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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주 예수를 바라보자(히 12:1-3)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는 26일부터 다음달 11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하계 올림픽이 열립니다. 우리나라는 143명의 선수들이, 큰 꿈을 품고, 올림픽에 출전하는데, 금메달 5개 획득을 목표로 한다고 합니다. 지난 4년 동안, 흘린 땀과 노력의 결과물들이 쏟아져나와, 많은 이들이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장마 기간인데, 예년에 비하여, 너무나도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서울을 갔다 왔는데, 얼마나 많은 비가 오는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앞에 달리고 있는 차 뒷꽁무니만 겨우 보일까 말까 하여, 온 신경을 그 앞차 보는 것에만 집중하여 운전을 한 것 같습니다.
이번 비로 인하여, 주택이 침수되고, 농작물이 물에 잠기고,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등 심각한 피해를 당했습니다. 장마가 끝나고 나면, 기온이 다시 올라가, 후텁지근한 날씨가 이어지고,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 열대야가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3호 태풍이 발생했다고 하는데, 폭염이든 태풍이든, 어려움 당하는 이들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루하루,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들이 잘 되리라는 그런 소박한 바램들이 있지만, 세상 일이란 우리 생각대로만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알게 된 사실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밝은 희망을 품고, 내일을 향해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어느 경기에서, 어떤 선수가 반드시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경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선수가 나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치곤, 금메달을 생각지도 않고, 경기에 임하는 선수는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가 금메달을 목에 걸든,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만큼 모든 선수들이 온 몸을 불태워, 피눈물나는 훈련을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좌우지간, 경기가 마치고 난 후, 아쉬운 눈물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올림픽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이 금메달을 바라보고, 피나는 훈련을 했듯이,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선수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 여야를 떠나, 당 대표를 뽑는 일이 한창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누가 당 대표가 되든, 당 대표가 그들의 최종 목표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을 발판 삼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할 것입니다. 옛날에는 청와대였지만, 지금은 용산의 주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들처럼, 어떤 사람들은 권력을, 또 어떤 사람은 재물을, 또 어떤 사람은 지식을 얻는 것을 바라보고,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무언가는 영원하지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영원히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앉아 있다고 한들, 평안하지가 않습니다. 어차피 내려와야 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한 번 앉아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도 합니다.
바라보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겠지만, 믿음의 사람들이 바라보아야 할 것은 일시적이고, 영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 하늘의 것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주,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말했는데, 야고보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 1:17)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땅의 것에 목숨을 걸기보다는 위의 것, 하늘의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4:14)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하늘에 푯대를 맞추고, 그것만 바라보고 달려갔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그리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엇을 소망합니까?
어느 분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매주, 열심히 복권을 산다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당첨되면, 크게 쏜다고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는 것을 보니, 당첨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난 13일 로또복권 추첨에서, 63명이 무더기로 1등에 당첨되면서, 역대 최다 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1등 당첨금이, 세금을 빼고 나면, 3억 정도 될 것이라고 합니다. 집값도 많이 오르고, 물가도 많이 올라 가지고, 3억 정도 받아 가지고는 꿈을 이루었다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오직 믿음의 주 예수를 바라봄으로, 참된 꿈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믿음의 주 예수를 바라보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소망이 생기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설령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된다 할지라도,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면, 그 어려움을 극복할 용기가 생기게 될 줄로 믿습니다. 평안할 때에도,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불식간에 찾아오는 유혹과 시험도 넉넉히 이기게 될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했습니다.
포로로 끌려가, 총리가 된 다니엘은 아무 허물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을 시기하고 질투하던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그를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정 청탁이나 뇌물을 받거나, 횡령이나 배임 같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국회에서 행하는 인사 청문회를 보면, “정말 제대로 된 사람이 없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진 것도 많은 사람들이 법인 카드를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것 같은 일들을 참 많이 한 것을 보게 됩니다. 허물이 없는 사람, 정말 제대로 된 사람은 없는 것일까요?
인사 청문회를 하면, 이것저것 다 들통나기 때문에서인지, 예전보다는 장관 하겠다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장관 되는 것은 좋지만, 그 청문회 자리에 앉아, 온갖 죄와 허물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찌 그들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허물 많고,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 어디 온전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등바등 살아가는 세상에, 어찌 허물이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도토리 키재기일 것입니다. 오십 보, 백 보 차이일 것입니다. 당장 눈 앞에 이익이 있는데, 그것을 취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것들이 다 들통이 나서, 초라해지고, 무너져내리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그런 부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는 사람은 온전하게 해 주시고, 허물 많은 사람도 다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덮어 주셨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세상사 돌아가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덮어 주고, 용서하기 보다는 감추인 것을 들추어내고, 없는 것도 만들어내고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깨끗해지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추어냄으로, 자기 자신이 그보다는 낫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쓰러뜨려야 내가 설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생각 때문에,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하여,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공격하는 것 같습니다. 과격해지고, 포악해져만 가는 것 같습니다.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기 보다는 다른 사람을 파괴하고, 더 나아가, 세상을 파괴하고서라도, 홀로 남아, 그 파괴된 세상을 바라보며, 승리했다고 하는 그런 자아도취에 빠져 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아름다움이 파괴되는 것은 상관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다른 사람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듯 합니다. 어제는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지라고 할지라도, 눈 앞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돌아갈 수 없는 강을 쉽게 건너가는 것이 일반화된 것 같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죽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비참한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슬픈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혼란스럽고 어지럽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일이 엉망진창으로 꼬일 때, 세상 사람들은 그 문제만 바라봅니다. 환경만 바라봅니다.
그리하여, 실망하고, 한숨 쉬고, 신세타령을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자기 자신을 질책하고, 낙심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그 어떤 상황이 온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치 앞을 바라볼 수 없는 캄캄한 밤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강한 파도가 몰려와 나를 집어삼키려고 해도,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온갖 불평을 쏟아놓았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민 21:6)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불신앙과 불순종이 순식간에 확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려고,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그때, 죽어가던 백성들이 모세를 찾아와, 염치가 없음을 알아서인지, 자기들 대신,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는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 2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그들에게 살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모두 살았습니다.
평안할 때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에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답답하고, 우울할 때에도, 억울하고 속상할 때에도, 앞이 캄캄하고, 두려울 때에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1850년 1월 6일, 영국의 아주 작은 시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주일 아침에 눈을 떠보니, 엄청나게 많은 눈이 내리고 있고, 이미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가야 할까?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위험을 무릅쓰고, 눈길을 헤치고, 교회에 갔습니다.
교회 가까이에 살고 있는 성도들 열한 명과 처음 보는 소년 한 명이 교회에 나와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를 인도해야 할 목사님이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집사님이 강단에 올라가,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전하게 되었는데, 성경 말씀을 읽고, 말씀을 전하려고 하니,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처음 보는 소년을 바라보면서 힘껏 외쳤습니다.
“얘야, 넌 참 불쌍해 보이는구나! 예수님을 바라보아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만약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너는 항상 불쌍할 것이다. 살아 있을 때도 불쌍하고, 죽었을 때도 불쌍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지금 예수님을 바라보면, 너는 구원받을 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보아라.”
눈보라가 치는 날, 목사님도 오지 못한 교회에서, 그 집사님의 설교를 들은 소년의 이름이 찰스 스펄전이었습니다. 그날, 찰스 스펄전은 구원을 받았고, 영적으로 죽어가던 영국을 다시 깨운 위대한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훗날, 설교의 황태자라는 별명을 갖게 될 찰스 스펄전을 만든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 그대로, 찰스 스펄전은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크게 쓰임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본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3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종교 개혁을 승리로 이끌었던 마틴 루터가, 어느 날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의자 옆에 앉아 있던 개가 루터가 식사하는 모습을 열심히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손이 밥그릇으로 가면, 눈이 밥그릇으로, 손이 입으로 가면, 또 입으로, 손이 움직이는 대로, 개의 눈이 따라다녔습니다. 그 모습을 본 루터가 개에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개에게 고기 한 점을 던져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정신없이 먹어치우고는, 또 눈을 똑바로 뜨고, 루터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루터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개가 내 손을 쳐다보는 것처럼, 나도 하나님만 바라보았더라면, 하나님은 내게 더 크게 감동하셨을 것이다.”
마틴 루터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봄으로, 종교개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절을 보면,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3절을 보면,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셨습니다. 인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고 인내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며, 멸시하는 모든 자들에 대하여, 참으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바로 이러한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참고 인내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들, 그들은 얼마나 많은 훈련을 했을까요? 얼마나 많이 참았을까요?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뛰어난 운동 실력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별 노력없이,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일까요? 아마도, 그런 선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기 나라를 대표하여,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하여,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는 피나는 훈련을 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너무나도 힘들어, 선수생활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숱한 어려움들을 참고 인내했기에, 마침내, 자기 나라를 대표하여,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을 목에 걸든, 걸지 못하든, 지금껏 그들의 달려온 삶을 생각하면서, 힘찬 응원의 박수를 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라고 말했습니다.
인내하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약속하신 것들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애굽에 팔려간 요셉, 감옥에 들어간 요셉, 얼마나 많이 참고 인내했을까요?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버린 욥, 얼마나 많이 참고 인내했을까요?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을 피하여, 이리저리 도망쳐야만 했던 다윗은 얼마나 많이 참고 인내했을까요?
그들에게 인내가 있었기에, 마침내 총리가 될 수 있었고, 갑절의 복을 받을 수 있었고,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라고 말했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인내하는 자는 복되다고 하는 욥의 결말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참고 인내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예비해놓으신 복을 풍성하게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와 항상 함께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 곁에 가까이에 계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