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에 ‘일기 쓰기’의 의미
2023.02.20 저의 생일은 호적에 1924년 2월 29일로 되어 있습니다.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그 윤일(閏日) 말입니다. 그러나 집에서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음력 정월 22일에 생일상을 차려 주셔서 아무런 불편 없이 지내 왔습니다. 객지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에도 제 생일은 음력으로 지냈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났을 때 아버지 심부름을 부탁받은 친구가 출생신고를 하면서 착각해 2월 29일로 잘못 등록했기 때문에 생긴 착오였다고 언젠가 아버지께서 설명해 주셔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동안은 음력 생일을 지내 오다 두 분 다 돌아가신 후에는 편리한 쪽을 택해 생일을 지내 왔습니다. 직장 형편 등 여러 조건을 고려해 음력 생일을 택할 때도 있었습니다. 호적에 있는 날짜를 고치려면 재판을 거쳐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냥 지내 왔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피란 수도 부산에 살면서 여러 가지 웃지 못할 사건이 생년월일 때문에 있었습니다. 지금 쓰는 주민등록증이 생기기 훨씬 전 이야기입니다. 도로상에서 불심검문 받는 일이 흔히 있었습니다. 특히 병역 기피자를 색출하는 계엄사령부 헌병대 등의 검문이 자주 있었습니다. 나의 생년월일이 수상하다고 시비 거는 군인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미국 대사관에 근무하던 저는 대사관 신분증 외에 계엄사령부가 발행한 전시요원증도 꼭 가지고 다녔습니다.
생년월일도 서기 1924년 외에 단기 '4257'년도 꼭 외우고 다녔습니다. 오죽하면 지금까지도 '4257'년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제 양력 생일을 2월 26일로 정했습니다. 금년에는 양력과 음력의 거리가 그리 많이 떨어지지 않아 음력 생일 1월 22일(양력으로는 2월 12일)과 양력 생일 2월 26일이 2주 간격으로 똑같은 일요일이 됐습니다. 이런 경우는 제 기억에 과거에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50 평생에…' 또는 '90 평생에…'라는 말을 무의식중에 많이 써 왔습니다. 그런데 음력으로 100세가 된 이후 '제 100세 평생에…'라는 말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100세 평생'이란 말이 아무리 봐도 제게 어울리지 않는 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60 평생' 또는 '90 평생' 등의 말은 있을지언정 '100 평생' 또는 '100세 평생'이라는 말은 우리말 사전에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 국민 수명이 점점 늘어 100세 이상 고령자 수도 늘어간다는 소식을 들은 지는 오래됐습니다. 막상 제가 100세 노인이 되고 나니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참으로 이상한 기분입니다. 100세가 되었다 해도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데 이상하지 않은가, 하고 자기를 돌아보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닌 요즘의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 새로운 고민입니다. 요즘 이 100세 노인의 중요한 일과 하나가 침대에 들어가기 전 꼭 쓰는 일기입니다. 약 20년 전부터 다시 시작한 이번 일기 쓰기 습관은 이젠 죽을 때까지 계속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만 6세로 일본인 소학교에 입학하여 글쓰기를 배운 후 얼마 있다가 시작한 이 일기 쓰기는 만 8세 때 고향인 경상남도 남해(南海)의 조선인 소학교로 전학한 후 한때 중지하였다가 부모님들이 일본에서 완전히 귀국한 3년 뒤에 계속되었습니다. 일본어로 시작한 이 일기 쓰기는 1945년 해방 직전 일본군에 징집되어 입대할 때까지 몇 번의 중단을 거치면서 계속되었습니다. 일제 때에는 일기 쓰기가 유행이어서 연말이 되면 각종 일기책이 서점에서 판매되어 독자들의 일기 쓰기 취향을 북돋웠습니다. 해방 직전엔 상급학교 수험 공부하느라 일기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기 전 아직도 각종 물자가 흔할 때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학년별로 디자인을 달리한, 읽을거리도 포함된 일기책이 발행되어 일기 쓰기 분위기를 조장했습니다. 새 일기책이 나올 때마다 고향 남해에 없으면 아버지가 근처 도회지 서점에서 구해 연말 선물로 저에게 주셨습니다. 국민학교 담임 선생님의 도움말 영향도 많았을 것입니다. 해방 후에는 당연히 이 일기 쓰기 습관이 계속되었습니다만 한글이 어려워 한때 영어로도 써보고 당시 유행한 새로운 인공어(人工語)인 에스페란토(Esperanto)로 써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외국어로 쓴 이유에는 혹시 외부 사람이 훔쳐보더라도 잘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안심하는 마음이 잠재적으로 작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일기 쓰기를 의식적으로 중단한 것은 1963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입니다. AP통신사 사무실이 들어 있는 합동통신사의 청소원 아주머니가 AP 사무실 쓰레기통을 누군가 검사할 때가 있다고 귀띔해준 일이 있었던 후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 광주사태가 일어났을 때 한때 잠깐 합동수사반에 구금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수사관이 나의 일기책을 찾는 것을 보고 일기를 쓰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때 중단되었던 일기 쓰기를 다시 시작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는 한글을 이 기회에 좀 더 공부해 보자는 것이 첫째 목적이었습니다. 저는 해방 후 독립된 우리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가려던 서울대학은 당시 사상투쟁이 극심해 부모님이 한사코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이젠 다른 의미로 나의 일기 쓰기는 여생을 뜻있게 보내는 중요한 일과(日課)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 일과는 죽음만이 중단할 수 있는 일거리가 되었습니다. 매일매일 나의 삶을 깊이 반성하는 값진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를 어찌 소홀히 하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