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6년 9월 13일 주일예배 설교
에베소서 3:1-13
하나님의 집 경제(Oikonomia), 만물의 경영
지난 주일 우리는 누가복음 말씀을 통해 “소유의 곳간으로부터 존재의 나라로” 옮겨가는 삶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재물을 나만을 위해 축적하지 않고 이웃과 나누는 구제 행위는 단순한 도덕적 자선이 아니라, “기뻐하시며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경제’에 동참하며 살겠다”라며 이 세상의 능력주의 질서에 저항하는 살아있는 신앙 고백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최근 지구촌 반대편에서 재난을 당한 이웃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구호금을 보내기로 결의한 것 역시, 바로 이 하나님 아버지의 경제에 동참하는 뜻깊은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쓰는 ‘경제(Economy)’라는 말은 헬라어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에서 유래됐습니다. 이 말은 합성어입니다.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οἶκος)’와 ‘관리하다, 배분하다, 맡아 다스리다’를 뜻하는 ‘νέμω(네모)’ 계열의 말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리스의 고대 문헌에서 이 단어는 집안을 돌보는 ‘가정 경영’, ‘가사 관리’, ‘청지기의 살림살이’를 뜻했습니다. 즉, ‘오이코노미아’는 가정의 살림살이를 돌보는 ‘가정 경제’ 또는 ‘집안의 경영’을 의미합니다. 즉 오늘날 ‘경제(Economy)’라고 부르는 어원인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의 기본적인 의미는 ‘집을 어떻게 잘 돌볼 것인가’입니다.
그런데 언어는 시대에 따라 뉘앙스와 쓰임새가 다소 달라지지 않습니까. 이 의미 역시 점차 확장됐습니다. 집안 살림만을 가리키는 말에서 점차 행정과 통치, 질서 있는 배치와 관리라는 의미로요. 헬레니즘 시대에는 이 용어가 우주와 신적 섭리를 설명하는 철학적 문맥에서도 사용되었고, 유대 헬레니즘 사상가들의 언어에서도 이 개념이 새로운 의미를 얻어갔습니다.
그것이 대표적으로 기원전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철학자 필론(BCE 30-CE 45 추정)입니다. 그는 이 단어를 하나님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면서, 이 거대한 우주 만물을 가리켜 ‘하나님이 지으신 거대한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우주의 대주재(大主宰)로서, 당신이 지으신 이 집 안의 모든 생명과 만물을 완벽한 질서 속에 먹이시고 돌보시고 운행하시는 분이라고 설명했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통치를 가리켜,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본문 에베소서는 이 말을 복음을 전할 때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1:10, 3:2, 9).
‘경륜’. 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들은 낯익은 말일 것입니다. 개역 성경과 개역개정 성경에서 번역되어 교회에서 익숙한 표현인데요. 이 ‘경륜’이 바로 이 ‘오이코노미아’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새번역을 비롯한 공동번역 개정과 새한글성경 모두 ‘계획’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특히, 1:10은 이 하나님의 ‘가정 경영’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 우주를 회복하고 하나 되게 하시는 구원의 경영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에베소서가 하나님께 그리스도 안에서 찬양하고 감사하는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진전된 혹은 실현된 유대인(그리스도인)과 이방인(그리스도인)의 화해, 화합, 일치를 찬양하고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에베소서는 이를 하나님의 경륜의 일부로, ‘가정 경영’의 일부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민족들에게 복음으로 전한 것은 모두에게 그리고 모든 것에게 빛을 비춘 의미라고 말합니다.(3:9) 빛을 비췄다는 것은 곧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가정 경영이 무엇인지를, 그 비밀의 경영이 어떻게 시행되는지를 드러낸 것이라 말합니다. 이 역시 하나님께서 하시는 가정 경영의 일부로, 그 목적은 이제는 알려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늘들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선 누구를 통해서 하늘들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이제는 알려지게 하시느냐? 바로 교회입니다. 그럼 교회를 통해서 무엇이 알려지게 하려고 하나님께선 자신의 집을 경영하시느냐? 하나님의 지극히 다채로운 지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에 참여하고 관리하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에 참여하고 관리하는 ‘오이코노미아’입니다. 하나님의 ‘가정 경영’에 참여하여 관리하는 ‘가정 경영자’입니다. 이 가정 경영자 곧 집사, 가사 관리자는 본문 2절에서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하는 말인데, 이 역시 ‘오이코노미아’입니다. 즉 가정 경영의 직무를 맡은 사람을 뜻하기도 합니다. 흔히 청지기로 번역하기도, 직분이나 직분자, 임무나 임무자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즉 에베소서의 문맥에서 교회는 만물을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가정 경영’에 부름 받은 ‘가정 경영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경제, 경영, 경륜, 계획, 도모, 섭리에 참여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그동안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개인의 영혼 구원’으로만 축소하여 설파해 왔습니다. 현재도 많은 교회가 그러합니다만, 오늘 우리는 이 하나님의 가정 경영, 경륜, 경제, 계획, 도모, 섭리를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생태계’와 접목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엄밀히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집 곧 우주 만물을 돌보시는 경영의 일부인 생태계에 대해 함께 생각해봄으로써, 하나님의 경제, 경영, 경륜, 계획, 도모, 섭리에 참여한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 경제, 가정 경제는 만물을 하나 되게 하시는 경영이기 때문입니다. 생태계 역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그 집과 가정의 일부이자 구성원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10년 동안 해마다 계절마다 큰 재난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뉴스로 접합니다. 이전보다 그런 소식이 더 잦아지고 빈번해지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올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름에 우리나라도 중부와 경상도 일부 지역 등에서 극심한 호우로 피해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유럽은 엄청난 폭염으로 정말 심각했습니다. 유례없는 폭염과 그로 인한 산불로 유럽 전역이 재난을 겪었습니다.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최소 3만명에서 3만 2천명이 넘을 것으로 집계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몇 주전인 8월 26일엔 네팔-티베트에서 대홍수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히말라야 산맥의 빙하호가 붕괴하면서 마을과 계곡을 통째로 휩쓸어버렸습니다.
이러한 기후 재앙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지금의 구조와 시스템으로는 이런 일을 막을 수 없고 가속화하고 심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기후 위기의 큰 문제는 네팔 같은 경우입니다. 기후 위기의 주범은 두말할 것 없이 산업화로 인한 온실가스로, 그중에서도 탄소(CO₂)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탄소 배출은 산업화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곧 산업화를 먼저 그리고 오래 이룬 나라들이 그만큼 많이 배출했고, 그만큼 책임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 번 배출된 탄소는 수백 년간 대기 중에 머무는데, 그 양이 자정과 상쇄의 양을 넘어섰기 때문에 계속해서 지구 상층 대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열을 머금고 있어서 온도가 계속해서 올라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네팔이 배출하는 온실가스의 총량은 미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지역과 국가가 과도한 온실가스 배출의 기후 재앙을 겪는 것입니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에게 탄소 누적배출량에서 각 나라가 차지하는 비율을 물어봤습니다. 미국이 총 배출량의 25%로 1위, 영국을 포함한 유럽이 20%로 2위, 3위가 16.5%인 중국, 4위 러시아(7%), 5위 일본(4%), 6위 인도(3%), 7위 캐나나(2.5%), 우리 대한민국은 1%로 8위입니다. 경제력 순이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유사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적으로 살펴보았지만 이상에서 보듯이, 기후 위기와 재앙의 가장 큰 원인인 탄소 배출은 산업화를 이루고 경제력이 강한 강대국에게 큰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북반구의 나라들로서, 탄소 배출을 많이 한 만큼의 혜택과 윤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설사 기후 재앙을 겪더라도 나름대로 견디고 복구할 만한 재력과 기반과 자본과 체력을 쌓아두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이 탄소 배출에 큰 책임이 없는 나라들이 기후 위기와 재앙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네팔-티벳트의 히말라야 산맥의 빙하 붕괴처럼 말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기후 정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어쨌든, 이렇게 우리 인간들의 성장 중심 일변도가, 자본주의가, 무한성장과 무한경쟁이, 자족할 줄 모르는 경쟁과 가치관이, 그 삶의 방식이 하나님의 집을 어떻게 망가뜨리고 있는지 우리는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그 방식을 대대적으로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과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을 안다면요. 그것을 고백한다면, 자족할 줄 모르는 우리 인류의 탐욕이 하나님의 집을 어떻게 망가뜨리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확실히 명시합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의 ‘집 경제’의 비밀이란, 민족들이 ‘공동의 상속자이고, 공동의 몸이고, 약속에 공동의 참여자이다’는 것을요.(6절)
사사로운 내 개인적인 상속도 아니고, 내 개인적인 몸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받은 내 약속도 아닙니다. 함께 받는 상속이고, 함께 살아가는 몸이고, 함께 참여하는 약속입니다. 함께 상속자들이고, 함께 몸들이고, 약속에 함께 참여한 자들입니다. 다름 아닌 민족들, 저들, 이방인들이요.
이 길을 새로 여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방인들도, 민족들도 함께 상속자들로, 함께 몸들로, 함께 참여한 자들로 존재하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고 말하고, 또 이것이 ‘복음’이라며 “복음을 통해서”라고 명시합니다.
달리 말해, 복음으로 산다는 것, 그리스도 예수로 살고 그 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민족들이 공동의 상속자와 공동의 몸과 약속의 공동의 참여자가 된다는 것을 알고 그에 걸맞게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집 경제, 가정 경영, 우주 경륜’의 비밀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신비를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경륜, 경영, 경제, 계획, 도모, 섭리를 드러내시고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 만물이 공동의 상속자가 되고, 공동의 몸이 되고, 공동의 참여자가 되는 것임을 알고, 그에 걸맞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이에 알맞게 살아가는 방식이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을 알고 참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서 1:8-10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 곧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나 모든 것을 하나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신 하나님의 뜻의 비밀로 곧 하나님의 경륜, 경제, 경영, 계획 섭리, 도모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륜을 알고 그동안의 삶과 방식, 그 존재로부터 돌아서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넘치도록 주신 모든 지혜와 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경제에 참여하겠다는 우리의 고백은 좁게는 우리가 벌고 모으고 쓰고 나누는 경제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겠다는 의미인 동시에, 넓게는 세상 만물이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만드시고 세우시고 창조하신 하나님의 집임을 고백하며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관리하시고 돌보시고 대하시듯 우리도 그리하겠다는 의미의 고백입니다.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집이기에, 하나님의 집을 소중히 대하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을 관리하는 직무를 맡기셨기에, 그 직무와 임무에 충실하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렇기에 그 직무자로서 사사로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관리하기보다 늘 대국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관리하겠다는 몸부림입니다. 하나님의 뜻, 경륜, 경영, 경제, 계획, 섭리를 개인적인 사인(私人)으로서 생각하기보다는 그 관리를 맡은 공인(公人)으로서 생각하고 돌보고 임하겠다는 ‘돌아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 경륜, 경영, 경제, 계획, 섭리 곧 하나님의 통치 자체가 공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선 모두를 공적으로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인 세상은 그 만물이 다함께 살아가는 공동의 공간이자 공공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만물은 하나님의 집에 함께 살아가는 내 이웃이며, 한 분 하나님의 집과 가정에서 살아가는 가족 곧 형제자매로, 공동의 상속자요, 공동의 몸이요, 공동의 참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네팔의 재난에 마음 아파하며 돕는 손길도 참으로 귀하지만, 그 문제의 근본 원인을 숙고하고 그 삶의 방식에 저항하며 멀리하는 것도 귀합니다. 달리 말해, 기후 재앙을 가져온 우리의 탐욕적 소비와 성장 중심의 삶의 방식을 비판하고 저항하며 우리 스스로 생태적인 삶으로 돌아서는 것은 더욱 귀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우주적 경영을 대국적으로 바라보고 참여하는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그 역사를 행하고 계심을 믿는 신앙 곧 창조를 믿는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창조의 역사는 에베소서가 말하듯, 서로 다른 민족인 유대인과 이방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창조하시는 것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역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우주적 경영을 대국적으로 그리고 공적으로 바라보고 참여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사례를 들겠습니다. 기후 변화가 가져오는 또 다른 재앙은 바로 사막화이며, 그 대표적인 나라 중 하나가 우리나라와 비교적 인접한 몽골입니다. 봄마다 갈수록 황사가 더 심해지는데, 이 영향도 있습니다.
2008년에서 2012년 사이 몽골은 이미 전 국토의 70% 이상이 사막화의 영향을 받으며 수천 개의 강과 호수가 완전히 말라붙어 지도에서 사라지는 끔찍한 생태적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렇다면 2026년 현재는 어떠할까요? 상황은 재앙에 가깝습니다. 현재 몽골은 전 국토의 약 90%에서 사막화가 진행 중입니다. 여름의 극심한 가뭄 끝에 겨울이면 영하 40도 아래로 떨어지는 ‘조드(Dzud)’라는 기후 재난이 매년 반복되면서, 수천만 마리의 가축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수천 년 동안 자연과 공존하며 유목의 전통을 이어온 몽골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고 수도 외곽의 빈민가로 떠밀려가는 ‘기후 난민’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황폐되는 땅에서, 2008년부터 지금까지 18년 동안 묵묵히 묘목을 심어 생명의 숲을 만들어가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기독교환경운동연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척박한 땅에 심고 있는 이 숲을 가리켜 “은총의 숲”이라 부르면서, 이 사역의 본질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몽골 은총의 숲 조성 사업은 단순히 나무를 심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화석연료 사용이 초래한 기후변화로 인해 사막화의 어려움을 겪는 몽골의 이웃들을 돕는 일이며, 우리의 탐욕으로 파괴된 창조세계를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하여 생태적 정의를 이루는 일입니다. 몽골은 기후변화로 인해 전 국토의 90%에서 사막화가 진행 중입니다. 수천 년 동안 유목의 전통 속에서 살아온 몽골 사람들이 기후난민이 되고 있습니다. 땅에서 샘과 시내, 하천이 사라져 풀이 자라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토양을 개량하기 위해 풀을 심었고, 현지의 건조한 토양과 극한의 기후-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기후-에서 적응할 수 있는 11여 종의 나무를 선별했습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28,000여 그루의 나무를 몽골 은총의 숲에 심어 왔습니다.”
이방, 민족들의 사막 한가운데서 나무 한 그루를 심어 생명을 살려내는 이 우직한 행동이야말로, 하나님의 집(Oikos)을 온전히 돌보겠다고 결단하는 경영과 직무의 실천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모든 피조물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우주적 경제에 동참하는 살아있는 복음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한 가지 반성되는 것이 있습니다. 올해 사회·선교·구제비의 세부 예산을 세울 때 평화목 교회가 약 4년동안 후원하던 유일한 환경 선교 예산을 감축 삭제한 것입니다. 물론 한정된 재정 상황 속에서 불가피한 선택과 결정이었지만,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우주적 경제를 마주할수록 제 마음 한편에는 지울 수 없는 안타까움과 아쉬움, 그리고 고통받는 피조물들과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깊이 남습니다.
어쨌든, 이런 작은 방식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경제, 경륜, 경영에 참여하는 작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 경영, 경제, 계획에요.
또한, 이것은 우리 평화목 교회가 지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평화목 교회가 지향하는 교회는 <에큐메니컬 교회>입니다.
이 ‘에큐메니칼’의 어원은 οἰκουμένη로, 이 역시 ‘오이코노미아’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직역하면 “사람이 거주하는 집”, 확장되어 “사람이 살고 있는 온 땅, 온 세계”를 뜻합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 ‘오이쿠메네’는 로마의 통치가 미치는 문명 세계 전체를 뜻했고, 신약성경에서는 “온 천하, 온 세상”(마 24:14, 눅 2:1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오이코노미아(Economy)가 하나님이 우주라는 집을 다스리시는 ‘살림살이, 방법’이라면, 오이쿠메네(Ecumenical)는 그 하나님의 다스림이 미치는 ‘집 그 자체, 온 세상’을 뜻합니다.
달리 말해, 평화목 교회는 교회-이 교회가 개인이든 공동체든 기구든 조직이든-만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이 아니라,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에큐메니컬 교회’를 지향하며 그 방식이 이 시대의 교회의 모습이라 여기며 그 삶의 방식을 모색하기로 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평화목 교회는 이렇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넓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였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가 모두 다 신앙의 문제이다. 과학이 발달하고 인류의 복지가 실현되고 점차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다가오는 것을 기뻐하면서도, 인간이 가진 욕심 때문에 자초하는 불행들을 멀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전쟁, 분단, 테러, 기아, 가뭄, 지진 등등으로 고통을 겪는 우리와 지구촌 이웃들의 문제에 응답할 것이며, 근본적인 문제들의 해결을 위하여 연구하고 기도하고 실천할 것이다. 동시에 온 지구가 함께 겪고 있는 공통의 과제들, 인종차별철폐, 국가 간 경제협력과 균형발전, 그리고 지구 온난화 시대 환경보전 등등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의 아름다운 질서 회복과 보전을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평화목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의 경륜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비밀, 신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만드시고 세우시고 창조하신 하나님의 집임을,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집을 은혜와 자비와 긍휼과 사랑과 정의와 자비와 평화로 돌보시고 관리하심을 환히 드러내셨습니다. 그 은혜의 경륜을 알고 참여시키는 자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쓰임새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 직무에 신실해야 합니다. 자신의 집 모든 존재와 모든 것을 의와 사랑으로 돌보시고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하나님께서 환히 알게 하셨으니, 그것에 입각하여 그 직무에 임해야 합니다. 더 이상 사사로이 내 개인의 의견을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은혜의 경륜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교회, 직분자, 임무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경제와 경영에 참여하라고 부름받은 은혜의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스럽게도 말이지요. 그 경영에 동참하는 것은 분명 수고하고 고생하는 고난의 길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경영에 참여하는 부름을 받는다면, 큰 영광이자 영예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크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엇이기에 당신의 경영에 참여 시키시겠습니까. 이보다 더 큰 영광과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곁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경영을 배울 수 있는 것만큼 인생을 배우고 지혜를 배우고 인생의 경영을 배우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본문 13절의 말씀이 우리를 위로하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그러므로 내가 부탁합니다. 여러분을 위한 내 환난들 때문에 여러분은 낙심치 마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부르심은 영광스럽기도 하지만, 솔직히 겁이 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내 능력으로는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울 자리가, 발 뻗을 자리가 아닌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 7절 역시 우리를 격려하면서 동시에 도전을 줍니다.
“내가 일꾼이 되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그분의 능력의 역사를 따라.”
이 길과 이 직무는 우리의 능력으로만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감당할 능력을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이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 까닭과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민족들에게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유함을 복음으로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능력의 역사를 따라 민족들에게, 하늘들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에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유함을 전하고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삶과 존재 안에 담긴 하나님의 경륜이란 무엇인지 우리부터 살아가야만이 힘과 효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경륜을 고민하고 구하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경제와 경영과 경륜과 계획과 섭리와 인도를 구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더욱 깊고 넓고 높고 풍성히 주시기를, 그 하나님의 경제를 알고 깨닫고 배워가며 살아가기를, 그렇게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 속에서 살아가기를, 세상 곳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여기고 모든 존재를 함께 상속받을 공동의 상속자와 공동의 몸과 공동의 참여자로 귀하게 여기기를, 그렇게 세상 만물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고 구하기를,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하는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집인 만물을 잘 돌보는 교회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