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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1. 대민(주일낮)
지금이 그럴 때이냐(왕하5:20-27)
왕하 5:20-27, [20]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 [21]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22] 그가 이르되 평안하나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23] 나아만이 이르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그를 강권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그들이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24] 언덕에 이르러서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받아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내 가게 한 후 [25] 들어가 그의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26] 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사람에게는 때를 분변(分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때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겠지만, 특별히 구분이 되는 것은 ‘때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서 차이가 납니다.
잠언22장3절에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지혜로운 사람들은 자신이 해야 할 때, 머물러야 할 때, 떠나야 할 때를 압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이러한 때를 구분하지 못하고 나아가다가 해를 당하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의 삶에는 ‘때’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때’를 나타내는 말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간(time)’으로써 ‘짧은 시기(時期)’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여행하기에 적당한 시기’와 같은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회(opportunity)’로써의 ‘시기(時機)’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기회를 보아 무엇을 하라.’라는 경우입니다.
오늘 본문은 “때” 를 잘 알지 못하여 문둥병자가 되는 저주를 받은 엘리사의 종 “게하시”의 이야기입니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려 고생할 때 그 집안에서 아내의 수종을 들던 여종에 의하여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전해 듣고 엘리사 선지자들 찾아가 병 낫기를 구했지만 나아만은 엘리사의 태도를 자신에 대한 모욕을 생각하고 분노하여 돌아가려는 순간에 나아만의 종들이 엘리사의 말에 순종할 것을 권면하자 나아만은 마음을 돌이켜 엘리사의 지시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었습니다. 그 후 나아만의 문둥병은 치료가 되었습니다.
이에 나아만은 감사한 마음으로 준비한 선물을 엘리사에 전달하려 하자 엘리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선물을 사양합니다.
이때 엘리사의 종 게하시에게 마음에 탐심이 일어났습니다. 게하시는 나아만을 속여 재물을 취하였습니다. 그 결과 나아만이 떨쳐버린 문둥병에 게하시에게 걸린 것입니다.
게하시의 문둥병은 그의 자손에까지 영원토록 미칠 것입니다.
게하시는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구분하지를 못했습니다. 지금은 국가적으로 비상시국입니다. 잘못하면 나라라 망하느냐 흥하느냐의 기로에 서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나라와 민족이라는 공동체 안에 살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나라와 민족이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나 하나를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나의 어떤 유익도 나라의 유익에 우선 될 수 없으며 나라가 먼저 안정된 연후에 나의 안정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게하시는 나라를 깊이 생각해야 할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의 유혹에 빠져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성을 잃어버린 불쌍하고 탐욕스러운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나아가서 지금은 나라가 극히 어려운 비상시국이었습니다. 아람은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침략한 기회를 엿보며 수시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이런 사건이 벌어졌고 이는 곧 국가의 안보이며 온 국민의 생존권에도 깊은 손실을 입히는 행위였습니다.
성도 된 우리는 때를 분변하여 세상을 잘 살아가는 지혜를 가지고 어려움을 극복하시기를 바랍니다.
1.탐심을 가질 때가 아닙니다.(20-22)
[20]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 [21]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22] 그가 이르되 평안하나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보상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모두 월급 받는 날, 혹은 어떤 보상받는 날을 기다리고 또 그날을 기뻐합니다. 만일 일을 했는데 보상을 안 해주면 법에다 고소할 수도 있습니다.
성도 된 우리의 모든 생활을 하나님 중심으로 하면서 사람들이 무엇이라 하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하면 천배 만배 보상해 주십니다.
역대의 위대한 성도들은 이 하나님의 보상을 믿기 때문에 세상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가 되어서 하나님의 보상을 믿지 않는 시대가 되었고 도리어 그것은 유치한 신앙이나 저질적인 신앙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신앙이 타락한 시대의 징조입니다.
그러나 주의 할 것은 헌금이나 봉사를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잇속으로 한다든지 조급한 보상을 바라고 하다가 낙심 한다든지 하는 것은 그 동기가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사람에게 뇌물을 쓰듯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중심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 된 삶으로, 언젠가는 하나님이 상 주실 것을 믿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열정으로 따르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그 이상의 은혜로 보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상급의 보상을 위하여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에 우리의 힘과 능력과 재물과 노력을 투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투자하는 만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상을 바라고 열심히 헌신하되 탐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탐심은 금물입니다.
누가복음12장15절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탐심은 인생을 해치는 무서운 독입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비극적인 현상을 보면 모두 탐심에서 비롯됩니다. 사람이 탐욕을 갖게 되면 모든 정상에서 빗나가게 되며 끝내는 하나님의 은총에서 빗나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습니다.
탐심의 죄악을 말하게 되면 우리는 흔히 부자들의 죄악을 얼른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탐심은 부자들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도 부자를 비판하고 부자를 정죄하는 가난한 사람의 마음에도 꼭 같이 탐심이라는 내적인 죄악은 여전히 존재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탐심에도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유형의 탐심. 이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는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에게 탐심이 들어간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승인 엘리사가 자기를 찾아 온 아람사람 나아만 장군의 한센병을 고쳐주자 나아만 장군이 고마움에 선물을 주고자 하였지만 엘리사는 한사코 거절하여 지켜보던 게하시가 돌아가던 길에 있는 나아만 장군을 쫓아가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거짓으로 말하였습니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도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도 보상을 받을 만 하다고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에게 그 정도 선물을 받은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받은 것은 자기가 쓸 것이 아니라 지금 선자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을 위해서 사용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스승 엘리사에게 항변하는 모습입니다.
즉 자신의 수련생들이 굶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나아만 장군이 주는 선물을 받지 않으면 다입니까? 엘리사 자신도 제대로 먹을 게 없으면서,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 모처럼 온 기회를 날려 버려도 되는 것입니까?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 수 있단 말입니까? 재물을 훔쳐 오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런 거절을 한단 말입니까? 게하시처럼 수련생들의 생활을 책임져 가며, 그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아무리 살펴봐도 게하시가 그토록 큰 잘못을 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게하시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24절에 “언덕에 이르러서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받아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내 가게 한 후”
여기서 게하시는 하나님과 자기 주인의 이름을 도용(隘吊)하여 나아만에게서 은 두 달란트 와 옷 두벌을 예물로 받아 자기 집에 감추어 두는 파렴치 한 죄를 지었습니다.
게하시는 위대한 선지자의 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인 나아만의 종들 보다 더 좋지 않은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 입니다.
결국 게하시의 탐심은 문둥병을 가져오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과거나 현재도 언제나 탐심은 금물입니다.
출애굽기20장17절에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이는 오늘날 허영과 사치 그리고 분수에도 안 맞고 정당하지도 않은 탐심에 빠져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경청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탐심을 버린 삶이 복되고 평안한 삶이며, 자신과 이웃에게 유익한 삶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임을 확실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갖고 싶어 하며 분수에 넘치게 소유하고자 하는 탐심은 나와 내 이웃을 불행하게 합니다.
과거나 오늘날도 지금은 탐심을 가질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아 탐심의 유혹을 날마다 떨쳐 버리고 신앙의 유익을 위하여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거짓을 말할 때가 아닙니다.(23-25)
[23] 나아만이 이르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그를 강권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그들이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24] 언덕에 이르러서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받아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내 가게 한 후 [25] 들어가 그의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우리 사회는 거짓투성입니다. 진실한 말도 너무 너무 많겠지만, 거짓말도 너무너무 많으니 누구의 말을 믿어야 될지 구분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거짓말이 사실상 무서운 죄인데도 사람들이 제일 많이 짓는 죄가 거짓말하는 죄입니다.
날이 갈수록 거짓말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진실한 사람을 찾아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거짓은 언제나 또 다른 거짓을 가져옵니다.
그렇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으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그의 부정직함으로 인해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한 번 거짓말을 하면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되고, 결국에는 거짓말을 한 사람은 자신의 속임수의 거미줄에 걸리게 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마귀가 유혹할 때에도 교묘하게 거짓말로 넘어뜨렸습니다.
요한복음8장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고 분명히 마귀의 성격을 말씀하셨습니다.
마귀의 속성은 무엇보다도 거짓말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악령은 거짓 영이며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위선의 영이며 사람들을 그럴듯하게 미혹하는 미혹의 영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사단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였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 값의 일부를 감추고도 그것이 전부라고 거짓말을 한 것은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사단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다고 말합니다(행 5:3).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거짓말을 하다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거짓을 좋아하면, 돌아오는 것은 실패와 죽음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난 것도 사단의 거짓말에 속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거짓말에는 엄중한 형벌이 따르고, 거짓말하는 사람의 결국은 멸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소한 것이라도 진실이 아닌 것은 입에 담지 말고 정직을 실천하여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 사회에 팽배한 불신을 몰아내고 정직한 세상을 이루어 나가야겠습니다.
거짓이 지배하는 공동체, 거짓이 지배하는 사회 이것은 병든 사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는 반드시 도덕적인 위기가 찾아옵니다. 진실을 잃어버리고 양 심이 통하지 않는, 신용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을 때 그 사회의 복된 미래를 우리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본문의 게하시도 거짓말을 히였습니다.
25절에 “들어가 그의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이 모습에서 만약 게하시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아만에게 은과 옷을 받았다고 말을 했다면, 엘리사는 그를 책망했겠지만 용서했을 것이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면서 은과 옷을 주었을 것입니다. 순간적인 유혹에 넘어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게하시는 엘리사의 눈을 보면서도 끝까지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사마리아에 살고 있는 엘리사가 아람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아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게하시가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으면서, 욕심으로 화인 맞은 심령이 되자 그는 어리석게도 엘리사를 속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거짓말 한마디로 게하시는 마지막 기회를 잃고 말았습니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나아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 심령이 감각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나아만이 수레에서 내리는 장면을 굳이 말해준 것은,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 않았으며, 나와 헤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화인 맞은 심령이 된 게하시는 죄로 무뎌져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너희들과 함께 있다고 말 한 것처럼,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기도하는 엘리사에게 게하시가 하는 모든 행동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기 때문에, 우리들 곁에 있는 믿음의 형제를 속이려는 어리석은 행동이나 거짓말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결국 게하시는 자신을 사랑해 주었던 하나님과 엘리사를 속이고, 버린 죄로 나아만이 그토록 치료받기를 원했던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과거나 오늘날도 지금은 거짓말을 할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아 거짓의 유혹을 날마다 떨쳐 버리고 신앙의 유익을 위하여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받을 때가 아닙니다.(26-27)
[26] 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욕심을 부리다가 망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뇌물을 주며 취하려 합니다.
성경에서는 뇌물이라는 언어가 구약성경에서만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언어가 "쇼하드"(shochad)입니다. 뇌물은 상대방의 마음을 사려고 주는 선물입니다.
뇌물 [賂物]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직위에 있는 사람을 매수하여 사사로운 일에 이용하기 위하여 넌지시 건네는 부정한 돈이나 물건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 우리말처럼, 세상에서 출세를 하는 일도, 사업의 세계에서 성공을 하는 일도 부모나 친구, 심지어는 공무원이나 권력기관에 뇌물을 써서라도 유리한 조건을 차지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바람직한 신앙의 삶을 살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뇌물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뇌물을 받으면 판결이나 판단을 왜곡되게 하며 그것은 십중팔구 가난한 자들을 해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뇌물을 받는 행위는 성도가 반드시 금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한 사람의 인격을 저울질하는 중요한 잣대로 그 사람의 뇌물을 향한 자세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사회를 부패시키는 뇌물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며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청렴과 투명성을 되찾아 정의로우며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뇌물 퇴치는 필수적 요소입니다. 성도들이 앞장서서 이 영역을 함께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뇌물 나라가 바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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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게하시는 뇌물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욕심이 나서 받지 않아도 될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뇌물을 받은 것 같은 죄입니다.
스승인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으로부터 선물을 받지 않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26절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옥스퍼드 원어사전에 의하면 “이스라엘에 많은 우상들이 세워져 숭배되고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이기심과 탐욕으로 선지자인 체하며 선지자 직분을 경멸의 대상으로 만드는 이때에 하나님의 종이 자신의 부와 사치를 위해 이방인으로부터 돈과 물품을 취하는 것이 합당하며 지금의 과연 그럴 때냐? 란 질책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게하시는 그 말씀의 뜻을 언뜻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엘리사는 '지금이 돈을 받을 때냐?... '고 말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이야말로 돈을 꼭 받아야 할 때요, 돈이 가장 필요한 때'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7년의 기나긴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가축들이 무수하게 넘어져 갔으며, 왕이 직접 물줄기를 찾아 헤맬 정도로 살인적인 가뭄이 계속되었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로 끼니를 잇던 시절을 살고 있었습니다. 특히 선지자의 생도들은 더욱 경제난이 가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하시는 이러한 생각 끝에 지금이 오히려 돈이 필요한 때요, 돈을 받아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어렵고 딱한 사람들을 구제도 하고 베풀기도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며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말합니다. "지금이 어찌 돈을 받을 때냐?...." 하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건강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진데, 이 민족의 먹고사는 것도 하나님께 맡길 일이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은혜를, 어찌 돈으로 환산해 받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스승은 청렴결백하였으나, 그의 수제자요 는 돈을 받아 가지고 돌아온 것입니다. 결국 그 돈 때문에 문둥이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나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욕심과 탐심으로 행하는 풍조가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습니다.(딤후3:1-4)
성도 된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지금 게하시처럼 선생님 몰래, 주님 몰래, 나아만을 뒤쫓아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은 돈을 받을 때가 아닙니다.
과거나 오늘날도 지금은 부정직한 돈을 받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아 물질의 유혹을 날마다 떨쳐 버리고 신앙의 유익을 위하여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탐심을 가질 때가 아닙니다.(20-22)
2.거짓을 말할 때가 아닙니다.(23-25)
3.받을 때가 아닙니다.(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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