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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무(李宜茂) 묘비명(墓碑銘) - 홍언필(洪彦弼)
덕수 이공(德水李公)의 휘(諱)는 의무(宜茂)이고, 자(字)는 형지(馨之)이다. 7세조 이소(李邵)는 고려에서 벼슬하여 합문 지후(閤門祗候)ㆍ지삼사사(知三司事)가 되어 자금어대1)(紫金魚袋)를 하사받았으며, 5대조 이인범(李仁範)은 국조(國朝)에 들어와서 정당 문학(政堂文學)ㆍ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었고, 아름다운 명성을 이어서 대대로 인물이 있었다.
증조 이양(李揚)은 공조 참의(工曹參議)이고, 할아버지 이명신(李明晨)은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이고, 아버지 이추(李抽)는 온양 군사(溫陽郡事)이다. 군사가 예문관 대제학 윤회(尹淮)의 딸에게 장가들어 기사년(己巳年, 1449, 세종 31)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렸을 때에 학문에 힘써 게을리하지 않고 밤낮으로 계속하므로 군사공(郡事公)이 지쳐 앓게 될세라 염려하여 공부하는 서적을 빼앗고 여러 조카들을 시켜 지키게 하였으나, 공이 몰래 입으로 외어 마지않아서 ≪시경(詩經)≫ㆍ≪서경(書經)≫의 대의(大義)를 알았다.
19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29세에 정유년(丁酉年, 1477, 성종 8)의 과거에 급제하여 뽑혀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보임되고 박사(博士)에 이르렀으며,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 이때 성종(成宗)이 문치(文治)에 뜻을 다하였으므로 시문(詩文)에 능한 자를 불러 글제를 주고 기예를 겨루게 하였는데, 공이 잇달아 세 번 으뜸을 차지하였으므로 성종이 칭찬하고 특별히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ㆍ지제교(知製敎)를 제수하였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ㆍ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옮겨졌다가 승진하여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ㆍ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제수되었다. 임실 현감(任實縣監) 모(某)가 불법으로 사람을 죽이자, 성종이 공을 보내어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현감이란 자가 공이 법을 지키고 조금도 용서하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몰래 아우와 꾀하여 틈을 엿보아 해치려 하였으나, 공이 그 낌새를 미리 알아채고 현감을 잡아 매를 때려 죽이고 조정에 돌아와 대죄(待罪)하였다.
성종이 공은 법을 지키고 굽히지 않았다 하여 용서하고 죄를 묻지 않고 현감의 가족을 변방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연산군 때에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수하는 데에 참여하고,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ㆍ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ㆍ상의원 정(尙衣院正)에 제수되었다.
무오년(戊午年, 1498, 연산군 4) 사옥(史獄)이 일어났을 때에 공도 잡혀서 평안도 어천역(魚川驛)에 귀양 갔다가 이듬해에 석방되어 돌아와 동강(東江)의 시골집에 있었다. 임술년(壬戌年, 1502, 연산군 8) 가을에 불려가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ㆍ군기시 정(軍器寺正)에 제수되었다.
공이 시세가 장차 매우 위태로워질 것을 알고 힘써 외직(外職)에 보임되기를 구하여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나갔다. 탐학한 서리(胥吏)들이 앞다투어 백성의 재물을 빼앗기를 일삼아서 뭇사람이 근심하는 소리가 전야(田野)에 찼으므로, 공이 오직 너그러이 정사를 베풀어 온 경내가 이에 힘입어 소생하였다. 그러나 임금에게 바치는 물건을 나르는 일을 늦추어서 독촉하는 기한에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연산군이 노하여 불러다가 하옥하고 벌주었는데, 공은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고을에 돌아가서 더욱 늦추었다.
지금 임금이 즉위한 이듬해인 정묘년(丁卯年, 1507, 중종 2)에 감사(監司) 손주(孫澍)가 이 일을 장계(狀啓)로 올리니, 임금이 표리(表裏) 1습(襲)을 하사하여 특별히 총애하였다. 그해 겨울에 고을에서 졸서(卒逝)하니 59세를 누렸고, 이듬해 여름에 면천(沔川) 장자동(長者洞) 유좌 묘향(酉坐卯向)인 묏자리에 장사하였다.
공은 천성이 태평스럽고 도량이 넓어 세상의 득실(得失)ㆍ영쇠(榮衰)를 뜬구름처럼 여겨서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다. 한가롭고 조용히 지내며 외물(外物)에 욕심이 없어서 즐기는 것이 없고 능숙한 것도 없으나, 오직 성심을 다해 사람을 대접하여 귀천(貴賤)ㆍ소장(少長)의 높이고 낮추는 등급을 둘 줄 몰랐다. 30여 년 동안 벼슬하였으나 집에 남은 저축이 없어 쓸쓸하기가 마치 가난하고 검소한 집과 같았다.
시문(詩文) 짓기를 좋아하였는데 확실하고 정교하고 순수하여 거의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감식(鑑識)에도 매우 밝아서 빼어난 재주와 조예가 있는 선비가 책과 지은 글을 가지고 모두 그 집을 잇달아 찾아가 한 번 품평(品評)을 받으면 마치 등용문(登龍門)한 듯하였다. 지난 일을 갖추 기억하므로 나라에 문서를 만들어 제정할 일이 있으면 공이 반드시 참여하였다.
아! 공은 넓은 학문이 있고 관후(寬厚)한 도량이 있으며, 충직한 절조가 있고 개제(愷悌)한 덕이 있으므로 훌륭한 행실과 뛰어난 재능 어느 한쪽만 치우치게 능한 것으로 지목할 수 없으니, 그 지닌 것이 풍부하였다. 성종에게 인정받아 많이 발탁되어 요직을 역임하였고 명상(名相)이 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문득 임금이 승하하여 포부를 다 펴지 못하였으니, 운명이다.
만년에 연산군의 임금답지 않은 때를 당하여 실망하고 불안하여 외직으로 홍주에 부임하였으니, 오도(吾道)가 상실되었다. 지금 임금이 즉위하여 칭찬하는 하교(下敎)가 내려지자 몸은 이미 서거하였으니, 하늘이 착한 자에게 복을 주는 것을 어디에서 보겠는가?
빼어난 문장과 뛰어난 지략이 있는 문무(文武)의 기특한 재주가 모두 공의 집에 있으므로 누누이 나와서 세상에서 쓰여 의정부(議政府)에서 재상으로서 나라를 다스리고, 국경의 요새에서 절도사로서 나라를 지켜 일에 노고하여 공을 세운 것이 뚜렷하게 밝고 벼슬하는 사람이 집안에 가득하니, 자신에게는 인색하였을지라도 후손에게 돌려 성취한 것이 많다. 착한 자에게 복을 주는 이치가 과연 없다 하겠는가?
부인(夫人) 성씨(成氏)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성여완(成汝完)의 현손(玄孫)이고,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성석용(成石瑢)의 증손이며,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 성희(成熺)의 딸이다. 총명하고 숙성하여 보모(保姆)를 번거롭히지 않았고 매듭이나 바느질은 익숙한 공장이에 견주어도 분별할 수 없었다. 약혼하기 전에 집안이 불행을 당하여 부모가 잇따라 별세하였으므로 영락하고 도움이 없어 외로이 고생하였으나 덕이 있다는 명성이 이웃에 들렸다.
공의 어머니가 공을 매우 사랑하고 또 공의 기량을 기특히 여겼으므로 짝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부인에게 장가들였는데, 부인이 정성을 다하여 시어머니를 섬겨서 조석 문안과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여 모든 것을 도리에 따라 뜻을 맞추었으며, 자녀를 가르치고 비복(婢僕)을 어거하는 데에도 다 예법(禮法)이 있었으므로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집안일은 내가 걱정할 것이 없다.” 하였다. 공보다 5년 뒤에 서거하였는데 68세였고 공의 묘소에 부장(祔葬)하였다.
공의 아들 5인이 다 문과(文科)ㆍ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장군ㆍ재상이 된 자가 있다. 병자년(丙子年, 1515년 중종 11년)에 임금이 공의 묘소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공에게 자헌 대부(資憲大夫)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추증(追贈)하였는데, 세상에 일찍이 없던 일이므로 조야(朝野)가 영예롭게 여겼다. 정해년(丁亥年, 1527, 중종 22)에 공의 셋째 아들 좌의정(左議政) 이행(李荇)의 벼슬에 따라 공에게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을 더 추증하고 부인에게 정경 부인(貞敬夫人)을 추증하였다.
5남 2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이권(李菤)은 함경남도 절도사(咸鏡南道節度使)이고, 그 다음 이기(李芑)는 형조 판서(刑曹判書)이고, 그 다음 이행(李荇)은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ㆍ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이고, 그 다음 이영(李苓)은 수안 군수(遂安郡守)이고, 그 다음 이봉(李芃)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다.
큰딸은 진사(進士) 노우량(盧友良)에게 시집가고, 작은 딸은 호조 판서(戶曹判書) 창녕군(昌寧君) 조계상(曺繼商)에게 시집갔는데 조계상은 정국 공신(靖國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이권은 제용감 정(濟用監正) 최연(崔)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사가 없다.
이기는 군수(郡守) 김진(金震)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이원우(李元祐)는 선전관(宣傳官)이며, 딸은 참봉(參奉) 안응원(安應元)에게 시집갔다. 이행은 종실(宗室) 장산 부수(璋山副守) 이주(李稠)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 이원정(李元禎)은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박은(朴誾)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이원상(李元祥)은 평구 찰방(平邱察訪)으로 절도사(節度使) 신옥형(申玉衡)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이원복(李元福)은 참봉(參奉)으로 판서(判書) 한세환(韓世桓)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이원록(李元祿)은 생원(生員)으로 사성(司成) 장옥(張玉)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큰딸은 유학(幼學) 최세룡(崔世龍)에게 시집가고, 그 다음은 유학 유몽선(柳夢宣)에게 시집가고, 그 다음은 어리다.
이영은 내금위(內禁衛) 이수팽(李壽彭)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 딸을 낳았는데, 큰딸은 유학 이희양(李希陽)에게 시집가고, 그 다음은 유학 성학령(成鶴齡)에게 시집가고, 그 다음은 어리다. 이봉은 사인(士人) 조수만(趙壽萬)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생원 이제(李霽)에게 시집갔다. 진사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노인(盧禋)은 유학이며, 큰딸은 현감(縣監) 손수눌(孫守訥)에게 시집가고, 작은 딸은 감찰(監察) 유숙련(柳叔連)에게 시집갔다.
창녕군은 3남 4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조광원(曺光遠)은 공조 참의(工曹參議)이고, 그 다음 조명원(曺明遠)은 의금부 경력(義禁府經歷)이고, 그 다음 조휘원(曺輝遠)은 와서 별좌(瓦署別坐)이며, 큰딸은 현령(縣令) 황순경(黃舜卿)에게 시집가고, 그 다음은 사포(司圃) 한승권(韓承權)에게 시집가고, 그 다음은 상의원 별좌(尙衣院別坐) 권덕유(權德裕)에게 시집가고 그 다음은 진사 이계백(李繼伯)에게 시집갔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덕이 있는 사람이 태어남은 근원이 멀고 흐름이 기니, 합문 지후가 덕을 심고 정당 문학(政堂文學)이 빛을 감추도다. 계통을 이어받고 뒤를 이어서 빛난 사업이 아름다운 명성을 전하니, 선대에서 시작한 우리 밭과 우리 집을 자손이 즐겨 거두고 즐겨 짓도다. 중요한 관서에 등용되어 길을 같이하여 드나들며, 붓을 떨쳐 아름다운 말을 쏟아내어 그 문장을 밝게 빛내도다.
임금에게 은총을 받음은 그 가치가 연성벽(漣城壁, 보옥(寶玉))과 같아서, 고굉(股肱)의 신하로서 보필하고 집정(執政)하게 되리라 기대하였는데, 한밤에 골짜기에 단단히 감춘 배가 없어지듯이 믿을 것이 없고 비바람에 캄캄한 것처럼 어지러운 세상이 되자 재능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으며 고을살이를 영광으로 여겼도다. 천하가 어두움을 깨어 일월(日月)이 바르고 밝아지자, 임금의 글이 내려왔으나 오래도록 낫지 않는 병에 걸리도다.
사람은 죽고 도(道)는 쇠퇴하였어도 오히려 모범은 남아 있는데, 사봉(謝鳳)ㆍ순룡2)(荀龍)이 청운(靑雲)의 길에 날아올랐도다. 옥장(玉帳)에서 계책을 세우고 금현(金鉉)에서 국을 조리하며3), 임금의 조아(爪牙)가 되어 나라의 보불(黼黻, 보좌함을 이름)을 장식하도다. 아름다운 의례 이에 갖추어 하사받은 것이 성대하니, 우주(宇宙) 끝날 때까지라도 누가 공적을 동등히 하랴? 명성을 영구히 전하도록 비석에 의탁하노니, 천추(千秋)에 빛날 것이라 이 문각(文刻)에 질정할지어다.
각주
1) 자금어대(紫金魚袋) :
자색(紫色) 조복(朝服)과 금으로 장식한 어형(魚形) 부신(符信)을 담은 주머니임. 고려 때에 4품 이상이 이것을 입고 패용(佩用)하였
음.
2) 사봉(謝鳳)ㆍ순룡(荀龍) :
사씨ㆍ순씨 집안의 준재(俊材)들. 중국 진(晉)나라의 사안(謝安)과 그 종형(從兄) 사상(謝尙)의 자손 및 후한(後漢)의 순숙(荀淑)의 아
들에 뛰어난 인재가 많았던 것을 비유한 것임.
3) 옥장(玉帳)은 옥으로 장식한 장막으로 장군의 장막을 이르고, 금현(金鉉)은 금으로 만든 세 발 달린 솥의 귀인데, 국을 조리한다 함은 조
정에서 임금을 보좌하여 정무를 요리한다는 뜻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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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贈議政李公墓碑銘 幷序。
德水李公諱宜茂。字馨之。七世祖劭。仕高麗。爲朝閤祗侯知三司。賜紫金魚袋。五世祖諱仁範。入國朝。爲政堂文學,藝文大提學。襲美續聞。傳世有人。曾祖諱揚。工曹參議。祖諱明晨。知敦寧府事。考諱抽。溫陽郡事。郡事娶藝文大提學尹淮之女。己巳。生公。公在幼稚。力學不倦。夜以繼晷。郡事公慮成羸瘵。奪業書。戒群姪守之。公潛口誦不輟。得詩書大義。十九。登司馬試。廿九擢丁酉科。選補承文院正字。至博士,成均館典籍。是時。成廟極意文治。聚能詩文者。授簡角藝。公連三占魁。成廟嘉賞。特授弘文館校理,知製敎。轉司憲府持平,吏曹正郞。陞拜司憲府掌令,弘文館應敎。任實縣監某枉殺人。成廟遣公鞫之。監者怨公持法不少貸。潛與弟謀。覬間欲害。先機覺之。執監者敺而死。還朝待罪。成廟謂公守法不阿。釋不問。徙監者家屬於邊。燕山朝。參修成廟實錄。拜司諫院司諫,司憲府執義,尙衣院正。戊午史獄起。公亦見逮。謫平安道魚川驛。明年放還。在東江田墅。壬戌秋。召拜成均館司成,軍器寺正。公見時勢將至阽危。力求外補。出爲洪州牧使。惏吏追胥爭事割剝。嗷嗷滿野。公獨寬以爲政。閤境庇蘇。肆供輸不及督期。燕山主怒。徵下獄罰之。公不少懟。歸州益緩之。今上卽位之明年。監司孫澍以狀上。上賜表裏一襲以寵異之。其年冬。卒于官。享年五十九。某月日。葬于沔川長者洞酉坐卯向之原。公資性坦夷。氣度豁如。視世之得喪榮悴如浮雲。然不以一絲掛懷。閑居澹然沖虛。於物無所嗜。亦無所長。唯盡誠心以待人。不知有貴賤少長隆殺等級也。登朝三十餘年。室無餘儲。蕭然如寒素之家。常喜爲詩文。便操筆立成。不加點綴。精確鍊粹。殆若天成。藻鑑亦甚明。秀造之士持卷齎製。咸踵于門。一經品題。如登龍門。探玄鉤妙。備諳往事。國有撰定。公必與焉。嗚呼。公有學問之博。有寬厚之量。有忠讜之節。有愷悌之德。之德之器。不可以偏長目之。其所有者富矣。遇知成廟。多被識拔。歷揚華要。儲以爲名佐。遽爾上賓。不能展盡素蘊。命也。晩値燕山不君。鎩翮棲枳。左符洪州。吾道喪矣。及今上御極。褒敎纔降而身已逝。天之福善。於何見耶。桂枝崑玉。龍韜虎略。文武奇材。咸在公家。累累出爲世用。調鼎黃扉。建節紫塞。事功彪炳。簪笏滿床。雖嗇於先公。而歸成于後人者多矣。福善之理。果可謂無耶。夫人成氏。領中樞府事昌寧府院君汝完之玄孫。寶文閣大提學石瑢之曾孫。校書校理熺之女。聰悟夙成。不煩姆傅。縷結縫製。視諸宿工。無以辨矣。未笄。遭家不造。爺孃相繼淪沒。雖零丁孤苦。德馨聞於比隣。公之王母愛公甚。且奇公氣宇。思得與之齊者。歸夫人于公。夫人盡誠事姑。晨昏甘旨。無不順適。敎子女。御婢僕。皆有禮法。公嘗曰。梱內之職。吾無憂也。後公五年而逝。年六十八。附葬公塋。公之子五人。咸登文科。有爲將相者。丙子。上遣官致祭于公墓。世未常有。朝野榮之。丁亥。以公第三子左議政荇爵。追贈公議政府領議政。贈夫人貞敬夫人。生五男二女。長曰菤。咸鏡南道節度使。次曰芑。刑曹判書。次曰荇。議政府左議政,弘文館大提學。次曰苓。遂安郡守。次曰芄。江原道觀察使。女長。適進士盧友良。次適戶曹判書昌寧君曺繼商。錄靖國勳。菤娶濟用監正崔堧女。無嗣。芑娶郡守金震女。生一男一女。曰元祐。宣傳官。女適幼學安應元。荇娶宗室璋山副守稠女。生四男四女。曰元禎。娶弘文修撰朴誾女。曰元祥。娶節度使申玉衡女。曰元福。娶判書韓世桓女。曰元祿。娶僉正張玉女。女幷幼。苓娶內禁衛李壽彭女。生二女。長適幼學李希陽。芄娶士人趙壽萬女。生一女。適進士李霽。昌寧生三子三女。曰光遠。工曹參議。次曰明遠。義禁府都事。次曰輝遠。女長。適縣令黃舜卿。次適奉事韓承權。盧進士生一男二女。曰禋。女長。適縣監孫守訥。次適奉事柳叔連。銘曰。
德人之生。源遠流長。祇候種德。文學葆光。承緖踵武。赫葉傳芳。肯穫肯構。我畬我堂。登于華省。與道翺翔。奮筆瀉藻。煥其文章。荷聖恩眷。價擬連城。期以股肱。予輔予卿。夜壑藏舟。風雨晦冥。卷而懷之。雙鳧爲榮。寰區破暗。日月貞明。璽書初頒。沈痼轉嬰。人亡道癯。猶有典刑。謝鳳荀龍。騰翥雲程。玉帳儲籌。金鉉和羹。爲王爪牙。賁國黼黻。美則斯具。錫賚烜赫。窮宇宙來。誰與齊蹟。流聲不朽。將珉是託。焜耀千秋。質此文刻。<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