분명한 것은 묵상하다 생긴 궁금증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있기에 우리는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이처럼은 인격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빌립보서 2장의 말씀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내신 사랑이 인격적인 사랑임을 고백합니다. 빌2:6-8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말씀의 핵심은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입니다. 신이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잘 이해가 안되니까 왕궁에서 살던 왕자가 궁밖으로 나와 평민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최근에 보도된 기사입니다. “일본의 마코 공주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맞벌이를 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마코는 나루히토 일왕의 동생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55) 왕세제의 큰딸입니다. 그녀는 지난11월 대학 동기 고무로 게이(30)와 결혼하고 고무로 마코로 성을 바꿨습니다.”왕족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평민이 된 것입니다. 살아가기 위해 맞벌이를 생각할 정도로 고달픈 삶을 자청한 이유는 사랑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이 가진 위대한 힘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권능과 영광을 포기하고 이 땅에 우리들과 같은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예수님의 사랑이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나같은 사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준다? 가능한가? 내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를 생각하며 초라해지는 자신을 느낍니다.
육신은 참 불편한 것입니다. 젊을 때는 반짝 반짝 보석처럼 빛이 나지만 나이를 먹으면 갈수록 고장이 나고 볼품이 없어집니다. 모든 기관과 신체가 노후되어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힘겨워지는 인생입니다.
그 육신을 입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고통을 똑같이 느끼는 것이 참된 사랑이라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입으로만 하는 사랑이나 넉넉하게 가져서 적선하듯 던져주는 사랑이 아닌 참사랑. 예수는 신적인 권능을 다 버리고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혀가실 때 칼을 들고 스승을 잡으러 온 하인의 귀를 베드로가 내리치자 예수님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6:53절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천군천사를 동원할 권세를 사용하지 않고 잡혀갔습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은 사랑을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사랑안에는 폭력이 없어야 합니다. 육체적인 힘, 돈의 힘, 권력의 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개입하는 순간 그것은 생명없는 사랑이 됩니다. 우리 청년 딸들에게 말합니다. 어떤 폭력도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을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남 청년들에게도 당부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종류의 폭력을 사용할 생각이 있다면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요한일서 4:7절에 보면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내 감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참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열두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 이야기에서 유대인들은 부정한 사람이 자신을 만지면 자신도 부정해진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정한 여인이 자신을 만졌기 때문에 정결해진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고 축복했습니다. 그녀의 육체가 나은 것에 그치지 않고 그녀의 영혼이 구원받았다고 선포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당시 사회가 가진 이방인에 대한 차별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야 인격적인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프리티우먼,Pretty woman”리처드 기어는 냉정한 기업사냥군입니다. M&A를 통해 기업을 분해해서 팔아치워 이익을 남기는 사업을 합니다. 한 회사를 인수하기 위해 여성 파트너가 필요해서 길거리 여성을 고용합니다.
그런데 이 거리의 여자는 화장을 해도, 머리를 해도, 명품을 입어도 거리의 여인의 티가 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여인을 바꾸어 놓습니다. 자신의 천박함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찾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녀는 거리의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학교에 다닐 계획을 갖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성가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걸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날 향하고 있었다는걸 고마워요 그 사랑을 가르쳐준 당신께”
그런데 사랑은 자신의 소중함도 깨닫게 하지만 다른 이의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합니다. 리처드기어는 기업을 분해해서 팔아치우는 하이에나 같은 사람이었는데 기업을 살리는 결정을 합니다. 동업자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사랑으로 인해 다른 이들의 삶이 이루어온 소중한 가치를 자신이 파괴해왔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마지막에 리처드 기어는 그녀를 찾아갑니다. 도저히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우리는 줄리아 로버츠처럼 매력을 가지진 못했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의 친구가 되어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인격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그 사랑을 닮기를 원합니다.
기대를 버리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람에게는 기대라는 것이 있습니다.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기대는 기대치는 낮아질 지언정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탕자를 사랑한 아버지의 모습은 탕자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면 그려질 수 없는 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무모한 철부지, 유산을 탕진하고 가문에 먹칠을 한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그를 품고 새 삶을 시작하자고 잔치를 열어줍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이야기에서 양이 왜 길을 잃었겠습니까?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 제 갈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양을 그대로 들판에 두고 제멋대로 길을 벗어난 양을 목숨을 걸고 찾아나섭니다. 이사야 53장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왜? 하나님은 우리의 죄값을 아들에게 짊어지게 하셨을까요? 우리에게 하나님이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길래? 아들을 죽이셨을까요? 무엇을 기대하신 것일까요? 사실 우리는 하나님에겐 실망스러운 자녀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기대를 거두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소망을 항상 간직했습니다. 아벨의 죽음으로 인해 셋이라는 아들을 주셨습니다. 창6:6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그러나 노아의 가족을 남겨두셨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힘든 일 가운데 하나는 실망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우리도 수많은 실망을 경험해왔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가족에 대한. 형제와 자매에 대한, 교인들에 대한, 목사에 대한, 직장에 대한 그런데 그 많은 실망을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우리 대부분은 기대를 낮추다가 기대를 접고 기대하지 않고 사는 삶에 익숙해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우리 시대에 맞지 않는 이야기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이야기입니다.”옛날에 나무 한그루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가 사랑하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가며, 매달려 놀고 그네도 타며, 사과도 먹고 숨바꼭질을 했습니다. 피곤해지면 나무 그늘에서 잠을 잤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소년은 물건 살 돈이 필요해 사과를 따서 갖고 갑니다. 또 세월이 지나 소년은 집이 필요해 나뭇가지들을 가져갑니다.
또 세월이 지나 소년은 나무 가둥을 배로 만들어 멀리 떠납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소년이 노인이 되어 나무에게 돌아옵니다. 나무는 안타까워 말합니다. “이제 나는 네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나는 밑둥뿐이란다.” 노인이 된 소년은 그것으로 충분하다며 밑둥에 앉아서 쉬고 나무는 그래서 행복했습니다. 어떤 독자가 그 이야기 아래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무는 정말 행복했을까요?”이 질문에 대한 답글인데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사랑을 선택한 사람은 행복하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라도.”나무는 소년에게 무엇을 기대했을까요?“찾아와 주는 것”뿐이었습니다. 물론 소년이 나무를 찾아온 이유는 자기의 필요와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셔였습니다. 돈이 되고 쓸만한 것음 모두 가져가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우리는 솔직히 이 관계를 이해할 수 없습을 뿐만 아니라 소년에 대해 분노합니다. 우리가 나무였다면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소리를 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무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그 밑둥마저 깔고 앉은 소년에게 뻔뻔하다고 그래서 실망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소년이 찾아와 준 것으로 그래서 행복했다고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꼭 예수님과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 아닌지요? 1964년에 쓰여진 이 짧은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에 대해서 돌아보게 만드는 일종의 신호등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무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찾아와 기도하며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부족한 것을 채워달라고 아우성칩니다. 그리고 은혜로 주시면 다시 세상으로 떠나갑니다. 그러다가 다시 주님을 찾아오고 떠나고를 반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한가지 사실은 주님은 우리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실패를 반복하면 폐인이 되지만 주님안에서의 실패는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디딤돌입니다. 실패를 디딤돌로 만드는 이 힘은 우리를 향한 기대를 버리지 않으신 예수님의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어부인 베드로를 사람낚는 어부로 기대하여 불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실망만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지지해주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의 기대에 맞게 3천명, 5천명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드는데 쓰임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을 기대하는 사람은 겉모양이 아닌 그안에 감추인 하나님의 비전을 보는 사람입니다. 기대를 갖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만, 우리를 향한 기대를 가진 하나님은 우리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봅니다. 우리의 사랑(가족간, 형제와 자매간,교회의 제채간,연인간의)이 끝까지 서로를 향한 기대를 버리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닮아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